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문서와 옛편지] 가끔은 월급도 복고풍으로 게시기간 : 2024-06-26 07:00부터 2030-12-24 21:21까지 등록일 : 2024-06-24 1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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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와 옛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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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급날엔 봉투를 가불하는 재미로 출근~하다가 월급날은 남~몰래 쓸쓸해~진다
이것저것 제~하면 남~는~건 남는건 빈 봉투 가불하는 재미로 출근~하다가 월급날은 남~몰래 쓸쓸해~진다 이것저것 제~하면 남~는~건 남는건 빈 봉투 한숨으로 봉투~속을~ 채워나~ 볼~까 외상 술을 마시면서 큰소~리 치고 월급날은 나~ 혼자 가슴을~ 친다 요리조리 빼앗기면 남~는~건 남는건 빈 봉투 어떡하면 집 사~람을~ 위로해~줄~까 가요 <하숙생>으로 유명한 가수였던 최희준의 노래 <월급봉투> 가사이다. 돈을 미리 당겨쓰는 가불을 맘껏 하다 월급날에 갚고 나면 남는 건 텅 빈 봉투다. 현금 가득한 두툼한 봉투를 받았을 때 마음은 한껏 부푼다. 월급봉투가 얇아져 가고 빈 공간이 커질 때마다 부푼 마음은 푹푹 꺼진다. 외상 술 마실 때 큰소리는 월급날 한숨이 된다. 월급날은 손끝에 현금이 걸리는 짜릿함을 맛보는 날이다. 밀린 빚을 갚고 난 빈 봉투에 허탈감을 주는 날이기도 하다. 월급은 한 달동안 일한 대가로 받는 돈이다. 한 달에 한 번만 받기 때문에 ‘월급’과 관련한 일화들은 수없이 많다. 현금을 받는 날이어서 소매치기나 강도들은 이날을 노렸다. 돈을 빌려준 사람들이나 외상을 받았던 이들에게는 기필코 돈을 받아내는 날이다. 월급에는 꼭 따라붙는 게 있었다. 봉투이다. 돈과 황금이 가까운 사이여서 그런지 봉투도 황금빛에 가깝다. 대개 노란색 계열이다. 봉투에는 월급 받을 사람의 이름, 월급 내역과 금액이 쓰여져 있다. 한 달에 한 번 지급하는 형태인 월급은 1894년 갑오경장 때부터 시작되었다고 한다. 이때부터 현금으로 지불했는데 꼭 봉투에 넣어서 주었다.
<매일신보> 1937년 11월 27일 기사.
<매일신보> 1934년 9월 3일 기사. 녹봉 수령 증명서- 녹패와 재직증명서를 함께 내야 어떤 기관이나 기업, 사업장 등에 소속되어 일하며 그 대가로 받는 것을 월급이라 부른다. 한 달에 한 번 주기 때문이다. 조선시대에도 지금의 월급제도와 같은 것이 있었다. 조선시대에는 월급이 아니라 녹봉 또는 월봉이라고 불렀다. 왕의 혈족인 종친, 벼슬아치, 나랏일을 맡아 처리하는 서리 집단이나 군직 등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받았다. 나라의 통치와 관련한 일을 하는 이들을 대상으로 한 제도인 셈이다. 현대식으로 하면 공무원급에 속하는 이들의 월급체계와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기관이나 기업, 사업장에 들어가 근로계약서를 쓰고 일을 하면 그에 상응하는 대가인 월급을 받는다. 지금은 월급을 받기 위해 별도로 무엇인가를 제출하여 증명하지 않는다. 그런데 조선시대에 녹봉을 받으려면 증명서가 늘 있어야 했다. 그것이 녹패(祿牌)다. 녹패는 그 소지자가 녹봉을 받을 자격이 있음을 증명하는 문서이다. 관직에 임명되면 받을 수 있다. 관직에 임명되었음을 증명하는 문서는 고신(告身)이다. 고신이 있으면 녹패 발급 신청 자격이 생긴다. 고신을 받은 즉시 문관은 이조에, 무관은 병조에 녹패 발급 신청서를 제출한다. 조선초기 녹패 발급 기관은 삼사(三司)였다. 1466년 세조는 발급 기관을 바꿨다. 문관은 이조에서, 부관은 병조에서 각각 나눠 관장하라는 명을 내렸다. 이조와 병조에서는 고신을 확인한 후 녹패를 발급해 준다. 녹패도 정부의 공식 문서이므로 정해진 형식이 있다. 녹패는 접어서 사용하기도 했던 듯하다. 접었을 때 겉면에 해당하는 부분과 안쪽 부분으로 나뉜다. 겉면에 해당되는 곳에는 관직과 이름, 간지 등을 썼다. 안쪽에는 좀더 구체적인 내용을 기재하는데 관직, 성명, 해당 간지와 녹과 사항, 발급한 연월일을 썼다. 그리고 녹패 발급 기관의 판서, 참판, 참의, 참지, 정랑, 좌랑 등 관직 위계 순서대로 적고 서명했다. 녹봉 받을 이의 녹과가 몇 등급인지 기재되므로 그 등급에 맞게 받을 수 있다. 녹패가 없으면 녹봉을 받을 수 없었다. 녹봉 수령 증명서였던 것이다.
그런데 조선시대에도 부정수급자가 많았던 모양이다. 녹패를 위조하여 녹봉을 받아가는 일이 종종 발생했다. 녹봉 받을 사람이 실제로 어느 부서에 어떤 직급으로 재직하고 있는지 확인할 필요가 생겼다. 재직하고 있음을 증명하는 문건이 있어야 했다. 이럴 때 쓴 것이 고신이었다. 고신은 관직 임명장으로 녹패에 쓰인 관직과 고신에 쓰인 관직이 동일한지, 동일한 사람인지 등을 대조하여 확인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김훤(金煊)은 1772년 6월 병조참지에 임명되었다는 교지 즉 고신을 받았다. 곧바로 이어서 녹봉을 받을 수 있는 증서인 녹패를 발급받았다. 그 녹패를 보면 겉면에 通訓大夫兵曹參知(通訓大夫兵曹參知)라고 쓰여져 있다. 글씨는 해서인데 가로로 길게 늘여 써서 마치 전서체 같은 느낌을 준다. 가운데 부분에 김훤(金煊) 이름을 쓰고 아래쪽에 간지가 있다. 안쪽에는 ‘교사통정대부병조참지 김훤(敎賜通政大夫兵曹參知 金煊)’이라 쓰고 날짜인 임진년 7월 그리고 빈 칸을 두고 ‘과록자(科祿者)’라는 녹과 내용을 썼다. 다만 여기에 당시 김훤이 몇 과에 속하는지 구체적으로 명기되지 않았다. 임영은 1688년 8월에 호조참의지제교에 임명되었고 그 해 9월에 녹패를 발급받았다. 겉면에 해서체를 가로로 늘여 ‘통정대부호조참의지제교(通政大夫戶曹參議知製敎)’라고 썼고 그 아래에 간지를 썼다.
녹패와 임명 교지인 고신을 챙겨서 녹봉을 받으러 갔다. 녹봉 지급처는 광흥창(廣興倉)이었다. 광흥창은 지방에서 올라오는 공물을 받아 관리들의 녹봉을 지급하는 일을 맡았다. 서울 창천동 지역에 있었다고 하는데 현재 지하철 6호선 광흥창역 부근으로 지하철 1번 출구쪽에 광흥창 터 표지가 있다. 광흥창 관리들은 녹봉을 받으러 온 관리들에게 녹봉을 내주었다. 그리고 그 내역을 녹패에 직접 써주었는데 정조 때 들어서는 작은 쪽지에 따로 써서 주기도 했다. 이를 반록첨지(頒祿籤紙) 또는 소편지(小片紙)라고 한다. 김훤은 1772년 7월 즈음에 쌀 1석 9두(斗)와 태(太) 1석 5두를 받았다. 조선시대, 녹봉(祿俸)날엔 자루와 말이 있어야 녹봉의 양은 지위의 높고 낮음에 따라 달랐다. 조선의 법전인 『경국대전』에 규정되어 있다. 지위를 18등급으로 구분했는데 등급 명칭은 과(科)이다. 제1과부터 제18과까지 나눈 후 그에 해당하는 신분 또는 직급을 기재했다. 이를 테면 제1과는 최상 등급으로 여기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들은 왕의 적자인 대군(大君), 왕의 서자인 군(君), 정일품(正一品)의 품계에 속하는 벼슬에 있는 사람들이었다. 제2과에는 대군의 계승자, 종일품(從一品) 관료들이 들어갔다. 벼슬의 품계는 1품부터 9품으로 나눴고 그 안에서 정(正)과 종(從)으로 나누었으므로 등급이 18개여서 18과로 분류했다. 이를 녹과(祿科)라고 했다. 이 등급에 따라 녹봉을 지급했다. 지금도 직급이나 지위를 나누어 월급 액수를 정하는데 그 방식과 비슷하다. 녹(祿)은 미곡(米穀), 봉(俸)은 포백(布帛)을 의미한다고 한다. 그래서 녹봉의 지급물은 쌀을 포함한 곡물이나 베, 명주, 면 등이었다. 『경국대전』에 의하면 중미(中米), 조미(糙米), 전미(田米), 황두(黃豆), 소맥(小麥), 주(紬), 정포(正布), 저화(楮貨) 등으로 주었다. 중간 등급의 쌀, 현미, 좁쌀, 누런 콩, 밀, 명주, 삼베 그리고 종이 등으로 일한 보수를 주었던 것이다. 지금은 현금으로 주지만 조선시대에는 지금처럼 전적으로 화폐로 교환하던 때가 아니었다. 삼베나 면과 같은 옷감 또는 쌀 등으로 교환 가치를 매겼다. 그러다보니 녹봉도 화폐 같은 현금보다는 현물 중심으로 구성했다.
녹봉은 대개 1년에 네 번 지급하는 이른바 사맹삭반록제(四孟朔頒祿制)였다. 맹삭이란 네 계절이 시작하는 달이라는 말이다. 1월, 4월, 7월, 9월에 녹봉을 나누어주었다. 녹봉의 양도 법으로 규정했다. 제1과에 든 이들이 봄에 받는 양은 중미 4석, 조미 12석, 전미 1석, 황두 12석, 명주 2필, 정포 4필, 저화 10장이었다. 저화는 종이여서 가볍게 가져갈 수 있을 터이지만 곡식과 직물은 무게도 나갈 뿐 아니라 부피도 제법 되었다. 삼베인 정포의 경우 5승포 1필의 길이가 35척이었다. 폭이 35cm, 길이가 10.6M 정도였다고 하니 4개를 가져가지는 쉽지 않았다. 곡식과 직물을 함께 가져가려면 운반할 사람과 말이 필요했다. 녹봉은 자루에 담았을 터이고, 명주와 삼베도 자루에 넣었을 터이다. 짐 무게가 무거울수록, 짐 부피가 큰 만큼 뿌듯함과 즐거움, 희망도 더불어 커지지 않았을까. 월급 로그인 시대, 가끔은 느끼고 싶은 월급봉투 한달에 한번 임금을 지급하는 월급제를 실시한 때가 1894년 갑오경장 때라고 한다. 지금의 월급제도의 시작이라고 한다. 이때부터 현금으로 지급했다. 조선시대에도 한달에 한번 지급하는 일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이서(吏胥), 군병들에게는 매달 지급했다. 또 1746년에 반포된 『속대전』는 매달 지급하는 규정이 생겼다. 다만 여전히 현금이 아니라 곡식이나 직물 같은 현물 형태였다. 이 두 가지는 모두 ‘손’으로 만지며 그것이 일한 대가임을 몸소 직접 체감할 수 있는 것이었다. 손 끝에 느껴지고 손 안에 들어오는 묵직함은 지난 한달 동안의 힘듦을 날려 버리는 힘이 있었다.
현금을 넣었던 월급봉투들. 1990년대로 들어서면서 온라인 시스템이 거의 완비되자 이제 월급은 ‘우리’를 거치지 않고도 ‘들어왔다.’ 손으로 ‘받는’ 월급에서 ‘들어오는’ 월급으로 바뀌었다. 노란빛 월급봉투는 없어졌다. 통장에 월급액이 찍히는 대신 하얀색 월급 명세서를 받았다. 그리고 어느 사이엔가 하얀색 명세서도 더 이상 나오지 않게 되었다. 월급에 관한 한 모든 일들은 ‘우리 손’이 없는 듯이 이루어졌다. 손으로 ‘만지고 느끼’지 못하고 ‘눈’으로 보기만 한다. 그래서 이제는 월급날보다 ‘월급이 로그인하는 날’로 바뀌었다. 몸에서 떨어져 나갔다. IMF 직후인 1999년, 한 기업에서는 월급을 은행으로 송금하지 않고 하나하나 현금을 봉투에 넣어 지급했다. 당시 관계자 말에 의하면 한달 동안 열심히 일한 대가를 ‘직접 손으로 받게 해’ 직원들의 사기를 북돋워주려는 취지였다고 한다. 조선시대 녹패를 받고 녹봉을 받을 수 있다는 부푼 마음, 곡식과 직물을 잔뜩 싣고 돌아올 적의 흥겨움, 두툼한 월급봉투를 받았을 때의 기쁨 등은 손끝 촉각을 통해 전해졌다. 한 연구에 의하면 좋아하는 것을 촉각으로 느낄 때 안정감 같은 긍정적인 정서 상태가 된다고 하니 녹봉 자루나 월급봉투는 쓸모없는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요즘은 레트로가 트렌드인가보다. 과자부터 패션까지, 음악계에서도 LP판이 인기라고 한다. 월급도 그럴 수 있지 않을까. 황홀한 순간을 안겨주는 월급봉투 이벤트는 어떨까. ‘우리’를 패싱하는 월급이여, 봉투를 타고 손끝으로 돌아오기를. <도움 받은 글들> 규장각 https://kyudb.snu.ac.kr/
대한신문아카이브 https://nl.go.kr/newspaper 한국고문서자료관 https://archive.aks.ac.kr/ 한국고전종합 DB https://db.itkc.or.kr/ 김병근(2017),「마도 4호선 출수 목간」, 『목간과문자』19, 한국목간학회. 김혁(2002),「『이재난고』를 통해 본 조선후기 사회사 : 조선시대 녹패 연구」, 『고문서연구』 20, 한국고문서학회. 박평식(2012),「조선초기 화폐정책과 포화유통」, 『동방학지』 158, 연세대 국학연구원. 신유아(2010),「조선전기 녹봉의 반급과 관료가계」, 『역사교육』 114, 역사교육학회. 안시내,이정원(2015),「선호하는 촉각 이미지가 뇌파에 미치는 영향」, 『한국신경인지재활치료학회지』 7, 한국인지운동치료협회. 임성수(2015),「조선후기 녹봉제 연구」, 『동방학지』 169, 연세대 국학연구원. 임영현(2015),「조선시대 녹패의 제도와 양식」, 『고문서연구』46, 한국고문서학회. 최정환(1982),「조선전기 녹봉제의 정비와 변동」, 『복현사림』 5(1), 경북사학회. 글쓴이 김기림 조선대학교 기초교육대학 부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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