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窓] 화순 천봉암 현왕도 게시기간 : 2019-12-21 07:00부터 2031-03-01 02:02까지 등록일 : 2019-12-19 15:34
재단법인 한국학호남진흥원
문화재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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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화순 천봉암 현왕도의 전승 유래 <화순 천봉암 현왕도>는 2005년 4월 계룡산 갑사 대자암에 주석하였던 정영스님이 독성 스님에게 기증하여 현재 천봉암 대웅전에 봉안되어 있다. 정영 스님은 1940년 해인사로 출가해 1954년 불교정화운동에 참여했다. 이후 조계종의 중요 소임을 살았으며 수행풍토 진작에 노력하였다. 특히 1964년에 도봉산 천축사에 무문관(無門關) 개설하여 우리나라에서 무문관 수행의 효시를 열었다. 1993년에도 갑사 대자암에 제2의 무문관을 개설하여 목숨을 건 정진의 장을 제공하였다. 이와 같이 정영 스님은 불교계의 수행풍토를 조성하는데 앞장선 고승으로 조계종의 원로의원으로 추대된 덕숭문중 스님이었다. 2. 현왕도란 무엇인가? <현왕도(現王圖)>에서 ‘현왕(現王)‘이란 명칭은 <현왕청가영(現王請歌詠)>에 ‘세존차일기염라불구당래증불타(世尊此日記閻羅不久當來證佛陀)’에서 나온 것이다. 석가모니(釋迦牟尼) 부처님께서 염라대왕에게 수기(受記, 증명)하시기를 “너는 오래지 않아 성불할 것이다”라고 하였다는 것이다. 지금은 염라왕이지만 성불하면 불호(佛號)를 ‘보현왕여래불(普現王如來佛)’이라고 한다고 수기한 데서 ‘현왕’이라고 한다. 현왕도는 염라대왕(閻羅大王) 대륜성왕(大輪聖王), 전륜성왕(轉輪聖王)을 중심으로 판관, 녹사, 사자, 동자 등 권속을 거느린 채 신중단(神衆壇) 부근에 모시는데, 사람이 죽는 날로부터 3일째 되는 날 현왕재(現王齋)를 지낸다. 현재 알려지기로는 1718년 제작한 <기림사 현왕도>가 가장 이른 예이며, 18세기 제작한 작품이 11점이 현존한다. 이후 일제강점기 이전까지의 작품 총 80여 점이 알려져 있다. 3. 문화재로 지정된 현왕도 현왕도는 학술적 가치와 희소성이 있어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는 바 이를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문화재로 지정된 현왕도의 소장처는 서울, 경기, 강원, 부산, 경남 등이다. 화순 천봉암 현왕도는 호남 지역에는 발견되지 않은 대단히 희소성이 있눈 불화임에 틀림없다. 4. 화순 천봉암 현왕도
○ 화기(畵記) 大韓光武九年乙巳六月初三日鷄龍 山岬寺振海堂造成現王幀奉 安于大慈庵 緣化所秩 證明比丘 何山應善 會主比丘 震虛基日 誦呪 東湖法寧 大虛法海 金魚 錦湖若效 隆坡法融 比丘定淵 別座沙彌 天雨 供司 沙彌昌碩 鍾頭 比丘慧遠 比丘道炯 都監 比丘奉明 海演法眞 化主比丘 瓏珊士律 施主 公州官現里居住 乾命庚午生 金炳斗 坤命 癸酉生李氏 奉母信女戊申生權氏極樂月 率子癸巳生徐周郁 將此善根助㝠路 不還塵區往佛國
<화순 천봉암 현왕도>의 화기(그림 2)를 살펴보면, 불화가 제작된 시기와 제작된 곳과 봉안장소, 불화 제작에 참여한 인물들 등 불화제작과 관련된 내용들이 기록되어 있다. 이 불화가 ‘광무9년(1905년) 을사년 6월 초3일에 충남 공주군 계룡산 갑사(岬寺) 진해당(振海堂)에서 조성되어 산내 암자인 대자암(大慈庵)으로 옮겨 봉안된 현왕도’ 임을 알 수 있다. 이 불화는 중앙에 현왕이 호피가 깔린 의자에 앉아[倚坐] 좌우측에 대륜성왕(大輪聖王)과 전륜성왕(轉輪聖王), 판관(判官), 녹사(錄事), 사자(使者)가 자리하고, 상단에는 천인(天人)과 동자(童子)가 현왕을 감싸듯이 배치되는 일반적인 형식을 따랐다. 현왕을 중앙에 두고 총 22위가 등장하고 있다. 좌측에는 대륜성왕이 우측에는 전륜성왕이 각각 옥홀(玉笏)을 잡고 시립(侍立)하고 있다. 상단 좌우에 천인과 동자가 등장하는데 각각 과일[天桃]과 감로를 쟁반에 받치고 선 모습이다. 동자들도 각기 파초선(芭蕉扇)과 천개(天蓋) 등 지물을 들고 있다. 그 밖으로 사자들이 명부를 어깨 뒤로 멘 모습으로 등장하고 있다. 중앙좌우와 하단에는 판관 6위와 녹사 5위를 각기배치 하였다. 붓, 책, 두루마리, 명부 등 지물을 들고 서로 각무(各務)를 처리하고 있는 모습으로 그려졌다. 현왕의 법상(法床) 위에 벼루와 경권, 청화백자 연적(硯滴)으로 보이는 지물 등이 이채롭다. 이러한 <화순 천봉암 현왕도>의 구성은 하단 지옥장면을 삭제한 조선시대 시왕도와 흡사하다. 시왕도의 염라대왕과 동일하게 원유관(遠遊冠)과 관복 착용한 제왕형으로 표현하였다. 이는 현왕재가 염라대왕의 미래불인 ‘보현왕여래’ 자체보다는 ‘명부시왕’과 밀접한 관련이 있기 때문으로 보인다. 중국에서 설행된 예가 없는 현왕재는 조선시대 시왕 십재의 형식에, 사후 3일이라는 단위와 시왕 중 염라대왕과 관련이 있는 보현왕여래를 삽입하여 탄생한 새로운 불교 천도재이다. 이를 반영한 현왕도는 시왕도와 동일한 구성을 차용하여 표현된 것으로 추정된다. 참여한 금어(金魚, 畵僧)로는 금호당(錦湖堂) 약효(若效), 융파당(隆坡堂) 법융(法融), 비구 정연(比丘定淵) 등 이었으며, 금호당 약효가 수화승(首畵僧)이다. 금호당 약효(1846~1928, 그림 5)는 속성은 김金씨로 당호는 금호당이며, 법명은 약효이다. 1846년 출생해, 일찍이 부모를 여의고 20살쯤 예산 화암사로 출가하여 충남 공주 마곡사(麻谷寺)를 중심으로 활동하다 1928년에 입적하였다.
그림5. 금호당 약효 금호당 약효가 머물던 마곡사는 순조임금의 원찰로 왕실의 지원을 받았으며, 한말에는 충남의 수사찰(首寺刹)이 되었다. 이로써 사격이 더욱 높아졌다. 또한 마곡사는 16법산 중에서 유일하게 본사로 인가되었으며, 말사가 112개소에 이르는 충청도의 중심 사찰이었다. 이런 연유로 금호당 약효는 마곡사에 머무른 것으로 여겨진다. 이후 그를 중심으로 불화에 입문하려는 많은 화승들이 모였기 때문에, 마곡사가 충청도 화승들의 거점지로서, 또한 이 지역 불화제작의 중심지로서 인식되게 되었다. 특히 약효가 활동하기 이전의 충청도 지역의 불화는 다른 지역 화승들이 주로 제작하였기 때문에, 화승 약효의 등장은 충청도 출신의 화승으로 인해 이 지역사찰에 불화제작이 활발해지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현존하는 그의 작품으로 보았을 때 대략 1878년부터 1882년 무렵까지는 불화를 배워나가는 시기이고, 1883년부터 1924년까지 자신이 주가 되어, 본격적으로 수화승(首畵僧)으로 활동한 시기이다. 수화승 시기에 약효는 여러 지역으로 불화불사(佛畵佛事)에 참여했다. 5. <화순 천봉암 현왕도>의 문화재로서의 가치 <화순 천봉암 현왕도>는 18세기 이후 이어지던 정면상의 현왕과 좌우대칭의 권속을 표현하여 정적인 구도를 탈피해 현왕이 측면상을 취하고 동적인 구도를 취하면서, 더욱 시왕도와 도상적으로 비슷해지고 있음을 알 수 불화이다. 불교의 명부신앙으로 지장신앙과 시욍신앙 그리고 현왕신앙을 들 수 있는데, 현왕신앙을 구체적으로 알려주는 불화란 점에서 <화순 천봉암 현왕도>는 불교신앙적관점에서 유용한 작품임에 틀림없다고 할 수 있겠다. 또한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를 대표하는 화승 금호당 약효를 비롯한 화승집단이 전통적인 불화기법을 계승하면서도 새롭게 음영 등 서양화법이 시도되고 있는 변화과정을 살필 수 있는 중요한 작품으로 꼽을 수 있다. 글쓴이 이계표 전라남도 문화재위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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