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문서와 옛편지] 세 벗들의 편지, 「삼현수간(三賢手簡)」 게시기간 : 2020-01-23 07:00부터 2030-07-16 17:00까지 등록일 : 2020-01-21 17:37
재단법인 한국학호남진흥원
고문서와 옛편지
|
||||||||||||||||||||
<삼현수간> ‘세 사람의 어진이들의 친필 편지’라는 의미를 가지는 「삼현수간」은 절친인 구봉(龜峯) 송익필(宋翼弼, 1534~1599), 우계(牛溪) 성혼(成渾, 1535~1598), 율곡(栗谷) 이이(李珥, 1536~1584) 세 사람이 서로 주고받은 친필 편지를 모아서 첩으로 만든 것이다. 2004년에 보물 1415호로 지정되었다. 세 사람의 간찰 자료를 장첩(粧帖)한 문제자(門弟子)의 입장에서는 ‘어진 선생’이기 때문에 ‘세 분 선생님의 친필 편지’라는 의미로 「삼현수간」이라고 제목을 달았겠다. 「삼현수간」의 첫머리에는 송익필이 쓴 서문이 있다. 서문을 쓴 연도가 만력 기해년(1599, 선조32)이니 바로 구봉이 죽은 해이다. 율곡, 우계도 죽고 자신만이 살아남아 죽을 날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아들 취대(就大)가 흩어진 유고 속에서 우계와 율곡이 자신에게 보낸 편지를 수습하여 집안에 전해줄 자료집으로 만들었다고 하였다. 구봉이 우계, 율곡, 친구나 제자에게 보낸 답장 초고도 같이 편집되어 있다. 모두 98건의 간찰과 초고가 수록되었다. 이들 자료는 『구봉집』의 현승편(玄繩編)으로 대부분 수록되어 있고 『율곡집』이나 『우계집』에도 일부는 수록되어 있다. 우계가 구봉에게 보낸 편지가 50통으로 가장 많고, 율곡이 구봉에 보낸 편지가 13통, 나머지는 구봉이 우계나 율곡, 사계 등에게 보낸 편지나 답문(答問) 등이다. 율곡이나 우계가 보낸 간찰은 구봉이 받아서 보관하였던 것이고, 구봉이 다른 사람들에게 보낸 간찰은 실제 보내진 것이 아니고 보낸 편지의 초고와 잡록 등을 등서해둔 자료이다.
미천한 출신으로서 잡과를 거쳐 관상감 판관 벼슬을 하고 모반을 고변한 공신이 되어 당상관에까지 승진한 송사련의 4남 1녀 유복한 환경에서 태어나 자란 송익필. 형제자매들이 모두 양반가 심지어는 왕족과도 혼인하는 가문이 되었지만, 시대가 변하여 환천(還賤)되어 도망을 하며 유배가게 되는 영락의 세월, 그리고 그 사이에는 임진왜란이라는 미증유의 전쟁도 겪었다. 마지막 은거지인 충청도 면천(沔川)에 살면서 자신의 아름다웠던 시절의 기록을 수습하여 정리해둔 자료가 「삼현수간」이라 하겠다. 이 자료는 물론 송익필의 후손 집에 있어야 하지만, 제자인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의 집으로 들어갔다. 각 장마다 찍혀있는 「황강사계창주세가(黃岡沙溪滄洲世家)」라는 장서인이 그것을 말해준다. 황강은 사계의 아버지인 김계휘(金繼輝)의 호이고, 창주는 손자인 김익희(金益熙)의 호이다. 따라서 김계휘-김장생-김반(金槃)-김익희로 이어지는 광산김씨가에 전해 내려온 유물임을 알 수 있다. 사계가 스승인 송익필의 신원 운동을 주도하였고, 또 구봉의 마지막 은거지인 면천 마양촌은 사계와 인연이 있는 곳이었다. 또 구봉의 문집을 간행한 것도 김집과 그의 후손들에 의하여 만들어졌으므로 충분히 이 자료가 광산김씨가에 들어갔을 수가 있다.
<율곡이 구봉에게 보낸 간찰> 「삼현수간」에 수록된 100편에 가까운 간찰 중에서 젊었을 때에 율곡이 구봉에게 보낸 간찰 한 편과 안가(安家)들의 소송으로 환천이 된 이후 도피 중일 때에 우계가 보낸 간찰 한 편을 소개하여 도의로 교유를 한 세 사람의 아름다운 우정의 한 단면을 음미해보도록 하겠다. 먼저 율곡이 구봉에게 보낸 간찰. [雲長龜峯侍下 上柬] 近日䨪熱甚劇 未知/道况卽今何如 曾承六月念七日/下書 厥後更無/音問 向念悠悠 承聃甥侍學 有可/敎之勢云 幸甚 珥僅保 但妻妾在山中/ 無止泊處 必築室修粧移入 然後可歸/坡山 人事不如意 還期似在仲秋之晦/ 可嘆 希元來此纔二旬 厥嚴天召去 寂/寞之中 更無相長者 甚恨甚恨 安峽之/卜 季氏不遷 則事恐不成 未知魚彦休/之計 今則何如 且甥舅之間 爲師弟子/ 若眞有所授受者 則可稱先生 今者 聃/也於珥 有何所得而稱先生乎 不如從/俗稱叔姪之爲愈也 伏惟/下照 餘祈/自愛加嗇 謹拜/問 丁丑七月二十四日 珥 拜 魚彦休及季鷹了簡/ 銘傳何如 [구봉 운장 시하에 올리는 편지] 요즘 흙비와 더위가 매우 심합니다. 모르겠습니다만, 도황이 지금은 어떠신지요? 일찍이 6월 27일에 내려주신 편지를 받았고 그 후로는 다시 소식이 없어 향하여 생각하는 마음이 아득합니다. 생질 담이가 공부하는데 가르칠 만하다고 하시니 매우 다행입니다. 저는 겨우 보존하고 있습니다. 다만 처첩들이 산중에 있어서 머물러 잘 곳이 없습니다. 집을 짓고 도배를 하여 이사들어간 후에나 파산에 돌아갈 것 같습니다만, 사람 일은 뜻대로 되지 않으니 돌아갈 시기는 아마도 중추(8월) 그믐이 될 것 같습니다. 걱정입니다. 희원(김장생)이 여기에 와서 겨우 스무날 있다가 더운 날씨에 돌아갔습니다. 적막한 가운데 다시 서로 같이 공부할 사람이 없으니 정말 한스럽습니다. 안협에 자리 잡은 곳에 아우가 옮기지 않는다면 아마 일이 안될 것 같습니다. 어언휴의 계획이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습니다. 또 생질과 외삼촌 사이에 스승과 제자가 되는 것이 만약 정말 주고받은 것이 있다면 선생이라고 칭해도 되겠지만 지금 담이가 저에게서 무슨 소득이 있다고 선생을 칭하겠습니까? 세속에서 하는 대로 삼촌과 생질로 칭하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살펴주십시오. 나머지는 자애하시고 더욱 복 받으시기를 기원합니다. 삼가 절하고 문안드립니다. 정축년(1577, 선조10) 7월 24일 이 배 어언휴와 계응(동생 송한필의 자)에게 보내는 편지는 꼭 전해주십시오.
이 편지는 율곡 42세 때, 관직에서 물러나 황해도 석담에 돌아와 있을 때이다. 이해 12월에는 『격몽요결(擊蒙要訣)』을 완성하였다. 구봉에 은거하며 학문을 연마하는 구봉에게 율곡은 자신의 생질, 조카들의 교육을 맡긴 것으로 보인다. 위 편지에 보이는 윤담(尹耼)은 율곡의 매부인 윤섭(尹涉)의 아들이다.(『율곡집』 권34 부록 문인록) 우계, 율곡이 구봉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피봉에 구봉을 ‘운장(雲長) 송 생원(宋生員)’ 또는 ‘운장(雲長) 구봉(龜峯)’이라고 수신인을 밝히고 있다. ‘운장’은 송익필의 자이고 ‘구봉’은 송익필이 호가 된 고양 구봉을 말하는 것이다. ‘생원’이라는 칭호를 붙인 것을 보면 송익필이 생원 시험에는 합격했던 것으로 보인다. 『구봉집』을 해설한 연보 자료에는 출생에서부터 송익필의 신분 문제가 일어난 율곡 사후 사이에는 거의 공백이다. 그래서 그의 청장년기의 실제에 대해서는 잘 알 수가 없다. 그런데 우계와 율곡이 구봉에게 보낸 편지의 피봉에서 구봉을 ‘생원’이라는 호칭한 것은 매우 주목할 만한 것이다. 구봉이 생원 시험에 합격하였고 과거에 응시하였다는 것은 관직에 나아가 벼슬할 생각이 있었다는 것이다. 구봉보다 한 살 아래인 우계, 우계보다 또 한 살 아래인 율곡 셋은 거의 동년배로서 서로 관직에 나아갈 것인가 하는 문제인 출처(出處)를 두고도 서로 고민을 말하는 도의(道義)의 교제를 하고 있었다. 율곡은 결국 소과, 대과를 거쳐 관직에 나아가고 우계는 끝까지 과거에 응시하지 않고 산림을 자처하지만 유일로 천거되어 관직에 나아가 시사에 발언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이기도 하였다. 생원시에 합격한 것으로 보아 구봉은 처음에는 관직에 나아갈 의사가 있었다고 생각된다. 간찰의 내용은 구봉에게 가서 공부하고 있는 생질 윤담이 가르칠 만하다는 것을 듣고 기뻐한 것, 또 윤담과 자신과의 관계를 사제 관계로 보지 말고 자신은 그에게 가르친 것이 없으니 삼촌과 생질로 보는 것이 좋겠다는 것, 김장생이 자신에게 와서 20여 일 있다가 돌아가서 같이 공부할 사람이 없다는 것, 율곡이 황해도 안협에 구봉의 동생인 계응(송한필)과 어언휴 등과 이거하고 싶은 생각이 있는데, 송한필이 가려고 하지 않는다면 그 계획은 될 수가 없다는 것 등 근황을 전하고 있다. <우계가 구봉에게 보낸 간찰> 율곡이 죽고 율곡을 혐오하던 이발, 백유양 등은 율곡의 뒤에 송익필이 있었다고 생각하여 안가들을 조정하여 송가들을 환천하는 소송을 제기하였고 구봉은 하루아침에 천인이 되고 말았다. 구봉은 서울의 소식을 듣고 급히 친구들과 이별을 고할 수밖에 없었다. 『구봉집』에는 이때의 심정을 다음과 같이 밝혔다.(「聞京報 走筆別親舊」)
이렇게 도피를 하고 자수를 하고 유배를 당하고 사면이 되어 돌아오는 기구한 운명에도 불구하고 우계의 우정은 변치 않았다. 도피 중에 있는 구봉에게 우계가 보낸 편지는 적들의 공격에도 불구하고 전과 다름이 없었다. [龜老尊兄座前 上狀] 音徽長絶 歲已秋矣 戀慕之苦 衰老尤/切 未委/靜隱起居粗安否 春間潭陽使君 累致書/ 因仍承見/手札 其喜可言 渾衰耗頓添 日望溘死/ 未死之前 每懷故舊 終不可忘 在人/世者 爲幾人哉 然則奉慕/老兄 何時而已耶 直至地下 然後相忘耳/ 思庵先生 七月念日日考終于永平山/中 殄瘁之痛 可勝言哉 只爲栗谷文/集 少無就緖 道里稍邇 豈不得稟/老兄 而草本未成 不能賫持而往也/ 奴子看秋淳昌 盖有數畝田舍 往/納穀十斗于座前 幸/勿却何如 渾二月避瘟于外 前月纔還/ 虛足柴立 他無足道 奴歸甚忙 草/草不盡所欲言 伏惟/簡以一字 慰我孤懷 謹奉狀 己丑中秋三日 渾 拜 [구로 존형 좌전에 편지 올립니다] 소식이 오래 끊어졌는데 세월은 벌써 가을입니다. 그리워하는 괴로움이 노쇠할수록 더욱 절실합니다. 모르겠습니다만, 고요히 은거하시는 기거는 편안하신지요? 봄 사이에 담양 부사가 여러 번 편지를 보내서 그 편에 직접 보내신 편지를 받아보았습니다. 말할 수 없이 기뻤습니다. 저는 노쇠하고 혼모한 것이 갑자기 더해져서 매일 죽을 날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죽기 전에 매번 친구들을 생각하면 끝내 잊을 수가 없습니다. 세상에 살아있는 사람이 몇 사람이나 됩니까? 그러니 노형을 그리워하는 것이 어찌 끝이 있겠습니까? 바로 지하에 들어간 다음에나 서로 잊겠지요. 사암 선생이 7월 20일에 영평(永平) 산중에서 돌아가셨습니다. 무너지는 아픔을 이루 말할 수가 없습니다. 다만 율곡 문집은 조금도 실마리를 잡을 수가 없습니다. 거리가 조금 가깝다면 어찌 노형께 아뢰지 않겠습니까? 다만 초본이 아직 완성되지 않아서 가지고 갈 수가 없습니다. 저의 종이 순창에 추수 간심하러 갔습니다. 그곳에 대강 몇 뙈기 토지가 있습니다. 곡식 열 말을 드리오니 행여 물리치지 않으시면 좋겠습니다. 저는 2월에 밖으로 염병을 피하여 나갔다가 지난달에 겨우 돌아왔습니다. 허허로운 다리로 우두커니 서있으니 다른 것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종이 돌아가는 길이 매우 바빠서 초초히 말하고자 하는 것을 다하지 못합니다. 답장을 보내주시어 저의 외로운 마음을 달래주십시오. 삼가 편지를 올립니다. 기축년(1589, 선조22) 중추(8월) 3일 혼 배
이 편지는 기축년, 1589년 8월에 우계가 구봉에게 보낸 편지이다. 그 전해에는 조헌이 율곡과 구봉을 옹호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유배를 당하였다. 사노로 환천되는 곤경에 처하여 도피 중이어서 서로 편지도 자주 주고받지 못하고 담양 부사 편에나 소식을 듣다가 비로소 구봉으로부터도 직접 편지가 온 것이다. 아마 이때 구봉은 정철의 세거지인 담양에 피신을 하고 있었던 것 같다. 율곡이 죽고 구봉은 피신을 하여 서로 교유할 친구가 없어지니 우계는 그 쓸쓸한 마음을 견딜 수가 없었던 쓸쓸한 심정을 표현하고 있다. 사암(思庵) 박순(朴淳, 1523~1589)이 영평에서 작고한 소식도 전하고 몇 년 전에 죽은 율곡의 문집을 편찬하는 것이 두서가 없음을 토로하고 같이 초고가 정리되면 바로 아뢰겠다고 하였다. 또 자신의 순창 농장의 추수에서 얻은 곡식 열 말을 전하면서 도피 중인 구봉을 조금이나마 경제적으로 부조를 하였다. 또 전염병으로 피우(避寓)한 소식도 전하고 있다. 한 살 터울로 태어난 구봉, 우계, 율곡의 아름다운 우정은 도의(道義)의 사귐이었다. 세 사람의 만남은 비천한 출신과 양반사족의 신분적 장벽을 극복한 것이었다. 적서(嫡庶), 처첩(妻妾), 반상(班常) 등의 신분제가 엄존하는 조선사회에서 세 사람의 우정은 그러한 장벽을 뛰어넘는 아름다운 것이었다. 「삼현수간」은 그러한 우정이 오롯이 담겨있는 친필 유묵이다. 글쓴이 김현영(金炫榮) 한국고문서학회 명예회장 |
||||||||||||||||||||
Copyright(c)2018 재단법인 한국학호남진흥원. All Rights reserved. | ||||||||||||||||||||
· 우리 원 홈페이지에 ' 회원가입 ' 및 ' 메일링 서비스 신청하기 ' 메뉴를 통하여 신청한 분은 모두 호남학산책을 받아보실 수 있습니다. · 호남학산책을 개인 블로그 등에 전재할 경우 반드시 ' 출처 '를 밝혀 주시기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