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窓] 고반원과 임대정원림, 3백년만에 다시 조영 게시기간 : 2019-11-09 07:00부터 2030-03-01 11:03까지 등록일 : 2019-11-07 11:27
재단법인 한국학호남진흥원
문화재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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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2년(철종 12) 초여름, 전라도 동복현 내남면 사평촌. 일군의 선비들이 이제 막 지은 듯 소담한 정자에 모여 든다. 그 앞의 물길과 무성한 나무와 대나무숲에서 맑은 바람이 스치운다. 좌장인듯한 선비가 몇마디 한다. “이 언덕은 앞으로 먼 들을 임하고 남쪽으로 깊은 골짜기를 임하며 동북으로 산이 이어져서 땅의 형세가 가파르니 높이 올라 사방을 바라보면 확 트인다. 또한 무성한 나무와 대나무 숲이 좌우로 빙 둘러 있어 상쾌한 소리와 맑은 바람이 그 사이에 나오니 어찌 조그마한 정사[小榭]를 얽어서 더위를 가시게 할 계획을 만들지 아니 하랴.” 그 좌장은 사애 민주현(沙厓 閔冑顯, 1808~1882). 그들이 머문 곳은 임대정(臨對亭)이다. 정자와 함께 수림을 조성하고 연못도 파 다듬어 원림을 조영한 것. 현재의 전라남도 화순군 남면 사평리. 민주현은 동복 사평출신으로 철종때 문과에 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지내고 8권 4책의 문집을 남긴 학자관료이다. 1862년 원림을 조영하면서 종형제들이 함께 힘을 모았다. 2012년에 국가지정문화재 명승(名勝)으로 지정된다. 문화재명칭은 화순 임대정 원림. 학(鶴) 형국의 주변지형을 배경으로 평지를 이용하여 정자를 짓고 그 주변에 수림과 어울리게 인공적 연못을 조성한 대표적인 호남별서의 하나라는 가치 평가를 받은 것이다. 정자는 건조물 유적이지만 그 일원은 원림 경관으로서 역사문화경관에 속한다 할 명승으로 지정된 것이다. 사평마을 뒤에는 봉정산(411m)이 있으며, 앞으로는 상사천(외남천)이 감싸고 돌고 있다. 배산인 봉정산에서 흘러 드는 계류(溪流) 인접형으로 상지(上池)와 하지를 이루고 사평천으로 흘러드는 원림경관을 잘 갖추고 있다. 임대정은 정자와 원림경관을 뒷받침해 주는 기록 자료가 많다. 정자 옆의 방지에 있는 암각문, ‘피향지(披香池)’, ‘읍청당(挹淸塘)’, ‘기임석(跂臨石)’. ‘피향지’의 '피향'은 연꽃 향기가 멀리 흩어진다는 뜻이며, ‘읍청당’의 '읍청'은 연꽃 향기를 붙잡아 당긴다는 뜻이다. 임대정을 지을 때의 기문과 중건 상량문, 중건 기문과 제영문 시판, 주련 등 40여개가 넘는 현판자료는 사료 가치가 크고, 특히 시문 등에서 주변경관의 아름다움이 잘 묘사됨으로써 명승적 원림요소를 잘 알 수 있게 해준다. 임대정의 편액은 경원 민치상(1825∼1888)과 황사 민규호(1836∼1878)가 썼다. 또 하나 수륜헌(垂綸軒) 편액은 농천 이병희의 글씨이다. 이 “수륜헌”에서 임대정의 시원, 고반원과 수륜대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임대정 원림 조성 시기보다 300년 앞선다. 민주현의 임대정기에 보이는 기록이다. “옛적에 고반 남언기(考槃 南彦紀)선생이 일찌기 이곳에 은거하였으니 한 곳의 언덕과 한 곳의 골이라도 기이한 곳을 표시하고 뛰어난 곳을 가리지 아니함이 없었으니 그 기록인 고반원명명기(考槃園命名記) 가운데 이른바 수륜대(垂綸臺)라 한 곳이 대개 비슷하도다. 뒷날 사람들은 부르기를 은행대(銀杏臺)라 하였으니 은행나무로 인하여 이름을 얻은 것이다. 은행대 아래는 물이 흐르고 있었기에 은행대 위에서 낚시를 드리고 있었으니 당시 그 어른의 고결한 취지를 가히 상상할만 하다.” 이 글에 나오는 고반원명명기는 고반 남언기(1543~?)가 1570년대에 고반원을 조영하고 이곳 일원을 수륜대라 하면서 명명기록으로 남긴 것이다. 일부가 결락이 있다고 기록하고 있지만, 49개소의 지명경관의 유래를 적고 있다. 임대정 원림의 연혁과 경관을 이해하는데 귀중한 자료이다. 남언기는 부친 남치욱이 장흥도호부사(1546.10~1549.11)와 보성군수를 지내며 보성의 죽천 박광전(1526∼1597)의 요청으로 우계(遇溪)의 글씨를 쓴다. 지금의 보성군 문덕면 죽산리 대원사 들어가는 길목에 있다. 박광전의 <우계기(遇溪記)>는 우계 일원의 경관지명 20개소를 명명한 기문인데 산수유기의 명문으로 꼽히고 있다. 고반원명명기도 이같은 교류의 영향을 받은 듯 싶다. 남언기는 1567년에 학행으로 천거되나 나아가지 않고 1568년에는 생원시에 입격한다. 뒤에 동복의 사평촌으로 은거하면서 고반원을 조성하고 인근의 선비들과 학문을 토론하며 서예에 열중하였다고 한다. 사평으로 온 것은 장인인 설홍윤이 서석산 아래에 있었기 때문이다. 남언기는 고반원을 조영하며 고반원과 그 주변의 각종 경관마다 나름대로 고유한 이름을 붙였다. 그 내역을 적은 것이 고반원명명기이다. 이 기문에서는 49개소의 경관을 각기 세글자로 명명하고 있다. 이 경관 지명은 매우 다양한 원림 구성요소를 아우르고 있다. 기(磯), 누(樓), 늑(泐), 단(壇), 담(潭), 대(臺), 동(洞), 등(磴), 문(門), 산(山), 서(嶼), 석(石), 암(巖), 원(原), 작(杓), 정(汀), 정(亭), 지(池), 천(泉), 추(湫), 태(埭) 따위 21종에 이른다. 이 가운데 몇종은 희귀한 원림 경관 용어이다. ‘기(磯)’는 물결이 부딪치는 물가의 바위, ‘늑(泐)’은 수류의 풍화작용으로 갈라진 돌 틈이다. ‘등(磴)’은 돌이 많은 비탈길이나 돌다리이고, ‘작(杓)’은 구기 자루 모양의 나무다리이며, ‘태(埭)’ 는 물을 막으려고 쌓은 보나 둑이다. 이처럼 발길이 미치거나 눈에 보이는 모든 경물에 의미를 부여해 이름을 붙인 것이다. 발길은 물론 눈길이 닿는 곳이면 경관 요소로 인식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이 다시 고반원가의 배경이 되었다. 57행이 전하는 고반원가의 내용은 고반원 주인의 한가로운 은일생활과 고반원 산수자연의 아름다움을 읊은 것이다. 7단으로 구분되는데 제1단부터 고반원으로의 귀원, 고반원의 하루 일과, 사시 경물, 주변 산세, 수변 풍경, 고반원의 산곡 풍치 등이다. 16세기 후반 누정원림 가사로서 큰 의미를 갖는다. 고반원은 원기와 원가를 통하여 언덕과 못, 그리고 누정이 고반원을 이루는 중심 구성 요소임을 알 수 있다. 특히 누정은 13개소가 보인다. 물론 건조물이 아닌 정자나무 등 자연물인 경우도 있겠지만, 취벽루와 유옥정 그리고 수륜대는 고반원가에서도 원림경관으로 등장한다. 13개소의 누정이 있던 고반원, 30여년 뒤에 임진 정유왜란의 여파로 피해를 당한다. 그리고는 폐허 속에 잊혀져 가다가 300년이 흘러 이곳 사평 출신 민주현에 의해 임대정으로 다시 조영된다. 그로부터 다시 150년이 흘러 국가지정문화재 명승으로 지정되었다. 사평은 수로(사평천)와 육로의 결절지에 형성된 마을이다. 또한 시장과 걷어 들인 세곡을 보관하던 창고가 있었다. 그만큼 물산의 집산지이자 교통 중심지였음을 알 수 있고, 이러한 물류와 교통의 입지, 그리고 산수 자연 경관처이기 때문에 조선시대에는 문인들도 드나들기도 하였다. 그 대표적인 곳이 고반원-수륜대-은행대-임대정으로 이어진다. 그 주인공 고반 남언기와 사애 민주현, 300년을 넘나든 시상을 헤아려 본다. “구름 헤친 눈과 달 좋은 벗 만난 듯하고 꽃이 핀 연과 매화 옛 친구 보는듯하네. 온종일 점괘 헤아려 읽으며 취미를 이루니 행하고 그침을 깨우친 노래가 다 천진이라네/雲開雪月逢佳友 花發蓮梅見故人 日讀數爻成趣味 寤歌行止摠天眞 ; 卜居 同福 沙坪村” “여름날 맑은 바람이 나무끝에 나오고 가을이 오니 흰 달은 못 마음에 있도다. 산을 대하고 물에 임하니 지취가 무한데 머름위에 무릎 보듬고 읊음이 무방하구려./夏坐淸風生木末 秋來皓月在潭心 對山臨水無窮趣 不妨軒頭抱膝吟 ; 臨對亭原韻” 글쓴이 김희태 전라남도 문화재위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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