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경의 기억] 아동양육시설, 무안 소전원의 탄생과 그 배경 게시기간 : 2024-06-05 07:00부터 2030-12-24 21:21까지 등록일 : 2024-06-03 10:53
재단법인 한국학호남진흥원
풍경의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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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며 아동양육시설, 즉 고아원은 우리 현대사에 각별한 역사를 남겼다. 바로 6·25전쟁이 낳은 전재고아(戰災孤兒) 때문이다. 이 글에서는 전재고아의 보호시설로서 긴급 구호를 맡았던 고아원에 관한 사연들을 살펴보려 한다. 그리고 그 한 예로 전남 무안군 일로읍 의산리 소재의 소전원(蘇田院)과 그 설립자 나판수(羅判洙, 1921~1989) 원장에 대해 소개하고자 한다. 1957년 5월 5일 제35회 어린이날을 맞아 보건사회부에서 〈어린이헌장〉을 공포하였다. 모두 9조로 되어 있는데 그중 7조를 보면, “굶주린 어린이는 먹여야 한다. 병든 어린이는 치료해주어야 하고, 신체와 정신에 결함이 있는 어린이는 도와주어야 한다. 불량아는 교화하여야 하고 고아나 부랑아는 구호하여야 한다.”
고 되어 있다. ‘굶주린 어린이’로 시작하는 걸 보니 그런 어린이들이 많았다는 뜻인데, 그중에서도 고아나 부랑아는 또 얼마나 더 굶주렸을까? 그런 고아나 부랑아는 누가 어떻게 구호했을까? 바로 고아원이었다. 다만 이런 7조는 시대에 맞지 않다고 하여 1988년 개정된 〈어린이헌장〉에서는 사라졌다. 1957년과 1988년, 그 사이에 우리 아이들에게 어떤 일이 있었을까? 고아와 부랑아는 어떻게 되었을까? 6·25전쟁과 고아 구호 동족상잔의 비극, 6·25전쟁! 그 전쟁으로 인한 상처는 곳곳에 남아 긴 고난의 그림자를 남겼다. 그중에서도 고아문제는 가장 큰 고통이었다. 수많은 아이들이 부모를 잃고 거리를 떠도는 고아가 되어 비참한 삶을 연명하였다. 6·25전쟁 시기 우리나라 전체 고아는 폭발적으로 늘어나, 대략 10만 명 전후로 추산하고 있다. 고아는 이렇듯 시대의 산물이었고, 시대의 과제였다.1) 1950년대 아동문학에서 고아가 없고 고아원이 없으면 이야기가 되지 않았다고 한다. 아동소설의 주인공은 그야말로 “묻지마 고아”였다.2)
【그림 1】 서울어린이대공원에 설치된 1957년 최초 〈대한민국 어린이 헌장〉비 이렇듯 시급했던 아동의 구호는 어떻게 했을까? 아동복지정책의 흐름은 대체로 ①해방후 1950년대 말까지 시설보호 중심의 자선적 아동보호정책기, ②1960년대 초부터 1970년대 중반까지 시설아동의 가정복귀를 추구하며 시설의 재정자립을 강조했으나 외원 의존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잔여적 아동복리정책기, ③1970년대 후반 이후에는 새로운 발전적, 통합적 아동복지정책 모색기 등으로 구분하고 있다.3) 이런 흐름에서 보듯, 1950년대의 아동구호는 양육시설 즉 고아원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었다. 양육시설 중심의 고아 대책은 왜 나타났는가? 고아의 구호는 고아원과 같은 수용보호시설 외에도 입양이나 가정위탁보호(foster care), 공동생활가정,지역사회돌봄(소년소녀가장) 등 다양한 제도적 대안들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50년대에는‘고아원’이 마치 유일한 해법처럼 인식되었다.4) 왜 그랬을까? 우선 일제 때 만들어진 「조선구호령」의 영향도 컸다. 이 때문에 고아를 격리 수용하는 고아원 제도는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졌다. 이런 맥락에서 1950년 6·25전쟁의 고아문제가 닥치게 되자, 누구도 고아의 문제에 대해 고아원 제도가 적절한 해법인지에 대해서는 의문조차 갖지 않았다. 이것이 고아원 중심의 구호 대책이 자리 잡게 된 일차적 배경이었다. 요구호 아동의 보호시설은 해방 당시에도 이미 38개가 있어, 약 3,000명의 아동을 수용하고 있었다. 1949년에는 101개 고아원에 7,338명의 아동이 수용 보호되고 있었다. 전쟁의 발발로 1952년 8월에 고아원은 280개로, 수용 아동은 30,473명으로 급증하였다. 전후 복구 시기인 1955년에는 시설 수가 더 증가해 480개나 되었다.5) 한편, 이렇듯 고아원이 급격히 늘어나는 데에는 또 다른 요인이 있었다. 알다시피 6·25전쟁으로 인한 국가의 재난을 구호하는 데 미국 등 외국의 원조단체가 큰 역할을 하였는데 바로 이 외원단체들이 고아원을 통한 구호방식을 선호하였다는 점이다. 고아원 시설을 통한 구호가 여러모로 유용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것이 전쟁 중과 그 후에도 오랫동안 우리나라에서 고아원 시설 중심의 아동보호가 자리 잡게 된 결정적 요인이었다. 이들 외원단체는 스스로 고아원을 개설해서 운영하기도 하였지만, 대개는 기존에 설치되어 운영 중인 고아원들을 지원했다. 미군이나 공적 기관,외국원조단체들이 상당히 큰 규모의 원조를 제공했는데, 그로 인해 고아원은 당시에 좋은 ‘사업(business)’ 모델이 되기도 했다고 한다.
【그림 2】 구호물자를 받고 기뻐하는 소전원 아이들의 모습. 나판수 원장이 “성의껏 보내준 구호물자를 감사히 받어서 보람있게 쓰자”라고 쓴 쪽지가 붙어있다. 1954년경. 이런 이유들로 인해 고아원이 난립하는 현상까지 일어났다. 1950년대 중반 이후에 들어가면 전국적으로 고아원이 모자라서가 아니라 남아서 문제가 될 정도였다. 이는 일부이긴 했지만, ‘고아를 팔아’ 개인의 사리사욕을 채우는 ‘고아원 원장’이라는 부정적인 이미지를 만들어내기도 했다.6) 당시 아동복지정책을 세우는데, 고아원을 통해 외부로부터 지속적인 지원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에, 다른 대안을 찾지 못했다. 아니 찾을 필요가 없었다고 느꼈다. 따라서 전후 복구사업이 어느 정도 마무리된 이후에도 시설 중심의 아동보호 외에 다른 대안 찾기까지에는 미치지 못했다. 그 결과 안타깝게도 문제 집단이 발생하면 일차적으로 시설을 설립하여 수용·격리하고 보는 그런 관행이 자리 잡았다.7) 민간 외원단체의 역할 시설 중심의 고아 구호정책이 자리잡는 데 큰 영향을 미쳤던 민간 외원단체에 대해 알아보자. 6·25전쟁 중 유엔군총사령관은 1950년 12월 주한국제연합민간원조처(UnitedNations Civil Assistance Command Korea, UNCACK)를 설치하였다. 이에 따라 1952년부터 1950년대 후반까지 많은 외원단체들이 내한하였다. 내한 외원단체란 자국에 본부를 두고 그 본부의 재원으로 한국에서 활동하는 민간 사회사업 기관을 말한다. 이 시기에 활동한 대표적인 외원단체들로는 미국의 가톨릭구제위원회(Catholic Relief Service, CRS)와 기독교세계봉사회(Church World Service, CWS)를 꼽는다. 그중에서 CWS의 주도로 두 개의 민간외원단체연합회가 설립되었다.8) 하나가 1951년 5월 설립된 한국기독교세계봉사회(Korea Church World Service, KCWS)였고, 다른 하나가 1952년 7월 부산에서 설립된 외국민간원조기관 한국연합회(Korea Association of Voluntary Agencies, KAVA)였다. KCWS가 CWS의 주도로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와 연합하여 설립한 기독교 단체라면, KAVA는 천주교의 전쟁구호봉사회(WRS)와 한미재단 등 7개 외원단체가 연합해서 세운 외원단체연합회였다. KAVA는 한국인들만을 위해 설립된 단체로 원조만 아니라 재건에 목표를 두고 활동했다. 또 KAVA는 주로 한국교회와 협력하며 구호사업을 펼쳤기 때문에 기독교 활동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KAVA의 회원단체는 1970년에는 76개까지 늘어났다. 이들의 활동은 1950년대 중반 이후 1960년대 말까지 전성기를 이루었고 적어도 아동 구호사업에서만큼은 당시 보건사회부보다 더 많은 재원을 동원할 수 있었다. 그래서 제2의 보건사회부라는 말을 들을 정도였다. 대표적 아동구호 민간 외국원조(외원)단체, 기독교아동복리회(CCF) 1950년대에 들어온 민간 외원단체들의 최우선 관심사는 아동구호였다. 여기에는 기독교아동복리회(Christian Children`s Fund, 이하 CCF), 컴패션(Compassion, 스완슨복음선교회), 선명회(World Vision) 등이 대표적이었다. 이들 단체들이 전체 시설수용 아동 중 90% 이상의 후원을 담당했다.9) 이 단체들 외에도 대부분 복음주의 계통의 외원단체들이 이 시기에 많이 세워졌다.10) 이 중에서도 KAVA의 핵심단체로서 CCF의 역할이 가장 두드러졌다.11) 인도적 차원에서 전개된 CCF의 아동구호의 배경에는 선한 기독교인과 민주주의 수호자로서의 미국을 동일시하는 ‘기독교 미국주의’가 있었다.12)
CCF는 미국의 장로교 목사 캘빗 클라크(J. Calvitt Clarke)로부터 비롯된다. 그는 중국의 극동 구호기관에서 활동하고 있었는데, 전쟁고아 및 극빈아동을 돕기 위해 1938년 미국 버지니아주 리치먼드에서 ‘중화아동기금(China Children`s Fund)’을 창설하였다. 그러나 중화인민군이 중국 전역을 장악하게 되자 활동지를 변경하였다. 1948년 10월부터 밀스 목사(Dr. Verent John Russell Mills)의 노력으로 한국 지원을 시작하였다. 그후 6・25전쟁에서 많은 전쟁고아가 발생하자, CCF는 사업의 중심을 한국으로 옮겼다. 1951년 2월 6일, 영어 약자 CCF는 그대로 사용하면서, 중화아동기금에서 기독교아동복리회(Christian Children`s Fund)로 명칭을 바꾸었다. 1951년 4월 부산에서 사워(C. A. Sauer) 목사를 위원장으로 한 CCF 한국위원회(CCF 한국지부)를 구성하여 육아시설 가입 추천업무를 수행하였다. CCF에 가입하는 시설들은 1953년 휴전과 함께 점차 확대되었다. CCF가 지원하는 육아시설의 58%는 1948~1957년 사이에 설립되었다. 1954년에는 65개 시설 7,880명, 1955년에는 74개 시설, 9,078명이었고, 1957년에는 75개 시설, 9,786명으로 한국 내 전체 지원 아동의 약 절반에 가까웠다. 외원단체들 중 지원순위 1위였다. 주변의 고아를 거둬 개인적으로 고아원을 시작한 기독교인들의 시설에 CCF의 지원이 시작되는 경우가 많았다. 뒤에 다룰 소전원도 이런 CCF 지원시설 중 하나였다. CCF와 아동구호시설은 후원자가 양부모가 되고 아동이 양자녀가 되어 후원자와 아동간 후원금이 직접 전달되는 결연방식(Sponsorship System)을 취하였다. 이에 CCF는 후원자와 아동간 친밀한 유대감 형성을 위하여 서신교환을 강조하였다.13) 이 때문에 번역사업이 필요했다. 소전원 설립자 나판수는 1976년 CCF 연합번역실 운영위원장을 맡기도 하였다. CCF는 1955년 6월 3일 재한기독교아동복리회 설립 총회를 개최하였고, 10월 15일 “기독교 정신에 입각하여 부친 없는 아동 및 요구호 아동을 보호 부양하고 그들에게 교육을 부여함을 목적으로 한다”는 정관을 제정 발표하면서 정식으로 재단법인 설립 허가를 취득하였다. 1971년 사회복지법인이 되었다. 1979년 4월 1일에 한국어린이재단으로 출범하였다가 1994년 7월에 한국복지재단으로 변경하였다. 2002년 6월에 창립한 국제어린이재단연맹(ChildFund Alliance)에 가입하였고, 이후 2008년 1월 1일에 어린이재단으로 다시 이름을 바꾸었다. 2010년 4월에는 어린이재단의 BI로 초록우산을 채택하면서, 초록우산 어린이재단(Child Fund Korea)으로 불리게 되었다. 1970년대 이후 우리 경제가 성장함에 따라 외원의 축소 및 철수는 불가피해졌다. 1970년 76개였던 KAVA의 회원단체는 1971년 68개, 1979년 50개, 1972년 2개로까지 줄었고, 마침내 1995년 그 막을 내렸다. 이에 따라 2016년 7월 6일 대통령령 제27314호를 마지막으로 <외국민간원조단체에 관한 법률>도 역사에서 사라졌다. 폐지 사유는 대한민국이 원조받는 국가에서 원조하는 국가로 달라졌다는 데 있었다.14) 이런 추세 속에서 CCF 역시 고아 원조 중단을 결정하였고, 1986년 6월 30일부로 CCF의 한국지원을 종결한다는 ‘한국지원종결 10개년계획’을 수립하였다. 그때가 1976년이었다. 그 계획대로 1986년 CCF는 모든 지원을 종결, 철수하였고 현재 초록우산 어린이재단이 이어받았다. CCF는 한국아동지원 38년 역사에서 1억 달러와 10만 명 지원이라는 기록을 남겼다. 기독교아동복리회한국연합회 CCF의 지원을 받는 시설이 늘어나면서 시설 간 친목과 정보교환, 기술교류, 그리고 CCF와의 업무협의 필요성도 점차 커졌다. 이 가교 역할을 담당하기 위해 탄생한 기구가 기독교아동복리회한국연합회(이하 CCF한국연합회)였다. 이는 1953년에 나판수, 김응상, 한정교, 은영기, 홍성유 원장 등 당시 CCF 가입시설 37개 시설의 원장들이 CCF 한국지부와 업무협의를 위한 권익단체로 결성하였다.15) CCF한국연합회는 초대회장에 오긍선 박사, 부회장에 나판수 원장을 추대, 각 지방의 대표와 임원 등 7명 내외로 실행위원회를 구성하였다. 이 연합회는 1967년에는 전국 110개 시설이 참여하는 대규모 조직으로 발전하였다. 연합회는 1957년 1월 우리나라 최초로 사회복지 계간잡지(아동복지전문학술지) 『동광(童光)』을 창간하여, 1979년 제75호까지 발간하다가 이후 한국어린이재단에 인계하였다. CCF가 1976년 10개년 계획으로 지원 종결을 추진할 때 나판수는 밀스 총재와의 만남에서 1986년에 0의 기준으로 하지 말고 20% 정도는 남기는 것을 건의하는 등 외원의 유지를 위해 애쓰기도 하였다.16) CCF한국연합회는 1986년 10월 한국에서 CCF의 활동이 종결될 때, 연합회의 존속 여부로 진통을 겪었다. 일부 시설들이 연합회를 떠났지만, 65개 시설장들은 CCF의 정신을 계승하고 재한기독교아동복리회의 모든 업무를 인수하여 발족한 사회복지법인 한국어린이재단과 유대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연합회를 존속시키기로 하였다. 지금도 CCF한국연합회는 현 초록우산 어린이재단과의 관계를 꾸준히 유지하고 있다. 소전원의 탄생, 설립 배경과 나판수 소전원의 설립자 나판수는 1953년 11월 CCF한국연합회 설립부터 앞장서서 고아구호활동에 나섰다. CCF한국연합회에서 나판수는 초대 부회장을 맡아 핵심적 역할을 하였다. 이후 한 번 더 부회장을 맡았고 6~7대(1958.09~1960.09)에 걸쳐 회장을 연임하였고, 13대(1965.11~1966.07)에 다시 회장에 선임되는 등 세 차례에 걸쳐 회장을 맡았다.
【그림 4】 소전원 설립자 나판수 원장. 고아원을 만곡(万穀)의 기반인 밭[전, 田]에 비유하여 무한하게 소생(蘇生)시킨다는 뜻으로 소전원(蘇田院)이라 이름하였다. 2013년 현재 기독교아동복리회 한국연합회는 65개 시설이 회원으로 참여하고 있다. 광주·전남 9개 시설 중 8개가 전남에 있다. 전남에는 목포 공생원, 목포 아동원, 함평 삼애원, 무안 소전원, 순천중앙어린이집(구 순천애린원), 벌교어린이집, 목포 성덕원, 여수 보육원 등이 있고 광주에는 광주어린이집이 있다. 다만 광주어린이집도 그 연원은 여순사건과 6·25전쟁으로 고아가 된 아이들을 수용했던 보성 백십자원이기 때문에 모두 전남과 인연이 깊다. 물론 그 배경에는 나판수의 역할이 컸음을 짐작할 수 있다. 광주·전남에서는 1948년 10월에 일어난 여순사건으로 인하여 일찍부터 고아들이 생겨났다. 그 때문에 고아원도 다른 지역보다 먼저 필요했다. 광주 충현원이 그 시작이었다.17) 1950년 1월에 고아들이 점점 더 많아지자, 목포에서 고아원을 운영하던 윤치호 전도사의 제안으로 광주 YMCA 안에 동광원을 설치하였다.18) 이렇게 출발한 광주·전남의 고아원은 6·25전쟁 이후 빠른 속도로 늘어났다.
무안군 일로읍 소재의 소전원은 1951년 10월 3일 나판수에 의해 설립되었다. 그후 나판수가 CCF한국연합회에서 중추적 역할을 했기 때문에, 소전원은 그만큼 CCF와의 인연이 각별하였다. 소전원의 설립취지문은 보면, 전재아동들이 격증하여 거리에서 방황하거나 배회하는 그 참상을 차마 볼 수 없어 이들에게 “첫째로 의식주의 보금자리를 주고, 둘째로 기독교정신에 의거한 기독교적 정서교육을 바탕으로 참된 사람과 인격도야, 건전사고를 갖게 하여 자주적인 독립심을 길러주기 위하여” 고아원을 경영하게 되었다고 하였다. 소전원(蘇田院)이란 이름은 “장래 사회의 금은보옥(金銀寶玉)이 될 아동들을 만곡(万穀)의 기반인 밭[田]에 비유하여 무제한(無制限)하게 소생(蘇生)시킨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기독교정신을 내세운 것은 설립자가 어려서부터 교회에 다닌 인연도 있었고, 6·25 이전 신앙의 힘으로 걸인들을 모아 고아원을 만들었던 윤치호 전도사의 헌신적인 삶에서 받았던 영향도 있었다.19) 거기에 그치지 않고 그는 훗날 장로가 되어 대한예수교 목포노회 장로회 회장을 맡는 등 독실한 기독교신자로서의 삶을 살았다. 이런 인연으로 그는 기독교아동복리회 및 CCF한국연합회와 깊은 인연을 맺게 된다. 그리하여 그는 한 고아원의 아버지를 넘어서 한국 고아의 아버지라고 불릴 정도의 역할을 하였다. 그의 삶에서 품바와의 관계도 흥미롭다. 그가 설립한 소전원이 위치한 무안군 일로읍 의산리의 천사촌은 품바가 탄생한, 품바 발상지이다. 해방 이후 살기 어려웠던 시절 많은 품바 걸인들이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부랑생활을 하다가 “타향에서 괄세받고, 푸대접 받다가 이곳 ‘일로’에 오니 문전박대 않고 한 끼니만 있어도 나누어 주었다”는 전설이 있었다. 따라서 그들은 “고향에 온 기분으로 떠나지 않고 눌러 앉게 되었다”고 하였다.20) 일로의 명물 품바의 중심에는 거지대장 ‘작은 이’(천작은 : 본명은 천팔만, 탄생년 미상~1972)가 있었다고 한다. 일로에 30명 가량의 방랑인들이 작은 이를 따랐다. 작은 이는 나판수 원장의 좋은 친구이자 사업의 동반자이기도 하였다.
【그림 7】 품바발상지 기념비. 2000년 1월 1일 무안군 일로읍 의산리 967-12번지 일대 천사촌 입구에 품바 탄생을 기념하여 세웠다. 이런 품바를 기념하기 위하여 「품바발상지」 기념비가 설립(2000.01.01)되었다. 그만큼 이 지역에 걸인과 고아들이 많았다는 이야기인데, 일로읍에 소전원이 들어서면서 품바들의 자녀들은 소전원이 책임을 지기 시작했고, 품바들은 세월이 흐르면서 차츰 사라져 갔다. 한편 그는 1952년 2월 15일에는 한국사회사업연합회(현 한국사회복지협의회) 초대 이사를 맡았고, 1958년 1월 22일 한국사회사업연합회 부회장, 1960년 2월 한국사회사업연합회 제3대 회장(1960.02.17~1960.09.08)에 선임되기도 하였다.22) 그가 설립한 소전원은 한때 어려운 시절을 겪기도 했지만, 그의 딸 나온영 원장을 거쳐 지금은 외손녀 도혜경 원장이 맡아 설립자가 남긴 고아 사랑의 뜻을 이어가고 있다. 외국 원조가 남긴 영향 해방 이후 6·25전쟁을 거치면서 자리 잡은 이른바 ‘원조복지체제’ 23)는 분명 가난을 극복하는 데 절대적 도움을 주었다. 하지만 “공짜는 없다”는 말처럼 그로 인해 남겨진 명암이 있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고아 구호사업에 적극적이었던 수많은 외원기관은 대부분 기독교를 배경으로 설립된 단체들이었다. 이와 같은 기독교 관련 외원단체들의 영향으로 한국의 사회사업이 기독교와 밀접한 관계를 갖게 되었고, 또한 시설 중심의 사회사업이 자리 잡는 배경이 되었다. 당시 고아원 설립자로는 기독교 교회나 선교단체 등과 연계가 있는 목회자나 교인이 절대적으로 유리했다. 따라서 이런 사정들은 기독교가 확산하는데 좋은 환경을 만들어 주었다. 실제로 이 기간에 기독교도는 크게 증가하였다. 또 기독교 외원단체들의 활동에는, 미국이 공산주의의 위협으로부터 자유세계를 지키기 위해, 또 기독교적 사랑의 실천을 위해 고아들을 후원해야 한다는 명분이 크게 작용했다. 아동 후원은 미국인들에게 민주주의를 수호하고 기독교인다운 선량함을 실천한다는 자긍심을 주는 동시에 한국에서 미국의 역할을 긍정적으로 정립하는 데에도 도움이 되었다. 그 결과 후원받는 아이들에게 미국은 "The Great White Father”로 비춰지면서24) 미국문화의 영향력을 확대하였고, 아울러 반공주의도 강화시켰다.25) 그리고 원조라는 형태로 시작한 구제 활동이 지배적 지위를 누리면서 복지의 영역은 지속적으로 구제중심적 영역에 머무르게 되었고,시혜주의적 방식으로 작동하게 되었다. 그래서 지금도 잔여적 아동복지관이 여전히 유지되고 있다.26) 나가며 : 저출산·인구소멸시기에 되돌아보는 고아원 민간 외원단체의 원조에 절대적으로 의존했던 시절에 고아원은 비록 불편한 흔적들을 남겼지만, 시급했던 고아 구호에서 분명 그 역할을 다했다. 거기에 초기 고아원의 역할이 지니는 의미가 있다. 지금 우리는 원조 받던 나라에서 주는 나라로 바뀌었다고 자랑한다. 하지만 원조 받던 때의 비참함을 잊어버리고, 그로 인해 발생한 고아에 대한 왜곡된 인식의 고착화에 무심해져 있는 것은 아닐까? 2000년 이후 가정보호정책 중심으로 아동복지정책이 변화됨에 따라 가정위탁, 입양이 점차 증가하고 시설아동이 감소되는 추세이긴 하지만, 시설아동이 여전히 40~50%의 높은 비율을 점하고 있다.27) 이처럼 지금도 시설보호의 비중이 크다. 시설 환경 개선을 위한 꾸준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대중의 인식은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 ‘고아’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피하고자 시설 명칭을 ‘고아원’에서 ‘보육원’으로 바꾸기도 하였지만, ‘보육원 출신’에 대한 편견은 여전하다.28) 과거가 남겨놓은 굴레의 구속력이 어느 정도인지 바로 이 고아문제에서 확인할 수 있다. 더구나 지금의 고아는 말이 고아이지 대부분은 버려진 아이들이다. 보육원에 수용된 어린아이들 가운데 연고자가 없는 순수 고아는 15%에 불과하다고 한다. 나머지 85%가 부모가 생존해 있으면서도 자녀들을 방치한 결손·결함 가정의 출신이다.29) 대부분의 아이들이 고아가 아니고 보호대상아동인 것이다. 대한민국이 1호 인구소멸국가가 될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나올 만큼 심각한 인구소멸 시대를 맞아 고아에 대한 인식은 이제 뭔가 달라져야 하지 않을까? 그 첫 과제로 시설의 기능을 재정비할 때가 되었다. 종래 대규모 보호의 방식에서 소숙사제도나 그룹홈 등의 소규모 가정단위 보호 방식으로 전환하는 등의 제도 개선 방안들이 논의 중에 있다. 그렇다고 해서 지금 현 시점에서 양육시설을 배제해서는 답이 없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고아원은 일부 역기능도 있었지만, 긴급구호의 순기능적 역할을 해 왔고, 지금도 수많은 요보호아동들의 안식처가 되고 있다는 점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이제 양육시설에 대한 패러다임의 전환을 고려해야 할 때이다. 보호양육에 치중된 아동복지시설의 기능을 상담, 일시보호, 급식, 방과후 교육, 각종 프로그램 운영 등 지역사회 아동을 위한 기능으로 확대함으로써 시설이 지역사회 아동을 위한 거점시설로 전환하게 하는 것이 하나의 대안이 될 것이다. 최근의 시설아동에 대한 관심도 퇴소 이후의 자립실태에 맞춰지고 있는 것도 그런 사정을 반영하고 있다. 분명한 것은 양육시설의 아동 역시 모두 함께 살아가야 할 “우리 모두의 아이들”이란 점이다. 이런 정책의 전환을 통해, 고아=천사=착한 아이=성공으로 이어지는 올리버 트위스트의 옛이야기가 지금이라도 이루어질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1) 전재 또는 전쟁고아에 대한 전반적인 사정은 김창진·박갑룡, 『전쟁고아와 국가의 책무』(문운당, 2020) 참조.
2) 조윤정, 「1950년대 사회문화적 맥락에서 본 『올리버 트위스트』의 번역 양상」(『구보학보』 35, 구보학회, 2023), 309쪽. 3) 이혜경, 「經濟成長과 兒童福祉政策의 變容 -한국의 경험–」(『한국아동복지학』 1993-12, 한국아동복지학회, 1993), 201쪽. 4) 김영종, 「피란수도 부산의 고아원과 고아의 삶 – 한국 사회복지의 제도적 시원에 관한 연구」(『항도부산』 41호, 2021.02), 97쪽. 이하 이 부분에 대한 서술은 이 글의 91~101쪽을 참조하였다. 5) 김흥수, 「한국전쟁 시기 기독교 외원단체의 구호활동」(『한국기독교와 역사』 제23호,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2005.09), 114쪽. 6) 김영종, 같은 글, 94쪽. 7) 최원규, 「한국 전쟁기 가톨릭 外援 기관의 원조 활동과 그 영향」(『교회사연구』 제26집, 한국교회사연구소, 2006.06, 한국교회사연구소), 182쪽. 8) 이 부분에 대하여는 김흥수, 앞 글; 조기동, 「외국민간 원조기관 한국연합회(KAVA)활동」(『한국가톨릭병원협회지』 1975. 6(1), 한국가톨릭의료협회); 장금현(a), 「외원단체 연합회의 설립과정과 특성 -한국기독교세계봉사회와 외국민간원조단체연합회를 중심으로-」(『대학과 선교』 48권, 한국대학선교학회, 2021.06); 장금현(b), 「외국민간원조단체연합회(Korea Association of Voluntary Agencies)와 기독교 관계」(『영산신학저널』 56권, 한세대학교 영산신학연구소, 2021.06) 등을 참고로 정리하였다. 9) 이혜경, 앞 글, 204쪽 참조. 10) 그밖에도 양친회(Foster Parents Plan, FPP, 현 플랜코리아), 캐나다유니테리언봉사회(Unitarian Service Committe of Canada, 현 한국봉사회) 등 여러 기관들이 있었다. USC는 1945년 조직된 외원기관으로 1952년 우리나라에 들어와 전쟁고아, 미망인, 결식아동의 구호를 위해 활동했다. 특히 목포에 아동결핵병원을 설립하였고, 1964년에는 목포사회복지관을 설치하여 운영하였다. 11) 기독교아동복리회의 활동에 대하여는 『기독교아동복리회 한국연합회 60년사』(기독교아동복리회한국연합회, 2013.06)와 『아이들이 행복한 세상을 위해 –초록우산 어린이재단 70년사』(초록우산 어린이재단, 2019.04) 등을 참조하여 정리하였다. 12) 윤은순, 「1950·60년대 아동복지사업의 내용과 성격 : CCF를 중심으로」(『한국민족운동사연구』 107권, 한국민족운동사학회, 2021.06), 284쪽. 13) 윤은순, 같은 글, 290쪽 참조. 14) 장금현(b), 앞 글, 137쪽 참조. 15) 『기독교아동복리회 한국연합회 60년사』(기독교아동복리회한국연합회, 2013.06), 47쪽. 16) 나판수, 「CCF 向後 10年 設計에 對한 小考」(『동광』 72, 1977) 17) 최원규, 「광주 충현원의 사례를 통해 본 한국 사회복지사업에서 민관관계의 전개 양상」(『사회복지역사연구』 Vol. 5, 한국사회복지역사학회, 2022.12.31) 참조. 18) 이은선, 「해방 후 한국기독교인들의 토착적인 사회복지 형성 연구」(『역사신학논총』 37권, 한국복음주의역사신학회, 2020.12) 참조. 19) 백영규, 『實錄 永隱 羅判洙』, 1999.07, 기독문학사), 82쪽 참조. 이 책은 백영규 목사가 나판수 원장이 세상을 떠난 지 10년이 되는 해를 맞아 써낸 그의 삶에 대한 기록이다. 20) 김범수, 「인물 복지선구자⑥ 나판수 한국사회복지협의회 3대 회장」(『복지저널』제58호, 한국사회복지협의회, 2013.06), 72~73쪽. 21) 백영규, 앞 책, 59쪽. 22) 한국사회사업연합회는 1952년 출범, 1961년 한국사회복지사업연합회로, 1965년 한국사회복지연합회로, 1970년 한국사회복지협의회(SSN)로 개칭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관련 내용은 「한국사회복지협의회 60년사」(『복지저널』 제57호, 한국사회복지협의회, 2013.05), 43~54쪽 참조. 23) 원조복지체제에 대하여는 윤홍식, 「이승만 정권시기 한국복지체제: 원조(援助)복지체제의 성립, 1948-1960」(『사회복지정책』 45권 1호, 한국사회복지정책학회, 2018.03) 참조. 24) 윤은순, 앞 글, 297쪽. 25) 이 점에 대하여는 박보경, 「1950년 한국 전쟁 당시 한국 교회의 역할」(『선교와 신학』 26, 장로회신학대학교 세계선교연구원, 2010.08) 참조. 26) 정근식·주윤정, 「사회사업에서 사회복지로: "복지" 개념과 제도의 변화」(『사회와 역사』 98, 한국사회사학회, 2013.06), 24쪽. 27) 김경희·강현아·안소영, 「시설아동의 현황 및 쟁점에 관한 연구」(『아동학회지』 30(6), 한국아동학회, 2009.12), 406쪽. 28) 조아현, 「1990년 이후 한국 아동양육시설 보도의 명칭 변화 분석: ‘고아원’에서 ‘보육원’으로」(『가족과 문화』 제35집 1호, 한국가족학회, 2023.03), 39~40쪽. 29) 「복지시설아동 85%가 부모 생존」(「매일경제」 1992-10-31) 글쓴이 고석규 목포대학교 前 총장, 사학과 명예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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