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속의 재발견] 진도의 상장례 다시 읽기 10 게시기간 : 2024-06-19 07:00부터 2030-12-24 21:21까지 등록일 : 2024-06-13 11:29
재단법인 한국학호남진흥원
민속의 재발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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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유와 김이익과 순칭록에 대하여 유와 김이익의 순칭록1) 진도 풍속의 개화를 목적으로 쓴 저술이다. 전남일보 ‘이윤선의 남도 인문학’에도 두어 차례 소개하였고 졸저 『남도를 품은 이야기』(다할미디어)에도 게재한 바 있다. 다만 개략적인 내용을 다루었으므로 내용이 불충분하였을 것이다. 따라서 본 지면을 활용해 좀 더 보완해두기로 한다. 이번 호를 포함해 두어 번 다루게 되면 얼추 상례를 중심으로 한 순칭록의 대강은 소래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순칭록은 현행되거나 근자까지 전승된 진도의 풍속 중 다른 지역과 변별되는 점들을 비교해볼 수 있는 자료라는 점에서 그 가치가 인정된다. 박병술이 저술한 <진도와 진도사람들, 학연문화사, 1999>에 의하면, 진도에 유배된 인사 중 소재 노수신, 유와 김이익, 무정 정만조를 으뜸으로 꼽는다. 이들이 진도 유배 기간 중 집필한 방대한 양의 저술이 백미를 이루기 때문이다. 필자 또한 진도의 풍속을 논할 때 무정 정만조의 <은파유필>을 자주 인용하곤 하는데, 노수신과 김이익, 무정 정만조를 진도 유배 삼걸로 칭하는데 크게 반대하지 않는다. 다만, 정만조가 구한말의 대표적인 친일 유학자라는 점은 확인해두는 것이 좋겠다. 순칭록에서는 ‘진도’를 표방하면서도 ‘남도’ 혹은 ‘호남’이라는2) 지명을 여러 차례 쓰고 있다. 진도의 풍속뿐 아니라 남도 전반을 겨냥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200여 년 전의 진도 지역, 나아가 남도 지역 민속풍경을 엿볼 수 있다는 점에서 순칭록의 의미가 크다는 뜻이다. 순칭록은 관례, 혼례, 상례, 제례 순으로 기록되었다. 물론 본 지면에서는 상례만을 떼어내고 그중에서 중요하다 싶은 몇 가지만 거론하기로 한다. 기회가 되면 관례와 혼례, 제례 등도 차차 풀어 쓰기로 한다. 순칭록 발간 배경을 김이익은 아래와 같이 이야기하고 있다. 우리 성상께서 등극하여 5년이 된 을축년(1805)은 내가 벌을 받고 이곳으로 유배 온지 6년이 되는 해다. 이곳 진도에서 오래 있었기에 이 지역 풍습에 대해 많이 들었다. 대부분 하나 같이 그릇되어 개탄스럽고 매우 나쁘게 여겼으나 어떻게 고칠 방법이 없어 항상 근심할 뿐이었다. 하루는 갑자기 고을에서 人望이 두터운 朴震琮 厚玉군이 나에게 四禮儀節에 대해 질문하면서 ‘가르침을 주시어 저희가 의절에 대해 깨닫기를 원합니다.’라고 했다.
순칭록을 집필 이유를 밝히는 서문 중 한 구절이다. 위에서 밝힌 것처럼 순칭록은 진도의 문하생 박진종(朴震琮)의 요청에 따라 진도 유배 6년에 김이익이 저술한 의례 지침서다. 박진종이 사례의절(四禮儀節)에 대해 질문하자 사례(四禮)를 대략 초록(抄錄)하여 붙여준 이름이 ‘순칭록(循稱錄)’이다. 고을 풍습 중 크게 잘못이 아닌 것은 제외하고 옛것을 따르라고 하면서도 사례(四禮)에 기록된 성인들의 말씀에 대해서 정성을 다하고 온 고을 선사(善士)와 같은 집안 친척들이 익혀서 행한다면 성세(聖世)의 풍속으로 교화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라 하였다. 서문은 1805년 6월에 작성되었다. 유배 6년간에 이미 방대한 양의 저술을 남기고 있기도 하다. 그 뒤 진도 지역의 문장가인 강제(康齋) 박진원(朴晋遠, 1860~1932)이 교정하고 떨어져 나간 곳을 보완하여 1928년 『가정절검(家庭節儉)』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간행한 것이 현재 전해지는 순칭록이다. 본문 첫 장에 ‘가정절검(家庭節儉)’으로 내제를 표기하고 있다. “原循稱錄, 安東 金履翼 著 密城 朴晋遠 校”라 하여 원래의 책 제목과 저자, 교정한 사람을 밝혀두었다. 순칭록(循稱錄)은 지난 1993년에 진도문화원에서 진도향토사자료 제2집(珍島郡鄕土史資料 第2輯)을 간행하면서 원문을 영인하여 소개한 바 있다. 당시 9종의 향토 사료를 발굴하여 간행했다. 은파유필(恩波濡筆), 군고청령급진법(軍鼓廳令及陣法), 농악대상식서(農樂隊상식서), 소포걸군농악보(素浦乞軍農樂譜), 어록(語錄), 자모집(字募集), 소산시집(素山詩集), 옥주이천언(沃州二千言) 순칭록(循稱錄)등이 그것이다. 원순칭록을 가필한 것이 아니고 교정 정도로 새로 묶었다는 점에서 원문과 크게 다르지 않다. 두 가지 모두 당시 김이익이 묘사했던 진도 풍속 특히 상례의 면모를 짐작하는 데는 큰 지장이 없다고 생각된다. 2. 순칭록에서 비판하고 있는 진도 상장례 순칭록 전체 내용을 리뷰하거나 분석하는 것은 나중 일로 미루고, 우선 김이익이 지적한 바를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부분을 인용해가면서 풀어본다. 이 부분만 읽어도 당시의 진도, 나아가 남도 상례 풍속의 면모를 짐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각주 등으로 따로 붙이기보다는 본문에 예시해두고 큰 설명 없이 따라 읽으며 톺아보는 편을 택하기로 한다. ‘형식을 잘 갖추기보다 차라리 슬픔에 젖는 편이 더 낫고, 성대한 예보다 차라리 검소한 편이 낫다’고 聖人이 세상에 교훈으로 남기니 오랑캐들도 태만하지 않고 풍속을 아름답게 변했다는 것을 알 수 있고, 뛰어난 ‘문채’보다 본질을 귀하게 여김에 예의 근본이 情에 연유함을 더욱 잘 알 수 있다. 그러나 슬프게도 조석으로 곡하는 풍속이 있으나 수일 후에 갑자기 거두고, 조석으로 올리는 上食을 삼 년 안에 올리지 않는 습속에 유혹된 지 오래고 당연시 여기는데, 그 부모를 차마 갑자기 돌아가셨다고 인정하지 못하는 마음과 크게 어긋나지 않겠는가. 이러므로 개탄과 애석함을 견딜 수 없다.
위 인용문에서, ‘문채보다 본질을 귀하게 여긴다는 내용은, 『논어(論語)』 옹야(雍也)에 “바탕이 문채를 압도하면 촌스럽게 되고, 문채가 바탕을 압도하면 겉치레에 흐르게 되나니, 문채와 바탕이 조화를 이룬 뒤에야 군자라고 할 수 있다[質勝文則野 文勝質則史 文質彬彬然後君子]”라는 말을 인용한 것이다. 진도사람들이 삼년상도 지키지 않고 곡하는 것, 그것도 수일 만에 그치는 등 오랑캐나 할 풍속이란 비판이 들어있다. 발상(發喪)을 설명한 부분에서는 한 발 더 나간다. 여러 자식들은 3일간 음식을 먹지 않고 죽을 만들어 먹는다. 나는 習俗에 단지 화려한 장식을 않는다는 말에 따라 간혹 복을 입지 않는 사람이 관과 두루마기를 벗고 시체 곁에 있는 것은 공경에 흠이 될 뿐 아니라, 또한 매우 놀라운 일이다. ‘음식을 먹지 않는다.’는 것은 어버이 시체 곁에 있으면 차마 평소처럼 음식을 삼킬 수 없기 때문에 죽을 마시는 것이다. 힘에 따라 드문드문 3~4일을 먹지 않다가 다시 먹지 못한 것은 억지로는 불가한 것이다.
생각해보면 鄕俗은 여전히 固陋한 풍속이 많다. 남의 집 초상에서 술을 권함은 서로 아끼는 마음에서 나왔다고 여긴다. 그러므로 상가에서 으레 행하는 예의로 여겨 服人 이하는 질탕하게 취하지 않은 사람이 없다. 심지어 머리를 풀고 편안히 술잔을 잡고도 부끄럽게 여기지 않은 자들이 가끔 있다고 한다. 이런 짓을 어찌 인정상 차마 할 일이겠는가? 조객은 아직 위로의 말을 하지 않고 상인 역시 답하지 않는다. 기년복과 대공복을 입은 친척은 조문을 받으면 곡한다. 나는 ‘애고’라고 곡하는 것은 망인의 처자와 첩의 소생은 당연히 해야 하고, 諸子(아들과 같은 항렬을 말한다)의 부인 이하는 당연히 하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지금 들어보니 남쪽 풍속에, 남녀는 물론 조객도 ‘애고’라고 곡을 한다고 하니, 그건 전혀 모르고 하거나, 어쩌면 모두 禮에 꼼꼼하지 못하여 이 지경에 이르렀을 것이다. 마을 사람들일 조문객들이 모두 질탕하게 취해서 노래하고 떠들며 밤샘하는 풍경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하지만 남녀는 물론 조객들까지 ‘애고’라고 곡을 하는 점을 비판하고 있다. 상주와 구별없이 슬픔에 참여하는 것이 잘못되었다는 시선을 확인할 수 있다. 목욕(沐浴)과 반함(飯含)을 설명하는 대목에서는 주자의 가르침대로 격식과 순서를 지키지 않고 있음을 지적한다. 참고로 반함(飯含)은 염습(殮襲)할 때에 죽은 사람의 입에 구슬과 씻은 쌀을 물리는 일을 말한다. 상체를 沐, 하체를 浴이라 한다. 구덩이를 판다. 가장 조용하고 깨끗한 곳에서 행하고, 개나 닭의 접근을 방지한다. 찹쌀 끓인 물과 속세에서 향탕으로 목욕을 시킨 자가 있으나 이는 매우 무례하니 결코 써서는 안 된다. 시체를 받들고 자리로 가서 먼저 찹쌀 끓인 물로 3분의 1로 이불을 들치고 하체를 목욕시킨다. 빠진 머리카락은 落髮囊에 담는다. 부인도 당연히 상투를 만들되, 생전에 하지 않았다면 지금 생전 모습대로 한다. 다음 왼손 손톱을 자른다. 깊이 자르지 않는다. 남자는 왼손, 여자는 오른손을 먼저 자른다. 그 손톱은 주머니의 표시에 따라 담고 혹시라도 잘못하여 바뀌지 않게 한다. 후에도 모두 이렇게 한다. 오른쪽 발톱을 자르고 마치면 빗, 沐水, 沐巾, 沐盆, 浴盆 모두를 구덩이에 묻고 노출되지 않게 한다. 마치고 나면 염을 한다.
주인은 손을 씻고 左袒(윗옷의 왼쪽 어깨를 벗음)하고 들어가 곡을 하고 시체 동쪽으로 나아가 발에서 동서쪽을 향해 앉아, 버드나무 수저로 쌀을 떠 시체의 입 오른쪽을 채우고 아울러 구슬 하나를 넣는다. 나는 습전은 본래 반함 전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禮家들이 흔히 반함 이후에 행한다. 대개 六品 이하는 염습 이후에 전을 하는데, 글이 開元禮에 실려 있기 때문이다. 또 생각하면 띠를 묶고 신발을 신기면, 비로소 염을 마치게 된다. 그러나 전을 만약 반함 전에 설치한다면, 모든 것을 수용하기 어렵고, 염을 마친 뒤에 설치하는 것도 근거가 없다. 속세에서 향탕으로 목욕을 시킨 자가 있다는 대목에 주목한다. 진도씻김굿에서 가장 대표적인 의례가 쑥물, 향물, 맑은물로 ‘영돈마리’를 씻기는 ‘이슬털이’이기 때문이다. 바꾸어 말하면 상징의례로 ‘이슬털이’를 하는 경우와 실제 시신을 향탕으로 목욕시키는 사례가 공존했다는 뜻이다. 아마도 불교 전래 이후 생긴 풍속이겠지만 지금까지 전하는 진도의 상장례 풍속에 비추어본다면 매우 흥미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위에서 말한 개원례(開元禮)는 당나라 현종 20년(732) 9월 중서령 소숭이 건의하여 제정·시행한 관복제도를 말한다. 황제 이하 문무 관복을 비롯하여 황후 및 내명부·외명부의 관복까지 광범위한 관복의 제정이 있었다. 전을 반함 전에 설치했음을 알 수 있고 염을 마친 뒤에도 설치했다는 정황을 추측해볼 수 있다. 소렴(小殮, 시체를 싸는 일)과 염포(斂布, 소렴 때 쓰는 베)를 설명하는 대목에서는 한바탕 질펀하게 먹고 노는 장면들을 비판한다. 시체를 묶는다. 빈가의 초상은 의외의 초상이라 갖추지 못할 것은 물론이고, 이것에 얽매일 필요 없다. 비록 염습과 소렴은 사망한 제2일에 시행해도 무방할듯하다. 세속에서 시체를 연일 요동하는 것은 좋지 않고, 제3일에 염습, 소렴, 대렴, 입관을 모두 행하는 것도 결코 옳지 않다. 橫布 3폭, 縱布 1폭, 횡포는 발은 남겨두고 전신을 둘러 머리와 발끝은 3갈래로 찢어 둔다. 횡은 9번을 감고, 종은 발끝에 여유분을 두고 머리를 덮어 발끝에 이르면 그 양 끝을 3갈래로 찢어 둔다. 종은 3번 감는다. 나는 살피건대 목욕, 염습은 사망한 당일에 하고, 소렴은 사망 제2일에 한다. 그러나 사망한 날이 야심한 뒤라면, 미처 그 시간에 예에 따라 주선하지 못할까 걱정이다. 나는 예기에 성복한 뒤 별도로 설치한 전이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최근 풍속은 오로지 너무 많이만 준비하려 한다. 그 유래가 오래 되어 냉정하게 고치기 어렵다. 그러나 단지 떡, 면, 과일, 포를 겸하여 준비하고 상식과 밥과 국, 몇 그릇 어육만 진설하면 충분하다. 전을 마친 후 복인은 조객과 모여 즉석에서 취하고 배불리 먹는 것은 단지 生者를 보고 먹고 마시기 위해 진설한 것인데 어찌 인륜에 크게 어긋나지 않겠는가? 빈가라면 더구나 어찌 잘못을 본받겠는가. 이것은 의당 명심해야 한다.
앞선 인용에서, 매우 엄숙하고 간소하게 치러야 할 상례임에도 불구하고 모든 조객들이 즉석에서 취하고 배불리 먹었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다음 호까지 이어 차차 말하겠지만 이것은 현행되는 씻김굿과 다시래기의 풍경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 바꾸어 말하면 김이익이 200여 년 전에 진도에서 그렇게 바꾸고자 했던 상례가 전혀 바뀌지 않고 문화재 지정기까지 이어져 왔다는 뜻이기도 하다. 성복존(成服奠)의 설명 또한 진도의 토착 풍경을 역설적으로 묘사한다. 出殯의 일은 시골집에서 부득이한 일이다. 이미 빈소를 설치한 다음 하루에 한 번 찾아가는 사람도 매우 드물다고 하는데, 이는 어쩌면 사람이 모두 불효해서 그런 것인가. 어버이 초상에 뜻이 있는 자는 성복한 다음 비로소 빈소를 설치하고 매일 하루에 두 번 찾아가 곡하고 살핀다면 이마에 땀이 흐르는 나무람을 면하고 뜻하지 않는 우환에 대비할 수 있을 것이니 결코 불가한 풍우 때라도 당연히 살펴야 한다. 비록 비옷을 입고 바지를 걷고 가는 것은 정에서 나온 것인데 어찌 예에 손해가 있겠는가. ”
유교적 의례와는 다르게 빈소에 한번도 찾아가지 않는 것이 진도의 풍속이라는 점을 알 수 있다. 이를 진도사람 모두가 불효해서 그럴 것이라 지레 짐작하고 비판하는 시선을 또한 확인할 수 있다. 석곡(夕哭)과 택장지(擇葬地) 즉 장지를 택하는 순서에서는, 무당과 특히 여성들의 개입이나 주도적인 의사결정을 엿볼 수 있다. 나는 조석으로 두 번 곡한 것은, 부모 생존 시에 조석으로 항상 행하던 일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부모님 시체가 아직 싸늘해지기 전에 갑자기 폐지한다면 마음이 편안하겠는가. 나는 속인들이 지관의 말에 현혹되어, 가는 곳마다 그렇지 않는 곳이 없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실로 호남처럼 더욱 심한 곳이 없다. 모두 의원이나 무당, 卜師(점치는 일을 업으로 삼는 사람)가 사람의 이목을 현혹시키는 일을 능사로 여기니, 어찌 매우 애석하지 않겠는가? 더구나 부모 體魄의 안부를 걱정하지 않고 단지 다른 자손들의 몸과 명예를 가지고 득실에만 뜻을 둔 사람이 선인이겠는가 악인이겠는가? 선악의 보답은 옛날부터 겨우 만에 하나정도인데, 지금 亡親의 해골을 가지고 이익을 구하는 자료로 삼는다면 仁天이 증거 할 수 없는 물건으로 禍福을 만들겠는가? 같은 집에서 함께 숙식하고 죽어서 함께 묻히는 것은 천리와 인정상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죽으면 그 자식 된 자들은 妖師의 패설을 믿고 잡서의 異論을 탐을 내 갑자기 부모님 葬地를 하나는 동쪽 하나는 서쪽 혹은 남북으로 나누어 놓아 외로운 무덤이 되게 한다. 저들은 그 처첩과 주야로 한집에서 살면서도 다만 부끄러움을 모른단 말인가!
처첩과 한집에 살 수밖에 없었던 토착 환경이나 배경은 아랑곳없다. 어업을 본업 삼았던 섬사람들의 환경도 아랑곳없다. 위 본문의 뒷부분에서는 더 강력하게 진도사람들을 비판하는 내용들이 들어있다. 장지를 결정하는 것, 혹은 이장을 결정하는 것이 모두 당골이나 점쟁이의 교사요, 이를 주도적으로 견인하는 여성들의 문제로 지적하고 있다. 이를 바꾸어 읽으면 진도지역 여성들의 권위와 주도적인 역할을 상고할 수 있다. 위에서 부모 체백의 안부를 걱정하지 않고 단지 다른 자손들의 몸과 명예를 가지고 득실에만 뜻을 둔다는 것은, 씻김굿 중 주로 ‘제석거리’에서 장황하게 드러난다. 자손의 발복과 재화, 부귀공명을 주로 노래하기 때문이다. 이를 망친의 해골을 가지고 이익을 구하는 자료로 삼으니 악인이 분명하다고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발인(發靷) 부분에서는 훗날 남종화의 시조라 불리는 소치 허련의 건의문에 이르기까지 진도 지역 상례를 오랑캐의 것이라 폄하하는 모습이 이어진다. 소치 허련의 건의문은 다른 장에서 따로 다루기 때문에 여기서는 생략한다. 나는 상여가 나갈 때 북을 치고 앞에서 인도하고 큰 소리로 울며 뒤에서 따라가는 것은 결코 오랑캐의 풍속이라고 생각한다. 의관을 갖춘 집안에서 어찌 차마 이런 풍습을 본받겠는가. 반드시 搖鈴 하나를 준비하여 북을 대신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또 애경사와 관계된 일은 더더욱 반상의 구별이 있어야 마땅하다. 이 지역 선비들은 전혀 구별이 없는데, 필히 발인할 때 仰帳(상여 위에 치는 휘장)을 높이 덮어 상여를 나타내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또 향상, 교의, 등롱은 앞에, 만장과 翣扇은 좌우에 있는데 이는 의장물이다. 들고 있는 사람과 상여꾼은 필히 머리에 건을 써야하고, 상여 위에 채색을 꽂는 짓은 결코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삽선: 발인할 때 상여의 앞뒤에 들고 가는 부채 모양으로 된 치장제구의 하나. 구름무늬를 그린 운삽(雲翣)과 아자(亞字) 모양의 무늬를 그린 불삽(黻翣). 죽은 사람의 영혼을 좋은 곳으로 인도해 달라는 염원을 담고 있음. 북치고 장구치며 노래하고 운상하는 것은 지금까지 남아있는 진도의 상례풍속이다. 조선 후기 제사법까지 바뀌어가는 도도한 흐름들 속에서도 상여 앞에 북치고 노래하는 이 풍속은 변함없이 이어져왔음을 역설적으로 증명해주는 대목이다. 또한 상여 위에 채색을 꽂는 짓을 하지 말라는 훈계로 미루어 보아 당시 진도 지역의 상여는 삼색이나 오색 혹은 칠색의 울긋불긋한 색으로 치장되어 있었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붙이는 사진(지산면 인지리)에서 확인할 수 있겠지만 1970년대 전후까지만 해도 오색찬연한 꽃과 지전들로 상여를 장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색깔에 대한 해석도 차차 다루기로 한다. 이어 부변예방거(附變禮旁據). 계묘(啓墓), 천구(遷柩), 전상식(奠上食) 등이 거론된다. 재여전(載轝奠, 수레에 싣고 전 올리기)에서도 당골의 폐해를 집중적으로 지적하고 있다. 세상에서 간혹 처가 남편의 상변을 주관한 경우 신주에 ‘顯辟(현벽: 처가 있는데 아들 없이 남편이 죽으면 그 신주에 ‘顯辟’이라 쓰는데, 예기의 ‘남편은 皇辟이라 한다’는 말에 의거한 것이라고 한다)이라 쓴다. 자신을 ‘妻某氏’라고 일컫는 사례는 禮家들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다. 국법에 嫡妾이 아니고 따라서 無子한 사람은 양자를 허락하지 않는다. 그러나 첩의 자식도 또한 우리 선조의 혈맥에서 나온 소생이라면 承嫡(서자가 적자가 됨)이 가능하고 제사를 맡을 만하다. 더구나 내 몸이 정이나 이치상 당연히 제사를 맡을 만한데도 간혹 질투가 심한 아내나 욕심 많은 딸이 감히 선조의 말을 어길 수 없다하여 외손이 제사를 모신다는 핑계로 田宅을 모두 딸에게 준 경우가 있다. 그리고 우리 성씨를 잇는 첩의 자손이 표주박만 들고 걸식하다 종가가 망하고 제사가 끊어지게 하는 것은 실로 폐륜이며 常道를 문란하게 하니, 이 문제를 유념하지 않을 수 없다. 인가의 장자가 죽고 후사가 없으면 차자가 장자를 잇는데 이를 ‘兄亡弟及(형망제급: 맏형이 아들이 없이 죽었을 때, 다음 아우가 맏형 代身으로 계통을 이음)’이라 한다.
오늘날 풍속은 요망하고 허탄한 지관의 말에 많이 현혹된다. 자손이 零替하면 山禍(산화, 묏자리가 좋지 못한 탓으로 받는다는 재앙)탓이라 하고, 과거에 급제하지 못해도 산화 탓, 병에 걸려도 산화 탓, 衣食이 넉넉하지 못해도 산화 탓이라 하여 기어코 묘를 옮긴다. 그런 다음 우리집안 모든 일이 전보다 좋아지고, 내가 속으로 바라는 일이 이제 틀림없이 이루어진다고 믿고, 체백의 안부에 대해서는 오히려 열에 5~6명만 사건이라 생각한다. 故家들이 점점 추락하는데 반드시 여기에 원인이 없지 않다. 요즈음 남쪽 풍속을 보면 타 지역보다 천장(묘를 옮기는 일)을 열 배나 좋아한다. 대부분 輪圖(윤도, 지관들이 사용하는 나침반인 바퀴 모양의 나경(羅經)을 말한다)를 차고 다닌 자가 열에 칠 팔인데도 요망한 재앙을 내쫓는 자는 백에 한두 명도 없다. 그래서 아침에 쓴 묘를 저녁에 계장하는 것을 대수롭지 않은 일로 보고 오래된 묘를 파내면서 조금도 어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啓葬은 禮가 아니고 또 인정도 아니라 생각한다. 옛날에 孔子는 묘목이 묘를 침범하는 것을 근심했다. 그래서 지성으로 애통해하다 마침내 물을 다스려 저절로 물이 줄어들게 하였지, 계장했다는 일은 들어보지 못했다. 곧 朱子가 말한 ‘계장할 때 반드시 사당에 고한 다음 묘에 고하고, 그 다음 계묘하고, 장사하고, 장사를 마치면 제를 지내고, 돌아와 또 사당에 고하고, 곡한 다음 일을 마친다.’라고 한 것은 온당한 가르침이다. 그러나 이는 시속으로 인한 만류할 수 없는 폐단에 불과하다. 술을 따르는 일은 仁道상 합당하고 맞다. 그 중대한 일로써 살펴보면 의식의 법을 갖추는 것이고 주자가 아마 어쩔 수 없어 이런 말을 했을 것이다.
만약 위와 같은 인식이라면 서남해지역에서 광범위하게 행해졌던 초분 의례는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김이익의 비판에서 드러나듯이 진도사람들 대부분이 초분장을 하거나 이장(移葬)을 하고 혹은 오래된 묘를 파내는 일을 전혀 부끄럽거나 어렵지 않게 생각했던 것 같다. 체백의 안부에 대해 오히려 5~6명만 사건이라 생각한다거나, 윤도를 차고 다니는 이들이 칠팔 할이라는 비판이 이를 확인해준다. 요망하고 허탄한 지관이라 함은 점쟁이, 당골까지 포함하는 언급이다. 좁은 섬지역이라는 생태적 환경은 고려되지 않은 주문들임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비판은 계속 이어진다. 장례에 쓰이는 기구라는 것은 황토 두어 주먹과 백지 한속에 불과한데 스스로 넉넉히 준비했다 생각한다. 아이를 염하듯 싸고 묶어 걸인의 시체를 수송하듯 하는데 이런 일을 仁人 군자가 어찌 타인에게 행한단 말인가? 그리고 자손이라 이름한자가 차마 조부와, 부모에게 만고 천하에 어찌 이런 일이 있겠는가. 대개 사람이 세상에 살면서 壽夭와 貴賤, 貧富는 하늘에 달려 있고, 자신이 태어날 때부터 이미 분수가 정해져 있고 지금은 수척 땅속 깊은 구덩이에 맡겨져 있다. 그러나 사람이 이와 같은데도 마음에 하늘이 없고 하늘을 깔본 지 오래다. 아무리 그 어버이를 명당에 장사하였더라도 장차 하늘이 그 악을 갚는다면 覆滅로 지경에 이르게 하지 않겠는가? 더구나 현재 부모 백골을 꺼내자마자 다시 구덩이에 넣고 얼마 되지 않아 처자와 好合하고 붕우와 서로 기뻐한다면 다른 연고는 따지지 않더라도 유독 의관을 갖춘 자에게 자신이 부끄럽지 않겠는가? 지금 내가 여기에 붙여둔 한 조항은 주자가 남긴 교훈을 본받고자 하는 뜻이다. 그러나 두어 가지 전하는 말은 실은 주자도 평소 말하고 싶지 않은 말이다. 나 역시 내 뜻이겠는가. 슬프다.
슬프게도 남도의 준수한 자들은 본래 같은 이성(彝性, 타고난 떳떳한 본성)을 지녔는데도 어찌하여 지극히 슬픈 마음을 참고 어렵지 않는 일들을 포기하며 정상에 가깝지 않고 천륜이 아닌 인정을 달게 받아 들이는가? 지금부터 전에 한 행동을 부끄럽게 여기고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 자식 된 도리를 더욱 다한다면 당연히 매사 눈길 닿는 곳마다 부모님이 생각나고 애쓰지 않아도 슬플 것이다. 쓸데없는 비용을 버리고 어버이를 장사한다면 또 어려울 것 없고, 그런 다음 仁天의 죄인과 聖世에 질서를 어지럽히는 亂民을 면했음을 비로소 깨달을 것이니, 속히 함께 힘쓰고 영원히 전할 것을 도모해야 한다. 황토 두어 주먹과 백지 한 속, 아이를 염하듯 싸고 묶어 걸인의 시체를 수송하듯 한다는 대목에서는 지난 호 연재에서 언급해두었던 오쟁이쌈과 엄가시나무쌈을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아이의 시신을 오쟁이에 싸고 엄가시나무로 싸서 지게에 지고 초분골에 오르는 풍경을 짐작할 수 있겠기에 그렇다. 이것이 고대로부터 이어져오는 풍장(風葬)의 하나라고 소개한 바 있다. 김이익은 이러한 생태적 환경에 대해서는 모르쇠로 일관하면서 오로지 유교 이념과 절차를 준수하는 일만이 옳다고 강조하고 있다. 진도지역의 이차장 즉 초분을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대체로 생태환경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비판들임을 알 수 있다. 장례를 치른 지 얼마 되지 않아 처자와 호합한다는 비판도 생태적 조건을 고려하지 않은 시선을 노출한다. 예컨대 초봄의 절기를 맞춰 조기잡이를 나가야 하거나 들물 썰물의 물때를 맞춰 생업에 종사해야 하는 환경을 고려하지 않는 인식이기 때문이다. 김이익은 이런 시각을 중복하여 거론하며 진도사람들을 비판하고 있다. 아래 비판도 이와 같은 것인데 나로서는 중요한 사실을 환기해주는 대목이어서 더 거론해두기로 한다. 그러나 삼년 喪中에 폐지한 奠, 장사 전날 조객을 만나는 일, 상여 위에 꽂는 채색 꽃, 상여 앞에서 북을 치는 일을 끝내 버리지 않는다면 仁天의 죄인과 亂民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니 두렵지 않겠는가? 나는 일부러 중언부언 대서특필하여 알리고 또 고심하며 말한 것이다.
상여 앞에 북치고 장구치며 노래하는 ‘거전타고’는 물론이고 상여를 울긋불긋 오색으로 치장했다는 사실을 거듭 확인한다. 이 모든 것들이 무당의 교활한 짓이라 분석했으니 김이익을 포함한 조선의 학자들이 가진 의례의 척도가 어찌 편협하다 아니 하겠는가. 오히려 고려 이전의 풍속을 잇고 있다고 해석해도 부족할 텐데 말이다. 이는 조선 건국을 기획했던 삼봉 정도전으로부터 면면히 이어지는 유교 이데올로기일 수도 있다. 나는 이를 민화 관련 강의나 칼럼에서 백색 이데올로기라고 표현하곤 한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다음 차에 더 풀어서 설명하기로 한다. 아! 진실로 이런 폐단의 근본을 헤아려 보면 요망한 무당과 교활한 박수가 활과 화살을 만들어 선인을 수천백년 간 더러운 구덩이로 빠뜨린 짓이 아님이 없다. 이 같은 요망하고 교활한 말은 부녀자가 혹 질병과 우환에 걸렸을 때 믿고 감동하면, 가장이 당연히 냉정하게 꾸짖고 엄하게 배척하여 감히 근접을 못하게 막아야 한다. 그러나 지금 자신이 믿고 스스로 현혹되어 오히려 그들이 감히 신주를 옮기는 여부, 제사의 여부를 관여하게 한다. 그리고 머리를 숙여 그들의 명령을 따르고 신을 핑계로 祝手하게 하는데, 이런 짓을 한다면 무슨 짓을 못하겠는가. 요행히 이 지역에 살던 자가 혹시 타향으로 거처를 옮겨 마침내 이런 행동이 드러난다면 비록 잠시 자취를 용납받을 수 있으나 결코 면할 수 없을 것이다. 이제부터 하늘을 두려워한다면 모름지기 각자가 반드시 진심을 다 해야 할 것이다.
상례가 다 끝난 후에 제례를 행함에도 사당을 짓거나 위패를 모시지 않고 지방지로 대신하는 등의 풍속을 선량한 백성들을 교란하는 짓으로 이해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주영의 「사대부의 시선으로 본 무당의 형상과 그 의미」(한국고전연구 65집, 2024)에 의하면, 고려 말 이후 무당은 사대부들에게 배척당하고 비난받는 존재였으며, 조선 건국 이후 유교 사회의 질서를 어지럽히는 적대자로 인식되었다. 무당이 사대부들에 의해 ‘요사한 무당’, ‘가짜 무당’이라는 프레임 안에서 부정적으로 형상화되었던 것이다. 김이익도 이런 시선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않는 비판을 가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최종성의 「The Polarization Between the Confucian and Shamanic Culture in the latter half of Chosun Dynasty」(종교연구 34호, 2004)에 의하면, 조선 후기에 이르러 유교가 예제 및 법제의 정비를 통해 유교 문화의 정통성을 확보하였지만, 그것의 파장은 어디까지나 왕도와 국가의 공식적인 영역에 국한되었을 뿐이다. 유교는 무속문화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키기보다는 무속을 중심에서 주변으로 분리시켜 주변화시키려는 데에 급급했을 뿐이고 결국 예제와 법제를 동원하여 무속문화를 분리하고자 했지만, 무속은 근본적인 변화 없이 공식적인 영역에서 배제된 채 은밀하게 왕도를 오가며 왕실과 사적인 영역에서 지속되었다는 것이다. 사정이 이러하니 무속을 포함한 당대의 풍속들이 어찌 온전한 행로를 밟아 재구성될 수 있었겠나. 김이익이 비판했던 진도의 상장례 풍속도 이러한 틈새의 여지를 염두에 두면서 재해석하고 재비판하는 지혜가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3. 순칭록의 의미와 한계 김이익이 시종 ‘남도’로 표현하는 범주의 지역 풍속 중 다른 지역과 변별되는 점들을 비교해볼 수 있는 자료라는 점에서 중요하다는 점 거듭 환기해둔다. 내밀한 해석은 따로 하더라도 200여 년 전의 진도 지역 풍속의 한 측면을 엿볼 수 있다는 점만 주목해도 작은 성과라 생각한다. 유배 후 승승장구했던 행로를 보면 짐작할 수 있듯이 김이익은 조선 후기 중앙집권세력의 핵심위치에 있던 사람이다. 성세(聖世)의 문화, 곧 왕조 중심의 문화가 사례의 근간이라 여기고 실천했던 사람이다. 유배 섬 중의 대표적인 공간이었던 진도의 기층문화가 이와 달랐을 것이라는 점은 굳이 말할 필요조차 없다. 이를 “가엾고 병폐로 여겨” “풍속으로 교화”하고자 쓴 책이 순칭록임을 서문에서 밝히지 않았는가. “말한 사람은 적임자가 아니라 부끄럽지만”이라는 대목으로 보면 중앙과는 다른 진도의 기층문화를 인정하는 측면이 아닌가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교화해야 할 대상으로 진도의 풍속을 바라봤다는 점은 부동의 사실이다. 김이익의 순칭록은 사례편람 보다는 주자가례를 참고하였다고 생각된다.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위 의식은 풍속에 사용하는 의식과 맞지 않더라도 모두 朱子家禮에 있는 내용을 따라 증손(增損)하였으니 혹시 행하고 싶은 사람은 이것을 따라 홀기를 만들어도 무방하다.” 박진종이 편찬한 순칭록 서문에는 또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김공은 힘들여 원고를 쓰고 박옹은 고심하며 교정을 거쳐 인출한 뜻이 어찌 겨우 이 사례(四禮)를 행하다 그치려 함이겠는가? 어쩌면 이 책으로 인해 정확하고 자세히 구비된 『상례비요』와 『사례편람』에 맞게 점진(漸進)하고 싶어서였는지, 청향(淸向)한 진도 인사들에게 한편으로는 묻고 한편으로는 권면하노라.
다시 말하면 상례비요와 사례편람을 넘어서는 집필 목적이 있었다는 것이다. 사례편람은 도암 이재(1680~1746)가 주자가례를 바탕으로 일상에서 관혼상제의 사례를 적용하는데 편의를 주기 위해 편찬한 책이다. 순칭록은 그보다 60여 년 후인 1805년 초반에 쓰여진 글이지만, 실제 사례편람이 간행된 것은 이재의 사후에 수정, 보완 과정을 거쳐 증손 이광정이 수원 요수로 재직하던 1844년(헌종 10)에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보면 특기할 만한 성과라 아니할 수 없다. 오히려 1805년에 재구성되어 탈고된 순칭록이 더 빠르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다만 보편적으로 인용된 이재의 사례편람에 비해 순칭록은 진도 지역에 한정해 유통되었을 것이기 때문에 한계를 갖는 것은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적 기록으로서는 사례편람 발간 40여 년 전에 발간되었다는 역사성을 부여할 필요가 있다. 다만 전제해야 할 점은 사례편람의 상례는 김장생(1548~1631)이 친구 신의경(1557~ 1648)이 지은 초고를 수정, 첨삭 보완한 상례비요를 적극 참조하였다는 사실이다. 또한 상례비요 초고를 1620년에 전라도의 유생들이 1차로 간행하였다는 점에서 서로 영향관계를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사례편람이든 상례비요든 조선 초기부터 국가의 기본통치 철학이었던 유교의례라는 점에서 주가가례의 맥락 속에 편입되는 것이 사실이다. 김이익의 순칭록에서 얻는 교훈은, 어떤 시대, 어떤 지방 혹은 어떤 나라의 풍속을 교화하거나 개화시킨다는 명분으로 접근하는 것은 유효하지도 않고 옳지도 않다는 것이다. 진도 내에서 박진종과 소치 허련 등이 그들의 표현대로라면 진도의 풍속을 ‘개화’시키려 했으나 결국 실패하지 않았는가. 결국 문화란 주체적 수용자들과 창의적인 집단들에 의해 상속되고 혹은 변화하는 것이라는 점을 새삼 생각하게 해준다. 권세의 크고 작음을 떠나 김이익의 순칭록이 주는 교훈들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주목한다. 200여 년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풍속의 같고 다름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지배집단의 질서를 천륜에, 기층민중의 질서를 인정에 대비하고 있음이 역설적이다. 인정이라는 이름으로 사람 중심의 풍속을 미리 말해주었기 때문이다. 예컨대 부모가 정한 배필과 망설임 없이 혼인하는 양반들의 중매 풍속과는 다르다. 납폐(폐백)에 있어, 남쪽 지방 풍속은 오직 많이 보내는 것을 훌륭한 일로 여긴다고 비판한다. 또 거기에 가서 잡담과 장난을 하니, 이것은 무식한 상놈들이 하는 짓거리라 혹평한다. 바꾸어 말하면 진도 지역에서는 납폐를 오직 많이 보내는 것을 좋은 풍속으로 여기며, 잡담하고 장난하는 것을 좋은 일로 여겼음을 알 수 있다. 수년 동안 배필을 지켜보게 하고 심지어는 혼인 약속을 파기하는 풍속들이 등장한다. 사주단자 보내기에 있어, 무고(巫瞽, 무당과 판수)의 속설을 믿는 어지러운 풍속이 많아 혹은 궁합이 불길하다는 핑계로 사주단자를 받고도 약속을 어긴 경우가 있다고 지적한다. 오늘날로 말하면 점쟁이와 당골이 사주와 혼인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했음을 알 수 있다. 내가 최덕원의 해석을 받고 나승만의 현장 확인을 받아 이론화한 짝짓기 놀이 즉 강강술래 놀이의 맥락을 에둘러 확인할 수 있는 대목도 등장한다. 예컨대 택일단자 보내기에 있어, 날짜에 구애받는 일이 많았지만, 성혼날짜를 멀리 정하는 경우를 잘못되었다고 지적하고 있는 대목이 그러하다. 바닷일 조업에서 사망 사고가 잦았던 환경을 상고해보면 이해할 수 있다. 남녀 교합의 일이 중매 따위로 결정되는 메커니즘이 아니라는 뜻이다. 진도의 혼인풍속 중에 왜 성혼날짜를 멀리 잡았을까를 상고해보면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점쟁이와 당골이 관여하여 성혼의 이유와 날짜와 기타 의례들을 정한 이유를 포함해서 말이다. 부모의 묘를 나란히 쓰지 않고 따로따로 쓴다는 내용도 비판하고 있다. 가뭄이나 역병이 왔을 때 ‘도깨비굿’이라는 이름으로 가장 좋은 명당의 묘지들을 여성 전유의 반란으로 파헤쳐버리는 풍속에 대해서는 여러 차례 여러 지면에 다룬 바 있다. 풍수라는 이름의 공간 인식이 남도지역 특히 진도라는 공간에서 어떻게 소비되고 있었는지를 짐작해볼 수 있는 풍경들이다. 이 모든 결정에는 어김없이 풍속을 교란시킨다고 비판하는 당골과 점쟁이, 그 이면의 여성 혹은 여성성이 등장한다. 김이익은 줄곧 지관이나 무당, 점쟁이의 말에 현혹되는 일이 실로 호남처럼 심한 곳이 없다고 비판하고 있다. 이를 거꾸로 읽으면 역설의 풍경이 펼쳐진다. 그때의 당골과 점쟁이에 의존하는 습속이 현대의 고등종교 역할로 겹쳐질 수 있다. 의사결정의 패권은 남성보다는 여성에게 주어진다. 무엇보다 순칭록이 주는 교훈은 현재, 여기, 우리의 풍속을 읽고 이해하는 역설적 안목은 물론이고, 적어도 남도가 남성 중심의 이데올로기에 함몰되지 않은 여성적 권위의 기층 질서를 토대 삼았다는 데 있지 않을까 싶다. 원고의 양이 너무 많아졌으므로 김이익의 시선과 순칭록 서술의 배경에 대해서는 다음 차에 다시 거론하기로 한다.
1) 표제/저자사항 家庭節檢 : 原循稱錄 / 金履瀷 著
출판사항 木活字本 발행사항 珍島: [朴晋遠], 昭和4(1929) 형태사항 不分卷 1冊: 四周單邊, 半廓 22.0 x 17.7 cm. 有界. 10行20字, 注雙行. 內向黑魚尾; 28.5 x 19.9 cm 주기사항 四禮倣略序: 歲戊辰(1928)陽月 浮海 安宅承序, 古序 是歲之季夏下旬 牖窩纍人 安東 金履翼書 合綴(附): 詩社百選 / 朴晋遠 編 版心題: 循稱錄 2) 여기서의 ‘남도’는 현재의 ‘전라남도’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국어사전에 의하면, 남도는 경기도 이남의 충청도와 전라도, 경상도, 제주도를 통틀어 이르는 말이라 하고 있다. ‘남도’의 정체에 대해서는 졸고의 여러 주장을 참고하면 도움이 된다. 글쓴이 이윤선 문화재청 문화재전문위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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