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유학문선] 동학농민운동을 향해 묻는다 게시기간 : 2019-10-24 07:00부터 2029-11-30 04:04까지 등록일 : 2019-10-22 13:49
재단법인 한국학호남진흥원
근대유학문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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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말기 1894년은 격변의 한 해였다. 이 해 일어난 대사건을 꼽으라면 단연코 동학농민운동이다. 많은 사람이 동학농민운동을 향해 질문을 던졌다. 이것은 유럽 봉건제 사회에서 일어난 독일 농민전쟁 같은 것이 아닐까? 이것은 중국 청나라 말기 홍수전이 일으킨 태평천국운동 같은 것이 아닐까? 동학농민운동의 혁명적 메시지가 갑오개혁의 새 정책으로 계승된 것이 아닐까? 동학농민운동에서 전국적인 민중 공론을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교조신원운동에서 민중 공론장의 형성을 투시할 수 있지 않을까? 또 동학 교도들과 조선 정부 사이에 전개된 유교적인 담론 투쟁을 음미할 수 있지 않을까? 동학농민운동을 향한 질문은 당대 유학자도 던졌다. 이를테면 이관후가 지은 「갑오문답」의 질문이다. 동학농민운동 당시 삼남 지방에서 유독 ‘호강(豪强)’의 집이 화를 당한 이유는 무엇일까? [번역] 갑오년 전라도 고부(古阜)에서 성이 전씨(全氏) 1)인 사람이 요설로 군중을 미혹시켜 무리를 모아 세를 일으키고 오랜 원한을 통쾌히 갚았다. 삼남 지방이 호응하여 위세가 심히 맹렬해 마침내 큰 난리가 났는데 ‘호강(豪强)’의 집이 유독 그 화(禍)를 입었다. 이것이 문답을 지은 까닭이다. 누군가 내게 와서 시사(時事)를 말했다. “부귀(富貴)를 선망하고 빈천(貧賤)을 미워함은 천하의 똑같은 욕망입니다. 하지만 오늘날과 같은 세상에서는 부귀한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저와 그대는 빈천하니 참으로 큰 다행입니다.” 내가 말했다. “무슨 말입니까?” 그가 말했다. “지금 비류가 횡행하여 관청을 엄습하고 부인(富人)을 겁략해 많은 경우 사망에 이르렀습니다. 이 사람들이 저와 그대처럼 빈천했다면 어찌 이런 화를 만났겠습니까? 그래서 ‘지금 세상에서는 부귀한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한 것입니다.” “그대의 말과 같다면 지금 세상이 아니면 될 수 있지만 지금 세상이면 될 수 없다는 것인가요?” 그가 말했다. “그렇습니다.” “심하군요, 그대의 미혹됨이란! 저는 제대로 된 사람이면 지금 세상이라도 안 될 것은 없지만, 제대로 된 사람이 아니라면 다른 때라도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가 말했다. “무슨 말입니까?” “부귀는 공물(公物)입니다. 하늘이 군자를 후하게 기르는 까닭입니다. 군자가 부귀를 누리는 것이 어찌 공연한 일이겠습니까? 관에서는 세금을 가볍게 거두어 사랑하는 은택이 백성에게 두루 미치고 집에서는 곤궁하고 고단한 사람을 구휼하여 인후한 풍속이 향촌에서 이루어집니다. 그 마음 씀이 호오(好惡)를 남과 같이 해서 백성과 이익을 다투지 않으며 귀인이지만 천인에게 숙이고 부유하지만 가난한 사람을 병탄하지 않아 그래서 세민(細民)이 믿고 의지하며 살아갑니다. 지금의 부귀한 사람은 일절 이와 반대입니다. 사랑하는 정사가 폐지되니 취렴하는 향리가 일어나고 구휼하는 풍조가 없어지니 겸병하는 토호가 나타났습니다. 안으로 이익을 독점하려는 마음을 주로 해서 다시는 동포를 사랑할 줄 몰라 위세를 끼고는 그물질해 빼앗아가 못 하는 일이 없습니다. 미약한 사람이 손발을 놀릴 곳도 없고 호소할 데도 없어 속에 품은 원망이 오랜 세월 축적되다가 한 사람이 크게 부르짖어 천 리에서 호응하자 만사(萬死)의 계책을 내서 마음에 가득했던 원통함을 풀었습니다. 그래서 기약하지 않아도 모이고 도모하지 않아도 함께해서 난이 이렇게 극도에 이른 것입니다. 이로써 보건대 지금 세상의 난리가 일어난 까닭이 부귀한 사람 때문이 아닙니까? 난리가 자기 때문에 일어나 도리어 그 화를 받았으니 다시 누구를 원망하고 탓하겠습니까? 똑같이 부귀한데 지금 세상에 또한 더러 화란에서 초연했던 사람은 부귀한 사람으로서의 행동이 비록 군자의 부류는 아니라 해도 그나마 이쪽보다는 저쪽이 나았기 때문입니다. 이쪽보다는 저쪽이 나은 정도인데도 상응하는 화복(禍福)이 구름이냐 진흙이냐의 차이뿐만이 아니었으니 하물며 부귀한 사람으로서의 행동을 잘한 군자이겠습니까? 제가 그래서 ‘제대로 된 사람이면 지금 세상이라도 안 될 것은 없지만 제대로 된 사람이 아니라면 다른 때라도 안 된다’고 말한 것입니다.” 그가 말했다. “예.” 그 언설을 위와 같이 기록한다. [원문] 甲午歲全羅古阜田姓人, 以妖說惑衆, 聚羣作勢, 快雪宿怨, 三南響應, 威炎甚熱, 遂成大亂, 而豪强之家, 偏被其禍, 此問答之所以作也. 或有來我言時事者, 曰慕富貴, 惡貧賤, 天下之所同欲. 然如今之世, 富貴必不可爲, 吾與子之貧賤, 固其大幸也. 余曰何謂也? 或曰今匪類橫行, 掩襲官府, 劫掠富人, 多致死亡. 使此人者, 若貧賤吾與子, 何如見中於此禍乎? 故曰今之世, 富貴必不可爲. 曰若子之言, 非今之世則可爲, 今之世則不可爲乎? 或曰然. 曰甚矣, 子之惑也! 我則謂如其人, 雖今世, 無不可, 如非其人, 雖他時, 亦不可. 或曰何謂也? 曰富貴, 公物也. 天之所以厚養君子者也. 君子之享富貴, 豈其徒然哉? 在公則輕斂薄賦, 字惠之澤, 洽于民, 在家則周窮恤孤, 仁厚之俗, 成於鄕. 其爲心也, 好惡與人同, 不與民爭利, 能以貴下賤, 不以富呑貧, 細民所以依恃而爲生也. 今之爲富貴者, 一切反是, 字惠之政廢而聚斂之吏作, 周恤之風亡而兼幷之豪出. 內主乎獨利之心而不復知同胞之可愛, 藉勢挾威, 侵漁攘奪, 無所不至. 使微弱之人, 靡所措其手足而無處呼訴, 內懷怏怏, 蓄積於歲月之久矣. 一人大呼, 千里響應, 出萬死之計, 伸滿腔之寃, 故不期而會, 不謀而同, 亂至此極. 由此觀之, 今世亂之所由作, 非富貴之人乎? 亂自己作, 反受其禍, 復誰怨尤, 均之爲富貴. 今世亦或有超然於禍亂者, 其行富貴也, 雖不可謂君子之類, 而猶爲彼善於此也. 彼善於此, 而禍福之應, 不啻雲泥, 況君子之善行富貴者乎? 余故曰, 如其人, 雖今世, 無不可, 如非其人, 雖他時, 亦不可也. 或曰唯. 記其說如右. [출처] 이관후(李觀厚), 『우재문집(偶齋文集)』 권2 「갑오문답(甲午問答)」 [해설] 허균(許筠)은 「호민론(豪民論)」에서 말했다. 이 세상에는 세 가지 백성이 있다. 하나는 항민(恒民), 다른 하나는 원민(怨民), 그리고 또 다른 하나는 호민(豪民). 사람들은 대체로 국가의 지배 질서에 순응하며 항민처럼 살아가지만 가혹한 수탈이 계속되면 원민처럼 국가를 원망하게 되고 나라에 변고라도 발생하면 호민처럼 국가에 저항하기도 한다. 호민이 저항의 깃발을 올리면 원민은 언제든지 함께 결집하게 되어 있고 항민도 살아갈 길을 찾느라 합류하지 않을 수 없다. 중국사에서는 진(秦)나라 때 진승․오광의 난이 일어났고 당(唐)나라 때 황소의 난이 일어났으니 호민이 두려운 줄 알아야 한다. 그럼에도 호민이 없다고 안심하며 가혹한 수탈을 일삼고 있는 조선을 보라. 고려 말기보다 혹심한 고통으로 원민이 급격하게 증가하고 있구나. 천하에 두려워해야 할 존재는 백성인데 백성이 두렵지 아니한가? 허균은 호민을 말했지만, 조선 사회의 문제적인 존재는 호족(豪族)이었다. 흔히 호족 하면 신라 말 고려 초 지방 세력을 떠올리기 쉽지만, 이것은 하타다 타카시(旗田巍)의 논문 「고려사회성립기의 「부(府)」와 호족」(1960)의 영향 하에 이기백의 『한국사신론』(‘호족의 시대’)과 국사편찬위원회의 『한국사』(‘호족연합정권’)를 거쳐 역사 용어로 정착된 것이다. 근래는 개념이 불분명한 호족 대신 성주ㆍ장군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자는 논의가 제기되었다. 사실 호족은 『고려사』나 『고려사절요』에서 불과 1건이 검색되고 대개는 조선시대 사료에서 산견되는데 이들은 고을 수령이 행사하는 관권에 통제되지 않고 지방 사회에서 권세를 부리며 소민을 침학하는 부류였다. 이안눌(李安訥)은 호족이 많은 담양 고을에 자신이 부임해서 호족을 억제하는 정사를 펴자 소민이 기뻐했음을 전하고 있다. 정약용(丁若鏞)은 『목민심서(牧民心書)』에서 고을 수령이 호족을 징치하고 고을을 안정시킨 사례를 나열하면서 ‘토호의 무단은 소민의 맹수이니 해악을 없애고 백성을 살려야 목민관이라 이르겠다’고 특기하였다. 김성희(金成喜)는 조선시대에 공예가 쇠퇴한 이유를 관청의 사역과 더불어 호족의 수탈에서 구했다. 조선시대에 호족보다 더 자주 쓰인 말은 호강(豪强)이었다. 태조 때에는 ‘전조(前朝) 말기에 토지 제도가 문란해 호강이 겸병하여 창고가 비었다’고 인식하였다. 성종 때에는 ‘근일 도적의 일어남은 기한(飢寒) 때문이 아니라 호강이 도당을 이루어 자의로 겁략(劫掠)해서’라고 인식하였다. 중종 때에는 경상도의 군액(軍額)이 부족한 이유를 헤아리며 ‘호강의 자제가 모두 군역을 면제받고’ ‘이름하여 업유(業儒)인 자는 글자 하나 몰라도 유적(儒籍)에 모탁(冒托)한다’고 인식하였다. 조선의 향촌 사회에서 호강이 점점 사회 문제로 떠오르게 되자 종종 39년 1월 1일 마침내 호강률(豪强律)이 반포되었다. 그 주된 내용은 ‘호강 품관이 향곡(鄕曲)에서 무단(武斷)하여 민전(民田)을 억탈(抑奪)하고 고약(孤弱)을 침어(侵漁)하며 수령(守令)에게 공혁(恐嚇)하고 인리(人吏)에게 위제(威制)하며 공부(貢賦)를 횡역(橫逆)하고 관물(官物)을 솔점(率占)한 자’는 평안도ㆍ함경도 같은 변방으로 추방시킨다는 것이었다. 『목민심서』는 ‘『속대전』에서 이르기를 호강(豪强) 품관(品官)이 향곡에서 무단하고 백성을 능학하면 장(杖) 1백에 유(流) 3천 리’라고 기록하였다. 조선은 호족 또는 호강을 억누르는 법제를 갖추었으나 이들로부터 소민을 보호하는 데는 성공하지 못했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은 호족 또는 호강에 대한 원한이 쌓일 대로 쌓여있는 소민의 궐기였다. 허균의 어법대로 말하자면 수많은 원민(怨民) 가운데 마침내 호민(豪民)이 들고일어난 사건이었다. 이 사건에서 어떤 교훈을 찾을 수 있을까? 의령 유학자 이관후(1869~1949)는 삼남 지방에서 유독 호강(豪强)의 집이 화를 당한 사실에 주목했다. 그것은 부귀를 누리는 사람일수록 제대로 된 사람이 없다는 사회적인 분노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부귀는 사유(私有)가 아니라 공물(公物)이건만 이들의 부귀에 애당초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없었다. 오늘날의 세상은 어떠한가? 부귀의 공공성은 강화되었는가? 호강의 폐해도 원민의 고통도 모두 사라졌는가? 가까운 옛날은 오늘날을 비추는 거울이다. 1) 전씨(全氏) : 원문에는 ‘田氏’라고 표기되어 있으나 全琫準을 가리키는 말이므로 ‘全氏’로 고쳤다. [참고문헌] 『太祖實錄』 권7 태조 4년 4월 4일 丁卯 『成宗實錄』 권9 성종 2년 2월 18일 辛酉 『中宗實錄』 권101 중종 39년 1월 1일 庚子 許筠, 『惺所覆瓿藁』 권11 「豪民論」 丁若鏞, 『牧民心書』 「刑典六條」 『大韓自强會月報』6, 殖産部 「槪說」 이순근, 「나말여초 「호족」 용어에 대한 연구사적 검토」『성심여자대학교논문집』19, 1987 최종석, 「나말여초 성주․장군의 정치적 위상과 성」『한국사론』50, 2004 배항섭, 「19세기 후반 민중운동과 공론」『한국사연구』162, 2013 허 수, 「교조신원운동기 동학교단과 정부 간의 담론 투쟁」『한국근현대사연구』66, 2013 김정신, 「16세기 조선의 관 주도 향정과 호강률」『조선시대사학보』87, 2018 글쓴이 노관범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부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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