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명시초대석] 작법으로 읽는 한시 절구(3) 옛 그대로[依舊] 게시기간 : 2020-02-06 07:00부터 2030-12-03 01:00까지 등록일 : 2020-02-05 16:42
재단법인 한국학호남진흥원
명시초대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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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천(山川)은 의구(依舊)하되 인걸(人傑)은 간 데 없다. 고려 말의 야은(冶隱) 길재(吉再)가 지은 것으로 전하는 유명한 시조의 한 구절이다. 의구라는 말은 이처럼 오래전부터 우리 생활 속에서 익숙하게 사용되던 시어이다. ‘의구(依舊)’는 ‘여전하다.’, ‘변함없이~남아 있다.’는 의미이다. 한시 절구의 3구나 4구에 자리하는 게 정격(正格)으로, 모든 것이 사라지거나 변화하여 아쉬워하던 차에 옛날의 경물(景物)이 변함없이 남아 있어 반갑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그러나 이는 표면적인 것이고, 정작 이 시어를 사용하면 현재의 슬픔이나 아쉬움이 더욱 강조되는 효과가 있다. 특정한 경물이 그대로 남아 있어 기쁘기는 하지만, 한 편으로는 그 외의 다른 것들은 사라졌다는 것을 은연중에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시의 저자 양경우(梁慶遇, 1568~?)는 조선 선조, 광해조의 문신이자 시인으로, 자는 자점(子漸), 호는 제호(霽湖), 점역재(點易齋)이고, 본관은 남원(南原)이다. 고향인 남원에서 사촌(沙村) 장경세(張經世)에게 학문을 배웠고, 『주역(周易)』에 조예가 있었다. 약관의 나이에 부친인 의병장 양대박(梁大樸)을 보좌하여 고경명(高敬命)이 이끄는 의병 활동에 참여하여 공을 세우기도 하였다. 벼슬은 해미현감(海美縣監), 장성현감(長城縣監) 등 말직에 머물렀지만, 시에 매우 능하여 당대 조정의 명사들과 교유가 많았다. 명(明)나라 사신 주지번(朱之蕃)이 왔을 때 원접사 유근(柳根)의 종사관으로 차출되었고, 이후에도 몇 차례 사신 접대에 차출되었을 정도다. 조선 한시사(漢詩史)에서 중요한 저술로 평가받고 있는 『제호시화(霽湖詩話)』에는 시단의 일화를 기록한 것 외에도 시에 대한 제호의 이론을 피력한 것들이 들어 있어 그의 시적 성취를 살펴볼 수 있다.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은 『제호집(霽湖集)』의 서문에서 당시 사람들이 제호의 시적 위상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실감이 나게 묘사하고 있다. “그의 시 한 편이 발표될 때마다 호사자(好事者)들이 서로 앞다투어 전해가며 외웠고, 당대 문단의 명사들이 모두 자신을 낮추고 교유하였다.” 광해군 때 인목대비(仁穆大妃)의 폐서인(廢庶人) 문제로 아우인 양형우(梁亨遇)가 항소(抗疏)하여 유배되자, 관직을 버리고 물러나 제암(霽巖)에 집을 짓고 은거하였다. 이 시가 지어진 정확한 연도는 알 수 없다. 시에 나오는 지명도 애매하다. 시에서 언급한 내용이 지칭하는 바가 무엇인지도 분명치 않다. 시의 내용을 살피기 전에 먼저 이런 사실에 대한 확인이 필요할 듯하다. 일단 제목의 송산(松山)은 경기도 양주(楊州)의 송산을 가리킬 확률이 높다. 우계(牛溪) 성혼(成渾)의 『우계집(牛溪集)』 속집(續集)에 실린 「정사조에게 주다[與鄭士朝」라는 편지에, “남원의 양경우(梁慶遇)가 양주(楊州)의 송산(松山)에 피란 와서 있던 차에”라는 말이 보이기 때문이다. 그럼 송산은 시인과 어떤 인연이 있는 것일까? 시인이 지은 또 다른 시 「성 동쪽에서의 저녁 조망[東城晩望]」이라는 시에 보면 이런 구절이 보인다.
그 주석에는 “외구(外舅)의 별서(別墅)가 송산(松山)에 있는데, 10년 전에 책 보따리를 싸 들고 가서 배웠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구씨는 보통 외삼촌을 가리킨다. 주석의 외구는 보통은 처부(妻父), 즉 장인(丈人)을 가리키지만, 외삼촌을 가리키는 말로도 쓰인다. 시인의 외가는 고령신씨로, 외조부는 부사직(副司直)을 지낸 신지(申漬)이다. 신지는 신숙주(申叔舟)의 손자인 신복순(申復淳)의 측실 소생으로, 동복형 신혼(申渾)외에 정실 소생의 이복형제인 신영(申泳), 신탁(申濯), 신열(申洌), 신황(申滉) 등 4인의 형이 더 있었다. 따라서 이 시에서 말한 외숙부가 누구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이십 년 인사(人事)’의 ‘인사’는 벼슬살이를 말한다. 30살에 참봉을 지내고 있었고, 그 해에 별시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나선 것을 보면 이 시가 지어진 것이 약 50세 즈음이 아닌가 추정해 볼 수도 있지만 정확한 것은 아니다. 46세 때 박응서(朴應犀)의 고변으로 잡혀가 국문을 받은 이후의 허망한 상황을 표현한 것이 아닌가 조심스레 추정할 뿐이다. 삼봉(三峯)은 백운대, 인수봉, 만경봉으로, 삼각산(三角山), 즉 북한산(北漢山)을 가리킨다. 한양의 진산(鎭山)으로, 한양과 양주에 걸쳐 뻗어 있기 때문에 도성 동쪽 동대문을 나서서 양주 송산으로 가는 길에서 내내 볼 수 있는 산이다. 위의 내용을 가지고 보면, 이 시는 시인이 어느 날 자신의 외가 별장이 있는 송산으로 찾아가면서 지은 것이다. 첫 구에서 오랜 벼슬살이에서 지친 마음을 덧없다는 말로 표현하고 있다. 둘째 구에서는 송산에서 외숙에게 수업하던 일을 떠올리는데, 한바탕 꿈이 되어 버렸다는 표현은 외숙부가 현재 살아 있지 않음을 간접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앞에서 소개한 「성 동쪽에서의 저녁 조망[東城晩望]」이라는 시에서 외숙부에 대해 절절한 마음을 토로한 것을 보면 스승이자 외친을 향한 마음이 평소에 각별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어두운 느낌을 주는 앞의 두 구는 마지막 구를 위한 일종의 복선에 해당한다. 시인들은 시에서 단순히 공허함이나 슬픔만을 계속 강조하는 것은 시적 완성도를 떨어뜨린다. 모든 것이 변하고 덧없이 사라져 버린 상황에서 변함없는 대상을 만나게 되면 굳이 슬픔을 강조하지 않더라도 절로 슬픔이 배가되는 법이다. 여암(旅菴) 신경준(申景濬)이 시를 짓는 법을 적은 「시중필례(詩中筆例)」라는 글에서 강조한 내용이다. 마지막 구에서 삼각산이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보인다고 한 것은 이런 기법을 사용한 것이다. ‘의구’라는 시어의 본래 용법이 적절하게 사용된 사례이다. 얼마 전 민족의 최대 명절 중 하나인 설이 지나갔다. 이른바 ‘옛 것’의 대표적인 사례는 우리의 전통문화이고, 그 전통문화의 대표적인 모습은 예법, 그 중에서도 제례이다. 그 제례를 옛 그대로 유지하는 문제는 사회적으로 많은 갈등을 야기하고 있다. 시댁과 며느리의 갈등을 넘어, 남녀의 갈등으로까지 확대되고 있다. 그렇다고 어느 한쪽을 나무랄 수도 없는 노릇이다. 옛날에는 당연시되던 명절, 제사가 이제는 부담으로 다가올만큼 시대는 급하게 변해가고 있기 때문이다. ‘의구’. 옛 모습의 보존이라는 면에서 긍정적이기도 하지만, 옛날 그대로인 것이 반드시 좋은 것만은 아니다. ‘의구’의 부정적인 면은 답습이다. 옛 것을 그대로 지키려고만 하면 새로운 변화나 진보를 기대하기 어렵다. 인순도일(因循度日)은 그대로 답습하며 세월을 보낸다는 뜻이다. 인시제의(因時制宜)는 상황에 맞게 대처한다는 뜻이다. 어느 것을 택할 것인가? 옛 것의 장점을 살리면서 시대 상황에 맞게 발전적으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을 찾는 것, 현대를 살아가는 지식인들의 딜레마라고 할 것이다. 글쓴이 권경열 한국고전번역원 책임연구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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