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비, 길을 열다] 태극과 음양, 리(理)와 기(氣), 하나인가? 둘인가? 게시기간 : 2019-12-25 07:00부터 2030-04-04 03:03까지 등록일 : 2019-12-24 1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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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 길을 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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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55년 정월 부친상을 당한 기대승은 삼년 시묘를 살면서도 서책을 그냥 두지 않았다. 더구나 방대한 『주자대전(朱子大全)』을 독파하고 성리철학과 경세사상의 핵심문헌을 가려 뽑아 『주자문록』으로 엮었다. 1557년 4월 나주목사 김윤제(金允悌)가 간행하였는데, 송정황(宋庭篁)이 발문에 편찬 경위를 밝혔다.1) “자양전집(『주자대전』: 필자)은 백 권이나 되어 학자가 번거로움에 땀 흘리며 괴로워할 뿐 아니라 호남과 영남 이외에서 얻어 보는 자가 아주 적다. 이 때문에 몇 선생이 여러 해를 연구하여 번번이 간행하려고 하였지만 실마리를 얻지 못했다. 이번에 상사(上舍) 기대승이 3편에 묶었는데, 얼마간 누락된 것은 책 뒤에 붙였다.” 기대승의 3편 『주자문록』에다가 송정황이 빠지면 아까울 글을 보태서 부록으로 삼아 간행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송정황(1532∼1557)은 담양 대곡 출신으로 14살에 향시에서 장원하고, 1555년 진사, 이듬해 25살에 문과 별시를 통과하였던 준재였다. 일찍이 순창 훈몽재에서 강학하던 김인후를 스승 삼고, 을사사화로 함경도 종성으로 유배 갔던 사촌 매형 유희춘을 찾아가 배웠다. 『주자문록』을 간행한 나주목사 김윤제(1501∼1572)는 송정황의 처중부, 무등산 북록 가사문화권에 자리 잡은 환벽당 주인으로 을사사화로 풍비박산을 겪은 소년 정철을 거두고 외손녀와 맺어준 것으로 유명하다. 그런데 송정황은 『주자문록』이 간행된 다음 달 급병(急病)으로 객사하였다. 김인후의 만장은 처절하였다.2) 효도하고 우애하며 자질도 총명하였는데, 타향에서 병이 들어 이렇게 가다니. 그대 보내자고 내 어찌 만사를 지을 수 있겠나? 나 또한 너무 놀라 기약하기 어렵겠네. 제문 또한 비장하였다. “이렇게 가다니, 이 사람아! 바야흐로 아홉 줄기 영지(靈芝)처럼 빼어났는데, 문득 천척장송(千尺長松)이 꺾이었구나. 하늘이 기필코 사문(斯文)을 망치고자 함인가! 독학(篤學)은 자하(子夏)와 같고, 어버이 따름은 증자(曾子)와 같고, 하나를 들어 열을 앎은 안자(顔子)와 같았는데, 수명은 안자보다 여섯 해나 못 미쳤으니, 운명인가? 하늘인가?” 1558년 초여름 기대승은 장성 맥동의 백화정(百花亭)에 살던 김인후에게 인사를 갔다. 김인후가 흐뭇함을 건넸다.3) 내 취몽 중에 맑은 구슬 마구 떨구더니만, 듣건대 그대 다시 명산을 찾으려 한다더군. 이 몸도 일찍이 좋은 산수에 맡길 생각 있었건만, 병 때문에 청학동 신선의 자취를 따르지 못했었지. 1행 ‘맑은 구슬[明珠]’는 『주자문록』, 그만큼 대견하고 반가웠음이리라. 그해 가을 기대승은 식년 문과에 맞춰 상경하며 태인의 이항을 찾아뵈었다. 이때 두 사람은 북송 도학의 선구자 염계(濂溪) 주돈이(周敦頤)가 그린 「태극도(太極圖)」와 이를 해설한 「태극도설(太極圖說)」을 강론하였다. 『주역』 「계사전(繫辭傳)」의 ‘역은 천지의 표준이며, 역에는 태극이 있고 태극이 양의를 낳는다. 易 與天地準…易有太極 是生兩儀’를 실마리로 천지의 탄생부터 만물의 화생(化生)을 태극ㆍ음양ㆍ오행ㆍ남녀ㆍ만물의 다섯 층권(層圈)에 담고 인간도덕의 연원을 풀이한 파천황적 도식이요 장엄한 서사였다.
그림1. 주돈이의 태극도 1층 태극권: “무극(無極)이면서 태극(太極)이다.” 2층 음양권: “태극이 움직여 양(陽)을 낳는데, 움직임이 극에 달하면 고요하게 되고, 고요하면 음(陰)을 낳고 고요함이 극에 달하면 다시 움직인다. 한 번 움직이고 한 번 고요함이 서로 그 뿌리가 되어 음과 양으로 나누어지니 양의(兩儀)가 서게 되었다.” 3층 오행권: “음과 양이 변하고 합하여 수ㆍ화ㆍ목ㆍ금ㆍ토를 낳으니 오행(五行)의 기운이 순차적으로 퍼져 사계절이 운행된다. 오행은 하나의 음양이요, 음양은 하나의 태극인데, 태극은 본래 무극(無極)이다. 오행이 생겨남에 각각 그 성(性)을 하나씩 지닌다.” 4층 남녀권: “무극(無極)의 참[眞]과 음양오행의 정기가 묘하게 합하고 엉기어서 건도(乾道)는 남성(수컷)을 이루고 곤도(坤道)는 여성(암컷)을 이루었다.” 5층 만물권: “두 기(氣)가 교감하여 만물을 생성 변화시키니, 만물이 생기고 또 생겨서 변화가 무궁하다.” 여기에서 ‘무극이며 태극’이라는 명제의 파장은 컸다. 즉 만물의 법칙, 인간 본성의 원천은 하늘이 열리기 이전의 ‘선천(先天)’에서부터 존재한다는 거대한 상상, 영감을 불러일으켰던 것이다. 다만 이것을 인식할 수 없고 형용할 수 없어 ‘무극’이라 명명하고, 불변의 참[眞] 절대 진리로 승화시켰다. 그러나 역학과 노장이 어울린 현학(玄學)의 수사로 이해가 쉽지 않았다. 특히 밑줄 친 부분 ‘오행은 하나의 음양이요, 음양은 하나의 태극인데, 태극은 본래 무극(無極)이다’는 구절은 논란을 낳기에 충분하였다. 이 부분에 대한 염계 자신의 설명 또한 애매하였다.4) “이기오행(二氣五行)으로 만물은 변화하고 생성한다. 다섯 요소는 다르고 두 음양은 실재하며, 두 음양의 뿌리는 하나이다. 따라서 만(萬)은 일(一)이 되며 일은 실로 만으로 나뉜다.” 여기에 대해 주자가 보다 상세히 풀이하였지만 쉽게 다가오진 않는다. “이기오행은 천지가 만물에 부여하고 만물을 살리는 것이다. 말(末)에서 본(本)을 미뤄보면, 오행의 다름은 본래 두 음양의 실재이고, 음양의 실재란 또한 본디 하나의 지극한 이치이니, 따라서 만물을 합쳐 오직 하나의 태극일 뿐이라 한 것이다. 그러나 본(本)에서 말(末)을 미뤄보면 실재하는 하나의 리가 만물로 나뉘는 몸통[體]이 된다. 그러므로 만물 중에 각각 하나의 태극이 있다.” 여기에서 본(本)은 근원ㆍ원칙ㆍ원인의 체(體)로서 리(理)며, 말(末)은 현상ㆍ작용ㆍ운동의 용(用)으로 기(氣)였다. 요컨대 본체의 관점에서는 태극 즉 ‘하나의 리[一理]’는 음양오행 즉 기의 근본이 되므로 구분되지만, 실제적 현상에서는 하나의 리가 만물로 나뉘고 만물은 또한 하나의 리 즉 태극을 갖추고 있으므로 일체가 된다는 것이다. 또한 주자는 설파하였다.5) “태극에 동정이 있음은 천명의 유행이니, 『주역』에서 ‘한 번은 음, 한 번은 양으로 서로 바뀌는 것을 도’라 하였다.… 태극은 미묘한 본체이며 동정은 태극이 올라타는 기틀이다. 따라서 태극은 형체나 모양이 있기 이전의 형이상(形而上)의 도(道)며, 음양은 형체나 모양이 있은 이후의 형이하(形而下)의 기(器)다.” 태극과 음양은 도(道)와 기(器)의 구분이 있다고 한 것이다. 이러한 우주 탄생, 만물 화생의 근원과 작용을 강론하던 이항과 기대승은 태극과 음양, 리와 기의 관계 위상을 둘러싸고 의견이 갈렸다. 이항은 태극과 음양은 떨어질 수 없는 불가리(不可離)한 혼연한 일체라고 하였고, 기대승은 현상과 작용이 그러할지라도 근원 본체의 관점에서 태극과 음양은 서로 섞일 수 없는 ‘불가잡(不可雜)’의 관계라고 하였다. 이것은 리와 기의 관계에도 그대로 적용되었으니, 이항은 리와 기는 둘이면서 하나이고[二而一], 하나이면서 둘이라[一而二]는 이기일원(理氣一元)의 관점을 내세웠고, 기대승은 태극 음양의 관계와 마찬가지로 리와 기는 차원이 다르다는 이기이원(理氣二元)의 관점을 앞세웠다. 그해 겨울 식년 문과에서 을과 1위를 차지한 기대승은 금의환향하며 다시 이항을 찾았지만 여전히 이견을 좁히지 못하였다. 그리고 광주 가는 길, 김인후에게 인사하며 그간 이항과의 논쟁의 자초지종을 전하면서 재차 강조하였다. “『주역』에 태극이 양의(兩儀)를 낳는다고 하였으니, 태극과 음양이 섞이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에 김인후도 동의하였다. 이 자리에 이항의 사위이자 김인후의 장남인 종룡(從龍)이 있었다. 김종룡이 태인으로 돌아가서 이항에게 기대승과 김인후의 대화를 알렸고, 이항은 즉각 기대승에게 보낼 편지를 썼다.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6) “태극이 양의를 낳기 전에 양의가 본디 태극 안에 있고, 태극이 이미 양의를 낳은 뒤에도 태극의 이치가 또한 양의 가운데에 있으니, 양의가 나오기 전이나 나온 후에나 양의는 태극을 떠나지 않는 법. 오호라! 만약 태극과 음양이 서로 떨어져있다면 사물이 존재할 수 없는 법, 도를 아는 자가 아니면 누가 알 수 있으리!” ‘태극음양일체’에서 조금도 물러섬이 없었다. 이 편지를 마침 태인으로 심부름 갔던 김인후의 노복이 가져왔다. 김인후가 이 편지를 기대승에게 전하기 전, 미리 살펴보고 이항에게 짤막한 소감을 밝혔다.7) “무릇 리와 기는 혼합(混合)하여 천지 사이에 차 있으니 모든 사물은 그 안에서 나오지 않음이 없고 또한 모두가 리와 기를 각각 갖추었으므로 태극이 음양에서 떨어져 있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도기(道器)의 계한(界限)이 없을 수 없으니, 태극과 음양을 한 물건이라도 해서는 안 될 듯합니다. 주자도 ‘태극이 음양을 타는 것은 마치 사람이 말을 타는 것과 같으나, 결코 사람을 말이라 할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에 대해서도 이항은 즉각 반론하였다.8) “호남에서 오직 공(公)과 기군(奇君)이 우뚝 도학을 연마합니다. 그런데 공과 기군의 강론이 이와 같다면 학자들이 휩쓸리듯 따라가며 다시 생각하지 않을까 두렵습니다.…옛 사람이 배우는 사람을 위하여 리와 기를 나누어 말하였지만 본체는 하나입니다. 그래서 하나이면서 둘이고, 둘이면서 하나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김인후는 침묵하였다. 1559년 봄, 여름이었다. 그리고 가을 지나고 겨울, 조정에서 말미를 얻어 고향으로 내려오던 기대승이 이항에게 「태극도」의 다섯 층권을 자세히 변론하는 글을 제출하고, 다시 김인후를 찾았다. 김인후는 담담하였다. “나도 답서를 보냈는데, 우리가 너무 곤욕을 주는 듯싶네. 노선생이 다시 어떻게 벗어나려는지 모르겠구먼.” 그만 두시라, 한 것이다.9) 이듬해(1560) 정월 보름 다음 날 김인후는 세상을 떠났다. 향년 51세. 이때 이항 62세, 기대승은 34세였다. 이렇듯 세대를 넘고 고을을 넘어 의문을 품고 물음을 배우는 학문(學問)하는 세월이 열리고 있었다. 1) 기대승, 『高峯集』 「年譜」 ‘丁巳’; 『朱子文錄』 「券後」; 『正字宋公遺稿』 권2, 「遺事」. 송정황의 ‘유사’는 여러 선생의 의뢰로 기대승이 편찬하였으며, 김인후가 송정황에게 발문을 맡겼다고 한다.
2) 『하서전집』 속편 「挽宋生庭篁」 “孝友聰明質 他鄕一病棄 那堪挽送子 吾驚亦難期” 및 「祭宋生庭篁文」 3) 『하서전집』 권7, 「贈奇明彦」 “亂落明珠醉夢間 聞君又欲向名山 此身早寄煙霞想 靑鶴仙蹤病未攀” 4) 『성리대전』 「通書 」 二 “二氣五行 化生萬物. 五殊二實 二本則一. 是萬爲一 一實萬分.” 및 注 “二氣五行 天地所以賦受萬物而生之者也. 自其末以緣本 則五行之異 本二氣之實 二氣之實 又本一理之極. 是合萬物而言之 爲一太極而已也. 自其本而之末 則一理之實而萬物分之以爲體. 故萬物之中 各有一太極也.” 5) 『性理大全』 「太極圖說」 注 “太極之有動靜 是天命之流行也 所謂一陰一陽之謂道…蓋太極者 本然之妙也. 動靜者 所乘之機也. 太極 形而上之道也. 陰陽 形而下之器也.” 6) 『일재집』 「贈奇正字書」(1559년, 봄) 7) 『하서전집』 권11, 「與一齋書」(1559년 봄) 8) 『일재집』 「答湛軒書」(1559년 여름) 9) 『양선생왕복서』 제1권, 「퇴계 선생 좌전에 답하여 올림 答上退溪先生座前」(1560.8.6.) 여기에 기대승은 그동안의 이항과 자신, 이항과 김인후의 왕복서간을 첨부하며 그간 상황을 자세히 알렸다. 여기에 대하여 이황이 ‘호남의 인물들이 이러한 논변을 펼친 것은 우리나라에서 실로 드문 일’이라며 반가워하며 자신의 견해를 밝혔다. 글쓴이 이종범 (재)한국학호남진흥원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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