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비, 길을 열다] 호랑이 수령 게시기간 : 2019-11-26 07:00부터 2030-02-01 03:03까지 등록일 : 2019-11-25 13:49
재단법인 한국학호남진흥원
선비, 길을 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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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7년(중종 32) 겨울 권신 김안로(金安老)가 몰락하며 김안국ㆍ이언적ㆍ송인수ㆍ송순ㆍ나세찬 등 유배인과 재야선비들이 복귀하였다. 한동안 적폐청산, 국정쇄신의 기대가 뭉실하였다. 그러나 1543년 정월 명망 높은 원로사림 김안국이 서거하고 며칠 후, 한밤중 동궁이 활활 타면서 정국은 급랭하였다. 세간에 문정왕후의 동기 윤원형이 도발하였다는 소문이 돌았지만 유야무야, 어느덧 조정은 이기ㆍ정순붕ㆍ임백령 등의 궁정세력 즉 소윤(小尹) 차지가 되었다. 이때 적잖은 사림관료가 낙향하거나 지방관을 자청하였다. 이황은 성묘를 빌미로 내려갔고, 송순ㆍ유희춘ㆍ김인후 또한 부모 봉양을 내세워 고향 가까운 광주ㆍ무장ㆍ옥과의 수령을 맡은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시서화(詩書畵) 삼절(三絶)’로 명성 높은 신잠(申潛)이 태인현감으로 왔다. 특히 묵죽(墨竹)은 누구라고 갖고 싶었던 일품이었다.1) 자는 원량(元亮), 호는 영천자(靈川子), 본관은 고령이었다. 신잠(1491∼1554)은 본래 훈구가문 출신, 세조가 ‘제환공의 관중(管仲), 한고조의 장량(張良), 당태종의 위징(魏徵)’과 같이 치켜세운 신숙주의 증손자였다. 22살에 생을 마감한 조부 신주(申澍)는 세조의 으뜸 공신 한명회의 사위였다. 세종의 열 번째 왕자 의창군(義昌君)에게 장가들었던 부친은 진사ㆍ문과ㆍ중시에 연속 장원하여 ‘삼괴(三魁)’의 칭호를 얻었던 신종호(申從濩, 1456∼1497)였다..2) 그런데 부친은 ‘진신사림의 영수’ 김종직에게 수업받았음인지 훈구파와는 결이 달랐다. 성균관 시절 ‘소학계(小學契)’―학문과 재주를 권력 추구, 재물 축적에 쏟지 말고 먼저 사람이 되자는 수신 결사―에 가담하고, ‘한때 섬긴 임금 노산군을 벨 것’을 가장 앞서 주창한 정창손(鄭昌孫)의 무정 무상한 행태를 통박하는 사초(史草)를 남겼었다. 남효온ㆍ김일손 등과도 절친하였다. 그런데도 사화의 해를 입지 않았다. 중국사신으로 나갔다가 돌아오던 중에 세상을 버린 것이다. 이때 신잠은 7살, 이후 성종의 첫째 옹주를 배필로 맞이하였던 큰형 신항(申沆)에게 의탁하며 공부하였다. 신항(1477∼1507)은 경학에 능통하고 문장이 넉넉하며 행실이 소탈하고 올곧은 ‘부마사림’, 연산군의 배척을 받았다. “여러 왕자와 부마는 의식이 풍족하여 학문이 필요 없는데, 고원위(高原尉) 신항이 힘써 옛글을 외우고 문사(文士)들과 교제하니 상으로 내린 가자(加資)를 박탈하고 제조(提調)에서 해임하니, 여러 왕자와 부마는 이를 징계 삼도록 하라.”3) 신잠은 1513년(중종 8) 진사시에서 장원하고 1519년 늦봄 현량과에 뽑혀 예문관 검열로 벼슬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여섯 달 후 사화가 일어나며 현량과가 취소되자 벼슬을 잃고 한동안 청주로 내려갔는데, 정녕 무사하지 못하였다. 1521년 겨울 남곤(南袞)ㆍ심정(沈貞) 등이 기묘인을 발본색원 일망타진하려고 조작한 ‘안처겸(安處謙)이 공신을 제거하고 경명군(景明君)을 추대하려고 하였다’는 역모사건, 신사무옥(辛巳誣獄)에 연루된 것이다. 경명군은 성종의 열 번째 왕자, 안처겸은 젊은 신진사림을 후원한 신망 높은 재상 안당(安瑭)의 아들이었다. 결국 안당 일가는 물론 멀리 유배 갔던 김정(金淨)ㆍ기준(奇遵)ㆍ한충(韓忠)ㆍ이충건(李忠楗) 등이 죽음을 받았다. 이때 안처겸과 진사 및 현량과 동방이자 절친이었던 신잠도 여섯 번 형장을 받고 거의 죽을 뻔했다가 평안도 운산을 거쳐 전라도 장흥으로 유배되었다. 신잠은 장흥 읍치 동쪽 억불산 아래 살았다. 노모 걱정에 사무치다가 노모 모신 부인이 세상 떠나자 서러웠다. 그런 중에도 성균관 시절 선배로서 오래 소식 끊겼던 양억주(梁億柱)를 다시 만나 반가웠고 재주가 뛰어난 소년 문사 백광홍(白光弘)이 찾아오면 즐거웠다.4) 언젠가 연산군 치세 ‘악기(樂妓)’로 뽑혀 입궁하였다가 쫓겨난 늙은 기생이 찾아오자 한 수를 건넸다.5) 일찍이 이궁(離宮)의 백옥루에서, 임금 수레 따르며 몇 번이나 한가로이 노닐었던가? 지금 유락하여 천관산 아래 살면서, 새삼 봄바람 아쉬워 시름 깊은 나그네를 마주하였구려.” 남도는 포근하였다. 능주의 양팽손, 동복의 최산두, 담양의 송순, 해남의 임억령 등이 소식을 전하고 찾아오며 서로 위안하였던 것이다. 정변으로 파직되었거나 친상으로 벼슬을 쉬던 동료들이었다. 이들은 봄가을 장흥 보림사 강진 백련사 등에서 어울렸다. 이른바 호남시사(湖南詩社)였다. 특히 해남의 윤구―녹우당 주인 윤선도의 증조부와는 무척 가까웠다. 언젠가 같이 천관산 자락 옥룡사(玉龍寺)에 올랐던 듯, 동편 누각 벽상에 일필휘지 묵죽을 그리고 한 수를 적었다.6) 촌음 아껴 힘들게 구름층계 오르니, 층층 벼랑에 가람이 송골매처럼 깃들었네. 유마힐 법당에 취한 먹을 묻혔으니, 훗날 소동파의 품평을 바랄 수밖에. 신잠은 윤구ㆍ김기(金璣)와 같이 가지산 보림사에서 박상을 영접하고 이틀을 보내면서는 너무 신이 났다. “저녁놀에 가지산 절에 들어가 아침 되어 서쪽 개울가를 찾았지요. …날 저물어 긴 바람 불도록 서로 손잡고 돌아갈 줄을 몰랐으니.”7) 이때 박상이 한 수를 건넸다.8) “좋은 벼슬 지낸 그대 다시 오고, 해와 달이 궁궐 연못을 일곱 번이나 돌았군. 우리 아름다운 선비 함께 노닐며, 냇가에 가지런히 앉아 몇 잔술을 돌렸어라. 바람 물결 얼굴에 스쳐 취한 눈을 깨우니, 하늘 닿은 안개 낀 나무가 읊조리게 하는군. 노승(老僧)이 솔방울 술로 흥을 돋우니, 쇠옹(衰翁)은 짓눌려 돌아갈 줄 모른다오.” 박상이 ‘신잠이 와서 일곱 해가 되었다’고 하였으니, 1528년 즈음 박상이 나주목사일 때였다. 광주 서창 출신 박상은 1515년 가을 담양부사로 있으면서 순창군수 김정과 함께 강천산에서 만나 지난봄 원자―훗날의 인종을 낳고 유명을 달리한 장경왕후의 빈 자리를 반정공신에 의하여 쫓겨난 중종의 조강지처 신씨(愼氏)로 하여금 잇게 하자는 ‘신씨복위소’를 올려서 공신정국을 뒤흔들었던 장본인이었다. 여기에 신잠에 화답하였다. 일찍이 계산(溪山)을 부질없이 오가며 안타까웠는데, 이번에 사백(詞伯)이 오셔서 함께 나직이 돌아봅니다. 꿈속에서 몇 번이나 동쪽 언덕집을 찾았던지라, 뜻밖에 나그네 술잔을 거듭 비웠습니다. 잠시나마 깊숙한 시름을 짧은 시로 마름질하며, 높은 흥취 내키는 대로 재주를 부렸나이다. 내일 아침이면 동네를 나서 남북으로 갈릴 터인데, 저는 홀로 저 아득한 하늘로 돌아가렵니다. 신잠에게 박상은 문장의 우두머리 사백(詞伯)이었다. 얼마 후 세상 떠난 박상을 위하여 오언ㆍ칠언율시를 다섯 수씩, 총 480자의 장편 만사를 바쳤다. 그만큼 존중하고 따랐던 것이다. 이렇게 장흥에서 십여 년, 김안로가 죽으며 유배에서 풀려나자 선영이 있던 아차산 아래로 들어갔다. 이때의 감회가 다음과 같았다.9) “홍패는 거둬가고 백패는 잃었으니, 한림과 진사가 모두 헛된 이름이었네. 지금부턴 아차산 아래 살리니, 산인(山人)이란 두 글자야 어느 누가 시비하랴?” 벼슬 없고 품계도 없는 평민으로 조용히 살겠다는 것이다. 이런 중에도 1539년 늦봄 중국사신이 오자 그들과 시를 주고받은 제술관 즉 ‘시전재(詩戰才)’로 차출되고 모친상까지 치렀다. 그러다가 태인현감을 제수된 것이다. 신잠은 부임하자마자 백성에게 해악을 끼친 숙폐를 조사하여 무명잡세 없앴으며 특히 빈민 구제에 열성이었다. 3년 후 전라감사 보고가 다음과 같았다.10) “신잠은 고을을 청렴하고 간명하게 다스리며, 백성을 자식같이 사랑하였습니다. 흉년을 당하여 여러 방책을 세워 백성을 구제하는 황정을 크게 일으켜 한 고을만이 아니라 다른 고장에서 와서 살 수 있게 된 사람이 5백 인이 넘습니다.” 또한, 고현의 향학당 외에 동서남북 네 곳에 새로 학당을 세우고 서책을 배포하고 경비까지 지원하였다. 그리고 직접 찾아가 참관하고 격려하였다. 다섯 학당에 『소학』을 나눠주고서 정극인이 세우고 송세림이 확장한 고현의 향학당을 방문하였을 때였다.11) “고현은 문헌의 고장, 온 마을이 꽃다운 명분을 지키네. 조용하게 마음 닦고 학문하고 강론은 한 데 모여서. …소학 몇 편에 개도(開導)의 뜻이 담겨 있음을 유념하시길.” 이렇듯 신잠은 백성에게 은혜롭고 배움을 일으키고 풍속을 바꾼다는 ‘흥학변속(興學變俗)’에 각별하였다. 그 대신 간악한 향족 토호와 교활한 아전에게는 추상같고 각박하였다. 이후 상주목사로 나갔을 때도 마찬가지, 거푸 청백으로 포상을 받았음에도 사관의 평가가 다음과 같았다.12) “다만 형벌을 너무 엄중하게 쓰니 그의 선비로서의 평소 기상과 같지 못한 듯싶어 아쉽다.” 신잠이 다섯 해 넘게 태인에서 복무하였다. 자식 없는 재취 부인과 장모, 시비와 시비가 낳은 갓난아이와 같이 살았다.13) 신잠이 떠날 즈음 김원(金元)ㆍ백삼구(白三𪛃)가 이웃 고을 익산의 이조판서ㆍ좌찬성을 지낸 원로 소세양(蘇世讓, 1486∼1562)에게 비문을 받아서 ‘선정비’를 세웠다.14) 김원은 고현면 한정 주인 김약회의 아들로 1537년 진사였다. 그런데도 백성들은 못내 아쉬웠다. 언젠가부터 신잠 일가의 목각 영상을 성황당에 봉안하였다. ‘국태민인(國泰民仁)’의 수호신으로 여겼음일 게다. 그런데 왜 신잠이 호랑이를 거느리고 있을까? 간향활리(奸鄕猾吏)에게 무섭게 형장을 내리친 호랑이 같은 신잠의 재림(再臨)을 희구하는 여망이었음이 틀림없다. 신잠 일가 목각 영상: 성황당이 무너지면서 정읍시 태인면사무소 민원실에 전시하고 있다. 신잠은 초취 부인에게 얻은 두 딸은 이미 시집을 보냈고, 재취부인은 소생이 없고 시비(侍婢)에게서 아들을 보았다. 장모를 모셨는데, 조각상에는 없다. 전라북도 민속자료 4호(정읍시청). 1) 盧禛, 『玉溪集』 권3, 「通政大夫行尙州牧使申公行狀」. 노진(1518∼1578)은 신잠의 재취부인의 아우 즉 처남이자 문인이다.
2) 曺偉, 『梅溪集』 권4, 「嘉善大夫司憲府大司憲申公墓誌銘 幷序」 3) 『연산군일기』 56권, 연산 10년 12월 28일. 4) 魏伯珪, 『存齋集』 권23, 「處士梁公行狀」 5) 『高靈世稿續編』 권2, 「노기 대중래가 찾아오다 老妓待重來來見」 “曾入離宮白玉樓 閑隨鳳輦幾回遊 如今流落冠山裏 更惜春風對客愁.” 세주 “燕山朝選入宮者.” 『고령세고속편』은 노진(盧禛)이 1563년 간행한 스승이자 매형인 신잠의 시문집이다(『玉溪集』 권5, 「高靈世稿續編跋」). 한편 신잠은 태인현감 시절 조부ㆍ부친ㆍ백형의 유고를 『高靈世稿』를 간행하였다(申光漢, 『企齋文集』 권1, 「高靈世稿序」). 6) 具鳳齡, 『八谷集』 권2, 「宿玉龍寺 次申靈川韻 贈玉蟾師」 세주 ‘玉龍 一名塔山 在天冠山南面. 靈川申元亮先生嘗謫于此. 一日到寺 揮灑墨竹于東閣壁上. 因題一絶曰 躋攀分寸上雲梯 寺在層崖俯鶻棲 摩詰寶門留醉墨 他年蘇子肯來題. 尹橘亭衢, 亦次韻書其傍. 後寺僧廣其閣 毁壁退之 今無存者 深可惜也.’ 이 시는 『高靈世稿續編』에는 수습되지 않았다. 7) 『고령세고속편』 권3, 「仲春初 與亨仲子潤會 奉訥齋先生 遊寶林寺西溪」 “暮投伽智寺 朝訪西溪邊 拾石爲平座 分流作小川 尋詩空兀爾 對酒復陶然 向晩長風至 相携未覺還” 8) 박상, 『訥齋別集』 권1, 「贈申元亮」 “前度劉郞今又來 龍池日月七環回 同遊吾黨皆佳士 列坐前溪接數杯 吹面水風醒醉眼 拂天煙樹供詩材 老僧助興携松釀 壓倒衰翁不放廻” 및 『고령세고속편』 권3, 「奉次訥齋先生韻」 “曾惜溪山空往來 今參詞伯共低回 相尋幾夢東皐宅 偶値還傾客裏杯 暫撥窮愁裁短句 爲挑高興騁長材 明朝出洞分南北 渺渺天涯我獨廻” 9) 권별, 『해동잡록』 4, “紅紙已收白牌失 翰林進士摠虛名 從此峨嵯山下住 山人二字孰能爭” 10) 『명종실록』 8권, 3년(1548) 5월 15일. 11) 『고령세고속편』 권1, 「詩山古縣學堂次宋獻叔相公韻」 “古縣稱文獻 芳名在一閭 藏修須靜處 講論此群居…唯存開導意 小學數編書” 12) 『명종실록』 13권, 7년(1552) 11월 4일 및 15권, 8년(1553) 8월 4일. 13) 조선시대 지방관 임기는 당상관 수령이나 미설가(未挈家) 즉 가족을 데려가지 않으면 900일이지만, 파직 폄척을 당하지 않으면 1800일이었다. 14) 소세양 『陽谷集』 권14, 「申泰仁潛善政記」; 『명종실록』 13권, 7년(1552) 5월 11일. ‘선정비’는 지금 피향정 옆에 있다. 글쓴이 이종범 (재)한국학호남진흥원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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