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경의 기억] 충의(忠義)의 고장, 목사(牧使)고을 능주(綾州) 게시기간 : 2019-11-30 07:00부터 2030-03-01 12:56까지 등록일 : 2019-11-29 12:57
재단법인 한국학호남진흥원
풍경의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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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의의 고장, 목사고을 능주”를 아시나요? 한때 목(牧)의 지위를 누리며 ‘남주(南州)의 명향(名鄕)’으로 자리매김했던 능주목! 지금은 화순군의 일개 면이 되어 겨우 능주라는 이름만 전해주고 있다.
능주의 원래 이름은 능성(綾城)으로 현(縣)이었다. 능성현은 화순현과 행정구역 개편을 둘러싸고 곡절이 많았다. 조선시대에는 서로 치폐가 엇갈리던 곳이었다. 그러다 인조반정 이후인 1632년(인조 10)에 능성이 인조의 모(母)인 인헌왕후(仁獻王后) 구씨(具氏)의 관향(貫鄕)이라 하여 능성현에서 능주목으로 승격하였다. 영조 대에 편찬된 『여지도서(輿地圖書)』를 보면, 능주목의 인구수는 화순이나 동복에 비해 3.4배, 2.5배나 많을 정도로 규모의 차이가 컸다. 그후 1895년 5월 나주부 관할 능주군이 되었고, 1908년 화순군이 폐지되어 능주군에 편입되었다. 하지만 일제강점기에 들어와 1913년 능주군의 이름을 화순군으로 고치고, 동복군을 화순군에 합하면서 능주는 목은 물론 현으로서의 지위도 잃은 채 일개 면의 이름으로 남았있다. 이 능주는 “염백(廉白) 강명(剛明)하고 치적을 숭상할 만한 곳으로 능주가 최고”라고 하여 능주목사 이하징(李夏徵)에게 새서숙마(璽書熟馬)를 하사하기도 하였다.1) “명현(名賢)은 영남에서 많이 나오고, 충절(忠節)은 호남에서 많이 나왔습니다.”2)라 하듯이 호남은 ‘충절의 고장’으로 불렸는데 그 중에서도 능주는 각별하였다.
능주의 다른 이름은 대나무를 뜻하는 ‘죽수(竹樹)’이다. 대나무는 곧음, 충절의 상징이다. 그런 점에서 능주의 정신은 곧 충절이다. 어떻게, 어떤 사람들에 의해서 충절이 능주를 대표하는 정신이 될 수 있었는가? 조선 초기 능주 유교문화의 뿌리에 관하여 현재까지 중시되고 있는 것은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의 유배(流配)와 사사(賜死), 학포(學圃) 양팽손(梁彭孫) 부자의 학덕과 유풍, 일휴당(日休堂) 최경회(崔慶會)를 대표로 하는 창의(倡義) 인물들”이었다. 그 중에서도 능주는 무엇보다 정암 조광조의 적려(謫廬)로 인연을 맺게 됨으로써 정암을 도맥(道脈)의 핵심으로 삼는 조선의 유교문화 속에서 절의의 상징 장소가 되었다. 그로 인하여 ‘남주의 명향’으로 자리매김하였다. 정암은 1482년(성종 13)에 태어나서 1519년(중종 14), 기묘사화 때문에 서른 여덟살이라는 젊은 나이로 짧은 생을 마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당대 사림의 중심이었을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성리학 도통의 정점에 놓이는 인물로서 사림의 귀감이 되었다. 그는 도학(道學)을 정치와 교화의 근거로 삼아 성리학적 이상인 왕도(王道)를 실현하는 정치, 삼대(三代)를 모범으로 한 유교적 이상정치를 구현하고자 하였다. 이를 위해 임금 스스로가 철인(哲人)이 될 것을 요구하였고, 동시에 훈구세력의 특권과 비리를 집중적으로 비판·공격하여 유교 본래의 합리적이고 기능 위주의 관료체제를 확립하려고 하였다. 그런 개혁의 정점에서 1519년(동 14) 10월 정국공신(靖國功臣)에 대한 위훈삭제(僞勳削除) 파동이 일어났다. 위훈삭제는 거짓 공훈을 지운다는 것으로 훈구세력에게 직접적인 타격을 가하려는 시도였다. 그러나 훈구세력의 무고로 인하여 그해 11월 15일에 ‘북문우화(北門遇禍)’3)가 일어났고, 이로 인해 조광조 등 사림의 주도세력이 제거당하는 큰 패배를 맛보았다. 이른바 기묘사화가 그것이다. 그리고 그해 12월 16일 중종은 조광조의 죽음을 명하였고 이에 따라 그는 적소(謫所) 능주에서 최후를 맞았다. 조광조는 온아하고 조용해서 적소에 있을 때 하인들까지도 모두 정성으로 대접하였고, 분개하는 말을 한 적도 없어서 사람들이 다 공경하고 아꼈다.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 유엄(柳渰)이 사사(賜死)의 명을 가지고 이르니, 조광조가 곧 들어가 조용히 죽음을 맞으며 “임금을 어버이처럼 사랑하였고, 나라를 내집처럼 근심하였네. 해가 아랫세상을 굽어보니, 충정을 밝게 비추리.[愛君如愛父 憂國如憂家 自日臨下土 昭昭照丹衷]”라는 글을 남겼다. 그리고 거느린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내가 죽거든 관을 얇게 만들고 두껍게 하지 말아라. 먼 길을 가기 어렵다.”고 하였다. 그는 글을 쓰고 분부하는 일을 마친 다음, 드디어 거듭 내려서 독하게 만든 술을 가져다가 많이 마시고 죽으니, 이 말을 들은 사람들이 다 눈물을 흘렸다고 전한다. 지치주의(至治主義)의 정상에서 하루아침에 느닷없이 추락해서 죽음까지 맞게 된 조광조의 안타까운 최후는 이렇게 끝이 났다. 그는 죽음을 앞에 두고도 미천한 주변인들에게까지 섬세한 마음을 전해 사람들을 더욱 감동케 하였다. 전설 같은 이런 이야기들이 남고 전해져서 능주에 조광조의 신화로 자리 잡았고, 이는 다시 능주를 유교의 성지로 만들어 냈던 것이다. 조광조가 능주에 남긴 글로는 「능성의 누수(累囚) 중에서」라는 시도 있다. 그 누가 알아주랴? 화살 맞아 상해 버린 새와 같은 이 내몸을
이 마음 비유컨대 실마웅(失馬翁)과 같은 것을 스스로 고소(苦笑)한다. 잰나비[猿]와 학(鶴)의 울음 극성맞게 지저귀니 못 돌아갈 이 내몸이 복분(伏盆) 중에 벗어나기 어려운 줄 어이 아랴! 조광조가 능주에 남긴 절의야말로 바로 그가 사림의 세를 확보하기 위해 내세웠던 가장 중요한 명분이었다. 절의배양(節義培養)은 곧 사기진작(士氣振作)과 상보관계를 이루는 것으로 사림파를 정치세력으로 자리매김하는 선결조건이었다. 그리고 사기진작은 또한 사우지도(師友之道)의 흥기와 떼놓을 수 없는 동전의 양면 같은 것이었다. 그러니까 절의를 명분으로 사우지도를 일으켜 사림을 묶어세우면 사기가 진작되고 그런 사기 진작은 다시 사림의 사기를 북돋아 절의지사(節義之士)를 불러 모아 나라의 안정된 기틀을 다질 수 있다는 이야기였다. 조광조는 사도(師道)가 서면 후진(後進)이 그 향방을 알고, 사친(事親)·사군(事君)의 도가 모두 이에 말미암아 나타나리니, 만일 사표(師表)가 될 만한 자가 있으면 후진의 향방이 하나로 모아지고 또 조정에 명사(名士)가 많이 포열(布列)하게 될 것입니다.”4)
라 하여 사도는 후진을 모으고 명사를 끌어들이는 통로가 됨을 강조하였다. 사우지도의 강조가 도맥의 형성으로 이어지고 도맥으로 이어지는 사림의 계보는 당대만이 아니라 세월을 넘어 이후 조선왕조 400년 동안 흔들리지 않는 명분이 되었다. 절의가 사림들을 묶는 끈이 되었고 그 끈의 큰 매듭에 조광조가 서 있었다.
그 조광조가 최후를 맞은 능주의 적소는 절의의 상징 장소가 되었다. 이를 분명히 해 주는 것이 「정암조선생적려유허추모비(靜菴趙先生謫廬遺墟追慕碑」(전라남도 기념물 제41호, 1979년 8월 3일 지정)였다. 이 비는 1667년(현종 8) 4월 당시 능주목사 민여노(閔汝老)의 주도로 세워졌다. 비문은 송시열이 짓고 글씨는 송준길이 썼다. 내용의 일부는 다음과 같다. 아! 이는 정암 조선생께서 귀향살이하던 집이오, 따라서 운명했던 유지(遺趾)이다. 아! 지금으로부터 기묘년을 따지면 149년이나 되는 데도 학사(學士)·대부(大夫)들은 그분의 학문을 사모하고 여민(黎民, 백성)·서도(胥徒, 아전)들은 그분의 덕택을 생각하여 오랜 세월이 흐를수록 더욱 잊지 못하면서, 모두 이렇게 말한다. “우리 궁벽한 동방의 사람으로 하여금 군신․부자의 윤기를 알아서 이적(夷狄)·금수(禽獸)의 지경을 모면케 한 것은 선생의 주신 덕분이라고.” 그리고 여기를 지나는 사람들로서는 엄숙히 경의를 표하지 않는 이가 없으니, 아! 이는 누가 그렇게 하도록 한 것일까? 그의 떳떳하게 타고난 마음이 자연 그렇게 한 것이다.
【그림 3】 정암조선생적려유허추모비 [靜庵趙先生謫廬遺墟追慕碑] 옛 능성현 북문이 있던 곳 부근 도로변에 있다. 전라남도 화순군 능주면 정암길 30. 전라남도 기념물 제41호. “여기를 지나는 사람들로서는 엄숙히 경의를 표하지 않는 이가 없으니”라 하여 이곳이 유림의 성지였음을 분명히 하였다. 호남 의향의 뿌리가 여기에 있다고 해서 지나칠 리 없을 것이다. 한편 조광조와 함께 능주의 절의를 담고 있는 사람이 학포 양팽손이다. 양팽손(1488~1545)은 능주 출신으로 1510년(중종 5) 조광조와 함께 생원시에 합격하였고, 1516년 식년문과에 갑과로 급제하였다. 현량과에도 천거되었다. 정언·전랑·수찬·교리 등의 직을 거쳤고 조광조·김정 등 신진사류와 흐름을 같이 하였다. 기묘사화가 일어나자 소두(疏頭)가 되어 조광조 등을 구하고자 하였으나 이 일로 삭직되어 능주로 돌아왔다. 능주에서 그는 중조산(中條山) 아래 쌍봉리에 학포당(學圃堂)을 짓고 독서로 소일하며 이른바 기묘명현들과 친교를 맺었다. 또 조광조가 능주로 유배되어 오자 그와 함께 매일 경론을 탐구하며 지냈다고 한다. 그는 그후 1630년(인조 8)에 김장생 등의 청으로 조광조를 모신 죽수서원(竹樹書院)에 함께 배향되었다. 이처럼 죽수서원에 함께 모셔 있는 조광조와 양팽손은 살아서도 함께, 죽어서도 함께 하면서 능주의 절의를 빛내고 있다. 참고문헌 『中宗實錄』, 『英祖實錄』 『輿地圖書』 정암조선생기념사업회, 『국역 靜庵趙先生文集(附原文)』(1978) 목포대학교박물관·화순군, 『능주목의 역사와 문화』(1998) 1) 『英祖實錄』 권66, 영조 23년 10월 18일 을해 네 번째 기사
2) 『英祖實錄』 권61, 영조 21년 5월 15일 병술 세 번째 기사 3) 南袞·沈貞·洪景舟 등이 神武門 즉 경복궁의 북문을 열어 정승들이 밤을 타 은밀히 入對하게 하여 사화를 일으켰다는 데서 온 말 4) 『中宗實錄』 권36, 중종 14년 7월 임자 두 번째 기사 글쓴이 고석규 목포대학교 前 총장, 사학과 명예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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