[문화재窓] 조선 선비의 일생, 문화재로 남다 게시기간 : 2020-01-18 07:00부터 2030-12-17 17:00까지 등록일 : 2020-01-17 17:55
재단법인 한국학호남진흥원
문화재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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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절 110주년, 매천 황현의 삶 문화재로 살피다 조선말기부터 대한제국기의 대표적인 문인이자 역사가이며 우국지사인 매천 황현(梅泉 黃玹, 1855~1910). 절명시(絶命詩)를 남기고 순절한지 올해가 110주년이다. 그의 일생과 생각과 글들에 대해서는 별다른 설명의 필요를 느끼지 않을 정도로 잘 알려져 있다. 그런 그의 일생을 문화재로 살펴본다. 사진을 보고 추사한 초상, 보물 제2494호 먼저, 초상(肖像)이 문화재가 되었다. 국가지정문화재 보물 제1494호. 2006년이다. 그런데 초상화의 제작연대가 1911년 5월이다. 그럴 수 있는가. “절명시”는 1910년인데. 사연인 즉, 순절하기 전에 찍은 사진이 남아 있어 이를 보고 초상을 그린 것이다. 작가는 석지 채용신(石芝 蔡龍臣, 1850~1941). 대한제국기 전후 최고의 초상화가로 일컬어지는 분이다. 황현이 1909년 천연당(天然堂) 사진관에서 찍어두었던 사진을 보고 추사(追寫)한 것이다. 별세 한 뒤 사진을 보고 추사한 것이지만, 실제 인물을 보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만큼 매우 뛰어난 사실적 묘사를 보여주고 있다. 인물의 역사성과 함께 예술성을 평가 받은 것. 그 사진까지 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아마도 사진이 국가지정문화재로 지정된 사례는 매우 드문 사례일 것이다. 심의(深衣)를 입고 포대(布帶)를 맨 뒤 정자관(程子冠)을 쓴 모습이며, 도상은 안경을 쓰고 오른손에는 부채를 들고 왼손에는 책을 든 채 바닥에 화문석 돗자리를 깔고 앉은 부좌상이다. 앉은 자세는 거의 구분면(九分面)에 가까울 정도로 약간 왼쪽으로 앉은 정면상에 가까운 모습이다. 이는 애초 황현이 찍은 사진에서 취한 자세를 따른 것이며, 부채와 책을 들고 있는 것도 기본적으로 사진의 모습을 따르며 약간 변형시킨 것이다. 그러나 사진에는 두루마기를 입고 갓을 쓴 뒤 의자에 앉아 책을 펼쳐들고 있는 모습인데, 초상화는 심의를 입고 정자관을 쓴 뒤 화문석 돗자리를 깔고 앉아있는 모습으로 약간 바뀌어 있다. 매천 황현 초상(사진 문화재청, 이하 같음) 매천 황현 사진 심의(深衣)는 유학자들이 입던 겉옷이다. 백세포(白細布)로 만들며 깃과 소맷부리 따위 옷의 가장자리에 검은 비단으로 선(襈)을 두른다. 대부분의 포(袍)와는 달리 의(衣)와 상(裳)이 따로 재단되어 연결된다. 열두폭의 상이 몸을 휩싸게 되어 있어 심원한 느낌을 준다. 그래서 “심의”라는 말도 유래된 것이라 한다. 복건(幅巾)·대대(大帶)·흑리(黑履)와 함께 착용한다. 정자관은 사대부와 유생이 평상시 집 안에서 착용하던 관(冠)의 일종으로 말총으로 산자형(山字形)을 2단이나 3단으로 만든다. 황현 초상은 양식사적으로도 대한제국기 전후 초상화의 새로운 면모와 특징적인 모습을 매우 종합적으로 잘 보여준다. 이에 더하여 예술적인 수준도 이 시기 초상화의 백미로 꼽힐 정도로 뛰어나다는 평을 받는다. 문화재 명칭은 “황현 초상 및 사진(黃玹 肖像 및 寫眞)”이다. 보통 초상화라 표기하지만, 문화재 명칭부여기준에서는 초상으로 통일하였다. 저술과 생활유물, 등록문화재 8건 91점 2019년 들어 5월과 10월에 황현의 저술과 생활유품, 고문서, 문방구류 등 유물이 국가등록문화재로 등록되었다. 문화재 지정 건수로는 가지번호를 포함하여 모두 8건이다. 수량은 총 91점. 국가등록문화재 제746호 매천 황현 매천야록(梅泉野錄) 국가등록문화재 제747호 매천 황현 오하기문(梧下記聞) 국가등록문화재 제748호 매천 황현 절명시첩(絶命詩帖) 국가등록문화재 제749-1호 매천 황현 시·문(7책) 국가등록문화재 제749-2호 매천 황현 유묵·자료첩(11책) 국가등록문화재 제749-3호 매천 황현 교지·시권(2점)·백패통 국가등록문화재 제761-1호 매천 황현 문방구류 국가등록문화재 제761-2호 매천 황현 생활유물 매천 황현 매천야록(梅泉野錄)(7책)은 황현이 1864년(고종 1) 대원군 집정부터 1910년 경술국치까지 약 47년간의 역사 등을 기록한 친필 원본 7책이다. 한국근대사 연구에 중대한 가치를 지닌 사료이다. 매천야록에는 대한제국기에 세상을 어지럽게 하였던 위정자의 사적인 비리나 비행, 특히 일제의 침략상과 이에 대한 우리 민족의 끈질긴 저항 등이 담겨 있으며 자유로운 방식으로 당시의 역사를 보고 들은 대로 기록하였다. 매천야록 매천 황현 오하기문(梧下記聞)(7책)은 황현이 저술한 친필 원본으로, 매천야록의 저본(底本)으로 보고 있다. 19세기 후반부터 1910년까지의 역사적 사실과 의병항쟁 등을 비롯한 항일활동을 상세하게 전함으로써 한국근대사 연구에 중요한 가치가 있다고 평가받고 있다. 오하기문이란 표제는 황현이 거처한 정원에 오동나무가 있었는데, 그 아래에서 이 글을 기술하였다는데서 유래한다. 「매천야록」과 마찬가지로 자유로운 방식으로 당시의 역사를 보고 들은대로 기록하였다. 매천 황현 절명시첩(絶命詩帖)(1책)은 황현이 1910년 8월 경술국치 뒤 그 해 9월 절명시(絶命詩)를 남기고 당시 사랑채였던 대월헌(待月軒)에서 순절하였다. 바로 그 절명시 4수가 담겨있는 서첩이다. 양면으로 되어 있으며 서간과 상량문 따위도 포함되어 있다. 절명시첩 매천 황현 시·문(7책)은 황현이 1880년대에서 1910년까지 지은 약 548수의 친필 시를 모아놓은 시집(4책)과, 그가 지은 다양한 글을 모은 문집(3책)이다. 황현의 시에는 식자인의 책임의식이 깊이 투영되어 있어서 그의 우국충절의 지사적 면모를 확인할 수 있다. 또한 문집에서는 그가 지은 다양한 글을 싣고 있어 그의 사상과 활동을 파악할 수 있다. 매천 황현 유묵·자료첩(11책)은 황현의 저술과 함께 그의 지기(知己)들과 당대의 지식인들과 주고받은 서간, 중요사건에 대한 신문기사 모음 등 다양한 자료를 모아놓은 유묵과 자료첩이다. 19세기말 20세기초의 국가적 위기와 민족의 존망, 사회 상황, 그리고 지식인들의 동향을 살필 수 있는 매우 귀중한 희귀 자료라 할 수 있다. 매천 황현 교지·시권·백패통(4점)은 황현이 생원시와 향시 과거시험에서 써냈던 답안지(시권)와 합격증서인 백패(교지), 그리고 백패를 보관한 백패통이다. 백패(白牌)는 1888년(고종 25) 생원시(生員試)에서 급제한 교지이다. 이때 생원시 2소에 응시하여 1등 제2인으로 급제하는데 답안지인 시권(試券)과 백패를 보관했던 통이다. 다른 하나의 시권은 1887년 전라도 장수의 향시에 응시하여 장원한 문서이다. 당시 선비들이 지향했던 관계 입문의 첫걸음인 과거시험과 관련된 유물로서 순절한 우국지사의 일상을 보존하고, 이 시기 선비들의 생활상을 파악하는데 도움이 되는 자료이다. 매천 황현 문방구류(19점)는 황현이 사용한 유물이다. 벼루(3점)에는 매천이 직접 지은 벼루명(銘)이 새겨져 있다. 그리고 벼루집과 필통, 인장 따위 여러가지 문방구류가 원형을 잘 유지하며 보존되어 있다. 또한 지구의는 황현이 세계정세에도 깊은 관심을 가졌다는 근대 지식인으로서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해당 유물들은 황현을 비롯한 당대 선비들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어 역사적· 학술적 가치가 크다. 문방구류 -벼루와 벼루집 매천 황현 생활유물(35점)은 황현이 일상에서 사용한 생활유물로, 조선시대 선비와 근대 지식인의 모습을 동시에 보여주는 점이 특징적이다. 호패, 합죽선, 향로 따위 전통적인 성격의 유물을 비롯하여, 근대문물인 안경도 원형으로 있어 황현의 생활상을 파악하는데 도움이 된다. 또한 한 인물의 여러가지 유물이 한꺼번에 전하는 일관성을 가지고 있고 근대기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생활유물 - 안경 등록문화재는 개화기 이후 제작·형성된지 50년이 지난 근대문화유산을 등록하는 제도이다. 일종의 미래의 지정문화재라 할 것이다. 그런데 황현의 초상은 이미 국가지정문화재 보물로 지정되었다. 앞으로 생활유물과 고문서 등에 대해서 일괄유물로서 지정문화재로 지정되기를 기대해 본다. 이처럼 매천 황현 관련 유물은 조선 선비의 일생이 고스란히 문화재로 남았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이미 잘 알려진 매천야록이나 오하기문, 그리고 순절 당시의 절명시 등이 원본으로 그대로 전하고 있다는 점에서 잘 보존해준 후손에게 그저 큰절을 올리고 싶을 뿐이다. 생활유물과 고문서, 문방구류 등 그 당시로서는 어느 집에나 누구인들 사용하고 착용하고 주고 받았음직한 유품과 유물들이 원형 그대로 전하고 있는 점, 역사적 가치이면서도 학술적 가치이다. 전신(傳神)의 경지가 보이는 초상과 일생이 녹아들었을 시문, 순절 110주년을 맞아 더욱 큰 가르침으로 다가온다. 벽파진에서[바로 이 충무공이 왜병을 모조리 무찔러 죽인 곳이다.](碧波津[卽李忠武公鏖兵處]) 만번 죽은들 어찌 전공을 바란 적 있었던가 / 萬死何曾戰功計 이 마음을 모름지기 무신들이 알아야 하리 / 此心要使武臣知 지금 여기가 왜놈 배들이 지나갔던 곳이라 / 至今夷舶經行地 손가락 깨물며 명량대첩비를 가리켜 보네 / 咋指鳴梁指古碑 글쓴이 김희태 전라남도 문화재위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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