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경의 기억 ] 풍경에 중첩된 기억들: 국립아시아문화전당 게시기간 : 2019-10-26 07:00부터 2030-01-02 02:02까지 등록일 : 2019-10-24 13:16
재단법인 한국학호남진흥원
풍경의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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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동구 문화전당로 38(광산동 13)에 자리한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은 21세기 문화의 세기를 연출하는 신개념 복합문화공간이며 아시아 문화를 연구ㆍ교육ㆍ교류하는 국제적 학술문화 플랫폼이다. 각종 문화예술 행사와 지역 축제가 열리는 이곳은 ‘아문당’이라 불리며 충장로와 함께 젊은 층에게 사랑받는 곳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곳을 부르는 또 다른 이름은 ‘구(舊) 도청’이다. 현재 국립아시아문화전당 민주평화교류원 일원은 전남도청 청사로 사용되던 건물들이다. 광주시가 1986년 직할시, 1995년 광역시로 승격됨에 따라 행정구역상 전라남도에 속하지 않게 된 이후에도, 전남도청은 이곳에 머물다가 2005년 무안 신청사로 이전하였다. ‘구 도청’이란 이름이 사람들의 뇌리에서 쉬이 사라질 수 없는 이유는 전남도청이 1980년 5ㆍ18민주화운동의 최후 항쟁 공간이었기 때문이다. 박정희 사후 국가 권력을 탈취한 ‘신군부’―이렇게 쓰이지만, 실은 ‘신’이 아닌 유신독재를 보위한 친위 군부―세력에 반대한 광주와 전남 일원의 시민 학생이 궐기하였던 5ㆍ18민주화운동은 바로 이곳 도청에서 광주의 시민 학생이 최후까지 저항하고 계엄군이 진압함으로써 막을 내렸다. 하지만 80년 5월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서고자’ 하였던 광주의 희생과 정신은 이후 한국 민주화운동에 계승되어 군부 독재를 종식하는 데 기여하였고, 광주는 민주화의 성지가 되었다. 이러한 역사성으로 인하여 광주광역시는 1998년 관련 조례를 마련해, 전남도청, 5ㆍ18항쟁 기간 민주성회가 열렸던 도청 앞 광장, 그리고 5월 희생자의 시신이 안치되었던 상무관 일원을 5ㆍ18민주화운동 사적지로 지정하였다. 문제는 ‘구 도청’이 ‘아문당’으로 전환되는 과정이 순탄하지 못했다는 데 있다. 1993년 정부는 전남도청을 전남 관내로 이전하고 광주의 청사는 5ㆍ18기념공원으로 조성하겠다는 방침을 발표하였다. 무안에서 신도청 소재지 공사가 한창이던 2002년 12월, 노무현 당시 대통령 후보는 “충청권은 행정수도, 부산은 해양수도, 광주는 문화수도”로 만들겠다는 공약을 걸고 당선되었다. 2005년 구 도청 일대에 아시아문화전당을 세우기 위해 실시한 설계 공모전에서 우규승의 작품이 선정되었고, 그는 “새로운 건물이 기념비가 되기보다 5ㆍ18 과정에 남은 기억들이 기념비가 될 것”이라고 약속했다. 실제로 그의 설계는 아시아문화전당의 건물 대부분을 지하에 배치함으로써 지상에 있는 구 도청 공간을 가급적 살리고 존중하는 방식이었다. 하지만 시작부터 아시아문화전당을 상징하는 랜드마크를 지상에 건립하자는 주장에 부딪혀 2년간 표류했다. 2008년 아시아문화전당 기공식이 거행된 이후에는 5ㆍ18단체 및 시민사회를 중심으로 5ㆍ18 사적지인 전남도청의 원형이 훼손된다는 문제가 제기되었다. 애당초 구 도청 별관은 철거될 예정이었지만, 2010년에는 부분 보존하는 쪽으로 설계를 변경하였다. 이러한 우여곡절 끝에 2015년 11월에야 아시아문화전당이 개관했지만, 5ㆍ18을 소재로 한 예술작품을 전시하기 위해 공간을 리모델링하는 바람에 구 전남도청 본관, 구 전남경찰청 본관과 민원실 등 5ㆍ18 최후 항쟁 공간이 옛 모습을 가늠할 수 없게 되었다. 이에 5ㆍ18단체와 유가족, 시민사회가 구 도청의 원형 복원을 촉구하며 3년간 천막농성 투쟁을 지속하는 가운데, 민주평화교류원의 개관이 보류되었다. 그리고 문재인 대통령이 2017년 5ㆍ18기념식에서 원형 복원을 약속함에 따라, 2019년 8월 말 문화체육관광부 직속 ‘옛 전남도청 복원 추진단’이 신설되고 2022년까지 1980년 5ㆍ18 당시 모습으로 복원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도청 본관과 별관 등 건물을 잇던 연결통로를 모두 복원하고, 건물 내부의 전시물도 모두 철거한 후 5ㆍ18 당시의 방송실, 시민군 상황실 등으로 복원할 예정이다.
이 글에서 논란을 되풀이하려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전남도청이 국립아시아문화전당으로 탈바꿈하는 과정에서 나타난 논란과 갈등들이 ‘역사적 기억이 응축된 공간을 어떻게 사유하고 활용해야 할 것인가’라는 묵직한 질문을 우리에게 던져준다는 점이다. 여전히 곳곳에서는 개발과 일거리 창출이라는 이름 아래 역사적 공간과 문화유산을 외면하거나 심한 경우 파괴하고 있다. 혹은 한국의 전근대 문화유적은 자랑스러운 ‘전통’으로 기억하려는 반면, 근현대 일제 식민지배와 국가폭력의 현장들은 지워버려야 할 ‘일제의 잔재’나 감추고 싶은 ‘수치’로 여긴다. 혹은 근현대사의 비극적 교훈 공간을 정면에서 다루는 다크투어리즘 Darktourism에 대해서도 일제나 국가의 만행과 피해자의 고통을 적나라하게 드러낼 필요가 있다는 입장이 있는가 하면, 그런 방식의 선정성과 폭력성을 비판하면서 어린 학생을 포함한 수용자의 충격을 완화하기 위해서는 예술이나 문학 작품을 활용하자는 입장이 갈등하기도 한다. 광주는 구 전남도청과 아시아문화전당을 통해, 이러한 문제들에 가장 절절히 대면한 지역 중 하나다. 이때 하나 더 언급해두고픈 것은 현재 공간을 활용하는 방식이 그 공간에 대한 이후의 집단 기억을 좌우한다는 점이다. 호남 지역 인류의 역사가 10만 년 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면, 역사시대의 특정 사건은 찰나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시간의 길고 짧음은 중요하지 않다. 우리는 현재적 가치와 미래적 지향을 고려하면서, 공간 위에 켜켜이 쌓인 시간의 지층 가운데서 특정한 시간대를 뽑아내어 기념하고 후대에 기억을 전수한다. 국립아시아문화전당에서 현재 선택된 시간은 1980년 5월이지만, 구 전남도청 본관과 회의실이 1930년대 건립되었다는 사실도 비교적 널리 알려져 있다. 건물이 현존할뿐더러 일제강점기에는 보기 드물게 한국인 건축가인 김순하의 설계를 바탕으로 건축되었다는 점 때문에 이 기억이 유지되어왔을 것이다. 그에 대비되는 유적이 광주영상복합문화관 방면 문화생태공원에 조성된 조선시대 광주읍성 유허(遺墟)다. 1896년 전라도가 남도와 북도로 나뉘고 광주에 전남관찰청이 신설되기 훨씬 전부터, 현재의 아시아문화전당 부근은 조선시대 광주 지역의 행정중심지였다. 상무관 부근이 수령(사또)의 집무 공간인 동헌이 있던 자리로 추정된다. 주위에 돌로 쌓았던 성벽은 한말 일본이 의병을 탄압하던 1908년부터 1918년 사이 철거되었는데, 1992년 전남도청 주차장 공사 도중 유적이 확인되었다. 이후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을 조성할 때 발굴 조사하면서 성벽의 돌을 해체 보관하다가, 2014년 읍성의 일부 구간을 현재의 위치로 이전 복원하였다. 광주읍성이 전남도청보다 긴 세월을 이 공간에 자리 잡았던 셈이지만, 일반인 중에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은 듯하다. 같은 공간에서 아시아문화전당이 5ㆍ18 최후 항쟁지인 구 전남도청의 기억을 약하게 한 것처럼, 구 전남도청은 광주읍성에 대한 기억을 지워 나갔던 것이다.
시간은 결국 흘러가도 공간은 남기에, 기억이 켜켜이 쌓인 공간과 그 풍경들 속에서 우리가 무엇을 기억하고 공유할 것인가가 중요해진다. 무엇을 기억할지를 결정하는 과정에서 사람들은 제각기 다른 가치를 내세우며 충돌할 수도 있고, 하나를 기억하는 가운데 의도적이든 아니든 다른 나머지 것들은 기억에서 지워버릴 수도 있다. 하지만 사람이 다양한 경험을 통해 성장하듯이, 사회도 다양한 가치와 기억이 공존하며 서로 소통할 때 더욱 풍요로워지는 것은 아닐까. 이러한 생각을 바탕으로 지금부터 호남의 기억들을 찾아가는 여행을 시작해보려 한다. 글쓴이 이정선 조선대학교 역사문화학과 조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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