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窓] 영암 장암정 동계(洞契), 350년 지속된 마을 공동체 운영 문서 게시기간 : 2019-12-07 07:00부터 2030-03-01 03:03까지 등록일 : 2019-12-06 1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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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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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암 장암정 동계 문서. 2019년 11월 14일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337호로 지정되었다. 여러 가지 절차를 거치지만, 지정 고시를 할 때 그 사유를 요약하여 내 보인다. -17세기부터 현재까지 350여 년 동안 지속된 남평문씨 동족마을의 중요한 기록유산으로 사회경제사 측면과 역사적․학술적 가치 충분. -문중 조직과 운영 등 사회사적 측면과 각종 물가 변동을 통해 조선후기와 근현대 시기 경제적 변화를 고찰할 수 있는 중요 자료. 장암정 동계문서 마을과 문서. 우리들 생활사의 기본 단위라 할 마을은 외형이든 내형이든 다양한 형태로 나타난다. 고택이 즐비한 곳이 있는가 하면 마을숲과 선돌이 마을 입구를 알리는 곳도 있다. 안으로 들어가면 모정이나 정자가 있는가 하면 원사나 재실도 있다. 어떤 곳은 허름하게 보이지만 또 다른 곳에서는 마을 어른들이 드나들면서 잘 가꾸어진 곳도 있다. 마을에 사는 사람들은 늘지는 않고 노령화 되어 가지만 그 공간만큼은 여전히 마을 운영의 중심이 되고 있다. 마을 초입의 정자이다. 정자는 여러 가지 기능을 한다. 가르치고 배우는 곳에서 시를 짓고 교류를 하기도 하고, 마을 운영의 대소사를 논하는 곳이기도 하다. 상을 당하면 문상을 하는 곳, 멀리서 온 손들을 맞는 곳이기도 하다. 복합적인 ‘문화센터’라 할까. 그 가운데 하나 마을 대소사를 논하는 곳. 그리고 그 운영에 관한 기록을 문서로 남긴다. 동계나 동약 문서이다. 동계와 정자와 사우 장암 동계문서는 영암군 영암읍 장암리에 세거하는 남평문씨 동족마을의 마을문서이다. 남평문씨가 덕진면 영보리에서 영암읍 장암리로 이주한 것은 16세기 말엽이다. 장암리 남평문씨는 각종 계 조직을 결성하여 마을 공동체를 운영하였다. 1664년(현종 5)에 문계(門契)를 조직하였고, 1667년(현종 8)에 동계(洞契)를 창설하였으며, 1668년(현종 9)에 마을 동각인 장암정(場巖亭)과 향사우인 구암사(龜岩祠)를 건립하였다. 특히 17세기에 조직되어 문서로서 기록된 이래 현재까지도 동계가 전승되면서 기록이 정리되고 있다. 예전 문서로서의 유물 문화재가 아니라 살아 있는 생활문화 자료이자 기록유산인 것이다. 문계는 직계 선조의 제사를 모시고, 친족 간에 친목과 형제간에 우애를 돈독하기 위해 문중 성원들끼리 결속력을 강화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장암정 동계를 창립하는데 주도한 성씨는 남평문씨와 거창신씨였다. 이들은 영암 덕진면 영보촌에 입향하였던 전주 최덕지의 외손들이었다. 재지사족이 향중 공론을 배경으로 향촌사회에서의 위상을 확립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마을 공동체 조직과 운영 문서 영암읍 장암정에는 마을 공동체 조직과 운영 관련 문서 40점(책)이 예전 그대로 전해 온다. 그 종류를 살펴보자. ①장암동계(場巖洞契) 13점, ②용하기(用下記) 17점, ③수행안(隨行案) 등 성책고문서 10점 따위이다. 첫 번째의 장암동계 자료는 크게 2가지 유형으로 구분된다. 하나는 계원 상호간에 지켜야 할 규칙을 정리해 놓은 동헌(洞憲)이다. 다른 하나는 계원들의 명단을 기록해 놓은 좌목(座目)이다. 이후 새로운 계원과 규칙이 변화될 때마다 기록해 놓은 추입(追入)과 추약(追約)이 중수안에 부기되어 있다. 동헌의 주된 내용은 동약조(洞約條), 부상조(賻喪條), 호상조(護喪條), 곡물조(穀物條), 건물조(件物條), 권학조(勸學條), 정풍속조(正風俗條) 등이다. 두 번째의 용하기는 일종의 회계 장부이다. 17점을 분류해보면, ①동계용하기(洞契用下記) 12점, ②연회용하기(宴會用下記) 1점, ③부상추부기(賻喪追簿記) 1점, ④혼부계용하기(婚扶契用下記) 1점, ⑤문간성조하기(門間成造下記) 1점 이다. 한 책은 겉표지가 떨어져 나가 표제명이 확인되지 않는다. 원본은 어딘가 있을텐데 복사본만 전하는 용하기도 1점이 있다. 장암정 마을 동계의 회계 장부를 비롯하여 마을의 대소 잔치[연회] 용하기, 상가에 부조하는 장부, 혼례에 힘을 보태는 장부, 장암정 등 마을 공유의 건물을 손 볼 때 기입한 문서 등이다. 장암정 동계 용하기 이 용하기는 여러 가지 측면에서 가치가 있다. 첫째, 17~20세기 전라도 영암지방 향촌자치조직의 회계장부의 원형을 확인할 수 있다. 둘째, 조선후기 지방향촌사회의 물가정보와 미가정보 등 시장경제의 추이를 시계열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 셋째, 장암대동계의 운영을 파악할 수 있는데, 항목별로 중간 결산하고 단계적으로 최종 합계에 이르는 전 과정을 보고하여 그 결과를 외부인에게 감사받는 과정을 거치는 등 회계의 투명성이 돋보인다. 넷째, 조선후기 향촌사회 상호부조의 문화를 읽을 수 있게 해준다. 촌계와 동약, 동계와 향약 사람이 사는 곳이라면 서로 도우면서 살기 마련이다. 갈등과 대립도 있을 터이지만, 상호부조가 더 중요한 시대정신이었을 게다. 우리나라는 전래적으로 향촌결계(鄕村結契)의 전통이 있었다. 향촌에서 계를 맺어 서로 도왔던 것이다. 촌계, 두레의 전통이다. 일반 민간에 널리 퍼져 있었다. 규약 등은 기록으로는 많이 남아 있지는 않다. 생활에서 행해진 일상사 다반사였기 때문이다. 조선 초기에 이르러 향약 보급운동이 일어난다. 고을(군현-鄕) 전체적인 향약(鄕約)과 마을 향촌(촌락-鄕) 의미의 향약(鄕約)이 혼재 되어 있지만 다양한 기록들이 남아 있다. 기록상으로 광주의 부용정은 우리나라 향약의 시원지라고도 한다. 이 촌계-동계-동약-향약은 임진왜란이 지나면서 상하합계 형식으로 나타난다. 국난을 극복했던 ‘에너지’가 신분을 뛰어 넘게 된 것이다. 이어 조선후기에 이르면 수령향약이 나타난다. 주현향약으로도 하는데 관에서 일괄적으로 시행한 것이다. 일종의 사회 통제책이기도 하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도 중요한 것은 사람들 사이의 상호부조의 전통이었다. 그것만은 꾸준히 유지되어 오고 있다. 핵심인 셈이다. 유독 호남은 향촌 자치의 전통과 그 과정의 기록들이 많이 남아 있다. 영암 구림, 나주 쌍계정, 정읍 고현동약 등. 하나씩 들춰 보면서 그 시대정신을 읽어 보아야 할 것이다. 반추해 볼만하다는 것이다. 장암정 대동계 신묘년의 용하기 기록. 신묘년은 1951년 한국전쟁 기간이다. 전쟁의 변곡점에서도 마을 자치는 지속되었던 것이다. 역사의 변곡점에서도 이어진 마을 자치 영암 장암정에 소장된 고문서는 이미 역사학, 경제학, 사회학 등 다양한 학문 분야에서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다. 연구사적으로 중요하여 학술적 가치는 재론의 여지가 없다. 또 하나는 시계열성이라는 측면에서 의미도 있다. 1667년 동계 결성과 1668년 이루어진 장암정 건립과 함께 작성된 동계안부터 1969년에 작성된 동계안까지 12종의 동계안이 남아있다. 일부 시기가 비기는 하지만 각종 용하기와 비교하면 이어진다. 이를 통해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혼란을 극복하면서 작성된 문중 조직이 개항과 식민지, 그리고 현대 사회변화와 같은 우리나라 역사의 중요 변곡점이 되던 시기에 어떻게 대응했는가를 살필 수 있어 중요한 자료이다. 장암정 대동계문서는 40책이 있지만 그 가운데 문화재 지정은 35책이다. 덜 중요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원본이 확인되지 않은 복사본, 비교적 최근의 문서와 올해도 추가되었고 계속 이어져 갈 현행 문서는 미래의 문화재로 남겨 두었기 때문이다. 장암정 대동계의 전통과 정신이 잘 이어져 먼 뒷날 그 남은 근래 문서도 문화재 지정에 포함되기를 기대한다. 장암 동계 무술년 3월 14일 기록. 무술년은 2018년이다. 1667년 창계 이후 351년 째. 앞으로도 이어져 가리라. 글쓴이 김희태 전라남도 문화재위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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