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경의 기억] ‘학생독립운동’의 진원지 나주역을 기억하자! 게시기간 : 2019-11-02 07:00부터 2030-02-01 03:03까지 등록일 : 2019-10-31 16:42
재단법인 한국학호남진흥원
풍경의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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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으로부터 꼭 90년 전인 1929년, 나주는 우리 민족운동사에서 3·1운동 다음가는 자리를 차지하는 ‘학생독립운동’의 불씨가 타오른 곳이었다. 10월 30일, 그날 이른바 ‘나주역 충돌사건’이 일어났다. 광주와 나주 간을 기차로 통학하던 조선인 학생들과 일본인 학생들 간에 집단 싸움이 일어났다. 광주중학교의 일본인 학생인 후쿠다 슈조(福田修三) 등이 기차 안에서 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 학생인 박기옥·이광춘 등의 댕기머리를 잡아당기며 희롱하였다. 이들은 기차에서 내려서도 계속 여학생들을 못살게 굴었다. 이런 일본 학생들의 희롱에 분격한 박준채 등 광주고등보통학교(광주제일고등학교의 전신)를 다니던 조선인 학생들이 나주역에서 내려 일본인 학생들과 집단 패싸움을 벌이게 되었다. 그런데 일제는 이 사건을 처리하면서 오직 조선인 학생들만 부당하게 처벌했다. 그게 광주 일원의 조선인 학생 모두를 흥분시켰다. 이 때문에 조선인 학생들과 일본인 학생들간의 싸움은, 이튿날에도 그 다음날에도, 송정리에서 또 광주역에서 계속되었다. 이런 대립은 점차 고조되어 조선인 학생들의 항일민족의식을 자극하였고, 마침내 11월 3일에 광주에서 대규모 시위운동으로 폭발하였다. 바로 이날이 지금 기념하는 ‘학생독립운동기념일’이다. 학생독립운동은 단지 일본인 남학생들이 우리 여학생들을 희롱했기 때문에 일어난 것은 아니었다. 보다 근본적인 원인은 기만적인 식민지 교육정책에 있었다. 그래서 학생들은 “조선인 본위의 교육을!”이라고 외치며 시위에 나섰던 것이다. 11월 3일 광주에서 일어난 운동은 11월 12일 광주고보·광주농업학교·광주사범학교·광주여고보 학생들의 대규모 2차 가두시위로 이어졌고, 다시 서울로, 그리고 전국으로 퍼져 나갔다. 또 학생들만이 아니라 전민족으로 확산되어 갔다. 나주에서 광주로, 다시 전국으로 ‘학생독립운동’은 이렇게 당당한 민족독립운동이 되었다. 여기까지는 이미 잘 알려진 내용들이다. 그래서 좀 색다르게 접근해 보았다. 즉 왜 나주땅이 청소년들의 싸움장이 되었고, 광주를 거쳐 전국으로 확대되는 학생독립운동의 진원지가 되었을까? 그 원인을 나주가 근대도시발달 과정에서 겪게 되는 공간의 이중성이란 창을 통해 찾아보려 한다. 청소년들간의 사소한 다툼처럼 시작되었지만, ‘나주역 충돌사건’에는 식민지라는 상황이 빚어낸 민족적, 교육적 문제들이 그 바탕에 놓여 있었다. 그런데 나주의 경우에는 도시경관의 이중성에서 비롯되는 공간 환경의 모순도 못지않게 중요한 발생 배경이 되었음을 지적하고자 한다. 이를 나주시 지적도 위에서 풀어보기로 하자.
전통도시 나주 읍성의 경관을 크게 바꾼 것은 1910년까지 완공된 광주-목포 간 일등도로였다. 이 일등도로는 동문에서 본정과 군청을 거쳐서 영산포 방향으로 이어지는데, 나주에서 가장 먼저 신설된 근대식 도로였다. 이 도로가 들어서면서 이를 중심으로 신시가지가 만들어졌다. 도로 신설 이전, 나주의 성내 도로는 전통적인 공간 활용의 원칙을 지니고 있었다. 그것은 중앙을 가림으로써 중앙을 중시하는 그런 방식이었다. 그러나 일등도로는, 불가피한 근대화 과정이기도 했겠지만, 그런 전통도시경관의 원칙을 일거에 부정해 버렸다. 그 후 나주시가지는 성문과 성벽을 철거하여 일본인 주거 공간을 통합하였고 영산포 방면으로 확대해 나갔다. 그런데 묘하게도 이 일등도로는 나주읍을 조선인 공간과 일본인 공간으로 나누는 구분선이 되었다. 조선인들은 과원정과 서문정, 그리고 북문정, 박정리, 향교리 등 주로 북서쪽에 거주하였다. 이 지역은 원래부터 조선인들이 살던 곳이기도 하였다. 반면, 일본인들은 본정을 비롯하여 금성정, 남문정, 금정 등 남동쪽에 자리잡았다. 성밖에는 대정정과 월견정이 그들의 공간이었다. 이처럼 나주시가지는 북서쪽의 조선인 공간과 남동쪽의 일본인 공간으로 나뉘어졌는데, 일등도로는 바로 두 공간 사이를 지나가고 있었다. 한편, 그 후 시가지를 남북으로 연결하는 새 길이 생겼다. 즉 북문에서 조선인들의 주거지를 거쳐 남문 밖의 나주공립보통학교(1907년 개교)까지 직선으로 연결하는 길이었다. 이 길은 나주시를 정중앙으로 관통하면서 조선인의 상징공간들을 이어주고 있었다. 나주공립보통학교는 그 옆에 1926년 10월에 문을 연 나주실업보습학교와 함께 조선인 학생들이 다니는 민족적 저항의 공간이었다. 1926년 6·10 만세 때 나주공립보통학교에서 시위가 있었고, 나주역 충돌사건의 여파로 일어난 1929년 11월 27일 시위에는 나주실업보습학교와 나주공립보통학교 생도 약 오백 여명이 참여했다. 흥미로운 것은 이 시위 행렬이 새로 난 남북대로를 따라 남에서 북으로 행진했다는 점이다. 바로 그 길의 주변은 조선인의 공간이었고 따라서 그 길은 ‘민족의 거리’ 역할을 하였던 것이다. 나주의 도시 공간은 이렇게 ‘일등도로’와 남북을 잇는 ‘민족의 거리’를 경계로 조선인과 일본인의 공간으로 크게 나뉘었다. 조선인과 일본인은 마치 물과 기름처럼 확연하게 갈라졌다. 그야말로 이중 공간이 형성되었다. 첨부한 〈1930년대 나주시 지적도〉를 보면 이를 쉽게 알 수 있다. 한편, 나주역은 1913년 7월 1일 학교-나주간 개통을 기점으로 영업을 개시하였다. 광주로 기차통학을 하려면 조선인 학생들은 나주역까지 가야했다. 그런데 그 위치 때문에 나주역으로 가려면 부득이 위압적인 일본인 주거 공간을 지나야 했다. 그렇지 않아도 식민지 교육에 억눌렸던 조선인 학생들은 통학 길에서조차 이중 공간이 강요하는 차별을 일상으로 받아들여야만 하였다. 그래서 매일 매일 분노의 감정들이 쌓였고, 이것이 마침내 나주역 충돌사건으로 폭발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충돌이 광주학생독립운동으로 이어져 이른바 ‘학생독립운동’이란 거센 민족적 저항으로까지 확산되었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볼 때, 나주역 충돌사건은 결코 우발적인 충돌이 아니었다. 이는 식민지 공간이 배태한 일상의 모순이 누적된 결과였던 것이다.
‘학생독립운동’은 올해로 90주년을 맞는다. 하지만 광복 이후 학생독립운동을 기억하고 기념하는 일은 그리 순탄하지 않았다. 광복 이후에 11월 3일은 항일 독립운동을 상징하는 역사적 사건의 기념일이 되었다. 1953년 10월, 제2대 국회가 이날을 ‘학생의 날’로 지정하였다. 여기까지는 너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군사정부가 들어서면서 ‘학생의 날’은 왜곡되기 시작하였다. 1956년에 군사정부는, 1945년 11월 23일에 발생한 ‘신의주학생의거’를 기념하여 그날을 ‘반공학생의 날’로 지정하였다. 이에 따라 기존의 ‘학생의 날’은, 존재는 했지만, 그 의미는 잃어버렸다. 그러나 그마저도 1973년에 ‘각종기념일등에관한규정’에 따라 모든 학생의 날을 폐지하면서 사라졌다. 그 이유로 광주의 고등학생들이 유신 철폐를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기 때문이라는 견해도 있다. 그러다가 1970년대 말부터 ‘학생의 날’ 부활 논의가 나타났고, 여론의 지지도 받았다. 그리하여 1984년 9월 22일에 ‘학생의 날’이 국가기념일로 부활하였다. 2006년 2월 9일에는 국회에서 ‘학생독립운동기념일’로 이름을 바꾸었다. 그동안 지방교육청이 기념식을 주관해 소규모 행사로만 열렸다. 지난해부터 정부기념행사로 격상되면서 국가보훈처·교육부가 공동으로 기념행사를 주관하고 있다. 그 첫 행사가 광주에서 열렸었다. 올해에도 교육부와 광주시교육청 주도로 다채로운 기념행사가 열린다. 그러나 ‘학생독립운동’의 기억과 기념에는 아직 추슬러야 할 과제들이 많이 남아 있다. 10년 후 100주년에는 광주는 물론, 나주도 함께, 전국에서 기억하는 대한민국의 ‘학생독립운동의 날’이 되기를 기대한다. 참고문헌 全根完, 〈日帝下 羅州面의 都市景觀變化〉(한국교원대 대학원 사회과교육학과 지리교육전공 석사학위논문, 1996) 고석규, 〈나주의 근대도시발달과 공간의 이중성〉(《광주학생독립운동과 나주》, 나주시·전남대 호남문화연구소, 1999) 글쓴이 고석규 목포대학교 前 총장, 사학과 명예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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