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문서와 옛편지] 노사심화(蘆沙心畫): 기정진이 제자 이태용에게 보낸 간찰 2통 게시기간 : 2019-10-31 07:00부터 2029-02-02 10:03까지 등록일 : 2019-10-30 10:06
재단법인 한국학호남진흥원
고문서와 옛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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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 1798∼1879)은 조선 후기 호남 성리학의 종장(宗匠)이다. 손자인 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을 비롯하여 이최선(李最善), 조성가(趙性家), 정의림(鄭義林) 등 기라성 같은 큰 제자들을 배출하였다. 이항로(李恒老)의 화서학파(華西學派), 전우(田愚)의 간재학파(艮齋學派), 송병선(宋秉璿)의 연재학파(淵齋學派)와 함께 기호 학맥의 큰 줄기를 형성하였다. 여기에 소개하는 노사의 편지는 퇴계 이황이 친필로 쓴 「도산기(陶山記)」와 「도산잡영(陶山雜詠)」 그리고 고봉 기대승(奇大升)이 친필로 쓴 발문과 화운시를 목판으로 간행한 책의 말미에 첨부되어 ‘노사심화’라고 제목을 붙여 장첩(粧帖)한 간찰이다. ‘심화(心畫)’란 한나라 양웅(揚雄)의 『법언(法言)』에 나오는 말로서, “말은 마음의 소리이고 글씨는 마음의 그림이다. 소리와 그림의 형태로 군자와 소인을 볼 수 있다. 소리와 그림은 군자와 소인이 움직인 것이다 言心聲也 書心畵也 聲畵形 君子小人見矣 聲畵者 君子小人之所以動情乎.”고 하였다. 정조도 문체에 대해서 비판하는 글에서, 문장과 글씨에 대해서 언급하면서 “문장은 성정에서 나오는 것이고 글씨는 마음의 그림이다. 그러므로 더욱 기상을 이해해야 하는데, 그대들의 문체와 자획은 모두 까다롭고 난삽한 병통이 있으니 깊이 경계해야 할 것이다 文出於性情 而書者心畫也 故尤宜理會氣象 爾之文體字畫 俱有枯澀之病 切宜戒之”(『弘齋全書』 卷162 日得錄 2)라고 하면서 글씨를 마음의 그림이라고 하였다. 이처럼 옛사람들은 글씨를 마음의 그림 즉 마음이 형상화된 것으로 보았다.
여기에 소개하는 ‘노사심화’ 즉 노사 기정진의 편지는 후학들이 노사의 마음의 표현인 스승의 글씨를 간직하고 음미하기 위하여 「도산기」 말미에 첨부한 것이다. 이 두 편의 편지는 문집인 『노사집』에도 나온다(卷13 書 「答李尙三台容」). 무릇 도학자들은 글씨를 잘 쓰려고 하거나 미화하려고 하지 않았다. 글씨는 다만 마음의 그림이 되어 나타나는 것이기 때문에 사람의 성정이 드러나는 것일 뿐이다. 퇴계의 글씨는 답답해 보이기는 하지만 차분하고 달필이어서 많은 영남의 도학자들이 그의 글씨를 배우고 사랑하였다. 그래서 후학들은 「도산기」라든가 「매화시」 같은 퇴계의 친필을 판각하여 널리 보급하고 집집마다 간직하였다. 「도산기」는 향리에 은퇴한 61세의 퇴계가 도산의 자연과 자연 속의 자신의 심정을 기록한 것이다. 불러도 오지 않는 퇴계의 도산을 보고 싶어서 명종은 화공에게 도산을 그리게 하고 명필인 송인(宋寅)을 시켜 도산기를 쓰게 하여 병풍으로 만들어 머리맡에 두었다고 한다. 「도산기」 판본은 퇴계의 제자인 김취려(金就礪)가 「도산기」와 「도산잡영」(칠언절구 18수, 오언절구 26수, 별록 4수 등) 등의 친필을 입수하여 장첩하고 이를 고봉 기대승에게 보여준 데서 만들어졌다. 망년(忘年) 도우(道友)로서 우리나라 철학사에 길이 남을 이기 논쟁을 펼친 고봉은 퇴계의 도산기와 시에 화운한 시 18수와 발문을 써서 그것을 선생에게 보이려 하였다. 그러나 퇴계는 고봉의 화운시와 발문을 보지 못하고 작고하였다. 판각된 「도산기」에는 퇴계의 「도산기」와 「도산잡영」 그리고 고봉의 화운시와 발문이 같이 실려 있다. 따라서 「도산기」 말미에 첨부된 ‘노사심화’는 퇴계와 고봉의 뒤를 잇는 노사의 위상을 감안하여 노사의 제자가 만든 것으로 짐작을 할 수 있다. 아마 노사의 편지를 받은 이태용이나 그 후배가 만들었을 것이다.
(탈초) 未聞稅駕安穩爲菀 書來慰豁 仍審省節晏衛 新年吉慶 從此可卜 仰賀仰賀 黃卷中事 有心者 每患多事之妨工 無事者又患逸樂之奪志 此古今通病 在我只當責志 不可問妨碍之有無也 病人一直涔涔 又見歲除 只令人懷抱作惡而已 眩甚不一 癸酉歲除前日 正鎭 (번역) 무사히 도착했다는 소식을 듣지 못해 답답했는데, 편지가 오니 위로가 되고 마음이 풀리네. 그리고 부모를 모시고 지내는 형편이 좋은 줄 알게 되니 새해의 경사를 이로써 상상할 수 있어 우러러 축하를 드리네. 책[黃卷]을 읽는 일은, 마음을 둔 경우에는 번다한 일이 공부를 방해할까 매번 근심이고, 일이 없을 적에는 또한 안락하게 지내고 싶은 마음이 의지를 빼앗을까 근심이네. 이는 고금에 걸친 병폐로 자신에게만 의지를 다져야 할 따름이지 방해가 있는지 없는지를 물어서는 안 되네. 병든 나는 계속 골골대고 있는데 다시 세모가 되니 회포를 우울하게 할 뿐이네. 현기증이 심해서 일일이 다 말하지 않겠네. 계유년(1873) 새해 이틀 전날 정진(正鎭).
(탈초) 久無音耗 此書足以刮眼 因承省節連護 何慰何慰 君之讀書 其用工若何 吾坐在遠地 無以詳知 但每得手筆 輒見進步氣象 以此知其不浪讀也 更願猛進一步 勿以悠泛爲生涯 如何 老物過三冬 便是經過鬼關 眼看春又來 徒令人昏昏 未知下梢作何狀 此來少年乍看 甚是開眼 有爲若掘井 在我而已 此行虛費 光陰可惜 不宣 謝 乙亥二月二十一日 正鎭 頓 (번역) 오랫동안 소식이 없었는데 이 편지가 오니 눈을 비비고 보기에 충분하네. 편지를 보고서 부모를 모시고 지내는 형편이 계속 좋은 줄을 알게 되었으니 얼마나 위로가 되는지. 그대의 독서는 그 공력을 기울임이 어떠한지 내가 멀리 있어서 상세히 알 수가 없네만 편지를 받아볼 때마다 진보하는 기상을 문득 보게 되니 허투로 독서하는 것이 아님을 알 수가 있네. 다시 바라건대, 용맹하게 진일보하여 그럭저럭 세월을 보내지 않는 것이 어떠하겠는가? 이 늙은이는 삼동을 나면서 죽음의 문턱을 지나왔네. 봄이 또 오는 것을 또 눈으로 보게 되니 정신을 흐릿하게 할 뿐, 끝내 어떤 모습이 될지 모르겠네. 요즈음 젊은이들을 문득 보면 눈을 번쩍 뜨게 하네. 큰일을 하는 것은 우물을 파는 것과 같으니, 그 일은 나에게 달려있을 따름일세. 이번 걸음은 시간을 허비하는 것이 애석할 만하네. 이만 줄이며 답장을 하네. 을해년(1875) 2월 21일 정진(正鎭). 이 편지를 받은 이태용(李台容)에 대해서는 자세한 문헌이 남아있지 않아서 어떠한 활동을 했는지 찾아지지 않는다. 앞 편지는 76세 고령의 노사가 부모님에게 돌아간 어린 제자로부터 편지를 받고 부모님 모시고 잘 지내니 새해에 모든 일이 잘될 것이라는 하고 『시경』, 『서경』 등 서적을 읽고 공부에 매진하기를 독려하고 있다. 마음을 두고 공부를 하려고 하면 일이 있어서 공부를 방해하고 일이 없는 사람은 또 노는 데에 정신을 빼앗기는 것이 고금의 병통이라고 하면서, 자신이 뜻을 세워서 한다면 일이 있어서 방해되는 것에는 관계가 없을 것이라고 하였다. 뒷 편지는 햇수로는 2년 후이지만 1년 남짓 지난 후에 받은 편지이다. 78세의 노사가 이태용에게 독서와 공부를 어떻게 하는지 멀리 있어서 자세히 알 수는 없지만, 편지를 받을 때마다 진보하는 기상을 볼 수 있어서 헛되이 읽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고 하면서 더욱 용맹정진할 것을 격려하고 있다. 또 자신은 겨울을 나면서 건강이 매우 어려웠다는 것, 봄이 또 왔지만 혼몽하게 할 뿐이라는 것을 말하고 젊은이들을 보면 매우 개안이 된다고 하였다. 연보(年譜)를 통해 편지를 썼던 시기의 사회적 상황을 보면, 1866년(고종3) 69세의 노사는 6조의 상소를 올려 양이(洋夷)의 침범에 대비할 것을 건의하기도 하였고 1876년(고종 13년) 79세에는 병자늑약(丙子勒約)의 소식을 듣고도 아무런 대책을 제시하지 못하는 자신을 한탄하며 붓과 벼루를 문밖으로 내갈 것을 명하여 절필하였다고 전한다. 이 두 편의 편지에서 우리는 제자가 학문에 정진할 것을 자상하게 지도하는 노스승의 모습을 볼 수 있다. 글쓴이 김현영(金炫榮) 한국고문서학회 명예회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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