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지의 초상] 일본 군수공장 폭파를 계획한 박진철(朴鎭哲, 1924~2006) 게시기간 : 2024-07-03 07:00부터 2030-12-24 21:21까지 등록일 : 2024-07-02 1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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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지의 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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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머리말 실제 사실을 소재로 한 역사소설은 그 자체로서 또 다른 역사의 기록이다. 본인의 독립운동 사실을 담담히 신문에 연재한 박진철 선생의 『조국의 산하』는 비밀결사를 조직한 재일 유학생들의 생생한 항일독립운동사이다. 1966년 당시 전남매일에 ‘실화소설’로 연재된 선생의 그의 독립운동사는 1967년 『조국의 산하』로 출판되었다. 그는 “왜정 36년 동안에 겪은 우리 겨레들의 고난은 사실 그대로 녹음해 두었다가 뒷날의 자손들에게 알려주어야 할 의무가 있다.”는 신념으로 ‘조국의 산하’를 집필하였다고 하였다. 조국 프랑스가 나치의 수중에 들어가자 레지스탕스에 참여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다 총살형을 당한 ‘역사가를 위한 변명 Apologie pour le métier d'historien’이라는 불후의 명저를 남긴 소르본느 대학 교수 마르크블로흐(Marc Bloch)가 연상된다. 그의 저서에서 성도회, 라빗트 등 우리가 잘 몰랐던 재일 유학생들의 빛나는 독립운동단체가 소개되었다. 이들 단체는 당시 신문, 일본 당국의 기록에 남아 있어 박진철의 증언이 역사의 진실을 반영하고 있음을 알려준다. 미결수로 수감생활을 하며 겪었던 고초들이 사실적으로 설명되고 있다. 본서가 지닌 사료적 가치가 무궁무진함을 를 설명하고 있다. 박진철 선생은 해방 후 대한민국 교사가 되어 전남 교육 발전에 이바지하였다. 그의 교육자의 삶 또한 재조명 가치가 충분하다. 필자는 최근 『독립운동가 교사가 되다』(2022, 전남교육청)에서 그의 삶을 처음으로 소개한 바 있다. 출간 이후, 박진철 선생의 딸과 사위를 만날 수 있었다. 1929년 11월 12일 광주학생독립운동에 참여한 조용표 선생이 딸의 시아버지였다. 2. 식민체제에 울분을 삼킨 섬 소년 박진철은 1924년 당시 무안군(현재 신안) 압해도 신장리에서 태어났다. 본적은 ‘목포 福滿洞 2의 6’으로 되어 있으나, 당시 떨어져 살던 아버지의 주소지를 따른 것일 뿐이고, 원래 출생지는 압해도였다. 어렸을 때는 병문(炳文)을 이름으로 사용하였다. 박진철의 가족이 압해도에 살게 된 것은 한말 의병에 참가한 증조부 박윤식이 이 섬에 몸을 은닉하면서였다고 한다. 박진철은 어렸을 때 압해도에서 할아버지가 운영하는 서당에서 한학을 배웠다. 이후 그는 8살 때 목포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하였다. 1907년 개교한 목포보통학교는 1932년 목포제일보통학교로 개명하였고, 현재의 북교초등학교이다. 목포 공립보통학교는 1919년 목포 3·1운동, 1921년 목포 정명여학교 학생들이 주도한 학생운동, 1929년 목포상업학교 학생들이 주도한 학생운동에 참여하는 등 빛나는 독립운동을 자랑하고 있다. 이러한 목포보통학교의 독립정신은 어린 진철의 뇌리에 자리 잡았다. 보통학교를 졸업한 박진철은, 1927년 설립된 3년제 송정공립공업실수학교 공예과에 진학하였다. 현재의 광주광역시 광산구 송정동에 세워진 송정공립공업실수학교는, 1944년 4월 1일 목포상업학교가 공업학교로 바뀔 때 병합되어 목포공업학교가 되었다가 해방 직후 목포공업중학교로 교명이 바뀌었다. 그는 공예과에 진학하고 일본에 유학할 때도 일본대학 예술대학(창작전공)을 선택하였다. 그는 훗날 교사 재직 중에도 많은 창작활동을 하였다. 이는 그의 내면에 예능적 끼가 숨겨져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어릴 적부터 책 읽는 것을 좋아하고, 글쓰기를 좋아한 전형적인 모범생이었다. 그가 남긴 회고록에도 자신을 다음과 같이 소개할 정도였다. “나는 순진한 학생이다. 그저 도서밖에 몰랐다. 민족주의 사상이란 모르고 지내 온 터다. 다만 내 민족이 왜놈들로부터 모진 학대를 받을 때 나도 한국 사람이라는 민족의식에서 떨었을 뿐이다.”.
그는 누군가에게는 ‘너는 극히 내성적이며 순진하게 공부밖에 모르는 녀석’이라는 소리를 듣기도 했다고 회고하였다. 그의 민족의식은 안으로 뜨거운 용암이 되고 있었다. 3. 민족의식을 각성한 일본 유학 생활 아직은 민족의식이 표출되기에는 어린 감수성이 풍부한 박진철은, 1941년 아버지의 권유로 일본 유학을 떠났다. 일본대학 전문부 예술대학 예과에 진학하여 문학을 공부하였다. 일본대학은 1889년 설립된 일본의 대표적 사립대학이다. 그가 일본 유학에 왔을 때는 1937년 중일전쟁을 일으킨 일본이 1937년 국가총동원법 및 황국신민서사 제정, 1938년 지원병 제도 시행 등으로 우리 민족을 전쟁에 끌어들이는 만행을 저지르고 있을 무렵이었다. 이러한 현실을 무기력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자신을 한없이 책망하였다. “불쌍한 할아버지·할머니·아버지·어머니들은 그들의 학대에 떨고만 있었다”고 하는 그의 회고는 이를 말한다. 현실을 답답한 심정으로 받아들이며 학업에 열중하던 그의 인생을 바꾸어 놓은 것은 유학생으로 도쿄에 와 있던 양회종을 만나면서부터였다. 양회종은 아버지와 친분이 있어 어렸을 때 잘 알고 있었던 사이였다. 화순군 이서면 출신으로, 보통학교 재학시절부터 일본인 교사의 교육방침에 저항하였던 양회종은, 1936년 4월 일본 정칙중학교에 입학한 후에도 항일운동을 계속하다 일본경찰서에 40일 구금되었다. 이로 인해 퇴학당하였던 양회종은, 일본 동경에 있는 한인 유학생들이 조직한 ‘라빗트 그룹’에서 주도적 역할을 담당하였다. 이 그룹은 매주 수요일에 한 번씩 모였기 때문에 일명 ‘수요회’라고도 하였다. 라비트 그룹은 ‘뛰는 토끼’라는 뜻으로 그만큼 적극적으로 활동하자는 의미에서 붙여진 이름이었다. 다음은 라빗트 그룹의 강령이다. 첫째, 우리 회원은 인격도야 학술 연마에 힘써 친화 협동한다.
둘째, 우리 회원은 조상의 명예를 존중 선양한다. 셋째, 우리 회원은 민족 정의로 사명을 달성한다. 라빗트 그룹은 표면상 문학을 좋아하는 모임으로 위장하였다. 회장은 중산(中山), 회원은 손호주, 이종석, 양회종, 안혁주, 백남순, 김강현, 김상봉 등 33명이었다. 양회종은 1939년 8월 2일 여름방학을 맞아 귀국하였는데, 관부연락선에서 불심검문을 받았다. 그의 가방에서 ‘전쟁과 평화’라는 제목으로 기고한 라빗트 잡지가 압수되었다. 이 때문에 라빗트의 실체가 드러나 국내에 들어와 있던 양회종을 포함하여 손호주, 이종석, 김장곤 등이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양회종은 이듬해 집행유예를 받고 석방되었다. 다시 일본에 건너간 양회종은, 1941년 4월 메이지대학 법학부에 입학하였다. 1943년 9월 졸업 후 고국으로 돌아와 무료 변론 활동을 하려 하였다. 그러나 이 무렵 학병 강제 징집이 발표되었고, 소집영장이 나왔던 양회종은 귀국선에서 체포되었다. 가까스로 도피한 양회종은 신분증을 위조하여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평소 알고 지냈던 일본대학에 재학 중인 박진철의 하숙에 머물렀다. 그때 박진철 또한, 학병으로 징집 처지에 있었다. 양회종은 만연해 있던 조선인 학생에 대한 교육 기회 차별, 일제의 언어와 문자 박탈, 조선의 젊은이들 강제 동원의 부당함을 강변하며 학병을 거부할 것을 권유하였다. 이때의 박진철 심경이 『조국의 산하』 에 들어 있다. “학병의 소집영장을 받고 그대로 일본 동경으로 기피해 간 ‘야나가와(양회종 일본 이름)’라는 이름의 청년은 거기서 청년을 모아 지하조직을 하고 저항운동에 나섰던 것이다. 그때 나는 너무도 부끄러울만큼 의지도 약하고 활동력도 없었다. 다른 동지들에게는 따르지 못했던 사람이다.”
박진철이 양회종을 만난 이후 독립운동에 뛰어들 결심을 확고히 했음을 알 수 있다. 양회종은 그가 중심이 되어 활동하고 있던 재동경 한인유학생들이 조직한 독립단체인 ‘라빗트 구락부’에 박진철을 가입시켰다. 동경 형사지방재판소 검사국으로 끌려갔을 때 예심검사 다나카가 쓴 조서 일부이다. 박진철이 회고한 내용 일부이다. “(전략) 피고 박진철은 소화 19년(1944년) 3월 7일 하숙집에서 그전부터 친교가 두텁고 또 고향의 선배인 양천회일(梁川會一, 양회종의 창씨)이 나의 하숙집을 찾아왔다. (중략) 양회종을 회장으로 하고 이하 12명을 회원으로 하는 성도회는 독서회를 가장한 조선 민족 독립운동의 뿌리 깊은 조직으로 하여 일본 정부 타도를 꾀하고”
한편 양회종이 알려준 대로 박진철은 입대를 위한 신체검사 전에 간장 여러 컵을 마시고, 설사약을 복용하며 건강을 악화시켜 지금의 상근예비역 정도에 해당하는 병종(丙種)을 받았다. 당시 병종은 당장 전쟁에 끌려가지는 않아도 되었기에 시간을 번 박진철은 조국 광복을 위해 적극적으로 활동하였다. 4. 일본 군수공장 폭파 계획 수립과 투옥 양회종이 여러 차례 투옥되고 일본 경찰의 감시를 받으며 라빗트 구락부는 세력이 약화되어 있었다. 1944년 5월 양회종은 동경에 노동자로 살며 틈틈이 행상을 가장하여 동경을 오가며 13명의 동지를 모아 ‘성도회’라는 단체로 라빗트 구락부를 재편하며 조직을 재정비하였다. 성도회는 동포가 많이 모이는 곳을 돌며 한국인 유학생들을 대상으로 독립정신을 전파하고 학도병을 징발을 거부하도록 종용하는 활동을 하였다. 주로 회원들이 주변을 탐문하여 유학생에게 접근한 후 특정 장소로 불러낸 후 설득하는 방식이었다. 박진철은 일본에서 야간중학교에 적을 두고 있던 두 사람을 끌어들이는 등 적극적으로 활동하였다. 박진철은 1944년 9월 졸업을 앞두고 있었다. 전시동원 체제였던 당시 학생들은 졸업을 앞두고 누구나 의무적으로 일정 기간 군수공장에서 일을 해야 했다. 신체검사에서 병종을 받은 데다 명문대생이었기에 그는, 미쓰비시 군수공장에서 육체노동이 아닌 등사물 제작 업무를 맡았다. 당시 미쓰비시 군수공장은 일본에서 제일가는 대규모 시설이었고, 경영주는 일본 3대 재벌 중 하나였다. 이곳에서 자연스럽게 비밀서류들을 접할 수 있었던 박진철은 은밀히 기밀 문서를 빼돌려 양회종에게 전달하였다. 양회종은 이를 바탕으로 폭탄을 제조하여 군수공장 폭파 계획을 세웠다. 성도회의 목적이 폭력혁명에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던 중 박진철, 양회종 등은 1944년 9월 12일 그를 감시하고 있던 일본 헌병에 체포되었다. 졸업을 불과 사흘 앞둔 상황이었다. 스가모 헌병대로 끌려간 박진철은 양회종과 함께 거꾸로 매달고 코에 물 넣어 기절시키기, 잠을 재우지 않는 불침 고문, 손가락에 전선을 연결한 전기고문 등을 무려 59일간 당하며 조사를 받았다. 사실 헌병대는 양회종과 박진철의 뒤를 3개월 동안 밟으며 성도회 동료들을 모집한다는 것과 군수공장 문서를 빼돌린다는 사실을 파악하고 있었다. 또한 박진철이 고향 후배인 김군호에게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 일본군대는 피해라. 일본은 반드시 전쟁 오래가지 않는다. 일본은 지고야 만다. 그때까지만 피신해라”는 내용의 편지를 보낸 사실도 파악하여 추궁하였다. 1944년 11월 9일 박진철과 양회종 일행은 지옥 같은 스가모 헌병대로부터 소압 형무소로 이감되었다. 미결수로 형무소에 이감되어 재판을 기다리며 수감생활을 하였다. 감방의 배치 상황은 양회종 4사(舍) 1층 55방(784번), 박진철 6사 2층 26방(978번), 백남식 2사 2층 53방(369번), 김병수 6사 1층 18방(793번), 박성구 2사 1층5방(57번) 등으로 분산되어 있었다. 이때 체포된 사람은 11인이었다. 입감된 날 정황이 동료 박진철의 증언 『조국의 산하』에 담겨 있다. “초겨울의 차가운 날씨에 형무소에 갇힌 이들은 팬티도 벗기고 ‘훈도시(일본인들이 팬티 대신 쓰는 것)’ 한 장씩 걸치게 하였다. 점심 때가 지나도 밥을 주지 않고 굶기자 양회종은 이에 항의하였다. 그러자 간수가 매질하였다. 대꾸 한마디에 곤장이 세 대였다고 한다. 곤장을 맞으면서도 양회종은 굴복하지 않고 항의를 계속하였다. 매듭이 있는 로프 줄이 훈도시 뿐인 알몸에 차르르 휘어감길 때마다 회종은 숨이 끊겼다. 뱀 같이 살에 줄이 서고 얼룩투성이다.”
계속된 그의 수기에는 일본 감옥의 모습이 설명되고 있다. 식사는 5등 잡곡밥이었다. 1, 2등급은 강도·절도범으로 중노동에 임한자. 3등은 경노동, 4등은 감방 작업, 5등은 미결수로 구분하였다. 사기그릇에 주먹 만도 안되는 양이었다. 반찬은 된장 한점이었다. 이때는 태평양 전쟁 말기로 일본의 패색이 짙어 연일 동경 상공에는 연합군의 폭격이 계속되고 있었다. 가혹한 수감생활은, 박진철의 애국심을 불타게 하였다. “우리가 하루 아침에 일본 경찰의 손에 체포되어 ‘스가모’ 감옥으로 넘어간 뒤부터, 우리는 그야말로 인간 이하의 푸대접을 받아야만 했었다. 인간의 존엄성이란 감옥 속에서는 삭제된 사실이었다. 우리는 다만 조국을 부르고 사모했을 따름이었다. 목이 메었다. 사슴이 호수를 찾듯 애타게 조국을 사모할 뿐이었다”
일본 검찰은 성도회원들이 예심을 4회나 받았음에도 의도적으로 정식 재판을 청구하지 않았다. 1945년 8월 7일 증거불충분으로 출감하였다. 전날 있었던 히로시마의 원자폭탄 투하가 작용하였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일본 당국은 그를 바로 내보내지 않고 ‘동경사법보호소’로 인계하였다. 출감할 때 24일간 감방작업을 하였다고 2원 40전과 출감증명서를 주었다. 보호감호소에 있던 박진철은 1945년 9월 30일 풀려났다. 해방이 한참 지나서였다. 10월경 나가사키에서 부산을 거쳐 고향에 돌아왔다. 5. 인간다운 인간 양성 교육 박진철은 해방 이후 한국으로 돌아와 교직생활을 하였다. 그는 1945년 12월 초 수피아여학교에서 교직을 시작하였다. 수피아여학교에서 교직 생활을 한 이유가 일제 강점기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동맹휴학을 했던 학교였기 때문이었다고 밝혔다. 하지만 무교였던 그가 종교재단이 설립한 학교에 다니기에는 어려움이 있어 이듬해 목포상업고등학교로 옮겼다. 그런데 당시 목포상업학교에는 일제강점기 군수를 지낸 사람이 교장을 하고 있었다. 그는 교장과 갈등을 빚다가 광주로 옮겨 다시 사립학교인 광주상업학교 교사가 되었다. 광주상업학교 재직 중 6·25 전쟁이 발생하였다. 광주 역시 인민군의 수중에 들어가 학교에는 인민위원회가 임명한 새 교장이 임명되었다. 새 교장은 이전 교장을 학교 창고에 가두는 등 권력을 휘둘렀다. 분노한 박진철은, 교장에게 강력하게 항의한 후 인민군의 보복을 피해 피신하였다. 전쟁이 끝나고 그는 공립학교인 담양중고등학교 교사로 복귀하였다. 그는 주로 학교에서 국어를 가르쳤다. 이후 목포여자중학교, 충장중학교, 흑산중학교 교사를 거쳐 영광고등학교, 비금중고등학교에서 교장을 지냈다. 교육에 대한 공로를 인정받아 전라남도문화상을 수상하기도 하였다. 박진철은 2005년 인터뷰에서 꼭 남기고 싶은 말을 묻자 굴원의 「어부사」를 제시하였다. 세상 모든 것이 탁해있다고 하더라도 어찌 나까지 탁해질 수 있냐는 내용으로 개개인이 맑고 깨끗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생각은 학생 지도에도 반영되었다. 광주 학창 시절 그에게 국어를 배운 문학평론가 한정규의 회고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한정규 칼럼, ‘꼭 있어야 할 사람이 돼야’”
꼭 있어야 할 사람 그 말 나를 괴롭혀 온 말 중 하나다. 있어서는 안 되는 사람, 있으나마 한 사람, 반드시 있어야 하는 사람, 그 중 반드시 있어야 하는 사람이 돼야 한다는 말이다. 그것도 장소 물문, 시대 물운, 언제 어디서나 그렇게 살아야 한다는 말이었다. 1950년대 말 광주남중학교를 다니던 제3학년 때였다. 2월 말 경 졸업을 앞 둔 마지막 국어시간이었다. 국어과 담임교사는 박진철 선생님이었다. 그 선생님 말씀이 오늘 이 시간이 여려분과 함께 할 수 있는 마지막 시간이다. 그래서 하는 말인데 며칠 후면 여러분은 이 학교를 졸업하고 떠나게 된다. 고등학교에 진학하는 사람, 가정으로 돌아가 부모님을 돕고 사는 사람, 먹고 살기 위해서 일터를 찾아 집을 떠나는 사람, 그렇게 모두가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된다. 그런 여러분에게 선생님이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다. 여러분 어디서 무엇을 하던 그곳에서 그 일에서 없어서는 안 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있으나 마나 한 사람이 되어선 안 된다. 더욱 더 안되는 것은 있어서는 안 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된다. 여러분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어떻게 살던 그곳에서 그 시대에 꼭 있어야 할 사람, 반드시 필요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알겠니! 하시며 선생님과 약속하는 것이다. 그렇게 당부말씀을 하셨다. 그때 그 말 그 선생님의 모습이 때때로 내 가슴 속에서 충동질을 했다. 안 되면 되려고 노력이라도 할 게 아니냐! 꼭 있어야 할 사람이 되도록 그러면서 살라고 했다. 그 말 내 삶에 조금도 손해날 말이 아니었다. 뿐만 아니라 사람이면 너나없이 그런 생각으로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야 자신의 행복은 물론 주변 사람 모두가 보다 행복한 삶을 누리게 될 것 아니겠는가! 하며 하지만 꼭 있어야 사람이 된다는 게 쉬운 것만이 아니었다. 생각은 그렇게 하면서도 행동이 따라주지 않았다. 그러나 그 생각을 늘 떠 올리며 살았다. 한편의 글을 써도 그 생각을 떠 올리며 쓴다. 어떻게 하면 그 선생님이 말씀하셨던 말과 같이 독자에게 꼭 있어야할 작가, 독자로 하여금 반드시 기억하도록 하는 글, 독자의 머릿 속에 남아 가르침이 되는 한 편의 글이 될 수 있을까! 모든 사람들의 삶에 지렛대가 되는 명언 중 명언을 남길 수 있을까! 그 생각을 하며 쓴다. (하략) 필자는 이 글을 우연히 읽다가 어디서 많이 익숙한 이름임을 알았다. 영암신문에 연재 글을 쓰는 같은 필진이었다. 반가워 신문사를 통해 얻은 전화번호로 통화를 하였다. 박진철 선생의 글을 쓴다니 반가워하며 무려 60년 다 된 추억으로 돌아가시며 당시를 회고하였다. 이처럼 박진철의 교육 철학은 많은 학생의 삶에 깊은 영향을 주었다. 정말 전남 교육의 사표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박진철은 1989년 퇴직 이후 수필집 『초록길』을 시작으로 1년에 1권씩 책을 출간하며 왕성한 집필활동을 하다 2006년 사망하였다. 『조국의 산하』는 함께 활동하였던 양회종을 주인공으로 다룬 작품으로, 현재까지도 독립운동사를 밝히는 데 큰 도움을 주고 있다. 그는 『조국의 산하』를 집필한 동기를 “왜정 36년 동안에 겪은 우리 겨레들의 고난은 사실 그대로 녹음해 두었다가 뒷날의 자손들에게 알려주어야 할 의무가 있다.”고 분명히 하였다. 소설이 아닌 기록을 남기기 위해서였다.
정부는 그의 독립유공을 기려 1883년 대통령 표창,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하였다. 그의 유해는 대전현충원에 안장되어 있다. (追記) 박진철의 딸은 광주학생독립운동에 참여하였던 조용표의 며느리이다. 조용표는, 2024년 4월 11일 광주제일고등학교에서 명예 졸업장을 받았다. 필자가 ‘독립운동가 교사가 되다’를 쓰며 어렵게 찾은 박진철의 따님이 시아버지도 독립운동을 하였다고 하였다. ‘조용표’ 익숙한 이름이었다. 필자가 용역 책임을 맡은 전라남도가 추진한 미서훈독립운동가 발굴 명단에 들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2023년 7월 조용표의 고향(곡성)을 지키고 있는 아들을 찾아갔다. 광주고보 5년 동안의 생활을 하루도 빠짐없이 기록한 일기 등의 자료를 받았다. 일기 속에 우리가 알지 못하였던 독립운동에 참여한 인물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특히 그가 참여한 1929년 11월 12일 2차 학생 시위 전날, 시위 참여 여부를 가지고 번민하는 안타까운 모습, 그리고 결단을 내리는 순간의 결연한 모습 등은 가장 생생한 광주학생독립운동 기록이다. 조용표는 졸업을 앞두고 퇴학을 당하였기 때문에 광주고보 졸업장이 없었다. 더구나 그의 존재를 아무도 모르고 있었다. 필자가 광주제일고등학교 동창회에 연락하여 이번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기념일을 맞아 겨우 명예졸업장이 수여될 수 있었다. 전라남도가 추진한 미서훈독립운동가 발굴작업의 또 다른 성과였다. 국립묘지 묘지명
암울한 일제 치하에서, 빼앗긴 조국의 산하를 바라보며, 우리는 다만 조국 을 부르고 사모했을 따름이다. 목이 메었다. 사슴이 호수를 찾듯 애타게 조국을 사모했을 따름이다. -저서, ‘조국의 산하’에서
글쓴이 박해현 초당대 글로벌화학기계과 부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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