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경의 기억 ] 비 내리는 호남선, 남행열차 게시기간 : 2020-01-25 07:00부터 2030-02-06 01:00까지 등록일 : 2020-01-22 15:48
재단법인 한국학호남진흥원
풍경의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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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롯 가요제가 한참 뜨고 있다. 우리 광주·전남에서는 이난영의 「목포의 눈물」이 있어 아무래도 ‘목포’가 트로트의 원조 소재가 되고 있다. 그 소재 중에 ‘호남선’도 빼놓을 수 없다. 일찍이 “목이 메인 이별가 …”로 시작하는 손인호(孫仁鎬)의 「비 나리는 호남선」(1956년)이 유행했었고, 이 노래 제목을 따 “비 내리는 호남선 남행열차에 흔들리는 차창너머로 ······”라고 시작하는 김수희의 「남행열차」(1987년)가 크게 유행하면서 ‘남행열차’라는 이름은 호남선이란 공식 명칭보다 더 호남선을 대표하는 명칭이 되었다. 남행열차의 유래 남행열차라는 말은 언제부터 썼을까? 기록에서 찾아보면, 1922년 10월 14일에 처음 보인다. “광주(光州) 농교생(農校生) 사십명은 수학여행차 교유(敎諭) 양봉화(梁奉化) 우(又) 히라노(平野) 양씨(兩氏)의 인솔로 거(去) 삼일 오전 십시 남행열차로 래목(來木)하야”1)라는 『동아일보』의 신문기사가 그것이다. 이때 즈음부터 호남선은 남행열차라는 애칭을 띄고 호남인의 숱한 사연들을 담은 채 달리고 있었다. 이난영이 부른 노래 중에도 “끝없이 흔들리는 남행열차에 …”로 시작하는 「남행열차」(1939년)라는 곡이 있어 남행열차라는 이름이 꽤 유행했었음을 말해준다.2) 그밖에 「향수의 남행열차」(1960년대)라는 노래도 있었고, 「애수의 남행열차」(1963년)라는 영화도 있었으니 가히 ‘남행열차’는 호남선보다 더 익숙한 호남선이다. 이 남행열차는 완행열차여야 그 맛이 난다. “대전 발 0시 50분”이란 가사로 익숙한 안정애의 「대전 블루스」(1956년)의 그 기차도 목포행 완행열차였다. 최근에는 장윤정 가수의 「목포행 완행열차」가 또 인기를 끌고 있다. 이처럼 목포행 완행열차는 서민들의 애환을 싣고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달리고 있다. 그리고 이번 설 명절에도 예외 없이 수많은 사람들이 호남선 남행열차를 타고 고향을 찾을 것이다. 서민들의 애환만큼이나 많은 사연들이 호남선에 얽혀 있다. 그 얽힌 이야기들을 풀어보기로 하자. 자력건설운동의 보루, 호남철도 1897년 10월 대한제국이 성립하면서, 정부는 철도의 이권을 옹호할 뿐 아니라 그 부설의 필요성을 인정해서 적극 추진해 나갔다. 그 최초의 시험선이 서울과 목포를 잇는 경목선(京木線)이었다. 이 경목선은 대한제국이 추진한 최초의 시험선이었다. 경목선 부설 문제는 1898년 6월 18일 논의하고 다음날 재가되었다. 7월 6일에는 철도사(鐵道司)를 설치했고, 7월 27일에는 철도사를 1등국인 철도국으로 개칭하면서 강한 추진의지를 보였다. 특히 이 문제에 대해서는 외국의 차관조차도 거절하면서, 어디까지나 자력 부설을 목표로 했다. 그러나 자금사정으로 여의치 못하던 중 1904년 6월에 서오순(徐午淳)에게 부설권을 허가하였다. 이때 경목선의 이름이 호남철도로 바뀌었다. 서오순은 호남철도주식회사의 발기인으로서 호남철도 부설운동의 중심 인물이었다. 호남철도는 정부 및 민간인에 의한 철도부설운동 중 그때까지 남은 유일한 것이었다. 일제의 강점을 앞둔 우리 민족이 마지막으로 또 가장 활발하게 추진한 자력건설운동의 보루가 호남철도였던 것이다. 호남철도공사는 두 차례의 측량 사업을 추진하는 등 가시적인 움직임을 보였다. 행정 및 실무의 책임을 모두 한국인이 맡고 있었다. 또 고종의 지지에 힘입어 경성의 유력 실업인들이 주식모집활동에 참여하면서 토목 작업도 추진하였다. 그 후 자금문제에 봉착했을 때는 주식모집연구회가 개최되어 다시 활기를 불어 넣어 주었다. 이때의 주식자금은 경성실업인들의 협조, 지방 관료조직과 지주들을 동원한 강제 모집방식을 취해 어느 정도 해결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였다. 그래서 준공계획까지도 세울 만큼 진전을 보였다. 그 계획에 따르면 1909년 4월부터 시작해서 1912년에 준공하기로 예정되어 있었다. 3년이란 짧은 기간이었다. 그러나 일본의 책동으로 1908년 11월경 당시 내무대신이던 송병준(宋秉畯)이 전라남북도에 훈령을 발하여 관찰사가 주식모집운동에 관계하지 못하도록 방해하였고, 끝내 부설권도 일방적으로 빼앗아 가 버렸다. 그래서 아쉽게도 호남철도 건설운동은 마침내 실패로 끝났다. 호남철도주식회사 창립위원의 청원서를 보면 그때 이미 “마침내 온 나라를 부강하게 하는 방책으로 어느 것이 이보다 낫겠는가? … 금(今) 차(此) 철도는 전국의 혈맥[全國之血脈]일 뿐만 아니라 독립의 원인[獨立之原因]이 여기에 달려 있다.” 고까지 말하였다. 아니나 다를까 이 운동의 실패는 나라의 독립을 잃는 일과 결코 별개의 것이 아니었다. 아쉽게도 나라를 빼앗기면서 호남철도도 빼앗겼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이 호남철도 부설운동이 우리 민족이 벌인 자력건설운동 최후의 보루로서 자주적 근대화의 빛나는 자리를 차지하기에 충분하다는 사실이다.3) 3년만의 개통 대전과 전남 목포를 잇는 호남철도는 1911년 3월 15일 기공해서 1914년 1월 전구간을 개통하였다. 3년이란 짧은 기간에 완성될 수 있었던 것은 물론 식민 지배를 서둘던 일본이 “허술하더라도 빨리 완성”한다는 ‘졸속주의(拙速主義)’의 방침을 취하였던 영향이 크겠지만, 애당초 호남철도 부설운동 당시 예정된 준공기간이 1909년 4월에서 1912년까지 3년간이었음을 생각한다면, 결코 빠른 것도 아니었다. 당초 일제는 공사기간을 11년으로 잡았었다. 그런데 그 기간이 3년으로 단축될 수 있었던 데는 역시 자력건설운동기의 준비가 있음으로 해서 가능하였음도 분명히 알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부설운동은 비록 실패했으나 그 기초를 힘이 다할 때까지 민족의 힘으로 이루려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컸음을 다시 한 번 짚어 두고자 한다. 30년 넘게 걸린 복선화 – 호남차별의 민낯 20세기 초에 그것도 3년만에 완공된 호남철도였는데, 그 옆에 선 하나 더 놓는 복선화 사업은 호남 차별의 민낯을 그대로 보여주는 역사의 현장이었다. 1968년 1월 4일 복선화 사업이 시작된 이래 무려 30년이 넘어서야 마무리되었다. 역대 대선(大選)에서 호남선 복선화 공약은 단골손님이었다. 선거 때마다 수차례 공약으로 제시되었다. 하지만 빌 ‘공(空)’자 ‘공약(空約)’으로 끝나기 일쑤였다. 선거 때마다 찔끔, 느릿느릿 진행되던 공사는 1978년 3월 30일 대전∼이리간을 개통하였고, 이후 정읍, 장성을 거쳐 1988년 9월 5일에야 광주송정역까지 이르렀다. 또 그로부터 얼마나 많은 세월이 흘렀을까? 광주송정역에서 목포역까지의 복선화는 2003년 12월에야 완료되었다. 착공부터 무려 만 35년이란 긴 세월이 흘렀다. 그 사이에 세기도 21세기로 바뀌었다. 복선 전철화 준공식은 2004년 3월 24일에 열렸고, 그 해 4월 1일 고속열차가 목포역에 들어왔다. KTX 전용선은 또 그로부터 한참 후에 놓였다. 그것도 2015년에 광주송정역까지는 왔지만 아직 목포까지는 아니다. 언제 오려나…. 1939년에 일찌감치 전 구간이 복선화되었고, 지금은 복복선 전철화에 이어 2006년 전구간 전철화가 완료된 경부선과는 비교 자체가 무색할 정도다. 그래서 호남 차별, 그 중에서도 호남선은 첫손에 꼽힌다. 전라선은 더더욱 말할 것도 없지만…. 차별은 단지 철도 건설의 지지부진에 그치는 게 아니라 그 위를 달리는 열차의 편수나 질에서도 인구 비례를 훨씬 넘는 차별을 보이고 있다. 호남의 밝은 미래를 꿈꾸며 호남 푸대접의 티를 내며 달리는 호남선 열차, 언제나 그 티를 벗어낼 건가? 그래도 여전히 남행열차, 목포행 완행열차는 다정한 우리의 노래로 남아 있고, 호남선 열차는 낭만을 싣고 호남의 밝은 미래를 꿈꾸며 오늘도 여전히 달리고 있다. 2020년 경자년 새해가 시작합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1) 『東亞日報』 1922. 10. 14.
2) 남행열차(조명암 작사/박시춘 작곡/이난영 노래)의 가사는 다음과 같다. 1. 끝없이 흔들리는 남행열차에 홍침을 비고 누워 눈물집니다. 사랑하는 까닭에 사랑하는 까닭에 떠나를 가며 가엾다. 내 청춘은 누구를 주나 2. 세상이 다 모르는 내 가슴속에 눈물을 가득 싣고 떠나가건만 사랑하는 까닭에 사랑하는 까닭에 버린 내 사랑 야속한 추억만이 괴롭습니다. 3) 고석규, 「제8장 교통의 발달과 생활문화 : 기차에서 비행기까지」(『근대도시 목포의 역사·공간·문화』, 서울대출판부, 2004) 참조글쓴이 고석규 목포대학교 前 총장, 사학과 명예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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