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문서와 옛편지] 바위 틈에 핀 들꽃 : 장예원 속신 입안(掌隷院贖身立案) 게시기간 : 2019-12-26 07:00부터 2030-03-01 14:04까지 등록일 : 2019-12-24 1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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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와 옛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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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설화집 『야승(野乘)』에는 잠계(潜溪) 이전인(李全仁, 1516~1568)이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 1491~1553)의 아들이 되게 된 설화를 자세히 싣고 있다. 이전인은 회재의 첩자(妾子)였고 그의 어머니는 남쪽 읍의 관기(官妓)였다. 전인은 그 어미의 뒷 남편[後夫]의 성씨를 무릅쓰고 있었는데, 누구도 그가 회재의 아들인지를 몰랐다. 전인은 아비가 죽었음에도 전혀 눈물이 나지 않아 억지로 곡을 할 뿐이었다. 부자 사이에는 천륜이라는 것이 있는데 아버지 상에도 전혀 눈물이 나지 않으니 천지간의 큰 변괴라고 하고는 자결을 하려고 하였다. 어미가 크게 놀라 그를 만류하며, 전인이 성을 무릅쓴 아버지가 전인의 아버지가 아니고 회재가 전인의 아비라는 사실을 말해준다. 전인은 바로 그 집을 떠나 회재의 집으로 찾아간다. 그때 회재는 강계(江界)에 유배를 가 있었고 회재의 부인만 집에 있었다. 부인은 전인이 회재의 아들이라는 것은 추호도 모르고 있었으니 의심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전인이 문 앞에 눈물을 흘리며 엎드려 있으니 부인은 문발을 사이에 두고 전인을 자세히 관찰해보았다. 전인의 신체나 발부(髮膚), 언어나 성음(聲音), 기거(起居)나 행보(行步)가 하나도 회재와 비슷하지 않았다. 부인은 이전에 회재에게 아들이 있었다는 이야기를 듣지 못하였고 또 하나도 닮은 구석이라고는 없으니 잘못 찾아온 것이라고 하였다. 전인은 식음을 전폐하고 그 문 앞에서 죽으려고 하였다. 부인이 불쌍하게 생각하여 밥을 보내어 먹으라고 강권하였다. 전인이 그제서야 억지로 밥을 먹는데, 먼저 장을 세 번 맛보고 나서 밥을 먹는 것을 보고 부인이 깜짝 놀랐다. 천성이 원래 그렇다는 것이다. 회재의 식습관과 비슷한 전인을 보고 부인은 전인을 회재의 아들로 결정하였다. 이전인은 바로 강계에 갔다. 회재도 전인의 어미와 전에 한번 잠자리를 한 적은 있지만 과연 아들이 있었다는 것을 몰라서 그도 역시 의심을 하였는데, 부인에게서 온 편지를 보고 비로소 믿게 되었다. 전인은 그때 이미 장성하였어도 전혀 글자를 몰랐는데 비로소 공부를 시작하여 삼 년 만에 큰 학자가 되었다. 아버지와 아들이 변방인 강계에서 경학(經學)을 공부하고 서로 강론한 것을 『관서문답(關西問答)』으로 정리하였다. 이상이 야승에 실린 이전인 설화의 줄거리이다.
이전인의 친필 [서천잠(誓天箴)] : 또다른 설화집인 『기문총화(記聞叢話)』에는 석비를 첩으로 데려간 이는 무인(武人)인 조윤손(曺潤孫)이고 전인에게 옥항(玉缸)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으며 조윤손은 첩자인 옥항에게도 토지와 노비를 나누어 주었다고 한다. 옥항은 조윤손이 아버지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서는 모든 재산을 다른 형제들에게 돌려주고 회재에게 왔다고 한다. 이야기는 어디까지나 이야기일 뿐이고 이언적, 이전인의 후손가 독락당에는 이들의 문서가 대량으로 전해져 내려온다. 그중에는 전인의 어미 석비가 관비에서 양인이 되는 문서인 [1517년 장예원 속신 입안], 이전인의 부인 정비(丁非)를 양인으로 만드는 문서인 [1532년 장예원 속신 입안] 등이 있다. 옥산(玉山)의 잠계 가문은 회재의 혈손으로서, 말 그대로 ‘바위틈에 핀 들꽃’처럼 엄격한 신분제가 살아있는 조선사회에서 온갖 어려움을 극복하고 굳세게 가문을 형성하고 지켜온 대표적인 가문이라고 할 수 있다. 이전인의 출생을 둘러싸고 수많은 설화가 만들어졌을 정도로 잠계의 출생과 신분을 두고는 말이 많다. 그런데 사실상 이전인이나 그의 아들 이준(李浚), 이순(李淳)에 대해서는 당시의 구체적 사실을 말해주는 고문서들이 많이 남아있어서, 이들의 진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어떤 설화보다도 이 문서들을 살펴봐야 한다. 이전인, 이준·이순의 출자(出自)는 아래 <표1>에서 보는 바와 같이 연속적으로 모계(母系)를 천인 출신으로 하고 있다. 이 문서들은 이들이 천인 신분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속신(贖身)을 하여 양인(良人)이 되었음을 증명해주는 문서이다. <표1> 잠계 이전인과 그 가계와 문서 앞에서 본 『기문총화』에는 잠계의 어머니가 조윤손의 첩이 되었으며, 잠계의 원래 이름은 조옥항이라는 것, 그리고 조윤손의 후사가 되어 재산도 물려받았고 3년상도 치렀다는 것이다. 이 내용은 다른 설화집이나 현재 남아있는 1차 사료와도 많이 다르다. 또 『야승』에서는 이전인이 어머니 후부(後夫)의 성을 모칭(冒稱)하고 관역(官役)을 졌다고 하였으며, 의붓 아버지의 상이 날 때까지도 회재가 아버지라는 것을 몰랐다는 것이다. 회재도 또 회재의 부인 박씨도 잠계가 회재의 아들이라는 것은 몰랐는데, 어머니의 기억과 회재의 부인 박씨가 관찰한 이전인의 식습관으로 잠계가 회재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확인했다고 한다.
실제 문서상에서 회재와 회재의 부인 박씨, 잠계의 어머니 석씨 그리고 잠계 이전인 사이에는 어떠한 일이 있었는가? 독락당 문서에는 이를 증언해주는 문서가 많이 남아있다. 먼저 이전인의 어머니인 석비에 관한 문서이다. 석비는 [1517년 장예원 속신 입안]으로 관비의 신분에서 벗어난 것으로 되어 있다. 이 문서에 의하면 관비인 족비(足非)가 만호(萬戶) 석귀동(石貴童)의 첩으로 비 석비를 낳았는데, 석비 대신 비 일금(一今)으로 속신(贖身)하고 석비를 양인으로 한다는 것이다. 속신하기 위해 석비의 아버지인 석귀동은 경주부에 청원서[所志]를 올리고, 경주부에서는 경상도에 첩정(牒呈)을 올렸으며, 도에서는 승정원에 관문을 보내 우승지 윤희인이 담당 승지로서 계본(啓本)을 올려 임금의 윤허를 받아 노비 담당 관서인 장예원의 심의를 거쳐 입안(立案)을 하였다. 이 문서에 의하여 석비는 관비(官婢)의 천역에서 벗어났다. 그런데 아직까지 이언적은 문서에 등장하지 않는다. 이언적이 처음 문서에 등장하는 것은 그로부터 31년 후인 별급문기(<분재기3>)에서이다. 이 문서에서 이언적은 첩 석군(石君, 장예원 입안에 나타나는 石非)이 자신이 서울에 있는 동안 노친(老親)을 잘 봉양하여 재산을 나누어주지 않을 수 없다고 하고, 이 재산은 또한 자신의 가계를 이을 사람에게 전계되도록 해야 한다고 하였다. 설화에 나오는 것과는 달리 석비는 강계에 유배가기 전부터 이미 이언적 집안에 들어와 노친을 봉양하고 있었다. 문서상에서 이전인이 처음 등장하는 것은 그로부터 또 7년 후이다.(<분재기5>) 이언적은 죽기 직전에 자신의 재산을 이전인에게 별급하는 형태로 상속하고 있다. <표2> 문서상으로 본 잠계 가문 연보 1509년 석귀동이 아들 석간에게 재산 별급(<분재기2-별급>) 1517년 석비, 장예원 속신 입안으로 보충대에 속하여 양인이 됨(<입안1>) 1532년 정비, 장예원 속신 입안으로 보충대에 속하여 양인이 됨(<입안2><입안3>) 1546년 이언적이 첩 석군에게 재산 별급(<분재기3-별급>) 1553년 이언적이 첩자 이전인에게 재산 별급(<분재기5>) 1556년 이언적 적처 박씨 이전인에게 별급(<분재기6><분재기7>) 1560년 이전인이 도망비 반춘, 수월, 주질금을 추심하여 결급받음(<입안7>) 1565년 이준이 자기 아버지의 여종을 잠간한 박팽수 처벌 요청(<소지1>) 1565년 이전인이 동생 이응인의 비 조금(아들 몽호)과 자기비를 상환(<입안8>) 1566년 이전인이 「진수팔규(進修八規)」를 올리도록 왕이 유지를 내림(<첩2>) 1566~67년 이전인이 적첩(嫡妾) 3형제에게 재산을 별급(<분재기8><분재기9>) 1576~1578년 반춘 노비결송입안(<입안10>~<입안13>) 1583년 이준 납속 허통(<예조급첩1>=예조허통첩) 먼저 석비가 속신하여 양인이 되는 <입안1>에는 1515년 7월 11일에 가선대부 석귀동이 소지를 올려 “제가 전 감포만호 때에 경주 관비 족비를 첩으로 삼아 낳은 비 석비를 낳아 길렀습니다. 아버지 쪽으로 전래해온 비 막덕의 4소생 비 일금을 그 대신 납부하여 속신하니 처분해주십시오(矣段 前/甘浦萬戶時 慶州官婢足非作妾 所生婢石非矣身乙産長爲白有臥乎在亦 父邊傳來婢莫德四所/生婢一今年丁巳生矣身乙 依他代納贖身爲白只爲 行下向事 所志是白齊)”라고 하였다. 경주부에 올린 이 소지는 바로 경주부의 첩정으로 경상도 관찰사에게 올려지고, 경상도 관찰사는 관문으로 장예원에 보내어 왕에게 계문(啓聞)하였다. 장예원에서는 경주부에 관비인 족비가 언제 누구와 교가하여 낳아 길러 어느 노비를 대납하고 속신하는가, 대납 노비의 천적(賤籍)을 경주부에서 조사하여 보고하도록 하였다. 조사 보고를 마치고 장예원에서는 경국대전(經國大典) 「형전(刑典)」의 천첩자녀조(賤妾子女條)의 속신 규정에 따라 석비를 보충대(補充隊, 조선전기 양인 확대 정책으로 천인이 양인이 되는 과정에서 임시로 속했던 기구)에 소속시켜서 속량(贖良) 조치를 하였다. 이로서 석비는 양인의 신분을 획득하였다. 1517년은 이언적이 27세 때이다. 24세 때에 문과 별시에 급제하고 다음해에 출신지인 경주에 금의환향하여 경주의 주학 교관(州學敎官)으로 근무하였다. 이전인은 1516년생이다. 이전인은 진사 하부(河溥)의 첩 사비 내은지(內隱之)와의 사이에서 난 정비(丁非)와의 사이에서 아들 준(浚)과 순(淳)을 낳았다. 정비도 역시 1532년에 아버지인 진사 하부가 소지를 올려 장예원 입안을 받아 속신하여 양인이 되었다. 진사 하부의 소지에 의하면, 자신은 천안(天安)에 사는 인척 정씨의 호비(戶婢) 내은지를 작첩(作妾)하였고, 내은지와의 사이에서 정비를 낳았다. 하부는 내은지를 주인인 정씨에게서 법에 따라 매득하고 딸인 정비를 보충대에 소속시켜 양인으로 만든 것이다. 정비는 정축생이므로 15세 때에 비로소 양인이 된 것이다. 이전인과 정비가 언제 관계를 가졌는지는 알 수 없으나 장남인 이준이 1540년생이므로 적어도 이전인과 결혼할 때에는 이미 양인 신분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언적은 적처(嫡妻)인 박씨와의 사이에는 후사(後嗣)가 없어서 나중에 동생의 아들인 이응인(李應仁)을 양자로 하였는데, 이언적은 이응인을 입양하기 이전에 벌써 이전인에게 상당히 많은 재산을 물려주고 있다. 1546년(명종1)에 이언적은 첩인 석비(문서에는 ‘石君’이라고 칭하였음)에게 상당한 양의 재산(노비 4구와 밭 3마지기, 논 1섬지기)을 별급하였다.(<분재기3>) 그 이유는 자신이 서울에 벼슬살이를 하는 동안 첩인 석비가 노친(老親)을 잘 봉양하였기 때문이라고 밝히고 있다. 또 이 재산은 자신을 계승할 사람이 있으면 그에게 전해주는 조건으로 별급한다고 하였다. 그것은 다분히 이전인을 염두에 둔 것이다. 이 문기에는 이언적․이언괄(李彦适) 형제의 친필 서압이 있다. 이상의 자료들을 보면, 관비였던 석비와 아들 이전인의 설화는 실제보다 상당히 과장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석비는 이언적이 강계에 유배되기 전에 이미 이언적의 집에 들어와 노친을 모시고 있었다. 그리고 석비에게 별급하였던 재산은 그후 다른 재산을 덧붙여서 1553년 서자인 이전인에게 별급되었다. 이전인에게 이러한 재산을 별급한 별급문기는 바로 이언적이 죽던 해에 작성된 문서이다.(<분재기5>) 여기에는 별급한 사유와 별급 재산 목록을 기록하였고 나아가 어머니 석비에게 전에 허급해 주었던 것도 이전인이 차지하도록 허여한 문기이다. 이언적은 자신이 유배 생활 하는 동안 자신을 곁에서 극진히 자신을 시봉한 이전인의 뜻을 가상히 여겨 재산을 허여한다고 하였다. 분재량은 노비 7구와 논 70마지기, 밭 3섬지기, 가사(家舍) 1채로 별급으로는 그 양이 매우 많다. 증인으로 수결을 한 ‘충의위(忠義衛) 손 아무개’는 이언적의 외가 사촌에 해당하는 인물일 것이다. 이처럼 이전인은 아버지 이언적에게서 상당량의 재산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적모(嫡母)인 박씨로부터도 일부이지만 재산을 별급받았다.(<분재기6>) 1556년(명종11), 이언적의 3년상이 끝난 후 이언적의 적처(嫡妻) 함양박씨는 첩자(妾子) 이전인에게 남편인 이언적이 유배 시절에 시봉(侍奉)을 하고 호상(護喪)을 하였으며 3년간의 시묘살이를 잘 하였고, 적모인 자신의 사망 후의 여러 가지 일들도 미리 배려하는 첩자 전인의 효성을 치하하며 노비 2구를 별급한 것이다. 이 노비 2구에 별급은 재주 함양박씨와 증인, 필집(筆執)의 초사(招辭, 확인서)를 점련하여 경주부의 입안을 받았다. 재주인 정경부인 함양박씨, 증인인 박씨의 5촌 조카 충의위 손호, 손광현 뿐만 아니라 새로 입양한 아들 응인이 증인이 되어 있고, 필집은 얼사촌(孼四寸)인 손영이 맡았다. 이로서 이전인은 적부모(嫡父母)로부터 자신의 정통성을 인정받았을 뿐만 아니라 경제적 기반을 확립할 수가 있게 된 것이다. 잠계 가문의 경제적, 법적인 기반 형성은 이미 이언적의 생전에 만들어진 것이다. 글쓴이 김현영(金炫榮) 한국고문서학회 명예회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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