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비, 길을 열다] 파열 그리고 미망(未忘)의 빛, 조선왕조실록을 지킨 선비 게시기간 : 2020-02-04 17:00부터 2030-08-14 12:00까지 등록일 : 2020-02-04 13:40
재단법인 한국학호남진흥원
선비, 길을 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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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인의 이항은 나주 출신 두 문인 나사율(羅士慄)ㆍ김천일(金千鎰)을 통하여 진도의 노수신이 나흠순의 학술을 믿고 따르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물론 나흠순의 명성은 들었겠지만, 『곤지기』를 구해보지는 않았던 듯싶다. 그래도 나흠순이 주자의 학설을 따르지 않음은 분명하여 ‘나정암(羅整庵: 나흠순)은 문장과 박학으로 혹세무민하고 있을 뿐’이라며 도리어 노수신을 꾸짖었다. 노수신은 당혹스러웠다. “주자가 도심은 천리이고 인심은 인욕이라고 하였던 정자의 구설을 미처 개정하지 못하였고, 또한 『중용장구』를 주해하며 천하의 이치가 하늘이 명령한 성으로부터 나오니 성은 도의 본체이며, 성을 따르는 순성(循性)은 도의 작용이라고 하였는데, 왜 나의 외삼촌이신 노선생은 이를 살피지 않고 무조건 거부하는 것일까?” 「인심도심설에 대한 변론 人心道心辨」을 집필하여 태인으로 보냈다. 1559년 봄이었다.1) 이항은 곧장 붓을 들었다.2) “자사(子思)께서 ‘하늘이 명령하는 것을 성(性), 성을 따르는 것을 도’라고 하였으니, 성이 본체이며 도가 작용이다. 나정암이 도심을 본체라고 하고 인심을 작용이라고 한다니, 가소롭다.” 1561년 8월이었다. 한 달 후 노수신이 조심스럽게 답장하였으니 대략 다음과 같았다.3) “정자가 일찍이 정이 발동한 마음 즉 인심만을 말하였다가 훗날 스스로 잘못이라고 하였고 주자 또한 미처 개정하지 못하였습니다. 이 점에 관하여 나정암이 정이 생기기 이전의 마음을 도심이라고 밝혔으니 마냥 매도할 일은 아닙니다. 또한, 선생께서는 도의 발동(發動) 즉 작용만을 말씀하시지만, 도의 적연부동한 본체가 있으므로 비로소 발동하는 것입니다.” 즉 이항이 말하듯이 ‘성’이 본체이고 ‘도’가 작용이 아니라, ‘미발(未發)의 성’이 도의 본체이며 ‘이발(已發)의 정’이 도의 작용이 된다는 것이다. 이후 이항은 두 차례나 편지를 더 보내며 ‘인심과 도심은 리와 기가 마음에서 교차하여 생기는 것일 뿐’ 즉 천리를 따르면 도심이고 인욕[氣]을 따르면 인심이라는 정주의 학설에서 한 치도 물러서지 않았다. 또한, 도심과 인심은 공과 사의 갈림이 있다는 사실을 주장하며 나흠순을 추종하지 말 것을 강권하였다.4) 노수신은 더는 답신하지 않았다. 노수신은 훗날까지 자신의 이기론과 인심도심설을 굽히지 않았다. 1565년 겨울 외척권신 윤원형이 축출되고 배소를 괴산으로 옮겨가는 도중 기대승이 방문하였을 때였다.5) 기대승이 자못 심각하게 물었다. “나정암이 리와 기를 한 물건이라고 주장하였다는데, 고명(高明: 노수신)께서는 리와 기가 한 물건이라 여기십니까? 두 물건이라 여기십니까?” 노수신은 태연하였다. “지난 현인들이 비록 리 혹은 기라 하여 이름을 달리하였지만, 본체가 다르겠습니까?” 리와 기는 일물이며 일체라는 것이다. 기대승이 또한 ‘고명께서는 나정암의 견해대로 인심은 정(情)이라서 위태롭다고 하시는데 어찌하여 그렇습니까?’ 하자, 노수신은 ‘정은 선할 수도 있고 악할 수도 있으므로 위태롭다고 한 것…’ 하다가 말끝을 흐렸다. 이때 노수신은 술이 깊었다. 이항 역시 자신의 견해를 끝까지 가져갔다. 1566년(명종 21) 여름 속리산의 성운(成運), 지리산의 조식(曺植), 거창의 임훈(林薰), 그리고 남언경 등과 함께 경학에 밝고 행실이 올곧은 유일로 선발된 이항이 그해 가을 국왕에게 다음과 같이 아뢰었다.6) “주자가 인심은 형기(形氣)의 사사로움에서 생기고 도심은 성명(性命)의 올바름에서 생겨난다고 하였습니다. 이렇듯 마음속에 인심과 도심 두 가지가 섞여 있으니, 둘 사이를 정밀하게 살피고 전일(專一)하게 지켜야 중도를 잡을 수 있습니다.” 이해 가을 종6품 벼슬을 받은 이항은 지금은 부여군에 속하는 임천 수령으로 나갔다가 반년 만에 신병을 앞세워 사직하고 태인으로 돌아왔다. 1574년 종3품 장악원정(掌樂院正)에 제수되었는데 이때가 76살, 여전히 강건하였다. 을사사화로 함경도 종성에서 18년 유배살고 돌아온 유희춘이 어전에서 ‘이항은 늙어서도 낮잠을 자지 않았다고 아뢸 정도’였다.7) 1576년 6월 이항이 일흔여덟 수로 마감하자, 허엽이 오랫동안 이항의 문하를 출입한 몇 제자가 작성한 행장을 노수신에게 건네며 묘갈명을 부탁하였다. 노수신이 말미에 적었다.8) “그의 도학은 반신성의(反身誠意)를 근본 삼고 주경궁리(主敬窮理)로 요약되는데, 적덕(積德)하는 도구로는 ‘사서(四書)’로 충분하다고 여겼다. 다만 저술은 다른 학자의 글을 답습하거나 중복됨이 없지만, 자가설(自家說)을 너무 앞세운 나머지 옛 선비의 학설과 어긋함이 없지 않다.” 선조의 즉위와 함께 조정에 복귀하였던 노수신은 이때 우의정이었다. 그간 이조판서ㆍ대제학을 거쳤는데, 서경덕ㆍ이황ㆍ조식의 제자거나 유희춘ㆍ허엽을 종유한 이지함(李之菡)ㆍ조목(趙穆)ㆍ최영경(崔永慶)ㆍ홍가신(洪可臣)ㆍ유몽정(柳夢井) 등을 천거하여 관직에 올렸다. 개중에 이항의 문하생이 적지 않았다. 앞서 태인과 진도를 오가며 편지를 전하고 이항의 행장을 작성한 나사율ㆍ김천일ㆍ유몽학(柳夢鶴)ㆍ변사정(邊士貞) 등이었다. 이후 노수신은 영의정을 지내고 판중추부사로 물러나 있던 중, 정여립(鄭汝立)을 홍문관 수찬에 천거하였다는 이유로 파직되고 곧바로 세상을 하직하였다. 1590년 4월, 향년 76세. 7대조가 옮겨간 경상도 상주에 묻혔는데 본관은 8대조까지 살았던 전라도 광주였다. 정여립은 고려 말엽 부자(父子)가 문과에 급제한 전주의 세가에서 태어났다. 6대조 정가종(鄭可宗)은 이색(李穡)에게 ‘자인(子因)’이란 자를 받은 문인으로 예의판서를 지냈으며, 권근ㆍ하륜과 교유가 깊었던 5대조 정수홍(鄭守弘)은 예조참의ㆍ나주목사를 역임하였다. 수령과 경아문의 첨정에 그쳤지만 부친 또한 문과 출신이었다. 정여립도 선조 즉위년(1567) 22살에 백형과 나란히 생원이 되고 3년 후 35인을 선발한 식년문과에서 5위로 뽑혔다. 그러나 벼슬을 벗어나 대대로 살았던 전주, 장가들며 옮겨 살았던 금구의 모악산 자락, 그리고 서실을 갖춘 진안 용담 상류의 죽도(竹島)를 무대로 강학하고, 파주의 이이ㆍ성혼을 종유하며 어느덧 ‘죽도선생’의 명성을 얻었다. 1583년 겨울 이조판서의 소명을 받은 이이가 선조에게 ‘정여립이 남을 업신여기고 다듬어지지 못한 병통이 있으나 많이 배우고 재주가 있어서 추천하였는데, 누군가 헐뜯기라도 하여 낙점하지 않으신 것입니까?’ 아뢰었고, 얼마 후 이조좌랑이 되었다.9) 아마 이때였을 것이다. 정여립은 ‘율곡은 성인이며 사암은 어진 정승’이라 하였다. 사암은 당시 영의정 박순이었다. 그런데 이이 서거 이후 동인이 득세하며 홍문관 수찬으로 나섰을 때는 전혀 달랐다. 어전에서 ‘박순은 간사한 괴수, 이이는 나라를 그르친 소인, 성혼은 간사한 무리들을 부추겨 군부(君父)를 기망하였다’고 배척한 것이다. 결국 선조로부터 ‘이랬다저랬다 하는 형편없는 인물’로 내침을 당하자, 고개도 숙이지 않고 ‘천안(天顔)을 뵐 일이 없을 것’이라며 대전을 나왔다.10) 이때 ‘사서’를 현토ㆍ언해하는 교정청 낭관까지 뿌리치고 내려왔다.11) 실로 정여립의 언행은 파격적이었다. “사마광이 『자치통감』에서 위(魏)의 연호로 편년을 삼았던 것은 실로 직필(直筆)인데 주자가 그르다고 하였으니, 대현의 소견을 후생이 알 바가 아니나, 천하는 공물인데 어찌 정해진 임자가 있겠는가!” 하였고, “요는 순에게, 순은 우에게 전수(傳授)하였으니 성인이 아니겠는가!” 하였다. 주자가 삼국의 정통을 촉한으로 삼았던 것을 힐난하고 성인은 왕위를 세습하지 않았던 옛 사실을 들춘 것이지만, 주자학과 세습군주를 가볍게 여기는 처사로 비쳤음은 분명하다.12) 또한 과거보러 나주의 나덕준(羅德峻) 형제에게는 “그대들은 쓸 만한 재주로 어찌 쇠망한 세상에 시험을 보려 하는가? 몇 년 지나면 마땅히 태평할 것이니 그대들은 아직 기다리라!” 유세하였다.13) 이러한 거침없는 논설에 솔깃하여 왕래한 선비가 적지 않았다. 한편 반상(班常)ㆍ양천(良賤)을 아우르고 여러 고을 무사까지 끌어들인 대동계(大同契)가 1587년 2월 남해안에 왜구가 침범하였을 때 크게 위용을 과시하였다. 그때 정여립에게 군마를 조달하도록 당부한 전주부윤이 서경덕에게 배우고 이항에게 ‘비은(費隱)의 도’를 질의하였던 남언경이었다. 이러한 정여립이 1589년 10월 황해감사의 고변으로 역모로 몰리며 진안 죽도로 망명하였다가 그곳에서 목숨이 끊겼다. 그의 죽음이 자결인가, 피살인가는 지금도 설왕설래가 있지만 죽음 뒤의 정여립의 집에서 압수된 편지, 죽이지 않겠다는 유혹인지 무서운 고문에 허물어졌던지 잡혀온 사람들의 공술로 숱한 사람들이 고문 받고 죽어나갔다. 그간 동인과 서인의 일진일퇴에서 은원에 얽힌 고발도 한 몫을 하며, 명망 높은 동인계 조사(朝士)들이 쫓겨나고 목숨을 빼앗겼다. 아울러 고을에서 정여립과 마주치고 왕래가 있었던 사람들도 허망하게 갇혔고 죽어나갔으니, 그해 겨울 그리고 봄여름 전라도는 허망한 피바람에 검붉었다. 그런 중에도 정여립을 처음은 따랐지만 나중에는 끊었다는 증거가 있으면 살아났고 개중에 포상으로 벼슬을 받는 사람도 있었다. 고창 살던 유생 오희길(吳希吉, 1556∼1625)이었다. 오희길은 22살에 김인후와 이항의 문인이던 장성 살던 기효간(奇孝諫)에게 배우다가 27살에 정여립을 찾아가서 깊이 빠져들며 편지를 주고받았다. 결국 옥사가 일어나며 옥에 갇혔는데, 다행히 정여립의 집안에서 ‘이이를 나라를 그르친 소인으로 배척한 정여립의 잘못을 규탄한 절교 편지’가 발견되어 풀려났다. 정여립이 남에게 받은 편지를 모두 간직해서 그 때문에 죄를 입은 자가 많았지만,14) 정여립이 잘 간수한 편지 덕분에 오희길은 살아났고, 선조로부터 ‘호남에 사람이 있다 南中有人’의 칭찬을 받고 황해도 개풍에 있던 정종의 능침을 지키는 후릉 참봉까지 받았다. 그리고 1591년 5월 태조의 영정을 모시고 근처에 전주사고가 있던 경기전 참봉으로 옮겼다. 1592년 부산에 상륙한 일본군이 파죽지세로 경부선 따라 한양을 점령하고 평안도와 함경도로 진격하였을 때, 이순신이 바다를 지켜내며 한숨을 돌린 전라도의 수부 전주를 금산의 왜적이 넘보았다. 그간 관군을 이끌고 북진하다가 왜적에 막혀 감영으로 돌아왔던 감사 이광(李洸)은 다급하였다. 왜적이 전주를 침범하면 태조의 영정은 물론이고 성주사고ㆍ충주사고가 불탄 것처럼 전주사고 또한 온전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때 경기전 참봉 오희길이 내변산 바닷가 산중보다는 ‘많은 것을 감춘’ 내장산(內藏山)을 태조 영정, 왕조실록 등을 옮길 후보지로 건의하였고, 태인의 늙은 선비 안의(安義, 1529∼1596)와 손홍록(孫弘祿, 1537∼1610)이 인근 장정과 노복 30여명을 이끌고 나섰다. 이들은 전주사고의 ‘왕조실록’과 『삼국사기』 『고려사』 등을 60여 궤짝에 포장하고 수십 마리 말에 나눠 싣고 은봉암(隱峰庵)에 옮기고 태조 영정과 제기(祭器) 등을 용굴암에 숨겼다. 그래도 안심이 되지 않아 내장산 가장 높고 깊은 비래암(飛來庵)에 잠갔다. 이들은 1592년 6월 22일부터 1593년 7월 8일까지 내장산 깊은 곳에서 불침번을 서면서 실록 등을 지켜냈고 이후 아산, 강화 등으로 봉안하였다. 이때의 역정을 안의가 『수직상체일기(守直相遞日記)』에 담았다. 안의(1529∼1596)는 태산과 안의를 태인으로 합할 때 관아를 증축하였던 안기(安起)의 고손으로 『용비어천가』를 지은 안지(安止)가 종고조가 된다. 본관은 탐진, 선대는 김제에 살았는데 부친이 태인 옹동으로 이사를 왔다. 평소 ‘망언ㆍ거짓ㆍ분노ㆍ주색에 빠지지 말고 남의 집에 간섭하지 않고 친족을 홀대하지 않아야 한다는 팔물(八勿)’을 신조로 살며 물재(勿齋)로 자호하였다. 또한 자식들에게 ‘벼슬 없어도 나라의 근심을 나누고, 기구하고 박복한 운명을 탓하지 않으며, 곤궁하여도 걱정하지 않고 안빈낙도할 것’을 가르쳤다. 일찍이 이항에게 배웠다.15) 손홍록(1537∼1610)은 『동국통감』 신편에 참여한 손비장(孫比長)의 증손으로, 태인 칠보에 살며 12살부터 이항에게 배웠다. 태조 영정과 왕조실록 등을 강화를 거쳐 의주 행재소 그리고 영변의 묘향산 보현사까지 봉안하였는데, 국가의 장례에 필요한 물품을 제작 관할하는 귀후서(歸厚署) 별제(別提)를 제수 받고 ‘중흥6조’를 상소하였는데 전문이 남아 있지 않지만, 말미의 ‘민유방본(民惟邦本)’ 구절이 전한다. “백성은 나라의 근본입니다. 지금 7도의 백성이 전부 유망하고 오직 전라도만 겨우 잔폐(殘廢)되지 않아 국용과 군수, 명군의 양곡을 대고 있으니 백성은 고통을 견뎌낼 수 없고 사족까지 유리할 지경이니 각별히 구호하여 나라의 근본을 안정시키는 것이 급선무일 것입니다.”16) 안의와 손홍록은 당시 칠보의 부호로서 흉년에 이웃 구제에 재물을 희사하고 또한 왜란이 일어나자 많은 군량을 기부하였을 뿐만 아니라 자신이 장성 남문 창의에 가담하였던 김후진(金後進)과 함께 태인 칠보의 남천사(藍川祠)에 배향되어 있다. 김후진(1540∼1620) 또한 이항의 제자였다.17) 그런데 길 건너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된 무성서원은 최근 찾는 사람이 조금 늘었지만 남천사는 너무 쓸쓸하고 이항을 모신 북면 보림리 남고서원(南皐書院) 역시 스산하다. 1) 盧守愼, 『穌齋集』 內集 下篇 「人心道心辨」
2) 『소재집』 내집 하편, 「與盧寡悔書一齋」; 『일재집』 「與盧寡悔守愼書」(1561.8.21) 3) 『소재집』 내집하편 「奉答一齋先生書」(1561.9.21) 4) 『일재집』 「與盧寡悔書」(1561.12.20) 및 「與盧君書」(1563.8.29) 5) 『양선생왕복서』 권 2, 「선생께 올리는 편지 先生前上狀」(1566.5.1.); 『고봉집』 권 3, 「선생의 문목에 답함 答先生問目」. 6) 『명종실록』 32권, 명종 21년 5월 23일 및 33권, 명종 21년 9월 12일. 7) 『선조실록』 8권, 선조 7년 7월 13일 8) 『소재집』 권9, 「一齋先生李公墓碣銘」 9) 『선조실록』 17권, 16년(1583) 10월 22일; 『癸未記事』 11월 19일 10) 『선조수정실록』 19권, 18년(1585) 4월 1일. 11) 鄭介淸, 『愚得錄』 부록 「困齋先生事實」 ‘을유(1585) 6월’; 윤선도, 『고산유고』 권3상, 「國是疏」(1658.6) “교정청에 종사할 때에 마침 정여립과 공석(公席)에 앉아 함께 교정을 하고 10여 일 만에 즉시 임하(林下)로 돌아왔다.” 12) 안방준, 『은봉전서』 권5, 「기축기사」 13) 『선조실록』 23권, 22년(1589) 12월 14일. 14) 『선조수정실록』 23권, 22년(1589) 12월 1일 15) 黃胤錫, 『頤齋遺藁』 권17, 「勿齋安公行狀」 16) 楊應秀, 『白水集』 권15, 「寒溪孫公行狀」 17) 『이재유고』 권19, 「遠慕堂金公行狀」 글쓴이 이종범 (재)한국학호남진흥원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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