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명시초대석] 작법으로 읽는 한시 절구(1) 진작에 알았더라면[早知] 게시기간 : 2019-12-05 07:00부터 2030-02-01 03:03까지 등록일 : 2019-12-04 09:51
재단법인 한국학호남진흥원
명시초대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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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찍 알다.’는 의미의 ‘조지(早知)’는 보통은 ‘미리 알았다.’, ‘선견지명이 있었다.’는 의미로 쓰이지만, 한시 절구(絶句)의 제3구 첫머리에 놓일 때는 ‘일찍 알았더라면’, ‘진즉 알았더라면’이라는 가정의 의미로 쓰이는 것이 정격(正格)이 된다. 당연히 제4구에서는 ‘응당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려고 했겠는가?’라는 반전의 내용이 따라온다. 이런 작법은 남북조시대(南北朝時代) 양(梁)나라의 시인인 유신(庾信)의 「매화(梅花)」라는 시에서 이미 보인다. 섣달이 반도 더 지난 즈음이라 매화가 흐드러지게 피었을 것으로 생각하고 구경을 갔다가 아직 찬 눈 속에서 필 생각조차 하지 않는 것을 보고는 후회하며 다음과 같이 읊었다.
절구시는 아니지만 마지막 두 구에서 ‘조지(早知)’의 작법을 잘 살려서 구사하고 있다. ‘참으로 후회된다’는 의미의 진회(眞悔)는 ‘응당 ~하지 않았을 것이다.’와 표현만 다를 뿐, 결국 같은 의미이다. 이 시의 제목은 「의영사(擬詠史)」이다. 의(擬)는 ‘~하려고 시도한다.’, ‘시도했지만 실행하지는 않았다.’는 뜻이다. 영사는 역사적 사실에 대해 읊은 것이다. 전인들이 역사적 사실, 역사적 인물에 대한 자신의 소신이나 판단을 담아 즐겨짓던 시적 형식이다. 이 시도 40인의 전대 인물에 대한 시 중 제갈량에 대한 읊은 부분이다. 이런 시는 시인의 역사의식을 엿볼 수 있는 재미있는 내용이 많다. 하지만 역사 속 인물의 한 단면, 한 시점을 기준으로 그의 수십 년 인생 전부를, 그것도 전지적인 관점에서 평단(評斷)하는데 따른 오류도 노정하기 쉽기 때문에 시인의 역사관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를 남길 수도 있다. 업하(鄴下)는 삼국시대 조조(曹操)가 위(魏)나라를 일군 중국 하북성(河北省) 임장현(臨漳縣) 일대이다. 후조(後趙), 전연(前燕) 등이 계속 도읍으로 삼을 정도로 중요시되던 지역이다. 반면 용촉(庸蜀)은 사천성(四川省)에 소속된 곳으로, 유비(劉備)가 촉(蜀)나라를 세울 때 도읍으로 삼았던 익주(益州)에 소속되어 있었다. 유비가 중원에서의 쟁탈을 피하려는 목적으로 선택한 곳이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변방의 이미지가 없지 않았다. 후주는 유비의 아들 유선(劉禪)이다. 빈위(賓魏)는 유선이 위나라에 항복하여 그곳에서 안락공(安樂公)으로 봉해져 편안하게 삶을 마감한 것을 말한다. 유비를 촉나라의 황제로 옹립할 때 일등공신이었던 제갈량이었다. 그 자신이 유약한 후주를 대신해 황제의 자리에 올라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었지만, 그는 선제 유비에게 했던 것처럼 후주에게도 변함없이 충성을 바쳤다. 출정을 앞두고 후주에게 올린 「출사표(出師表)」는 만고의 충신들이 눈물을 흘리며 외우던 명문이었다. 그렇게 정성을 기울였지만, 제갈량이 죽은 뒤 얼마 못가 환관의 농락에 빠진 후주의 실정으로 인해 나라가 망하고 말았다. 시인은 이 시에서 제갈량의 공적이 이렇게 물거품이 될 바에는 차라리 유비의 삼고초려(三顧草廬)를 거부하고 초야에서 생을 마치는 것이 나았을지도 모른다고 평가하고 있다. 그렇지만 제갈량은 그래도 살아서 뜻하던 바를 이루었으니 출사한 것이 아주 무의미하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시인이 이렇게 노래한 것은 일단은 못난 군주로 인해 평생의 노력이 헛되게 된 것을 아쉬워하는 마음이 기본적으로 자리하고 있다. 그러나 더 깊이 들여다보면 자신이 권신(權臣) 김안로(金安老)를 잘못 추천한 것에 대한 진한 아쉬움을 제갈량의 사례를 통해 표현한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시인 심언광(沈彦光, 1487∼1540)은 조선 중종조의 문신이다. 자는 사형(士炯), 호는 어촌(漁村)이며, 본관은 삼척(三陟)이다. 1507년(중종 2)에 진사가 되고 1513년에 식년문과에 급제하였다. 1514년에는 사가독서(賜暇讀書)에 선발되었다. 중국 사신 공용경(龔用卿) 등이 태자의 탄생을 알리기 위해 입국했을 때 스스로 원접사를 자원했을 정도로 시적 재능을 자부하는 등, 형 심언경(沈彦慶)과 함께 강릉의 대표적인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이후로도 요직에 올라 승승장구하던 그가 인생의 결정적인 전기를 맞는 일이 있었다. 대사헌으로 있던 1531년에 조정에서 배척당해 유배 중이던 김안로(金安老)의 용서를 청하여 중신으로 재등용되게 만든 일이 그것이다. 김안로의 등용을 반대하는 이언적(李彦迪)을 내치게 만들 정도로 김안로를 위해 애를 썼다. 그러나 이후 김안로의 절대적인 권력 남용이 많은 부작용을 낳고 심지어 자신의 외손녀를 세자빈(世子嬪)으로 삼으려 하는 일까지 추진하자 그에게 극력 맞섰다. 그로 인해 결국 김안로의 모함을 받아 함경도관찰사로 좌천되었다. 1537년 김안로가 사사(賜死)된 뒤 우참찬(右參贊)을 거쳐 공조판서가 되었으나, 이전에 김안로를 두둔한 일 때문에 탄핵을 받고 이듬해에 삭직(削職)되었다. 약 140여년이 지난 뒤에야 복작되고 문공(文恭)이 시호를 받았으니, 그가 입은 타격이 얼마나 컸을지 짐작할 수 있다. 이 시는 바로 이 시기, 파직되어 고향으로 돌아간 뒤에 지은 것이다. 차라리 자신이 44세이던 1530년에 지은 강릉의 해운정(海雲亭)에 물러나 유유자적한 삶을 살았더라면 이런 결과는 없지 않았을까 후회하는 마음을 이 시에서 제갈량의 평가하면서 은근히 담았을 수 있다. 고향으로 돌아온 지 2년 뒤 54세의 나이에 세상을 떠나는 것을 보면 김안로를 잘못 추천한 것에 대한 회한과 상심이 매우 컸을 것으로 보인다. 아주 특출한 능력을 지닌 자가 아니라면 자신의 미래를 알 수 있는 이들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늘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그에 대한 득실을 판단할 수 있다. 『회남자(淮南子)』 「원도훈(原道訓)」에 춘추시대 위(衛)나라의 어진 대부인 거원(蘧瑗)에 관한 고사가 있다. 우리에게는 거백옥(蘧伯玉)으로 더 알려진 그는 ‘50세가 되자 지난 49년 동안의 잘못을 깨달았다.[年五十而知四十九年非]’고 한다. 현대에도 지금 아는 것을 10년 전에 알았더라면이라는 책이 인기가 있었던 것을 보면, 후회하는 것은 인간 고금의 변함없는 정서라고 할 수 있다. 그래도 후회한다는 것은 최소한 자신을 돌아본다는 반증이다. 전통시대의 주된 사상이었던 유학에서는 잘못을 전혀 하지 않는 완벽한 인간상을 높이 치지 않는다. 잘못을 깨닫고 고치는 인간상을 바람직하게 본다. 대부분의 현대인들이 고리타분하다고 생각하는 유학에 대한 여러 오해 중의 하나이다. 잘못은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잘못을 깨닫고 고치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잘못을 깨닫는다는 것은 이전의 행위에 대해 후회를 한다는 것이고, 후회를 한다는 것은 자신을 돌아보고 있다는 의미인 것이다. 그런 사람은 설사 또 다시 실수를 하게 되더라도, 그 횟수는 그만큼 줄어들 것이다. 많은 정치인들의 대폭적인 교체가 예상되는 총선이 몇 달 뒤로 다가왔다. 또 많은 후보자들이 ‘진작 알았더라면’ 하고 후회할 것이다. 단순히 복권에 낙첨한 경우처럼 실패에 대한 아쉬움만 되뇔 게 아니라 차제에 자신을 돌아보고, 미래의 또 다른 ‘진작 알았더라면’ 하는 탄식을 재현하지 않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글쓴이 권경열 한국고전번역원 성과평가실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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