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佛家別傳] 한국 불교개혁의 지도자 만암종헌 게시기간 : 2020-01-30 07:00부터 2030-12-17 15:00까지 등록일 : 2020-01-29 15:32
재단법인 한국학호남진흥원
佛家別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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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중이 되라 "우선 중이 되라. 중이 되기 전에 부처를 말하지 말라."이것은 대한불교 조계종 종정을 지낸 백양사 출신 만암종헌(曼庵宗憲, 1876-1957) 스님의 말씀이다. 이 얼마나 무서운 말인가. 머리를 깎았다고 다 스님이 아니요, 먹물 옷을 입었다고 모두 승려일 수 없다. 겉껍데기만의 승려는 아무런 가치가 없다는 의미일 것이다. 완전한 인격을 갖추어 속알맹이가 승려가 되어야 비로소 명실상부한 스님이라는 것이다. 만암 스님은 일제 강점기와 해방, 한국전쟁과 불교분규사태의 격동기에 한국불교 최고 지도자의 한 사람이었다. 그는 숨막히게 돌아가는 현실 속에서 수행위주의 산중불교 본래의 면목을 되찾으려는 노력과 함께 대중 속으로 뛰어들어 그들을 계몽하려는 교육사상을 지닌 참다운 보살정신의 실천가였다. 만암종헌 만암 스님은 법휘가 종헌(宗憲), 호가 만암(曼庵)으로 고종 13년(1876) 정월 17일 전북 고창군 고창읍 중거리에서 아버지 송의환(宋義煥)과 어머니 김씨 사이에서 3남으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나 성장한 시기는 나라가 안팎으로 소용돌이에 휩싸여가던 어려운 때였다. 이러한 시대적 격동기에 만암 스님은 개인적으로도 커다란 어려움을 당하게 되었다. 그는 4살때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 밑에서 자라게 되었는데 어머니마저 11살때 돌아가셔서 고아의 신세가 된 것이다. 그가 절에 들어간 것은 11살때였다. 그의 허약한 몸과 수명이 짧을 것이라 어느 스님의 관상담에 걱정이 된 어머니가 그를 백양사에 맡긴 것이다. 그는 백양사 취운도진 선사(翠雲道珍 禪師)를 은사로 머리를 깎게 되었다. 16세에 이르러 순창 구암사의 불교전문강원에 들어가 당대의 대강백 석전(石顚) 박한영(朴漢永) 스님 문하에서 경문을 배우기 시작했다. 그 후 백양사에 돌아와 운문강원에서 환응(幻應) 강백에게도 수학하여 일대교학을 두루 섭렵했다. 이러한 이력으로 25세에 환응 스님으로부터 강석을 물려받아 이로부터 강사에 종사하게 되었다. 특히 합천 해인사에서의 특강은 그 이름이 전국에 널리 알려져 많은 학인스님들이 일부러 해인사를 찾기도 하였다. 1910년 8월 29일 한일합방이 단행되어 조선왕조가 역사의 막을 내리게 되자, 낙심한 만암 스님은 음울한 심정으로 다시 백양사로 돌아와 사찰에서 대중교육을 실시하였다. 일제하의 한국불교는 크게 두 흐름으로 나뉜다. 그중 하나는 일본불교를 적극적으로 수용함으로써 현실에 적응하자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전통불교를 수호하기 위한 호법투쟁과 함께 항일민족운동을 전개하려는 것이었다. 한일합병이 이루어지던 무렵 시세를 재빠르게 간파한 이회광(李晦光, 당시 해인사 주지)과 그의 일파들은 조선불교의 장래를 위해서는 일본불교와 연합해야 된다고 주장하였다. 더욱이 당시는 왜색불교의 영향이 이미 침투하여 승려들 중에는 긴 머리에 양복을 입고 개화장을 짚으며 여자와 동거하는 등의 행동을 하는 사람이 나오기 시작했다. 이에 일부 승려들이 이회광의 주장은 조선불교를 일본에 팔아넘기는 행위이며, 태고보우(太古普愚) 이래 임제계통의 법맥을 뒤바꾸는 반종교적 행위라고 하면서 반대하게 된다. 당시 호법을 주장하는 세력에는 선암사의 장금봉(張錦峯), 김학산(金鶴傘)과 화엄사의 진진응(陳震應), 범어사의 오성월(吳惺月), 한용운(韓龍雲) 스님 등과 함께 만암 스님의 스승인 백양사의 박한영(朴漢永)이 포함되어 있었다. 한편 조선총독부는 1911년 6월 3일 조선사찰령 7개조를 제정하고 동년 7월 8일 사찰령시행규칙 8조를 반포하였다. 이리하여 조선불교는 선․교 양종 30본산제로 바뀌게 되었다. 전남에서는 최초 장성 백양사, 순천 송광사, 선암사, 해남의 대흥사에 본산이 설치되었고, 그뒤 구례의 화엄사가 추가되어 5본산이 설치되었다. 이러한 시기에 만암 스님은 불교가 시대적 조류에 부응하기 위해서는 교학진흥과 교육이 중요하다는 신념을 갖고 백양사내 청류암에 광성의숙을 설립했다. 청류암은 1894년 갑오농민전쟁시기에 전봉준이 하룻밤 묶어가기도 하였고, 구한말 항일의병 활동기에는 의병들이 드나들기도 하는 등 백양사내 사회운동의 거점이 되었던 곳이다. 이곳에 의숙을 개설한 만암 스님은 50명 내지 1백명 단위로 학인스님을 모아 선·교·율(禪·敎·律)의 겸수와 함께 외전도 가르쳤다. 이때 외전으로는 구한말의 역사와 지리, 측량법 등을 가르쳤는데, 이것이 민족주의적이라 고 일제 관헌의 감시를 받기도 하였다. 이러한 교육에 대한 열정은 이후 그의 전 생애에 걸쳐서 일관되게 나타난다. 그는 승가교육에 대한 원력으로 1929-1932년까지 4년간 불교계에서 세워 운영하는 중앙불교전문학교(현재의 동국대학교 전신)의 교장을 맡았으며, 1947-1955년까지 9년간 송정리에 정광중․고등학교를 설립․운영하기도 하였다. 이와 함께 만암은 중창불사의 가람수호에도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일제치하에서 퇴락한 백양사의 중건에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던 것이다. 그는 1917년에 백양사 중건모연에 들어가, 그 이후 40여 년간 이곳에 주석하면서 무려 6차례의 중건불사를 일으켰다. 그의 사찰 중건불사는 당시 다른 사찰의 불사와 사뭇 달랐다고 한다. 그는 늘 사찰의 자급자족을 주장하였는데 그 방편으로 양봉을 강습하여 꿀을 제조하였고, 짚신을 만들었으며, 죽기를 제작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그 수익을 모두 중창불사에 보태게 하였던 것이다. 뒷날 문도들이 이것을 '반선반농(半禪半農)'이라고 불렀다. 사찰의 도량불사나 대중생활을 통해 보여준 만암 스님의 수행하는 자세는 오늘날까지 백양사에 이어져 내려온다. 그는 늘 운력이나 공양은 대중과 더불어 했다. '반선반농(半禪半農)'으로 표현된 대중노동은 그에게는 수행의 한 부분이었던 것이다. 또한 조석예불과 함께 뒤이어 참선을 하도록 한 백양사의 전통도 그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그 외에도 일반적으로 새벽에만 하는 도량석을 저녁까지 하도록 한 것도 그에게서 비롯된 백양사의 전통으로 오늘에까지 이어지고 있다. 호남고불총림의 결성 한편 만암스님은 1947년 부처님 성도일에 호남일대 20여개의 사찰, 암자, 포교당을 규합하여 백양사에 한국불교 최초로 호남고불총림(湖南古佛叢林)이라는 종합적인 수행도량을 결성했다. 그는 엄격한 계율과 법식을 되찾아 변질된 한국불교를 바로 회복하여 불타의 위대한 광명과 고승들의 석덕(碩德)을 계승하고자 하는 취지에서 호남고불총림을 조직하였는데 호남권을 중심으로 광범위한 호응을 받게 되었다.
불교개혁괴 승단분규 8·15 해방 이후 한국 불교계도 새로운 사회변화의 추세 속에서 좌․우익의 대립으로 점차 복잡한 양상으로 전개되고 있었다. 이런 분위기에서 1948년 당시 교정(敎正)이던 박한영(朴漢永)스님이 입적하게 되자 뒤를 이어 만암스님이 교정(敎正)에 취임하게 되었다. 당시 한국불교는 왜색불교의 잔재로 말미암아 많은 문제와 과제를 안은채 개혁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우선 종명을 조계종으로 환원하고 '교헌(敎憲)'을 '종헌(宗憲)'으로 바꾸었다. 종헌의 내용도 대폭적으로 개정하였다. 그의 평소의 소신대로 승가를 교화승(대처승)과 수행승(비구승)으로 구별하는 과감한 조치를 취한 것이다. 이러한 조치는 비구 측의 다소의 긍정적인 반응이 있었으나 대처 측의 반발은 거셌다. 그리하여 양측이 모인 가운데 1952년 통도사에서 이 문제를 가지고 회의를 갖게 되었다. 종정 만암 스님은 이 회의에서 "그동안 사찰에서 소외되었던 수행승에게 일부 사찰의 운영을 맡기자"고 제의하며 "적어도 3보 사찰(해인사, 통도사, 송광사)만이라도 비구측에 넘겨주자."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러한 제의는 비구측의 환영과 대처측의 거부로 합의점에 이르지는 못하였다. 그뒤 불국사에서 또 한 차례 회의를 가졌으나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이런 와중인 1954년 5월 당시 이승만대통령의 "불교정화" 유시는 비구승 측에게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비구측은 이를 계기로 "불교정화"의 기치를 높이 들고 연일 대회를 갖게 되었다. 그리하여 선학원에서 같은 해 9월 28-29일 전국비구승대표자회의가 열려 종정에 송만암(宋曼庵), 부종정에 하동산(河東山), 도총섭에 이청담(李靑潭), 총무원장에 박성하(朴性夏)를 선출하였다. 그런데 당시 이들은 '정화방법'을 둘러싸고 다소간 갈등을 일으키고 있었다. 즉 만암 스님과 효봉(曉峰) 스님 등은 '정화'는 비구승들이 수도할 수 있는 수행도량을 얻는데 그 목적이 있으므로 점진적으로 이 일을 추진해야 한다고 주장한 반면, 청담스님 등은 이와 같은 좋은 기회는 다시 없으므로 강경하게 이끌고 나가야 된다는 주장을 폈다. 양측은 점차 극단적인 대립양상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시기에 조계종의 종조(宗祖)문제가 제기되었는데 이것은 불속에 기름을 부은 셈이 되어버렸다. 이불화(李佛化), 이종익(李鍾益)을 앞세운 비구측이 조계종 종조를 보조국사(普照國師)로 해야 된다고 주장한 것이다. 이들의 주장에 의하면 정화운동은 단순히 대처측의 절 몇 개를 할애 받거나 또 이들을 절에서 물러나도록 하는 것에 그칠 것이 아니라 잘못된 종통을 바로잡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 주장은 조계종조는 고려의 보조국사(普照國師) 지눌(知訥)이며 태고보우(太古普愚) 법통은 조선중기의 중관해안(中觀海眼)이 위조하였다는 것이다. 이에 이효봉(李曉峰), 하동산(河東山), 이청담(李靑潭) 스님 등이 보조국사(普照國師) 종조설을 지지하고 나서버렸다. 당시 총무원장 이청담(李靑潭) 스님은 이에 대해 성명까지 발표하여 보조(普照) 종조설을 강력하게 주장하였다. 전통적인 태고보우(太古普愚) 법통설을 따르는 만암스님은 "이것은 환부역조(換父易祖)"라면서 정화운동에서 손을 떼겠다고 선언하고 백양사로 내려와 버렸다. 그리하여 같은 해 11월 비구승 측은 스님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하동산(河東山) 스님을 종정으로 선출했다. 비구승 측과 결별한 만암스님은 그 후 백양사에 주석하면서 후학들을 가르치며 보냈다. 그러던 1957년 1월 10일(음력 56년 12월 15일) 세수 81세, 법랍 71세로 만암스님은 열반에 들었다. 떠나시기 7일전에 문도에게 후사를 당부하였다. 입적하던 날 작설차를 마시고 손발을 씻고 새 옷을 갈아입고 11시 30분 "눈이 많이 내려 올해는 풍년이다."라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떠나가셨다. 다비 후에 사리 8과가 출현하자 이를 거두어 백양사와 제주에 봉안하였다. 조선시대에는 국가의 억불책 속에서 민간에서만 전파되던 불교, 조선왕조의 멸망과 함께 닥쳐온 이민족의 지배 속에서 스스로를 재정립해야만 했던 불교, 해방 직후 혼란의 와중에서 스스로도 혼란과 대립에 빠져들었던 불교, 그 모든 시기에 만암 스님은 소용돌이의 중심에 있었으며 수행승의 자세를 견지하고 있었다. "(불교가 발전하려면) 이판(理判, 수행승)과 사판(事判, 교화승)을 분명히 하고 이판(理判)은 선리(禪理)를 탐구하고 사판(事判)은 교화활동에 힘써야 한다."고 한 그의 말은 오늘날의 불교계에서도 되새겨볼 만한 말일 것이다. 글쓴이 이계표 전라남도 문화재위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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