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비, 길을 열다] 상춘곡(賞春曲), 세상의 새날을 노래하다 게시기간 : 2019-11-05 07:00부터 2030-12-06 03:03까지 등록일 : 2019-11-04 13:49
재단법인 한국학호남진흥원
선비, 길을 열다
|
||||||||
1478년(성종 9)은 벽두부터 황사바람이 거셌고 흙비가 내렸으며 지진이 일어났고, 봄 농사철이 되자 무척 가물었다. 근래 홍수와 태풍에 산이 무너지고 메뚜기 떼가 들판을 휩쓸고 복숭아 자두가 때도 아닌 가을에 꽃을 피우던 이변이 계속되던 차, 훈구공신은 초조하였다. 인사가 잘못되면 하늘이 재앙과 이변으로 꾸짖는다고 생각하던 시절, 국정 실패의 책망을 피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성년이 되어 비로소 친정을 시작한―이때까지 모후 인수대비가 수렴청정 하였다―국왕도 당황하였다. 어떻게 할 것인가? 여러 신료에게 국정의 쇄신과 대안을 요청하는 구언교(求言敎)를 내렸다. 이때 한 상서(上書)가 올라갔다.1) “신은 모르겠나이다. 전하께서는 지금의 집정자(執政者)를 모두 어질다고 여기십니까? 어진 이와 어질지 못한 이가 섞였다고 여기십니까? 비록 어질지 못한 이가 많으나 어진 이를 얻지 못하였으므로, 자리를 비울 수 없어 부득이 채워놓으신 것입니까? 아니면 조종(祖宗)께서 이미 등용하여 남겨주었으므로 어질고 어리석음을 묻지 아니하고 용납하여야 조종의 뜻을 저버리지 아니하는 것으로 여기십니까?” 아울러 상소는 ‘지금 뜻을 펴고 있는 자들은 단정하고 공손하며 또한 응대함에 능숙하고 말을 잘 꾸밀 따름’이라며 득의양양한 권력자들의 미덥지 못한 속내를 들췄다. 상소의 요점은 다름이 아니었다. ‘훈구대신을 물러나게 하자!’ 4월 8일, 주계부정(朱溪副正) 이심원(李深源, 1454∼1504)이 올린 상소였다. 학술과 문장으로 후진의 감화를 이끌어냈던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으로 경학에 밝고 행실이 올곧은 종친이었다. 이때 이심원은 ‘열 집이 모여 사는 작은 고을에도 충신(忠信)한 사람은 있다’는 공자를 인용하며, ‘함양의 정여창(鄭汝昌), 은진의 강응정(姜應貞), 태인의 정극인(丁克仁)을 성현의 동아리’로 소개하며 등용할 만한 인재로 추천하였다. 정여창은 함양군수로 왔던 김종직을 스승 삼은 후로 ‘소학(小學)’을 생활화하고 성리학을 깊이 연구하였으며, 강응정은 젊은 선비들과 수신을 앞세운 ‘소학계’를 꾸렸던 장본인으로 효행으로 정려를 받았었다. 이심원과 교유가 있었던 두 사람은 아직 소과에 급제하지 않는 상태, 그런데 어떻게 이미 벼슬을 물러난 조부 연배의 정극인을 거론하였을까? 혹여 정극인이 왕족의 교육기관인 종학(宗學)에 봉직할 때 가르침을 받았을 수 있겠지만, 향약 시행, 향촌 교육활동에 깊은 인상을 받았음은 틀림없다. 이심원의 상서 이레 후, 이번에는 남효온(南孝溫, 1454∼1492)이 상소를 올렸다2) 음양ㆍ천지ㆍ일월ㆍ남녀의 조화가 흐트러진 세월을 한탄하고 ‘닭과 개조차 서러운 농가’의 가난을 폭로하면서, 제때 혼인을 장려하고, 수령을 제대로 선발하고, 인재를 고루 등용하고, 왕실의 금고 역할을 하는 내수사(內需司)를 혁파하며, 무당과 불교를 억제하며, 학교를 일으킬 것을 주장한 것이다. 그리고 ‘소릉을 추복하자!’ 소릉(昭陵)은 문종이 왕위를 잇기 전에 세상 떠난 노산군 생모의 능침(陵寢). 사육신의 ‘상왕복위운동’ 뒤 끝, ‘왕이 아닌 자’의 생모를 종묘에 모실 수 없고 문종의 현릉에 같이 묻을 수 없다는 세조의 명령에 따라 신위가 철거되고 관곽마저 파헤쳐졌다. 문종은 사후에 강제 이혼을 당한 셈이었고 노산은 한때의 임금으로도 인정받지 못했던 것이었다. 그런데 아직 사마시도 들지 않는 유학(幼學) 신분의 남효온이 소릉을 다시 복위시키자 하였으니, 노산을 임금으로 인정하자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신자로서 ‘감히 입에 담을 수 없는’ 국가의 금기를 거론한 것이다. 세조 치세의 어두운 과거사, 왕실의 감추고 싶은 진실이 공론의 장에 등장하는 순간이기도 하였다. 파장은 엄청났다. 세조의 으뜸 공신 한명회(韓明澮)를 비롯한 훈구대신들이 발끈하였고, 당대 문형―학술과 문장의 기준을 세우는 대제학―서거정(徐居正)의 분통도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이러한 훈구공신, 학문권력의 입장을 국왕에게 전달하며 국왕의 분노를 부추기는 자가 당시 도승지 임사홍(任士洪)이었다. 1466년(세조 12) 18살에 문과를 통과한 간재(奸才)로 세 아들 중 둘을 왕실의 사위―광재(光載)는 예종의 현숙공주(顯肅公主), 숭재(崇載)는 성종의 휘숙옹주(徽淑翁主)에게 장가들었다―로 들여보낸 실력자였다. 그 자신도 효령대군의 아들 보성군의 사위였다. 앞서 상서한 이심원이 보성군의 손자이니 이심원의 외삼촌이기도 하였다. 그런데도 이심원의 상소를 극력 비판하고, 남효온과 이심원이 기맥을 통하여 조정을 요동시킨다고 중상하였다. 이러한 상황임에도 이심원과 남효온은 일단은 무사하였다. 한명회 등의 전횡이 불편하였던 중신들이 국왕에게 거듭 구언에 따른 상소에는 죄를 묻지 않는다는 명분을 앞세웠던 것이다. 이런 파란을 태인의 늙어가는 정극인도 모르지 않았다. 국왕에게 궁중의 양식과 장 등을 관장하는 사도시(司䆃寺)의 비리 즉 ‘사도시에 들어가는 세금을 액수보다 많이 거두어들이고, 포물(布物)로 대납하면서 시세보다 비싸게 거두어들인다는 사정’을 고발하였다. 이에 국왕은 전라감사에게 정극인에게 물어 비리 주범을 밝히라고 하고도 정작 당사자가 임원준으로 드러났음에도 ‘오래전 일이라 묻지 말라’ 한발 물러섰다.3) 임원준(任元濬)은 집현전 학사 출신으로 한때 학문이 있다고는 하지만 재물 욕심으로 구설수가 끊이지 않았던, 바로 임사홍의 부친이었다. 임사홍의 비릿한 소곤거림이 들리는 듯하다. 이즈음이었다. 정극인은 마을 사람들과 어울리며 「상춘곡(賞春曲)」을 불렀다. 훈민정음 반포 한 세대 만에 나온 최초의 우리말 가사였다.4) 이렇게 시작한다. 홍진(紅塵)에 묻혀 사는 사람들아, 이 내 삶이 어떠한가? 옛사람 풍류를 미칠까 못 미칠까? 천지간 남자 몸이 나 만한 사람 많지마는, 산수에 묻혀 있어 지락(至樂)을 모른단 말인가? 몇 칸 초가를 푸른 시내 앞에 지어 놓고, 송죽이 우거진 속에 풍월주인 되었도다. 홍진, 재물과 권세를 앞세우는 사람들은 산림에 묻혀 사는 풍월주인의 즐거움을 알 수 없다, 한 것이다. 그리고 봄날의 풍광과 잔잔한 소요, 그리고 냇가의 술잔 돌림에 흔쾌하며 이렇게 마쳤다. 공명도 날 꺼리고 부귀도 날 꺼리니, 청풍과 명월 외에 어떤 벗이 있을까? 단표누항(簞瓢陋巷)에 허튼 생각 아니 하네. 아무튼 백년 행락(行樂)이 이만한들 어떠하리.
공명과 부귀을 추구하지 않고 소박하고 청빈한 삶을 추구하였을 자부한 것이다. 정극인은 이즈음 한글 단가(短歌) 「불우헌가(不憂軒歌)」도 지었다.5) “뜬구름 같은 벼슬살이에 뜻대로 되지 않는 일이 많고 많습니다. 뵈이고 싶어라, 불우헌 늙은이는 뵈이고 싶어라. 때때로 은혜로 보살피게 한 맛있는 음식을 뵈이고 싶어라. 뵈이고 뵈이고 싶어라….” 늙은 선비의 자족과 성심을 국왕에게도 전하고 싶었던 것이다. 실제 1480년 초겨울 여든 노구에도 불구하고 몇 조목의 민폐를 아뢸 겸 궁궐을 찾았다. 「불우헌곡」과 「불우헌가」, 「상춘곡」까지 국왕에 바쳤다. 그러나 국왕은 ‘승정원에 음식을 대접하라’ 하였을 뿐, 친견하지 않았다.6)이듬해 한가위 다음날 세상을 떠났다. 향년 81세. 「상춘곡」은 분명 농촌 봄날 시골 선비의 안분자족(安分自足)을 노래하고 있다. 그러나 이심원과 남효온의 상소가 올라가며, 훈구공신의 철벽같은 기득권에 균열이 일어났던 시점에 창작되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 노래는 재야 선비의 물아일체, 도의적 삶을 예찬함으로써 유교이상과 윤리를 팽개친 세태, 훈구공신을 향한 비판의식을 깔고 있는 정치문학, 풍자가사였다. 아울러 구름을 뚫고 땅을 덮을 권세와 재물로도 얻지 못할, 천금보다 소중한 ‘성현의 동아리’라는 영예를 안긴 이심원 그리고 국가적 금기를 들추며 과거사의 상흔을 치유하자는 남효온을 향한 답가(答歌)이기도 하였다. ‘임금이 아닌 자’로 깎인 노산군 부인 송씨(宋氏)―훗날 정순왕후로 추증되는―의 생가가 냇가 건넌 이웃 마을에 있었다. 글쓴이 이종범 (재)한국학호남진흥원장 |
||||||||
Copyright(c)2018 재단법인 한국학호남진흥원. All Rights reserved. | ||||||||
· 우리 원 홈페이지에 ' 회원가입 ' 및 ' 메일링 서비스 신청하기 ' 메뉴를 통하여 신청한 분은 모두 호남학산책을 받아보실 수 있습니다. · 호남학산책을 개인 블로그 등에 전재할 경우 반드시 ' 출처 '를 밝혀 주시기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