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佛家別傳] 승보종찰 조계총림도량 중흥 공덕주 취봉창섭(翠峰昌燮) 게시기간 : 2020-01-21 07:00부터 2030-02-01 00:00까지 등록일 : 2020-01-20 13:41
재단법인 한국학호남진흥원
佛家別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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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승보종찰 조계총림 송광사 순천 조계산 서남쪽에 자리잡은 송광사는 오늘날 승보종찰 조계총림이라 불린다. 신라 말 혜린 선사가 화엄종지를 펼치기 위해 송광산 길상사로 출발하였으나, 고려 명종 20년(1190) 불일보조국사 지눌이 정혜쌍수(定慧雙修)의 정혜결사를 주창하고 송광사를 근본도량으로 삼으면서 교학을 바탕으로 한 선풍을 드날리게 되었다. 지눌의 뒤를 이은 진각혜심(眞覺惠諶)이 독특한 선풍을 진작시켜 남방사회를 이끌게 되자, 고려 조정에서는 ‘수선사(修禪社)’라는 사액을 내려주고 경제적 시혜를 아끼지 않았다. 또한 수선사를 이끈 사주(社主)를 ‘국사(國師)’로 추대하여 국가차원의 예우를 극진히 하며 대중을 교화하도록 하였다. 한국에 불교가 전래된 4세기 삼국시대 이래 21세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송광사만큼 한 사찰에서 많은 국사와 고승을 배출한 사찰은 어디에도 없다. 오로지 송광사만 그러하다. 송광사만이 간직하고 있는 독특한 전통이 소위 열여섯 분의 국사를 배출했고, 새벽별처럼 빛나는 선지식(善知識)을 낳은 것은 아닐런지 모르겠다. 송광사의 독특한 전통을 해명하기 위해서는 먼저 고려후기 송광사의 소위 “16국사설(十六國師說)”의 사자상승(師資相承)의 전통이 무엇인지, 조선후기 송광사를 이끈 고승들이 어떤 선지식이었는지를 살펴서 승보종찰로서의 면모를 드러내고자 한다, 아울러 송광사가 고려후기의 불일보조국사 지눌의 목우가풍(牧牛家風)을 계승하여 오늘날 조계총림으로 거듭나게 한 선승은 효봉학눌과 구산수련이다. 이들이 송광사와의 인연과 조선후기 이래 송광사 부휴계(浮休系)의 승맥(僧脈)을 계승한 취봉창섭이 승보종찰 조계총림 도량의 중흥공덕주로 칭송되는 인연을 밝히고자 한다. 2. 송광사의 초대계석(招待繼席)의 전통 고려시대의 국사제도는 생존 시에 국사로 책봉된 경우가 있고, 사후에 추봉된 경우도 있다. 고려후기 수선사는 열여섯 분의 국사를 배출한 도량이다. 이들은 송광사 출신 스님들뿐만 아니라, 다른 사찰 출신의 스님들도 들어있다. 수선사의 사주는 법주(法主)로서 다른 사찰의 스님도 송광사에서 법주로 초대하여 법석을 잇게 하여 대중을 지도하면 국가에서 국사로 임명하였다. 고려후기 송광사는 이른바 ‘초대계석(招待繼席)’ 전통은 법주(法主)를 세웠는데, 이들이 국사로 임명되면서 국사도량으로 이름나게 되었던 것이다. 송광사의 ‘초대계석(招待繼席)’의 전통은 조선중기 정유재란으로 사찰이 초토화되다시피 한 상황에서 거듭나게 되었다. 왜란으로 큰 손실을 입은 송광사가 난 후에 곧 소규모의 사찰복구를 시도하였으나 여의치 않았다. 그리하여 지리산에서 수행하며 승려사회에서 중망을 얻고 있는 부휴선수(浮休善修)를 법주로 초빙하여 법석을 열어 사찰을 중수하면서 사격(寺格)을 일신(日新)하였다. 조선후기에 송광사는 지리산 화엄사와 더불어 부휴계 사찰의 중심사찰이 되었던 것이다. 송광사의 법맥(法脈)은 부휴계의 승맥이 사자상승하게 되었고, 이들은 고려후기의 보조유풍(普照遺風)을 계승하면서 부휴계로서의 선풍을 드날리었다. 송광사의 부휴계는 해남 대둔사를 중심으로 하는 청허계와 쌍벽을 이루면서 조선후기 불교를 이끌었던 것이다. 송광사의 부휴계 승맥은 조선후기에 시작하여 일제강점기를 거쳐 해방 이후에도 변함없이 이어졌다. 불교승단정화운동기에도 변함이 없다가 1971년에 이르러 중대한 변화가 주지직 계승에 나타나게 되었다. 1948년 1월 이후 1991년 3월까지 송광사의 주지직의 승계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1) 제342대 취봉창섭(1948.1-1949.5) 제343대 추강봉우(1949.5-1950.10) 제344대 금당재순(1950.10-1955.11) 제345대 추강봉우(1955.11-1956.9) 제346대 금당재순(1956.9-1963.7) 제347대 취봉창섭(1963.7-1966.10) 제348대 인암봉록(1966.10-1969.12) 제349대 취봉창섭(1969.12-1971.1) 제350대 회광일각(1971.1-1973.7) 제351대 범일보성(1973.7-1974.9) 제352대 도연법흥(1974.9-1977.7) 제353대 범일보성(1977.7-1979.3) 제354대 대응원명(1979.3-1983.3) 제355대 석림현호(1983.3-1991.3) 제356대 범일보성(1991.3-1994.3) 제357대 승남현고(昇南玄杲)(1994.3-1998.5) 재358대 회암현지(晦巖玄旨)(1998.5-2000.1) 제359대 남은현본(南隱玄鋒)(2000.1-2004.1) 제360대 원광영조(圓光永照)(2004.1-2012) 제361대 진화(2012~2020.1 현재) 위와 같이 제349대 취봉창섭(1969.12-1971.1)에서 제350대 회광일각(1971.1-1973.7)으로 주지직 승계는 중대한 변화를 보여준다. 취봉창섭은 부휴선수의 12세손인데 비해, 회광일각은 구산수련(九山秀蓮)의 문도였다. 송광사의 주지직이 부휴선수계 스님에서 효봉학눌(구산수련의 은사) 스님계로 변경된 것을 의미한다. 1971년 송광사의 주지직이 회광일광 스님 이후 범일보성-도연법흥-범일보성-대응원명-석림현호-범일보성-현고승남-회암현지-남은현봉-원광영조-진화 스님으로 이어졌다. 회광일각 이후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효봉문도들이 송광사 주지직을 승계한 것이다. 주지직의 승계(僧係)가 변경된 1971년 전후로 한 시기에 송광사에는 어떤 중대한 변화가 있었던 것은 아닐까? 그것은 다름 아닌 1969년 봄 조계총림의 개설이었다. 조계총림의 방장은 효봉학눌의 법제자인 구산수련이 추대되었고, 이미 두 차례 송광사의 주지직을 역임한 바 있는 취봉창섭이 다시 세 번째 주지직을 맡은 것은 조계총림이 개설된 7개월째인 1969년 12월이었다. 주지직과 함게 총림 염불원 회주의 소임을 맡게 된 것을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염불원은 총림을 구성하는 계율을 익히는 율원, 참선을 하는 선원, 경전을 배우는 강원과 더불 어 중요한 종무기구이다. 이와같이 취봉창섭은 총림 개설 당시의 주지 부휴 14세 인암봉록에 이어 세 번째 주지직을 맡게 되어 총림도량 창설 당시의 중추적인 역할을 맡았던 스님이다. 그는 송광사를 조계총림으로 거듭나게 하는데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온 장본인이었다. 송광사의 ‘초대계석(招待繼席’의 전통은 취봉창섭에 의해 구산수련을 방장으로 하는 조계총림의 개설로 오늘날에 계승된 것이다. 3. 효봉학눌·구산수련의 송광사 인연 1969년 봄 하안거 결제일에 조계총림의 방장으로 추대된 구산수련은 효봉학눌의 법제자였다. 송광사의 조계총림 개설은 효봉학눌과 구산수련의 선풍으로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다. 효봉학눌·구산수련의 송광사와의 인연을 살펴보기로 하자 신계사에 주석했던 금강산 도인으로 알려진 석두보택(石頭寶澤)에게 1925년 출가한 효봉은 청허휴정(63世), 편양언기(64世), 환성지안(67世), 석두보택(77世)을 잇는 청허계 스님이다. 구산수련(九山秀蓮)은 효봉학눌(曉峰學訥, 78世)을 이어 제79世가 된다. 효봉은 1937년(50세) 송광사에 머무르게 되었다. 1946년 해인사 가야총림 조실로 추대돼 이석(移席)하기 전까지 10년 동안 송광사 조실(祖室)로서 많은 후학들을 지도하였다. 1938년 음력 4월 28일 새벽, 수선사 제16세 고봉화상(1350-1421) 몽중법문을 듣게 되었다. 그 후로 법명은 학눌(學訥), 법호를 효봉(曉峰)으로 개명하였다. 학눌(學訥)은 ‘지눌스님을 배운다’는 뜻이고, 효봉(曉峰)은 고봉화상을 잇는다는 것을 표현한 것이다. 효봉은 보조지눌의 목우가풍과 정혜쌍수의 선풍을 재현하려는 원을 세워 송광사를 승보종찰로 거듭나게 하였다. 그는 임종할 때에 승보종찰 송광사를 중흥하여 현전승보(現前僧寶)를 양성(養成)하라는 유언을 법상좌 구산수련에게 유촉(遺囑)하여 조계총림의 개설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조계총림 초대 방장 구산수련은 1937년 29세에 송광사 삼일암에 입산하였다. 그는 효봉스님을 은사(恩師)로 득도하고 삼일선원에서 수선 안거하였다. 1966년 효봉이 임종할 때에 승보종찰 송광사를 중흥하여 현전승보를 양성하라는 유언에 따라 송광사로 옮겨왔다. 1969년 하안거 결제일(음력 4. 15)에 드디어 조계총림을 개설하니 시방납자가 운집하고 전종단의 중망 속에 방장으로 추대되어 개당설법 하였다. 같은 해 가을 전국에 불일회(佛日會)를 조직하고 총림기구를 갖춰가며 상구보리 하화중생의 기반을 다지게 되었다. 4. 취봉창섭과 조계총림 도량의 중흥
법정 지음, 취봉창섭(翠峰昌燮, 1898~1983)은 한평생을 송광사에 머물면서 청정한 생활규범으로써 승보도량을 장엄한 스님이었다2). 스님은 1898년 하동군 화개면 쌍계사 아랫마을에서 나주임씨 상묵(相默)의 세째 아들로 태어났다. 15세에 쌍계사로 출가하여 19세 때 송광사 남호(南湖) 스님을 은사로 사미계를 받고 이듬해 호은(虎隱)스님을 계사(戒師)로 비구계와 보살계를 받았다. 26세 때 송광사 강원을 수료하고 그 다음 해에 송광사 부설 벌교 송명학교(松明學校) 교사로 봉직했다. 1939년(42세) 일본 교토의 임제(臨濟)전문대를 졸업했고 송광사에 돌아와 강원의 강사로서 도제양성에 헌신했다. 또한 덕숭산 정혜사 만공(滿空)회상과 충무 용화사 도솔암에서 효봉선사를 모시고 참선 수행했다. 1949년과 1963년, 1970년 세 차례에 걸쳐 임기 4년의 주지직에 취임하여 가람수호와 대중외호에 온 힘을 다했다. 특히 6·25 전란으로 폐허가 되다시피한 송광사를 대웅전을 비롯하여 설법전, 명부전, 응향각, 종고루, 차안당 등을 어려운 여건 아래서 송광사 스님들과 힘을 모아 복구하였다. 취봉창섭은 1969년 조계총림이 개원될 때 구산 방장(九山方丈) 스님과 뜻을 같이하여 총림 설립에 크게 공헌하였다. 총림의 4대 구성요건의 하나인 염불원 회주(念佛院會主)로 추대되었고 송광사 불일회(佛日會)를 결성 초대회장이 되었다. 취봉 스님의 승행(僧行)은 후학들에게 큰 모범이 되었다. 사중(寺中)의 모든 승물(僧物)과 개인의 사물(私物)을 엄격히 구분 공과 사를 분명히 했으며 생강 한조각일지라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헤어진 옷가지도 함부로 버리지 않고 깨끗이 빨아 손질해 두었으며 노쇠해진 몸으로도 승가전래(僧家傳來)의 청규(淸規)인 조석예불과 대중공양을 거르는 일이 없었다 이웃에 신세지는 일을 꺼리어 생전에 49일 동안 지장기도를 정성껏 모시어 사후의 49재를 몸소 지내기도 했다. 돌아가시기 얼마전 지녔던 물건들을 정리정돈 이웃에게 모두 나누어 주고 갈아입을 옷마져 남기지 않았다. 간직한 정재(淨財)를 절에 내놓아 중창불사와 장학기금 및 사후의 일에 써 달라고 했다. 입적하기 며칠 전 삭발목욕후 불전마다 향을 사르며 참배하고 비전(碑殿)과 화엄전에까지 가서 하직인사를 드렸다. 뼈와 살갗만 남은 말년의 노스님 모습은 마치 부처님의 고행상을 방불케 했다 이 세상에 몸을 받아 살아오는 동안 받은 것을 남김없이 모두 돌려주고 알몸과 빈손으로 가시려는 것 같았다. 입적하는 그 순간까지 의사를 부르거나 약 한 첩 쓰는 일이 결코 없었다. 스님은 1983년 6월 28일 밤 3경에 마지막 잿불이 사그라지듯 가을바람에 풀잎이 눕듯이 86년의 생애를 조용히 거두면서 수행자에게는 죽음도 삶의 한 모습이라는 것을 보여주셨다. 법정 스님은 취봉 노스님과 같은 살아있는 승보(僧寶)를 10년 가까이 한 산중에 살면서 지켜보고 배울수 있었던 출세간의 인연에 진심으로 감사드리지 않을 수 없다고 하면서 승보종찰 총림도량 중흥공덕주로 칭송하였다. 6·25전란 후 한국불교는 비구승·대처승간의 종단정화불사의 소용돌이의 늪에 빠졌다. 서울뿐 아니라 지방 사찰도 극단적인 대립이 벌어지는 사례가 많았다. 하지만 송광사는 예외였다. 송광사는 단 한차례의 물리적 충돌도 없이 원만하게 합의를 이뤘고, 승보종찰로서의 위상을 확고히 했다. 이러한 화합 승풍을 도모한 스님이 바로 취봉스님이었다. 효봉학눌의 법제자인 구산(九山)스님을 모셔와 호남불교 중흥의 원력을 실천할 조계총림 개설에 앞장섰던 분이 취봉창섭 스님이었다. 1) 고경,「송광사역대주지」『조계산 송광사』(대한불교진흥원, 2010)
2) 법정 지음, 「승보종찰 총림도량 중흥공덕주 취봉당창섭비」 글쓴이 이계표 전라남도 문화재위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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