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문서와 옛편지] 문서의 양식, 의례(儀禮)의 표현 게시기간 : 2019-12-12 07:00부터 2031-03-05 02:02까지 등록일 : 2019-12-10 10:15
재단법인 한국학호남진흥원
고문서와 옛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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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첩(作帖)과 주첩(周帖)> 조선시대의 문서 양식에 대한 연구는 매우 드물다. 문서가 의례(儀禮)의 표현이고 이에 따른 문서의 양식도 달라진다는 점에서 이에 대한 연구가 좀더 진전되어야 한다. 문서에 사용하는 종이[料紙], 문서의 크기, 문서를 접는 방식, 글씨의 크기[字大], 글씨의 모양[字樣], 글씨의 서체[字體], 매 면(面)에 쓰는 글씨의 행(行)의 수, 매 행에 쓰는 글자의 수, 글씨를 쓰는 기준이 되는 행[平行], 글씨를 높이고 낮추거나 칸을 떼는 방식(中行, 極行, 高字, 低字, 間字), 피봉의 유무, 문서의 포장(封裹) 등에 이르기까지, 사소하지만 의례이기 때문에 소홀히 할 수 없는 격식이 있었다.
어찌 보면 소소한 이러한 문서의 양식에 대하여 그동안 별로 알려진 것도 없고, 그다지 중요시 되지도 않았지만, 이러한 점들도 반드시 조선시대의 문화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반드시 해결해야 할 과제이기에, 여기에서는 조선후기 문서식의 기본 규범서라고 할 수 있는 『전율통보(典律通補)』 별편(別編)의 문서식(文書式)을 중심으로 하여 아주 극히 사소한 문제 하나를 정리해보려고 한다. 그것은 바로 문서를 접는 방식에 대한 것이다. 크고 작은 문서를 만들어 상대방에 보낼 때, 그 넓은 문서를 그대로 보낼 수는 없고 몇 차례 접고 봉투에 넣어서, 귀한 문서의 경우에는 다시 또 보자기로 싸기도 한다. 조선시대에 문서를 접는 방식은 크게 두 가지 방식이 있었다. 작첩 방식과 주첩 방식이다. 사대(事大) 문서인 표문(表文), 자문(咨文)과 교린 문서인 국서(國書), 서계(書契)는 전근대 동아시아 국제 질서 의례가 잘 반영되어 있다. 사대 문서와 교린 문서는 외교 문서이기 때문에 형식에 대한 규정이 매우 엄격하였다. 문서가 조금이라도 잘못되었을 때에는 외교 문제로 비화하기도 한다. 표문과 자문은 명, 청에 보내지는 문서이다. 모두 작첩으로 만들어졌다. 국서와 서계는 일본과의 주고받은 문서이다. 모두 주첩으로 만들어졌다.
作帖으로 만든 表文(병풍식으로 접어서 펼쳐볼 수 있도록 만들었다)
周帖으로 만든 國書(오른쪽은 접었을 때의 형태) 표 작첩과 주첩 『속대전(續大典)』, 『대전통편(大典通編)』을 보완하는 성격을 가지는 『전율통보』에는 그 별편에서 문서의 형식 즉 문서식을 수록하였다. 여러 가지 문서식에 대한 설명에서 이해가 잘 되지 않았던 것은 각 문서의 첫머리에 붙어있는 작첩, 주첩이라는 용어였다. 알고 보니 그것은 문서를 접는 방식에 대한 규정이었다. 실제 남아있는 문서를 통하여 작첩과 주첩의 형식에 대해서 이해할 수 있었다. 작첩이란 것은 병풍식 접는 방식을 말하는 것이고, 주첩은 좁은 직사각형으로 꺽어 접어서 펴면 하나의 문서가 되는 두루말이식 접는 방식이었다. 『전율통보』에서는 사대문자인 하표(賀表), 자문(咨文), 신문(申文), 정문(呈文)은 모두 작첩으로 접으라고 하였고 진향 제문(祭文)만 주첩으로 접도록 규정하였다. 그런데 일본과 주고받는 교린문자인 국서와 서계는 모두 주첩으로 접었다. 국내 문서들은 전문(箋文)이나 계본(啓本), 계목(啓目), 차자(箚子), 상언(上言), 정사(呈辭), 단자(單子) 등은 모두 작첩으로 접었고, 초기(草記), 장계(狀啓), 첩정(牒呈), 평관(平關), 첩(帖), 준호구(準戶口) 등은 주첩으로 접었다. 작첩과 주첩 사이에는 어떤 차서(差序)가 있을까? 전근대 동아시아 국제질서에 있어서 중국과 조선의 관계는 사대 관계였고, 중국의 황제와 조선의 국왕이 하는 문서 행위는 외교 행위가 아니라 천자(天子)와 제후 사이의 상하 관계에서 주고받는 문서였다. 따라서 양국 사이에 구체적인 문제가 생겼을 때에 조선의 국왕과 실질적인 논의를 하는 상대방은 예부 상서(禮部尙書)였다. 조선의 국왕과 일본의 파트너는 관백(關白)으로 표현되는 쇼군(將軍)이었고, 실제의 문서 행위는 우리나라의 예조 참의, 동래 부사와 일본 막부의 외교를 대행해주고 있었던 대마(對馬)의 태수(太守)인 종씨(宗氏) 및 여러 번주(藩主)들이었다. <표2> 외교 문서의 작첩 방식, 크기, 행수(行數), 자수(字數)>
* 周尺 1척을 20.0cm로 환산. <주첩으로 만들어진 문서, 국서(國書)와 서계(書契)> 먼저 주첩의 사례를 일본에 보낸 국서와 서계를 통하여 살펴본다. 다음 그림은 임란 직전인 1590년 선조(宣祖)가 일본 관백인 도요또미 히데요시(豊臣秀吉)에게 보낸 국서이다. 잘 알듯이 일본을 통일한 도요또미가 조선을 침략하려 한다는 소문이 있어서 황윤길(黃允吉)을 정사로 하고 김성일(金誠一), 허성(許筬)을 각각 부사와 종사관에 임명하여 보낸 사행에 딸려보낸 문서이다. 국서의 내용은 일본 60주를 통일한 것을 축하하기 위하여 토산품을 보낸다는 의례적인 서술이다. 58.1×114.9cm. 일본 궁내청(宮內廳)에 소장되어 있다.
奉 書 朝鮮國王李 (爲政以德印) 㫟 謹封 日本國王 殿下 朝鮮國王李 㫟(爲政以德印) 奉書 日本國王 殿下 春候和煦 動靜佳勝遠傳 大王一統六十餘州雖欲速講信修睦以敦隣好恐道路煙晦使臣行李有淹滯之憂歟是以多年思而止矣今令與 貴价遣黃允吉金誠一許筬之三使以致賀辭自今以往隣好出于他上幸甚仍不腆土宜錄載別幅庶幾 笑留餘 順序珍嗇不宣 萬曆十八年三月 日 朝鮮國王李 㫟(爲政以德印) <국역> 조선 국왕 이연이 일본 국왕 전하에게 씁니다. 화창한 봄날씨에 건강은 좋으신지요. 멀리서 대왕께서 60여 주를 통일하였다고 들어서, 비록 빨리 강신(講信) 수목(修睦)하여 잘 지내려 하였으나, 도로가 희미하여 사신의 행리(行李)가 지체될까 하는 걱정이 있었습니다. 이 때문에 여러 해를 생각만하고 그쳤습니다. 이제 귀하의 사신과 함께 황윤길, 김성일, 허성 세 사신을 파견하여 축하의 말씀을 드립니다. 지금부터는 이웃과 잘 지내는 것이 다른 곳보다 나으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풍족하지 않은 토산물을 별폭에 수록하였으니 웃고 받으십시오. 나머지는 계절에 따라 하여 몸을 진중히 보존하시기를 바랍니다. 이만 줄입니다. 만력 18년 3월 일 조선국왕 이연 이외에도 현재 남아있는 조선 국왕의 국서는 1500년에 연산군이 유구국왕(琉球國王) 상진(尙眞)에게 보낸 것(일본 都城 島津家 소장), 1607년에 선조가 일본 관백 도꾸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에게 보낸 것(일본 京都大學 總合圖書館 소장), 1617년에 광해군이 일본 관백 도꾸가와 히데타다(德川秀忠)에게 보낸 것(일본 京都大學 總合圖書館 소장) 등 4점이 확인되고 있다. 다음은 예조 참의(禮曹參議) 이식(李拭)이 일본 대마도주에게 보낸 서계이다. 1576년(선조 9), 조선국 예조 참의 이식이 대마도주 종의조(宗義調)에게 보낸 것으로, 대마도주가 보낸 토공(土貢)에 대해서 답례로 돌아가는 사신 편에 정포(正布) 등 토공(土貢)을 보낸다는 의례적인 서계이다. 51.5×68.6cm. 일본 국립공문서관 소장되어 있다.
奉 復 朝鮮國禮曹參議李 拭 謹封 對馬州太守平朝臣宗公足下 朝鮮國禮曹參議李 拭(全州李氏印) 奉復 對馬州太守平朝臣宗公足下 書來得審 迪吉開慰所 獻禮物謹 啓收了將土宜正布拾匹幷 給賜甘茶割綿紬貳匹付回使惟 領留餘冀 自玉不宣 萬曆四年五月 日 禮曹參議李 拭(全州李氏印) <국역> 조선국 예조 참의 이식은 대마주 태수 평조신 종공 족하에게 답장을 합니다. 서계가 와서 편안하게 있다는 것을 알고 위로가 되었습니다. 바친 예물은 삼가 잘 받았습니다. 토산물 정포 10필과 감다(甘茶)와 할면주(割綿紬) 2필을 돌아가는 사신 편에 하사하니 잘 받으십시오. 나머지는 진중하게 지내시기를 바랍니다. 만력 4년 5월 일 예조참의 이식. 매번 일이 있을 때마다 조선 예조에서 대마도주에게 보낸 대량의 서계는 쓰시마(對馬) 종씨(宗氏) 가에 보존되어 있었는데, 일제 강점기에 나가사끼 출신의 조선사편수회 고문 구로이타 가츠미(黑板勝美)가 총독부에 소개하여 조선사편수회에 이전하여 현재는 만 점에 가까운 서계가 국사편찬위원회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글쓴이 김현영(金炫榮) 한국고문서학회 명예회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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