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비, 길을 열다] 태산에 올라 무엇을 근심하리? 게시기간 : 2019-10-29 07:00부터 2030-03-01 03:03까지 등록일 : 2019-10-28 14:00
재단법인 한국학호남진흥원
선비, 길을 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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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림별곡(翰林別曲)」은 13세기 초엽 최충헌 무신정권에 복무하던 학사들이 함께 짓고 같이 불렀던 일종의 속악가사로 모두 8장이다. 각 장마다 ‘아, …광경 어떠하니 잇고[偉…景何如]’를 반복한다. 첫째 장에 유원순(兪元淳)ㆍ이인로(李仁老)ㆍ이공로(李公老)ㆍ이규보(李奎報)ㆍ진화(陳澕)ㆍ유충기(劉冲墓)ㆍ민광균(閔光鈞)ㆍ김양경(金良鏡)이 등장한다. 지공거(知貢擧) 금의(琴儀)가 주관한 과거에서 문장과 시부, 대책과 경전 해석에서 빼어난 기량을 발휘하였던 당대 정예 관료이며 일급 문사였다. 그래서 첫 번째 후렴이 다음과 같았다. “금학사(琴學士)의 옥순문생(玉笋門生), 금학사의 옥순문생, 아, 날조차 몇 분이니 잇고.” 이들은 유교 경전은 물론 많은 서책을 섭렵하였다. 다음은 둘째 장이다. 당한서(唐漢書) 장노자(莊老子) 한류문집(韓柳文集) 이두집(李杜集) 난대집(蘭臺集) 백낙천집(白樂天集) 모시(毛詩) 상서(尙書) 주역(周易) 춘추(春秋) 주대예기(周戴禮記) 아, 주(註)조차 모두 외운 광경 그 어떠하니 잇고. 한ㆍ당의 정사(正史), 『장자』와 『노자』, 한유(韓愈)와 유종원(柳宗元)의 문집, 이백(李白)과 두보(杜甫)의 시집, 반고(班固)의 『난대집』, 백거이(白居易)의 문집을 읽었고, 유학 오경은 원문은 물론 풀이까지 외웠다는 것이다. ‘주대예기’는 『주례(周禮)』와 대덕(戴德)이 편찬한 『예기』다. 이렇게 누군가 선창하면 일동은 다음 가락으로 화답하였다. “태평광기(太平廣記) 사백여권(四百餘卷), 태평광기 사백여권, 아, 역람(歷覽)하는 광경 그 어떠하니 잇고.” 『태평광기』는 송 태조 조광윤의 동생으로 2대 황제에 오른 조경(趙炅)의 명령으로 편찬된 방대한 야사, 설화, 소설 모음집이다. 셋째 장은 명품 글씨와 희귀한 붓. 이쯤 되면 순배(巡杯)가 빨라지며, 문사들은 멋진 잔에 좋은 술, 아름다운 꽃, 갖가지 악기와 흥겨운 가락, 호숫가 경치, 그리고 그네타기에 빠져들었다. 6장 연주에 도취한 ‘과야경(過夜景)’을 풀어본다. 아양(阿陽)의 거문고, 문탁(文卓)의 피리, 종무(宗武)의 중금(中笒), 대어향(帶御香)과 옥기향(玉肌香)이 쌍가야(雙伽耶), 김선(金善)의 비파(琵琶), 종지(宗智)의 해금(嵆琴), 설원(薛原)의 장고(杖鼔), 아! 밤을 지새우는 광경 그 어떠하니 잇고. 일지홍(一枝紅)의 비낀 피리소리[笛吹], 일지홍의 비낀 피리소리, 아! 듣고야 잠들고 싶어라. 실로 여유롭고 호기로우며 화려하고 질탕하였다. 조선왕조가 들어서며 「한림별곡」은 더욱 인기를 끌었다. 특히 예문관ㆍ승문원ㆍ성균관ㆍ교서관에 처음 배속되는 신급제(新及第)가 선배에 한턱냈던 신참례(新參禮) 잔치에서는 빠뜨리지 않았다. 국왕 또한 정예 문신이 봉직하는 승정원, 홍문관 잔치가 있으면 「한림별곡」에 나오는 자개 껍질로 만든 ‘앵무잔’을 하사하였다.1) 이들 문인관료들은 「한림별곡」을 즐기며 한편으론 고려 문학의 최전성기를 연출한 이인로ㆍ이규보 등의 재능과 풍류를 부러워하면서도, 다른 한편에선 그들의 처지와 각박한 세월을 동정하였다. 저들이 문장과 학술로 일세를 풍미하였다지만, 기실은 강퍅한 집정 무신에 휘둘리며―이인로는 무신이 정변을 일으킬 때 승려가 되어 피신하였고, 이규보는 최충헌에게 깊숙이 굽히고서야 벼슬을 받았다― 여진의 금에게 굽실거리는 문장을 짓다가 무섭게 치솟던 몽골에 짓눌리며 가슴앓이를 하였음을 알았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임금은 문학 하는 선비를 우대하고 이웃 나라와는 사대교린의 평화를 구가하고 있으며, 그간 주인이 정해지지 않았던 북방이 우리 강토로 명실공히 회복되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하였다. ‘우리 왕조의 태평과 성대한 문물’에 도취되었음일까? 「한림별곡」 잔치는 ‘모두가 매미 소리와 같은 청아한 노래에 취하여 서로 손뼉 치고 몸을 흔들며 춤을 추다가 새벽이 돼서야 그쳤다.’2) 1472년(성종 3) 늦봄 전라도 태인 고현(古縣)―지금 정읍시 칠보면에서 「한림별곡」의 형식 음절은 본받았으되 취향이 전혀 다른 「불우헌곡(不憂軒曲)」이 울려 퍼졌다. 이 마을 정극인(丁克仁)이 ‘명예나 지위를 구하지 않고 청렴결백하게 자신을 지키면서 인근 자제를 부지런히 가르쳤기에 가상하다’는 국왕의 상찬과 함께 종3품 산관(散官)을 받았을 때, 잔치를 베풀며 하객들과 함께 불렀다. 「한림별곡」이 정예 문신의 혁혁한 실력과 명예를 과시하며 화려한 풍광 질탕한 풍류를 탐닉하였다면, 「불우헌곡」은 안빈낙도(安貧樂道) 효제충신(孝悌忠信)의 ‘자기 지킴[自守]’ 그리고 보잘것없는 벼슬을 지내면서도 후진을 게으름 피지 않고 인도하였다는 ‘자긍’을 드러냈다. 모두 여섯 장인데, 다음은 둘째 ‘정성껏 잘 이끌었다는 순순선유경(諄諄善誘景)’이다.3) 늦게 생원, 늙어서 급제, 낙천(樂天)하고 천명(天命)을 알았어라. 두 번 훈도, 세 번 교수, 남을 가르침 게으르지 않았네. 집안 글방 세 칸, 어린아이 모아놓고, 소상히 구두법을 일러줬지. 아, 정성 들여 잘 가르치는 광경이 어떠한가. 즐겁지 않은가, 또한 책궤를 짊어진 서생들 있네. 아, 먼 곳으로부터 찾아오는 광경, 어떠한가.―재창(再唱) 이때 정극인 72살, 이태 전에 사간원 정언을 사퇴하고 귀향하였었다. 불우헌(不憂軒)은 ‘얻거나 얻지 못하는 사이에 내가 무엇을 근심하며 기뻐할 것인가!’란 각오를 담은 당호(堂號), ‘헌(軒)’을 붙인 것으로 미뤄보면 사랑채와 행랑채가 딸렸음이 틀림없다. 1401년 낮은 벼슬을 지낸 조부와 부친이 묻혔던 한강 두모포(豆毛浦)―오늘날 동호대교 성수역 일대―에서 태어난 정극인은 관향인 전라도 영광에 내려와 향시(鄕試)에 수석하고, 1429년 생원이 되었다. 성균관 유생 시절 왕비가 세종의 병환을 기도하라고 성균관에 보낸 내시와 무당을 매질하여 쫓아냈고, 흥천사 주지로 초빙된 판천태종사(判天台宗事) 행호(行乎)를 규탄하는 유생 상소를 주도하였다.4) 이렇듯 왕실의 호불(護佛)에 맞섰다가 유배와 정거(停擧)를 당하고, 처가가 있던 태인 고현―정읍 칠보면 무성리―에 정착하였다. 이때 ‘농사짓는 사람, 나무하는 사람들과 섞여 살며’ 학당을 열어 인근 자제를 교육하고, 덕업상권(德業相勸) 과실상규(過失相規) 예속상교(禮俗相交) 환난상휼(患難相恤) 하는 고을 향약을 세웠다. 스스로 인륜을 지키고 서로 돕는다는 도덕문명의 모듬살이, 동아리 짓기였다. 따라서 반목과 거짓은 금물, “신명이 벌하리라! 그 죄는 마땅히 내쫓아서 굴복시켜야 하나니!”5) 이렇게 십여 년, 1451년(문종 1) 겨울 ‘학행이 있으나 늙도록 급제하지 못한 사람’으로 뽑혀 국가 창고를 관리하는 광흥창(廣興倉) 부승(副丞)이 되었다. 이태 후에는 문과도 통과하였다. 어느덧 53살, 이후 향교의 교수와 훈도, 토지를 측량하여 세금을 매기는 양전관(量田官)을 지냈다. ‘유림으로서 속상하는 직책’이었다.6) 비록 늙어 급제하였다지만 달갑지 않았음이었다. 그래도 성실하게 감당하였다. 특히 훈도ㆍ교수를 지내면서 세운 학령은 엄격하였다.7) “일과(日課)를 외우지 못하는 사람은 회초리 50대, 앞서 배운 것을 외우지 못하는 사람은 60대, 바둑이나 장기 등 잡기 놀이하는 사람은 70대, 규계(規戒)와 책려(責勵)를 따르지 않는 사람은 80대, 시간을 틈타서 활쏘기를 배우는 사람은 90대, 여색을 탐하여 따르는 사람은 100대를 치는데, 모두 댓가지로 만든 회초리로 벌한다. 제생(諸生)들은 자신의 재질을 헤아리고 능력을 요량하여 이 학령에 따를 수 있으면 학당에 있고 따를 수 없으면 학당에서 나가야 옳다.” 65살이 돼서야 중앙 조정의 직책을 맡았다. 사헌부 감찰, 성균관 주부, 종학(宗學) 박사였다. 그리고 다시 태인 훈도로 왔다가 1469년 8월 사간원 정언으로 되고선 그해 겨울 은퇴하고 귀향하였다. 51살에 종6품 광흥창 부승으로 시작하여 70살에 정6품 사간원 정언으로 마감한 것이다. 1470년 정월 귀향할 때 감회가 다음과 같다.8) 벼슬에서 물러나 읊조리며 사립문에 이르러, 관을 벗어 걸고 다시 불우헌에 기대었네. 호남의 군현이 얼마던가? 쉰셋 고을에 정언은 한 사람뿐이었네. 임금에게 바른말 할 수 있는 정언(正言)에 자족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아쉬움이 없지 않았다. 하여 이어지는 칠언율시에서는 ‘다만 몸과 마음이 아직 여위지 않았으니, 나이를 줄여 다시금 홍진을 밟고 싶어라’ 하였다. 그런데 2년 후 국왕이 ‘염개자수(廉介自守)’ ‘교회불권(敎誨不倦)’을 알아주고 비록 실직이 아닌 산관이지만 종3품 중직대부(中直大夫)를 내렸던 것이다. 얼마나 감격하였을까? 이후에도 정극인은 마을 잔칫날 선보였던 「불우헌곡」을 ‘간혹 벗들과 함께 부르며 밤이 되면 같이 춤을 추었다.’9) 그러나 정녕 한 견의 응어리마저 씻겼을까? “학문에 힘쓰고 총명을 개발하라! 공경장상이 어찌 종자가 있겠는가!” 광흥창 부승으로 발탁되었을 때, 자손을 훈계한 글에 있다. ‘공경장상에 어찌 종자가 있겠는가!’는 진 멸망의 도화선을 당겼던 진승(陳勝)의 어록이다. 1) 『성종실록』 6년(1475) 8월 4일 및 권111, 10년(1479) 11월 14일
2) 성현(成俔), 『용재총화』 제4권 및 『허백당문집』 제6권, 「여회가의 연회에 참석한 분들이 쓴 시의 서문 如晦家宴集詩序」. 여회(如晦)는 성현의 형인 성임(成任)의 아들 성세명(成世明)이다. 3) 『불우헌집』 권2, 「불우헌곡」 “晚生員 老及第 樂天知命, 再訓導 三敎授 誨人不倦, 家塾三間 鳩聚童蒙 詳說句讀, 偉 諄諄善誘景何叱多, 不亦樂乎 負笈書生 偉 自遠方來景何叱多(再唱)” ‘하질다(何叱多)’는 ‘하여(何如)’로 전라도 방언 ‘어쩐가?’의 음차(音借)다. 4) 『불우헌집』 권2, 「요승 행호를 베기를 청하는 성균관 상소 太學請誅妖僧行乎疏」; 『중종실록』 11권, 5년(1510) 4월 13일. 5) 『불우헌집』 권1, 「태인향약계축 泰仁鄕約契軸」 6) 『불우헌집』 권2, 「불우헌 기문 不憂軒記」 “量田三 敎授三 儒林之腐者也” 7) 『불우헌집』 권2, 「학령 學令」 “훈도 교수로 있을 때 訓導敎授時” 8) 『불우헌집』 권1, 「나이가 많아 벼슬을 물러나며 읊다 致仕吟」 “致仕行吟到蓽門 掛冠還倚不憂軒 湖南郡縣知多少 五十三分一正言” 및 “…只有身心衰未了 縮年還欲踐紅塵” 9) 『성종실록』 122권, 성종 11년(1480) 10월 26일 “ 글쓴이 이종범 (재)한국학호남진흥원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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