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문서와 옛편지] 선비들이 쓰는 꽃 편지, 시전지(詩箋紙)
재단법인 한국학호남진흥원
고문서와 옛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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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생활에는 유행이 있다. 지식사회학자 칼 만하임은 각 시대에는 그 시대정신을 반영하는 예술 양식(style of art)이 있다고 하였다. 그 예술 양식은 각 시대에 따라 다른 모습으로 나타난다. 처음 한국사를 공부하기로 전공을 정하고 따라간 학부 2학년 첫 답사는 구산선문(九山禪門)을 주제로 한 답사였다. 보령 성주사지, 김제 금산사, 곡성 대원사, 순천 송광사, 태고종의 사찰 선암사, 하동 쌍계사 등을 답사하였다. 답사를 마친 후에는 모두 사찰만 답사한 것 같아 어느 절이 어느 절인지 잘 구별이 안될 정도였다. 각 사찰에는 으레 탑이 있게 마련이고 그 탑에 대한 예술적, 시대적 설명을 곁들인 답사였다. 멀리 폐사지에 있는 탑을 보고 선생님은 이게 어느 시기의 탑인가 하고 질문을 하였다. 우리는 우리나라에 불교가 유행하던 시기가 통일신라시기부터 고려시기에 이어지는 것이어서 대강 그 시대의 것인 줄은 알았지만 그것이 삼국기의 탑인지 통일신라시기의 것인지, 고려 전기의 것인지 후기의 것인지를 알 수가 없었다. 지금도 잘은 모르지만 한참을 공부하고 나서야 어느 정도 탑의 양식을 가지고 거기에 아무런 문헌 기록이 없어도 어느 시기의 탑인지를 감별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그것이 간찰이나 시를 쓰는 꽃종이인 화전지(花箋紙), 시전지(詩箋紙)에도 적용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였다. 오랜 기간 동안 간찰을 강독하면서 비로소 시전지에도 시기적인 유행과 패턴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대강 구별하자면 17세기의 죽책형(竹冊型) 시전지, 18세기에는 시전지의 오른쪽에 조그만 채색의 시전지판으로 찍은 채색문(彩色紋型) 시전지, 19세기 후반에는 청으로부터 유입된 다양화하고 소형화한 단찰형(短札型)시전지가 유행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여기에서는 시전지 가운데에서 가장 선비답고 아름다운 17세기의 시전지 두 건을 소개하려고 한다. 현종의 국구(國舅)인 청풍부원군(淸風府院君) 김우명(金佑明, 1619~1675)의 간찰 한 점과 선조의 사위인 영안위(永安尉) 홍주원(洪柱元, 1606~1672)의 간찰 한 점이다. 우연히도 두 편지는 모두 1662년(현종3)에 보내진 편지이다. 먼저 내용이 간단한 김우명의 간찰을 소개한다. 向迬之極 伏承/令翰 憑想/令政候萬相 仰感且慰 生/又遭外家之喪 悲痛何極/ 令惠水柿依受 極感 餘不/宣 伏惟/令鑒 謹謝狀上 壬寅八月卄九日 服人 佑明 매우 그리워하던 차에 영감님의 서한을 받고 정사 보시는 건강이 좋으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우러러 감사하고 위로가 됩니다. 저는 또 외가 쪽의 상을 당하여 얼마나 비통한지 모르겠습니다. 보내주신 수시감은 매우 감사합니다. 이만 줄입니다. 영감님께서 살펴주십시오. 삼가 답장 편지를 올립니다. 임인년(1662, 현종3) 8월 29일 복인 우명 아주 간단한 편지이다. 지방 수령을 하는 지인이 먼저 안부를 전하면서 수시감을 보내온 것에 대해서 자신은 외가 쪽의 상을 당하였다는 근황을 전하고 또 수시감을 잘 받았다는, 말하자면 영수증 같은 간찰이다. 당시의 사대부들이 각 계절마다 소소하지만 조그만 선물을 보내어 지속적인 연망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옅은 군청색의 수수한 죽책형 시전지이다. 죽책 앞쪽에는 ‘광주리 하나 가득 천하의 봄[一筐天下春]’이라는 화제(畫題)를 써넣고 있는 예쁜 시전지이다. 전형적인 17세기 시전지라고 하겠다. 다음은 영안위 홍주원이 지방 수령을 하고 있는 지인에게 잔치에 쓸 물품을 구청(求請)하는 편지이다. 春和 伏想/令政履萬安/ 五馬雖有入城時 趂未聞知/ 闕然一候 可歎 就煩 前/冬容兒登科時 緣有一/家喪患連仍 循例侈/恩之擧 亦不得設行 到今追設/ 雖似過時 欲於來初九日/ 略設曲會 以爲書與別給/文字之地 鷄兒鷄卵及新/産魚物石花等物 幸望從優/覓惠 以爲助用之地如何/ 前冬下臨時 旣蒙臨/時更通之敎 故敢此仰//溷 爲容兒有會 而令過在外 不得請臨 以/一欠事 可歎 餘不宣 伏惟//令亮 謹拜狀上 二月卄八 服人 柱元 따뜻한 봄입니다. 영감님 정사 보는 데 편안하신지요. 오마(五馬, 지방 수령의 행차)가 비록 입성(入城, 서울에 들어옴)하였을 때가 있어도 소식을 듣지 못하여 한번 문안 인사도 드리지 못하였으니 안타깝습니다. 그런데 지난 겨울에 용아(홍만용)가 등과(登科)하였을 때에 집안에 상환(喪患)이 계속 이어져서 전례에 따라 치은(侈恩, 과거나 벼슬, 시호 등 국왕의 은전을 드러내는 것)하는 거조도 역시 설행하지 못하였습니다. 지금에야 늦었지만 설행하려고 합니다. 비록 때가 지난 것 같습니다만, 내월 초9일에 대강 곡회(曲會, 모여서 술과 음식을 나누어 먹는 것)를 설행하여 별급(別給)하는 문서를 써서 주려고 합니다. 닭과 달걀 및 새로 난 어물이나 굴 등 물품을 넉넉히 구해서 주시면 쓰는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지난 겨울에 내려오셨을 때에 이미 때가 되면 다시 통지하시라는 말씀이 있어서 감히 이에 번거롭게 해드립니다. 용아를 위하여 만났으면 하지만 영감님께서는 외방에 계시니 임석하시기를 청할 수 없는 것이 흠사여서 안타깝습니다. 나머지는 이만 줄입니다. 영감님께서 살펴주십시오. 삼가 절하고 편지 올립니다. 2월 28일 복인 주원 맏아들 홍만용이 문과에 합격하여 도문연(到門宴)을 벌여야 했었는데 계속 상환(喪患)이 있어서 거행하지 못하다가 봄을 맞이하여 잔치를 베풀고자 지방 수령을 하는 지인에게 닭, 달걀, 어물, 굴 등 잔치에 소요되는 물품을 구청(求請)하는 편지이다. 홍만용(洪萬容)은 1662년(현종3) 문과 정시(庭試)에 장원으로 합격하였다. 당대 최고의 부귀를 누렸던 홍만용의 도문연은 어떻게 치러졌을까? 각 지방에 구청하여 올라온 산해진미로 잔치상을 벌이고 당대의 고관대작 친지들을 두루 불러 모아 과거 합격의 영예를 내려주신 성은(盛恩)에 감사하고 또 과거에 합격하여 가문을 빛낸 자식에게 특별히 재산을 별급한다. 이 시기에 가뭄이 있었던지 국가에서는 연악(宴樂)을 금하라는 명이 있었던 모양이다. 아들의 잔치를 베푼 이후, 홍주원은 금령에도 불구하고 풍악을 베풀고 잔치를 하였다고 언론의 탄핵을 받아 파직이 되었다. 잘 알 듯이 홍주원은 선조의 부마이다. 인목대비가 낳은 정명공주(貞明公主)와 결혼하여 영안위가 되었다. 부마가 되는 데에는 인조가 크게 역할을 하였다고 한다. 부마가 아니더라도 홍주원은 할아버지가 모당(慕堂) 홍이상(洪履祥)이고 외할아버지는 월사(月沙) 이정귀(李廷龜)인 당대 최고의 명가였는데, 정명공주와 혼인을 함으로써 영안위를 전후한 풍산홍씨는 조선 최고의 부귀를 누리는 가문이 되었다. 홍주원은 4남 1녀를 두었는데, 여기에서 ‘용아(容兒)’라고 부르는 아이는 큰아들 홍만용을 가리킨다. 홍주원에게는 만용, 만형(萬衡), 만희(萬熙), 만회(萬恢)가 네 아들과 조전주(曺殿周)에게 시집간 딸이 있다. 이 편지를 받은 사람은 바닷가 고을의 지방 수령으로 보인다. 아들 등과 잔치에 쓸 물품을 대기 위하여 어물과 석화를 요청한 것을 봐서 그렇다. 홍주원의 간찰은 전형적인 17세기 화전지(花箋紙)에 썼다. 사각 틀 안에 군청색의 죽책문의 괘선이 그어진 화전지인데, 죽책 앞에는 주황색 꽃이 핀 난초 그림이 찍혀 있는 수수하면서도 사치스러운 화전지이다. 하나하나 보면 별것이 아닌 것 같은 조그마한 간찰에서도 많은 스토리가 숨겨져 있다. 기본적으로 간찰은 그 내용을 통하여 구체적인 역사적 사실을 뒷받침할 수 있는 일차 사료를 찾을 수 있지만, 간찰의 형식에서도 많은 시대적 상황을 찾아볼 수 있다. 17세기에는 매란국죽 사군자와 같은 꽃을 그려 넣거나 단순히 죽책의 괘선만 있는 죽책문 시전지가 유행하였고, 18세기에는 종이의 오른쪽 시작 부분에 약간의 채색의 꽃무늬를 더한 시전지가 유행하였다. 19세기 후반에는 청나라의 영향을 받아 그쪽의 시전지를 수입하여 사용하는 경향이 보이는 소형 단찰형 시전지가 많이 쓰였다. 이를 통해서도 각각 그 시대정신이 간찰지에서도 나타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도침질한 반질반질한 장지에 마음대로 서예 작품을 쓰듯이 간찰을 쓴 경화사족의 대형 간찰과 피봉도 없이 뒤가 비치고 얇은 한지에 편지를 쓴 향촌의 가난한 남인 학자들의 간찰과는 확연히 다른 생활의 모습에서도 당시 사대부들의 생활과 시대정신을 볼 수 있다. 글쓴이 김현영(金炫榮) 한국고문서학회 명예회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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