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지의 초상] 재일본 항일 비밀결사를 조직한 양회종(梁會鏦 1919 ∼ 1993) 게시기간 : 2024-05-29 07:00부터 2030-12-17 21:21까지 등록일 : 2024-05-28 14:26
재단법인 한국학호남진흥원
미지의 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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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머리말
필자는 지난 4월 중순 광복회 전남지부에서 추진한 해외 독립운동 사적지 답사를 회원들과 함께 다녀왔다. 이번 답사는 재일본 항일 독립운동의 거점이었던 일본 도쿄였다. 재일 유학생의 독립운동 거점이었던 도쿄대학교와 와세다 대학도 찾았다. 와세다 대학을 찾았을 때 마침 대학 응원부가 밴드까지 동원하여 신입생 환영회를 하고 있었다. 일본 군국주의 시대의 교복을 입은 응원단장이 외치는 구호에서 군국주의 잔재가 저변에 남아 있음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일제강점기 민족 독립운동의 커다란 줄기의 하나는 재일 유학생 출신이었다. 이 시기(1910 ∼ 1942)에 조선인 186,321명이 일본에 유학을 왔다. 근대적인 고등교육을 받은 신시식층의 대분을 차지하는 조선 유학생 가운데 상당수는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예컨대 완도 지역 농민운동은 이들 유학생들이 이끌었다. 특히 1919년 4월 상해의 프랑스 조계에서 출범한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적지 않은 재일 유학생 출신들이 참여하였다. 대표적으로 와세다 대학 출신으로 재일 유학생 조직인 ‘학우회’를 이끌었던 신익희는 임시정부의 내무총장을 역임하였고, 1919년 3월 5일 학생들이 주도한 경성 3·1 만세운동을 이끌고 임시정부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경성의전 재학생 한위건 또한 와세다 대학 출신이다. 영암이 낳은 걸출한 독립운동가이자 정치가인 김준연은 도쿄대 출신이다. 1929년 광주학생운동으로 셀 수 없는 학생들이 투옥되거나 퇴학을 당하였다. 이들 가운데 적지 않은 이들이 일본 유학길에 나섰다. 이들은 그곳에서 노동운동을 하거나 비밀리에 결사를 조직하여 항일운동을 이어가고 있었다. 1928년 조선공산당 사건 때 일본으로 망명을 온 광주 사회주의 운동의 태두 강석봉이 재일 유학생을 중심으로 비밀조직을 만들려다 1933년에 체포된 것도 이와 관련이 있다. 광주학생운동을 촉발하고 1931년 2월 일본으로 망명왔던 이경채는 역시 같은 학생운동 동지로 일본에 건너온 문두재, 양태성, 유병후, 윤창하, 김보섭 등과 비밀리에 모임을 하며 독립운동의 기회를 엿보다 체포되어 온갖 고문을 당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1930년대 들어 재일 유학생들은 1920년대에 일본 사회에 전파된 사회주의 사상의 영향으로 유학생 조직의 성격을 둘러싼 갈등이 심화되고 있었다. 이러한 갈등이 있었음에도 흉폭화되어가는 일본 군국주의에 맞선 재일 유학생들의 저항도 갈수록 치열해졌다. 이 가운데 광주 전남 출신 재일 유학생들이 주축이 되어 결성된 ‘라빗트 구락부’와 ‘성도회’를 아는 이 거의 없다. 라빗트 활동은 국내에까지 조직을 확장하려 한 사실이 당시 언론에서 확인되고 있다. “전남 경찰부에서는 지난 8월 초순에 동경으로부터 광주 농학교 3학년생 김모에게 반전적 서신이 와 있음을 발견하고 계속 수사한 결과 동경에 ‘라비트구락부’가 표면한 법적 조직을 하고 있는 이면으로 인민전선 운동을 하고 있음을 탐지하자 전남 지방과 동경 등지에서 청년 수십 명을 검거하여 취조중이었는데 그 후 취조 일단락으로 9일에 치안유지법 위반 및 육해군 형법 위반의 죄명으로 다음 5명을 광주 검사국에 송치하고 그밖의 다수 연루자는 훈계 석방하였다 한다.
문경호(평북 정주) 양회종(화순 이서, 동경 명륜중학생) 이종석(영암 금정, 동경 연교학생) 김장곤(나주 다도)” 라빗트 구락부나 성도회는 일본 경찰 자료에도 확인되고 있다. 이 단체를 조직한 핵심 인물이 양회종이다. 재일 학생 항일운동을 이끈 양회종은 해방 후 전남 교육 발전에 이바지하였다. 그럼에도 그에 대한 평가는 그리 넉넉하지 못하다. 필자의 고등학교 재학 시절 교장 선생이었던 그를 ‘양길동’이라고 부르거나 “뺨 한 대 맞고 서훈을 받았다”라고 하여 그의 독립운동 사실을 폄하한 얘기를 꽤 들었다. 그러나 필자가 독립운동사를 정리하는 과정에서 발견한 그의 활동은 소문과 동떨어져 있음을 알게 되었다. 역사에서 ‘사실’과 ‘진실’을 구별하는 것이 쉽지 않음을 알게 한다. 2. 재 일본 비밀결사 라빗트 그룹 활동 화순군 이서면 영평리에서 태어난 양회종은 이서공립보통학교 6학년 재학 당시인 1936년 동맹 휴학을 주도하였다. 어린 학생들에게 심한 차별을 하고 또 농촌 진흥, 자력갱생이라는 미명 아래에 학과 수업보다도 노역에 치중한 학교 당국의 처사에 반발한 것이다. 일본인 교장인 반총효차랑(飯塚孝次郞)을 쫓아내는 데 주도적 역할을 하였던 양회종은, 교사에게 뺨을 맞았다. 훗날 그가 뺨 한 대 맞고 서훈을 받았다는 말이 나온 배경(?)이 아닌가 한다. 양회종이 어릴 때부터 항일의식을 강하게 지녔던 것은 보통학교 4학년 때 광주학생독립운동에 가담하여 퇴학당한 종형 양회순의 활동에 감화받으면서였다고 한다. 이 일 때문에 국내 상급학교 진학이 어렵게 되자 일본에 건너간 그는, 1936년 4월 동경에 있는 정칙(正則)중학교에 입학하였다. 그의 항일의식은 일본에 와서 강렬해졌다. 공부방 하나 얻는데도 민족적 차별을 당했다. 항상 형사들이 미행했다. 1920년대 조선 유학생들이 증가하자 일본 정부는 이들을 감시하는 부서를 경찰서 내에 별도로 두었다. 그가 평소 일기장에 기록해 둔 일본과 일본인에 대한 비방 글이 경찰에 발각되어 동경 우에노 경찰서에 약 40일 구금되었다. 양회종은 이 일로 정칙중학교에서 퇴학당하였다. 퇴학 후 1939년에 일본 지바현 소재의 명륜중학교에 다시 들어간 그는 항일단체인 ‘라비트 그룹’ 간행물에 ‘전쟁과 평화’라는 제목의 항일적인 기사를 기고하는 등 항일 운동을 멈추지 않았다. ‘라비트 그룹’은 동경에 있는 한인 유학생들이 조직한 독립운동 단체로서 표면상 문학을 좋아하는 동지의 모임으로 위장하였다. 회장은 중산(中山)이고, 총무는 조원경, 회원은 손호주, 이종석, 양회종, 안혁주, 백남순, 김강현, 김삼봉 등 33명이었다. 그 강령이라고 볼 수 있는 ‘우리의 신조’는 다음과 같았다. 1. 회원은 인격 도야, 학술 연마에 힘써 친화 협동한다.
2. 우리 회원은 조상의 명예를 존중, 선양한다. 3. 우리 회원은 민족 정의로 사명을 달성한다. 그의 명륜중학교 재학 사실은 앞서 언급한 신문 자료에서 확인되고 있다. 그는 1939년 8월 2일 여름방학을 맞아 고향에 돌아오다 관부연락선 선상에서 일본 경찰에게 소지품 검사를 받았는데 그가 쓴 ‘전쟁과 평화’라는 기고 글이 발각되어 곤욕을 치렀다. 우여곡절 끝에 고향에 돌아온 양회종은 피신하였으나, 8월 7일 일본 경찰로부터 통보받은 광주경찰서 경찰에 의해 체포되어 일본에서의 활동, 배후 등을 조사하였다. 광주경찰서 유치장에 갇혀 6개월 동안 받은 회유, 협박, 고문 등을 이겨냈다. 이때 체포된 이들은 양회종 외에 손호주, 이종석, 그리고 김장곤 등이었다. 이듬해 1940년 2월 11일 기소, 송치되어 광주 형무소 미결감으로 옮겨져 재판에 회부될 때까지 수개월 동안 미결수 상태로 조사를 받았다. 3개월 후 이뤄진 재판에서 집행유예를 받고 5월 석방되었다. 물론 학교에서는 이미 퇴학 조치가 내려져 있었다. 그런데 그가 작성한 이력서에는 1936년 4월 1일 도쿄 스루가다이 상업학교를 입학하여 1941년 3월 25일 졸업한 것으로 되어 있어 약간 차이가 있다. 이는 아마도 양회종이 학교에서 퇴학당하였던 시기를 학교 졸업했다고 착각하였을 수 있다. 하지만 그가 메이지대학에 입학한 것을 볼 때, 퇴학당한 후 다시 복학조치가 내려진 것은 아닌가 한다. 여러 차례 퇴학을 당하고, 구속까지 당하면서 양회종의 항일 의지는 더욱 강렬해졌다. 그는 나라의 독립을 위해서는 힘을 기르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함을 잘 알고 있었다. 그가 학문의 길을 포기하지 않는 까닭이다. 그리하여 1941년 4월 5일 메이지대학 법학과에 입학하여 이를 악물고 학업에 정진하였다. 그가 법학과에 진학한 것은 불쌍한 민족의 대변인이 되고자 함이었다. 그는 법학과 재학 시 법률토론회에 자주 나가 두각을 나타냈다. 그가 입학한 1941년은 일본 군군주의가 파국으로 치닫고 있던 시기였다. 그해 12월 5일 일본은 미국의 하와이 진주만에 있는 태평양함대를 공격함으로써 세계대전을 일으켰다. 이미 일제는 전쟁을 예비하고 1938년 4월 1일 식민지 조선 및 대만, 사할린에 적용한 ‘국가총동원법’을 제정하여 인적, 물적 자원을 총동원할 수 있는 법적 수단을 만들어 놓은 뒤였다. 초기 기습 공격에 성공하여 전쟁의 주도권을 장악하였으나 1942년 미드웨이 해전 패배로 점차 미국에 밀리기 시작하자 일본은 더욱 광분하고 있었다. 한편 양회종은 재학 중에 법률 연구실 고문이던 전상우평(田上宇平) 변호사가 조선총독부 내 국민총력조선연맹 총무부장에게 추천하여 취직이 확정되었다. 1943년 9월 졸업하자마자 귀국하여 조선 민중을 위한 봉사를 하려고 하였다. 그런데 시모노세키항으로 오는 열차 안에서 한국 출신으로서 그해 전문학교 이상 졸업자 또는 재학생은 학도병으로 출정해야 한다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들었다. 급히 귀국하여 몸을 피신하려 했으나 관부연락선에서 일본 형사들에게 붙잡혀 학도병 지원을 강요받았다. 그는 귀국하여 지원하겠다는 핑계를 대고 일단 그곳에서의 강제징병을 모면하였다. 귀국 후 양회종은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고 만주 두도구(頭道溝)로 피신했으나, 그곳에서 체포되어 본국으로 송환되었다. 그런데 당시 신문에 그의 이름이 포함된 ‘관부연락선 상에서 자진하여 학병에 지원한 16명’이라는 제목의 기사가 나왔다. 일본 천황에게 충성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는 선동적 찬양 기사도 실려 있었다. 기사 제목으로 볼 때, 현장에서 강제 징집되는 것을 피하려고 거짓 지원 희망원을 낸 사실을 일제가 대대적으로 홍보하지 않았나 짐작된다. 국내에 강제 송환되자마자 바로 소집 영장이 나왔다. 양회종은 신분증을 변조하여 철도원으로 위장하고 일본으로 다시 피신하였다. 이러한 것이 아마 후일 그에게 ‘양길동’이라는 별명이 나오지 않았을까 한다. 일본에 건너간 양회종은 그의 고향 후배이며 메이지대에 재학 중이던 박진철의 하숙에 머물렀다. 이들은 바야흐로 전쟁이 막바지에 이르러 독립할 절호의 기회가 왔다는 데 인식을 함께 하고, 항일운동을 체계적으로 전개하자고 다짐하였다. 그리하여 일본의 한국에 대한 식민지 정책, 특히 민족차별, 한인 학생에 대한 일제 경찰의 감시 미행, 우리 말과 한글의 말살 문제 등을 쟁점으로 삼아 분석, 비판을 거듭한 두 사람은 우선 동지를 규합하여 세력을 키우는 것이 중요하다는 데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동지 모집 일을 담당한 양회종은 지바현으로 근거지를 옮겼다. 그곳에는 비행장 건설 공사가 이루어지고 있어 한국인 징용 근로자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곳에서 그는 동포들과 함께 생활하며 동지들을 모았다. 그러나 일본 경찰이 이미 그를 감시하고 있음을 눈치채고 피신하였다. 그는 사이타마현 칠본목촌(七本木村)에 있는 웅곡(熊谷) 항공대로 거처를 옮겨 행상으로 위장하여 도쿄까지 왕래하며 적극적으로 동지를 규합하는 활동을 하였다. 후카나와에 있는 기나이 사진관을 운영한 김종우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그가 졸업반 앨범 편집위원으로 맺은 인연 때문이었다. 양회종이 졸업 앨범에 서울 창경원과 경주 불국사를 소개하였다 하여 일본 헌병대가 문제를 삼았다. 이때 양회종은 김종우의 누이동생 김경자를 만났는데 훗날 그녀와 결혼을 하게 된다. 1944년 6월 양회종은 도쿄에서 우리 동포가 경영하고 있는 군수공장인 동아제작소에 취직했다. 그 공장 전무로 있던 대학 동창 이강일이 취업을 알선한 것이다. 그는 이강일이 거주하는 판교장(板橋莊) 아파트로 숙소를 옮겨 아지트로 삼았다. 3. 항일 비밀결사 성도회 조직 이에 앞서 1944년 5월 9일 판교장 이강일의 아파트에서 그동안 규합한 동지 백남식·김병수·박진철·안혁주·이강일·남미숙·박성구·안성순·홍영숙·김강현·손호주 양회종 등 12명이 모였다. 이 자리에서 모임을 독서회로 가장한 성도회(醒道會)를 결성하였다. 이들이 왜 ‘성도회’라고 모임 이름을 정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광주학생독립운동의 구심점 역할을 한 성진회와 명칭이 비슷한 것으로 보아 성진회의 독립 의지를 계승하겠다는 의도에서였다고 짐작된다. 이 자리에서 회장으로 양회종, 총무에 김강현이 선출되었다. 회장으로 선출된 양회종은 다음과 같이 행동 강령을 발표했다. 1. 앞으로 우리 성도회는 독서 친목회를 위장하고 구국 투쟁 활동을 벌인다.
2. 조국 광복을 위한 구국 신념을 굳게 한다. 3. 활동을 하다가 일본 관헌에게 피검되더라도 끝까지 투쟁한다. 12명 전원은 그 자리에서 단지(斷指)로 피를 뽑아 엄숙히 맹약하였다. 회원들은 결의를 굳게 하고 각자의 역할 수행에 들어갔다. 도쿄 일대의 대학가를 비롯하여 동포가 경영하는 흥아식당, 산해장 등에서 동포 학생을 상대로 하여 민족 독립사상을 고취시켜 학도병 징발을 거부하도록 하는 선무 운동을 전개하였다. 한편 양회종은 미쓰비시 계열의 군수공장에 근로 동원된 동지 박진철을 통해 그 공장의 비밀문서를 입수하여 폭탄을 제조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이는 양회종이 지향하는 독립운동이 단순히 계몽운동이 아닌 무장 투쟁까지 계획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던 중 그의 활동이 노출되어 1944년 9월 12일 소곡(小谷)이라는 일본 헌병에 체포되어 스가모(澁谷) 헌병대로 끌려갔다. 이곳에서 59일 동안 갖은 고문과 학대를 받았다. 그 헌병대 설치 이후의 제일 큰 사건이며 장기간의 구류였다. 일본 헌병대는 양회종, 박진철을 3개월이나 미행하고 끈질기게 추적하여 이들의 구체적 범죄사실을 잡으려 하였다. 1944년 11월 9일, 양회종과 성도회 동지 일행은 지옥 같은 스가모(澁谷) 헌병대로부터 소압(巢鴨) 형무소로 이감되었다. 감방의 배치 상황은 양회종 4사(舍) 1층 55방(784번), 박진철 6사 2층 26방(978번), 백남식 2사 2층 53방(369번), 김병수 6사 1층 18방(793번), 박성구 2사 1층5방(57번) 등으로 분산되어 있었다. 이때 체포된 사람은 11인이었다. 입감된 날 정황이 동료 박진철의 증언 『조국의 산하』에 담겨 있다. “초겨울의 차가운 날씨에 형무소에 갇힌 이들은 팬티도 벗기고 ‘훈도시(일본인들이 팬티 대신 쓰는 것)’ 한 장씩 걸치게 하였다. 점심 때가 지나도 밥을 주지 않고 굶기자 양회종은 이에 항의하였다. 그러자 간수가 매질하였다. 대꾸 한마디에 곤장이 세 대였다고 한다. 곤장을 맞으면서도 양회종은 굴복하지 않고 항의를 계속하였다. 매듭이 있는 로프 줄이 훈도시 뿐인 알몸에 차르르 휘어감길 때마다 회종은 숨이 끊겼다. 뱀 같이 살에 줄이 서고 얼룩투성이다.”
양회종의 강한 신념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형무소로 옮겨진 이틀 후인 11월 11일에 동경 형사지방재판소 검사국으로 끌려갔을 때 예심검사 다나카가 쓴 조서의 일부이다. 박진철이 회고한 내용의 일부이다. “(전략) 피고 박진철은 소화 19년(1944년) 3월 7일 하숙집에서 그전부터 친교가 두텁고 또 고향의 선배인 양천회일(梁川會一, 양회종의 창씨)이 나의 하숙집을 찾아왔다. (중략) 양회종을 회장으로 하고 이하 12명을 회원으로 하는 성도회는 독서회를 가장한 조선 민족 독립운동의 뿌리 깊은 조직으로 하여 일본 정부 타도를 꾀하고”
양회종의 애국심에 감화받아 독립운동을 했을 뿐인데 일본정부 타도라는 죄명을 씌우자 박진철은 이를 부인하였다. 그러자 검사는 양회종의 조서를 읽었다. 역시 박진철의 글에 있는 내용이다. “양회종은 아주 무서운 과거를 가진 놈인데 네가(박진철) 그걸 모른다 해서야 되겠는가. …… 양회종은 보통학교 6학년 때부터 앙큼한 사상을 품고 일을 저지르기 시작한 자로서 당시 교장이 ‘자력갱생, 농촌진흥’이라는 미명하에 수업 충실을 기하지 않고 실습지 전답 경작에만 힘쓴다고 학급 간부들과 모의 끝에 3일간 동맹 휴학을 단행한 사실, 그후 정칙(正則) 중학교 2학년 때 우에노 사까모도 경찰서에서 일본정부와 일본사람을 비방한 내용의 일기장 사건으로 40일 간 유치당한 일, 거기서 퇴학을 맞고 명륜(明倫)중학으로 학교를 옮겨 라빗트 구락부라는 비밀결사에 가담하여 활동하다가 여름방학에 귀가 중 관부연락선에서 라빗트지 발견으로 광주경찰서에서 6개월 구금 조사 끝에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기소되어 광주형무소에서 6개월만에 집행유예로 출옥된 일 …… 그밖에 본적지로 조회한 사실이 있어 세밀히 기록되어 있다. 학병 소집 영장을 받고 도주하여 위의 네(박진철) 하숙에 회동할 때까지 경위를 모른다고 하는 것이 말이 되느냐!”
그러나 양회종은 헌병대의 조서가 말할 수 없이 가혹한 고문과 강제 구인으로 이루어진 것이라는 말만 되풀이하여 강력히 부인함으로써 사건을 완전히 원점으로 돌아가게 하였다. 이 때문에 재판은 지연되어 4회의 예심을 거쳤으나 재판도 열지 않은 채 미결로 계속 수감되었다. 그러는 동안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 8월 9일 나가사키에 미국이 원자탄을 투하하여 항복하였다. 바로 나가사키에 원자탄이 투하되던 날 성도회 동지들은 동경지방재판소 전중(田中) 검사의 신문을 받았다. 그리고 일본이 패망하던 이튿날 8월 16일 출옥하였다. 4. 대한민국 교사가 되다 양회종은 관부연락선을 타고 귀국했다. 귀국 후 그는 교육이야말로 민족의 장래를 결정짓는 첩경임을 깨닫고 교육계에 뛰어들었다. 감옥에서 해방을 맞이한 그의 첫 근무지가 학생운동의 본산 광주서중이었다. 독립운동가인 그의 첫 교직 생활 시작이 이곳이라는 사실은 의미가 있다. 1945년 12월 1일 광주서중 교유(교사)로 발령을 받은 이후 민족혼이 서린 광주서중의 전통을 잇는 민족 교육에 헌신하였다. 1947년 8월 30일까지 2년 남짓 근무한 광주서중은 그 무렵 민족주의계와 사회주의계 학생들이 충돌하는 등 치열한 이념의 갈등이 노출되고 있었다. 이 갈등은 교사들 사이에도 있었고, 교사들의 갈등은 바로 학생의 갈등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해방된 조국이 이념의 소용돌이에 휘말리는 것에 안타까워하던 양회종은 1947년 여름 사립 광주상업학교로 옮겼다. 광주상업학교는 현재 동성고로 바뀐 광주상업고등학교의 전신학교로, 1945년 11월 13일 광주사립호남보통학교를 모체로 광주공립상업전수학교의 교구 일체를 인수하여 광주 부호 최선진이 세웠다. 훗날 호남소학교로 이름을 바꾼 광주사립보통학교는 현재 광주 호남동 광주세무서 자리에 있었는데 1922년 4월 광주 유지들이 세웠다. 김형옥, 최선진, 최상현, 조만선, 지응현, 현준호, 정덕범, 정낙교 등이 추진위원이었다. 1928년부터 최선진이 이 학교를 맡아 운영하였는데 1944년 폐교되었다. 광주상업실습학교가 이전해 해방 직후까지 있었는데, 최선진이 1945년 12월 광주상업학교로 새롭게 개교한 것이다. 미곡업으로 부를 축적한 최선진은 독립운동 자금을 비밀리에 제공하는 등 사회사업을 활발히 하였다. 그는 광주상업학교를 설립한 후 양회종과 같은 독립운동을 한 인물들을 교사로 영입하여 민족주의 교육을 지향하였다. 경성의전 출신으로 광주 3·1운동을 이끈 김범수의 아들을 교사로 채용하기도 하였다. 광주상업학교에 영입된 양회종은 교무주임으로 개교 초기의 학교 발전의 초석을 닦았다. 그의 능력을 본 박철웅은 그를 조선대부속중고등학교 교감으로 초빙하였다. 박철웅은 1929년 12월 10일 전주신흥학교 3학년 재학 중 시위를 일으키다 구금된 경력이 있다. 메이지대학 정경학부 출신의 박철웅은 같은 동문이자 독립운동 경력을 지니고 상업학교 교무주임으로 있었던 양회종을 영입했던 것이다. 양회종이 교감으로 부임하여 학교 교육 계획을 수립하려 하고 있을 때 한국전쟁이 일어났다. 그는 전쟁이 소강 상태로 있던 1952년 9월 나주중고등학교 교장으로 부임하였다. 당시 교사 자원이 부족한 상태에서 교감 경력을 지닌 그가 교장으로 발탁된 것은 나름의 이유가 있다. 그때 나이 33세였다. 이후 목포, 여수, 순천, 광주 등 주요 학교의 교장의 중책을 맡아 학교 발전을 이끌었다. 특히 1972년 9월 1일 호남의 명문 광주고등학교에 부임한 그는, 호남의 영재를 교육할 꿈에 부풀어 있었다. 하지만 불과 한 달 후 일어난 10월 유신은 그의 이러한 꿈을 여지없이 짓밟았다. 당시 본관 담벼락에 붙은 ‘이룩하자 유신 과업’이라는 표어는 그의 가슴을 짓눌렀다. 광주고 교장으로 있던 4년은 그에게는 고통의 순간이었다. 그는 광주고등학교 다음 부임지로 광주학생운동의 발상지인 광주제일고등학교 교장을 간절히 원했으나 당시 박정희 정부는 그가 민족교육을 할까 두려워하여 화순 교육장으로 일종의 영전을 시켜 보냈다고 한다. 1985년 전남공업고등학교 교장을 마지막으로 정년 퇴임하였다. 한편 양회종은 한국중등교육회 부회장(1970~1972), 전남교육회 회장(1973~1975), 한국중등교육협의회 부회장(1972.~1974), 대한교육연합회 부회장(1974~1976) 등을 맡아 교원들의 권익을 보호하는 데 앞장섰다. 아울러 청소년 운동에 관심을 가져 한국보이스카우트연맹 광주연맹장(1980~1982)을 맡았는데, 학교마다 보이스카우트를 창설하고 활성화하는 데 앞장섰다. 5. 맺는말 양회종에게는 ‘양길동’이라는 별명이 있다.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는 홍길동을 빗대 하는 말인데, 이 별명은 이미 일본의 감시를 따돌리는 과정에서 나온 것이었는데, 교육계에 들어온 후에도 열정적으로 활동하다 보니 이 별명이 더 상기되었다. 해방 직후, 그리고 한국전쟁 후 학교가 많이 생기면서 일찍 교감, 교장 등 관리직으로 승진하는 경우들이 적지 않았다. 교사 경력 6년에 교감, 교감 경력 2년에 교장을 하는 등 요즘 기준으로 보면 파격 승진을 한 셈이다. 그러나 앞서 살펴본 바처럼 그의 승진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하지만 동료 교직원들로부터 부러움과 시샘의 대상이 되기도 했을 법하다. 양길동이라는 별명을 부정적으로 사용하는 이도 있다. 그는 이러한 주위의 이러한 시기, 질투에 구애받지 않고 확고한 철학을 바탕으로 대한민국 교육 발전을 위해 헌신하였다.
그는 전라남도지사 공로표창(1961), 문교부장관상(1963), 대통령 특별공로상(1970), 국민포장(1971), 국민훈장 목련장(1977) 등을 수상하였고, 1985년 정년 퇴임하며 국민훈장 동백장(1985)을 받았다. 그의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하여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애국장(1980년 건국포장)을 수여하였다. 그는 회고록 『교단여적』을 저술하였다. 성도회 동지인 신안 출신 박진철(1924 ~ 2006)이 쓴 항일 독립운동의 실화 소설 『祖國의 山河』의 주인공이기도 하였다. 박진철은 양회종과 함께 전남 교육 발전에 이바지하였다(1990년 애족장). 박진철의 사위는 1929년 11월 12일 학생운동에 참여한 조용표의 아들로 부친의 역사를 정리하고 있다. 조용표는 광주고보 5년 동안 학창 시절 이야기를 하루도 빠짐없이 일기로 남겼다. 전라남도가 추진한 미서훈 독립운동가 발굴 및 서훈 신청 사업을 총괄한 필자는, 이 과정에서 조용표 아들을 만났다. 필자의 도움으로 조용표 선생은 지난 4월 11일 광주제일고등학교에서 명예졸업장을 받았다. 조용표 선생의 얘기는 별도로 다루려 한다. 님은 가셨지만 우리 곁에 영원하리
학창 시절 항일 투쟁 조국 광복 이루시고 통일 없는 독립은 없다시며 인재 양성에 평생을 바치셨네 거룩한 뜻 깊게 새겨 길이길이 이어가리 <양회종 국립묘지 묘지명> 글쓴이 박해현 초당대 글로벌화학기계과 부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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