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비, 길을 열다] 호걸선비, 태산이 높다 하되… 게시기간 : 2019-12-10 07:00부터 2031-03-05 07:00까지 등록일 : 2019-12-09 11:19
재단법인 한국학호남진흥원
선비, 길을 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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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잠은 태인현감을 지내면서 고을 학자나 처사와 정성으로 교제하였다. 성리학에 조예가 깊고 효자로 이름 높던 정언충(鄭彦忠)을 밤중에 방문하여 건넨 시가 있다.1) “차가운 대청에서 손잡고 마주 앉으니, 한 고을 이름 떨친 그대가 부럽구려. 오늘밤 퉁소 불며 등잔 밑 모임, 한양으로 돌아가더라도 잊지 못할 게야.” 정언충은 고현 지금의 칠보면에 살았는데 동갑이었다. 한편 지금의 정읍 북면에 살던 이항(李恒)을 만나서는 반가움이 앞섰다.2) 요즘 세상에 숨어사는 이런 분을 만나다니, 자신에 도를 쌓아두고 가난은 입에 담지 않네. 산중에 홀로 앉아 세상 이치를 살피며, 하늘 움직임에서 우리 참된 본성을 찾는다오. 자신보다 8살 연하였음에도 도학에 정진하는 모습에 감탄하고 존경한 것이다. 언젠가 주자의 문집을 선물하자 이항이 다음과 같이 사례하였다.3) “산중 서재에서 뜻밖에 회암(晦庵)의 글을 얻으니, 잠에서 깨어나 맑은 창가에서 안목이 확 트인 듯. 올곧고 아름다운 글을 보내주신 뜻을 받들어, 이제부터 솔개 날고 물고기 뛰듯 이 마음 활발하리라.” 이항은 유명한 시조 「태산가(泰山歌)」의 주인공이다.4) 태산이 높다 하되 하늘 아래 뫼이로다. 오르고 또 오르면 제 스스로 오를 수 있건만, 제 아니 오르고서 뫼만 높다 하더라. 이항(1499∼1576)은 젊은 시절 한양의 유명한 협객이었다.5) 고약한 도적과 주인을 배반한 노비가 있다는 소문을 들으면 동아리를 이끌고 찾아내서 응징하였다. 스님들을 겁박하여 사찰을 빼앗은 험상궂은 사이비 중을 패대기쳐서 저승으로 보낸 적도 있었다. 근기 일대 씨름과 승마, 활쏘기의 제1인자로 오로지 무과로 발신할 생각이었다. 그러다가 이십대 후반 백부 이자견(李自堅)의 따끔한 훈계를 듣고 진로를 바꾸었다. 일찍이 문과에 급제한 백부는 연산군의 갑자사화 때 유배를 갔다가 중종반정 이후 복귀하여 호조판서까지 지냈다. 이항은 그간 어울렸던 무술 동아리를 단호히 사절하였다. 그러나 어디서부터 착수해야 하는지 아련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이웃집 벽에 걸린 「주자십훈(朱子十訓)」6)과 「백록동규(白鹿洞規)」7)에 대하여 주인이 대강 뜻을 풀며 ‘기묘학자들이 공부과정으로 삼았다’고 하자, 큰 충격을 받았다. “생애를 거의 놓칠 뻔했구나!” 이때 새삼 조회를 마친 김정(金淨)이 『대학』을 끼고 김식(金湜)을 찾아가는 광경이 새삼 스쳤다. 그런데 지금 저들은 사화를 당하여 이 세상에 없다. 이후 『대학』을 수십 번 읽고 또 읽었다. 길을 가거나 말을 타거나 손에 놓지 않았다. 도봉산 망월암(望月庵)에 들어가서도 정진하였다. 한때 선산의 박영(朴英)을 찾아 배우기도 하였다. 저명한 무신으로 혁신정치에 가담하였다가 파직당한 무인사림(武人士林)이었다. 「백록동규」를 풀이하고 『대학』의 독법을 일목요연하게 그림에 담았는데, 천문ㆍ지리ㆍ의약에도 밝았다.8) 이렇듯 뒤늦게 시작한 공부에 열중하다가 어느덧 살림이 어긋나며 빚은 쌓여갔다. 제사나 가족부양도 곤란하였다. 결국 노모를 모시고 태인으로 내려왔다. 선조의 묘소가 있고 약간의 농토가 있었다. 1538년 봄, 마흔 살이었다. 한동안 노복을 데리고 직접 농사를 지었다. 이때도 허리춤에 경서를 끼고 나가서 쉬는 틈에 읽었다. 더구나 부지런한 측실은 화식(貨殖)에도 재간이 있었다. 살림은 다시 폈고 묵은 빚도 갚았다. 아우의 식솔까지 불러들였다. 이렇게 몇 년, 십리 남짓한 보림산 자락에 정사(精舍)를 마련하고 ‘일재(一齋)’로 편액 하였다. 공자의 ‘일이관지(一以貫之)’ 즉 충서(忠恕)를 새겼음이 틀림없다. 충서는 진심과 관용이다. 어느덧 후학이 찾아왔다. 거듭 공부란 스스로 얻어가는 자득(自得)이 중요함을 강조하였다. “동지를 따르기보다는 단칸방에 단정히 앉아 채찍질하고 담금질하는 것이 낫다.” 그러던 중 1543년 가을, 뜻밖의 손님이 하인도 없이 찾아왔다. 전라감사 송인수(宋麟壽, 1499∼1547)였다. 일찍이 김안로를 탄핵한 대가로 경상도 사천에서 유배 살다가 조정에 복귀하여 대사헌ㆍ이조참판을 거친 중견사림이었다. 송인수가 반가움을 건넸다.9) “호해 남녘에 한 사람이 있으니, 벼슬 영화 구하지 않고 가난하고도 걱정이 없네. 낮밤으로 틈만 나면 공부하니, 『대학』의 참된 맛이 거듭 새롭구려.” 이항 또한 기꺼웠다.10) 호남을 관찰함에 도탑게 교화하고, 몸소 도의를 실행하니 고을 사람들 본받네. 뭇 백성 눈 비비며 신정(新政)을 우러르니, 삿된 생각 이겨내고 성의를 다하여 자신을 돌아본다오. 관찰사의 솔선수범이 고을의 쇄신, 사람의 변화를 이끌어냈음을 반가워한 것이다. 두 사람은 비록 동갑이라지만 엄연한 감사와 처사학인 사이, 그런데도 주고받음이 퍽이나 스스럼없다. 얼마 후 송인수는 과거를 앞둔 도내 총명하고 연소한 유생을 선발하여 선운사에 모아놓고 무장 현감 유희춘(柳希春)으로 하여금 『소학』과 『근사록』 『주자대전』을 가르치도록 하였다.11) 이른바 선운사 강회(講會), 여기에 이항이 사장(師丈)으로 초대받았다. 당시 유희춘의 기별을 받고 힘들게 선운사를 찾았던 옥과 현감 김인후가 오언장편 「선운사에서 사군(使君) 유인중(柳仁仲)에게 주며 아울러 동아리에게 보이다」에 강회 뒤끝 수작(酬酌)의 광경을 다음과 같이 담았다.12) 윗자리 서너 분만 구면이라, 새로 알아 즐거운데, 이자(李子)가 가장 연상일세. 이런 모임 우연하지 않아, 해 넘도록 작별하지 못하네. 붓을 당겨 힘겹게 시를 짓나니, 훗날 보면 서로 흐뭇하겠지. 여기에서 이자(李子)가 바로 이항, 두 사람은 처음 만난 것이다. 얼마 후 이항은 김인후의 장남 종룡(從龍)을 사위 삼았다. 을사사화가 일어나자 벼슬에서 물러난 김인후가 찾아왔다. 이항은 반가웠다. “쓸쓸하고 고요한 산재의 밤, 벗이 있어 멀리 찾아왔구려. 도를 전하려거든, 한 잔술에 같이 취해 보세나.” 김인후 또한 흔쾌하였다. 동성(同聲)은 천리 밖에서도 들리는 법, 배우고 익히는데 벗이 오면 즐겁고말고. 이리 서둘러 출입하였으니, 어찌 한 잔으로 가당키나 하겠소.”13) 이러던 중 1549년 가을 사마시 양과를 동시에 거머쥔 준재(俊才)가 이항을 방문하였다. 광주 임곡에 살던 23살의 기대승(奇大升, 1527∼1572)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배움은 근실해야 하니, 반듯이 외어야 하며 또한 읽고 생각하고 글짓기를 반복하라!’ 하였던 부친의 자상하고 엄격한 가르침을 따랐으며, 광주목사 이홍간(李弘幹)과 송순(宋純)의 향교 강학에도 빠지지 않았다.14) 전라감사 송인수에게도 감화를 받았으니 훗날 선조에게 다음과 같이 아뢰었다.15) “소신은 시골에서 자라나 책 읽을 줄을 몰랐습니다만 송인수가 관찰사로 와서 소학을 읽게 하였으므로 그 책을 얻어 읽은 뒤에야 성현의 하는 일을 알았습니다.” 1) 『고령세고속편』 권1, 「夜訪鄭良父兼示同行」 “相携促膝坐寒堂 愛子高名動一方 今夜吹簫燈下會 洛中歸去可能忘” 양보(良父)은 정언충의 자(字), 본관은 경주.
2) 『고령세고속편』 권1, 「贈李恒之」 “隱求今世有斯人 道積於身沒道貧 獨坐山中觀物理 天機動處是吾眞” 3) 李恒, 『一齋集』 「謝靈川申潛送晦菴集」 “山齋忽得晦菴書 睡覺晴窓眼豁如 持贈典謨應有意 從茲活潑得鳶魚” 4) 『一齋集』(續錄) 「遺事」 “誰云泰山高 自是天下山 登登復登登 自可到上頭 人旣不自登 每言泰山高” 5) 盧守愼, 「有明朝鮮國中訓大夫掌樂院正一齋先生李公墓碣銘」, 『소재집』 권9 및 『일재집』 부록. 노수신은 이항의 종생(從甥) 즉 사촌누이의 아들이다. 6) 「주자십훈」은 주자가 제시한 살면서 후회하는 열 가지로 ‘주자십회(十悔)’라고도 하는데, 다음과 같다. “부모에게 효도하지 않으면 돌아가신 뒤에 뉘우친다 不孝父母死後悔” “가족과 가깝게 지내지 않으면 멀어진 뒤에 뉘우친다. 不親家族疎後悔” “젊어서 부지런히 배우지 않으면 늙어서 뉘우친다. 少不勤學老後悔” “편할 때 어려움을 생각하지 않으면 실패한 뒤에 뉘우친다. 安不思難敗後悔” “부유할 때 검소하지 않으면 가난해지고 뉘우친다. 富不儉用貧後悔” “봄에 밭 갈고 씨 뿌리지 않으면 가을되어 뉘우친다. 春不耕種秋後悔” “담장을 고치지 않으면 도둑맞은 뒤에 뉘우친다. 不治垣墻盜後悔” “여색을 삼가지 않으면 병든 뒤에 뉘우친다. 色不謹愼病後悔” “취중에 함부로 하는 말은 술 깬 뒤에 뉘우친다. 醉中妄言醒後悔” “손님을 소홀히 대접하면 돌아간 뒤에 뉘우친다. 不接賓客去後悔” 7) 「백록동규」는 주자가 백록동서원에 게시한 다섯 조항의 실천규범으로 첫째 ‘오교의 조목 五敎之目’은 ‘부자유친(父子有親) 군신유의(君臣有義) 부부유별(夫婦有別) 장유유서(長幼有序) 붕우유신(朋友有信)’이며, 둘째 ‘학문의 순서 爲學之序’는 ‘박학(博學) 심문(審問) 신사(愼思) 명변(明辨) 독행(篤行)’이며, 셋째 ‘수신의 요체 修身之要’는 ‘언충신(言忠信) 행독경(行篤敬) 징분질욕(懲忿窒慾) 천선개과(遷善改過)’이며, 넷째 일을 처리하는 요체 處事之要는 ‘의로움을 바르게 하고 이로움은 도모하지 않으며 正其義 不謀其利, 도를 밝히고 공을 따지지 않음 明其道 不計其功’이며 다섯째 ‘사물을 대하는 요체 接物之要’는 ‘자기가 싫은 일은 남에게 하지 않고 己所不欲 勿施於人, 행하여 상대가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 원인을 자신에게 돌이켜 찾음 行有不得 反求諸己’이다. 8) 박영, 『松堂集』 권1, 「白鹿洞規解」 및 권2, 「大學圖」 9) 송인수, 『圭菴集』 권1, 「贈李一齋恒」 “湖海之南有一人 不求榮宦不憂貧 閒中日月工夫在 大學書中味更眞” 10) 『一齋集』 「贈宋圭菴麟壽」 “觀察湖南敎化淳 躬行道義效鄕人 庶民刮目瞻新政 克念存誠更反身” 11) 丁焰, 『晩軒集』 권4(부록), 「行狀」(丁命說 撰) “宋圭菴爲本道方伯 柳眉巖適宰茂長 圭菴取道內年少聰敏於禪雲寺 使眉巖授小學ㆍ近思錄 以正士趨 眉巖以朱子大全 兼治擧業 以是敎之.” 12) 『하서전집』 권3, 「禪雲寺 贈柳使君仁仲 兼示接中」 “…座上數三公 惟吾舊面目 新知亦可樂 李子最年德 此會非偶然 日西未言別 援毫强題詩 相慰在他夕” 13) 『일재집』 「贈湛齋」 “寥寂山齋夜 有友遠方來 君若傳吾道 共醺我一杯”; 『하서전집』 권5, 「和一齋韻」 “同聲千里應 講習樂朋來 出入非無疾 何當共一杯” 14) 『고봉속집』 제2권 「과정기훈(過庭記訓)」 및 「자경설(自警說)」 15) 『선조실록』 2권, 1년(1568) 1월 12일. 글쓴이 이종범 (재)한국학호남진흥원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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