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비, 길을 열다] 고을 학당, 질나발 불고 젓대 불며 게시기간 : 2019-11-12 07:00부터 2030-04-04 08:08까지 등록일 : 2019-11-11 15:03
재단법인 한국학호남진흥원
선비, 길을 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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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극인은 8살 아래로 14년 먼저 세상 떠난 부인과 아들 둘, 딸 여섯을 보았다. 가업을 이어갔던 장남 삼준(三俊)이 1469년(예종 1) 늦은 나이에 생원이 되었지만, 외손ㆍ외증손 중에 급제자가 적지 않았다. 1495년 생원 김희윤(金希尹)을 비롯하여 그의 두 아들 약회(若晦)ㆍ약허(若虛) 형제가 1513년 나란히 사마시에 들고, 1528년에는 약현(若玄)이 진사, 1543년에는 약묵(若默)이 문과에 들었다. 이들은 정극인의 넷째 사위로 같은 마을에 살았던 김윤손(金潤孫)의 아들과 손자들이었다. 여러 곳 목사를 지낸 개국원종공신 김회련(金懷鍊)의 후예로 본관은 도강(道康)―오늘날 강진이다.
(참조)…사위, ♧사마시, ☆문과 김희윤은 담양의 유옥(柳沃)과 나주의 이임(李任)을 사위로 맞았는데, 유옥(1487∼1519)은 아쉽게 일찍 생을 마감한 기묘정치의 신진기예였으며, 이임은 명종 말년 외척권신과 대결하며 조선성리학의 수준을 한 단계 높였던 기대승(奇大升, 1527∼1572)의 장인이 된다.1) 한편 김희석(金希奭)과 김약회는 이웃 마을 송연손(宋演孫)의 둘째, 다섯째 사위였다. 송연손(1460∼1508)은 15살부터 불우헌에서 공부한 정극인의 늘그막 제자였다. 18살에 향시를 통과하고 1486년 진사시에서 수석을 차지한 준재로 1493년 진성대군 훗날의 중종 6세 때부터 ‘시독(侍讀)’ 즉 왕자사부를 지냈던 관계로 ‘정국원종공신’ 녹권을 받았다. 그러나 조정보다는 모친 봉양을 내세워 고향 가까운 용담ㆍ곡성현감을 지내다가 한산군수로 생애를 마쳤다. 지금은 전하지 않지만 ‘호남 열읍을 노래한 별곡 10장’이 인구에 회자하였다고 한다.2) 훗날 정순왕후로 추복(追復)되는 노산군부인 송씨와 같은 마을, 같은 집안으로 본관은 여산(礪山). 비록 한때의 중전이었으나 군부인으로 강등된 집안의 아픔이 있었지만, 그 나름 평온하였다. 아들 셋, 딸 다섯을 두었다.
(참조)…사위, ♧사마시, ☆문과 송세림(宋世琳, 1479∼1519)은 일찍부터 두각을 드러냈다. 1498년(연산 4) 20살에 생원 진사를 동시에 거머쥐고, 4년 후 알성문과에 장원한 것이다. 그러나 난정에 실망하고 부모상을 겪으며 고향에 많이 머물렀다. 이때 정극인의 불우헌을 확장, 강당과 동서 양재(兩齋)를 갖추면서 ‘향학당(鄕學堂)’ 즉 고을 학당으로 발전시켰다.3) 후진을 가르치며 졸음 쫓는 우스개이야기를 들려주었는데, 지금 『어면순(禦眠楯)』으로 전한다. 또한 동약, 향음주례의 전통을 되살렸다. 1510년 좌목(座目)을 새로 갖추면서 발문에 적었다.4) “불우헌 정선생은 오직 우리 마을 덕이 높은 어른일 뿐 아니라 곧 문종조의 일민(逸民)이었다. 지금 향음주례 서문을 읽고 또 마을의 기풍을 보니, 실로 선생이 조정에서는 유일(遺逸)이 되고 고을에서는 빛남이 우뚝하여 미칠 수 없음을 알겠다. 우리 마을은 고운선자(孤雲仙子)가 수령을 지냈던 곳이다.… 부모ㆍ자손ㆍ형제ㆍ붕우가 한 마을에 살면서 온화하고 기쁘게 지냄이 모두 선생이 남기신 약속으로부터 이른 것이니, 그것이 어찌 우연이겠는가.” 송세림은 1516년 부임한 능성현령 시절 민간의 공물을 대신 납부하고 높은 가격으로 징수하는 방납(防納) 폐단, 교서관에 바치는 종이 값의 과다 책정 등을 상소하는 등 서정쇄신에 힘들이다가 병을 얻고 돌아와 기묘사화 직전 세상을 떠났다. 태인 고현면의 동약과 향학당은 향풍 개선, 인성 교화의 요람이었다. 능성현령 시절 송세림에게 배움을 청하였던 면앙정 주인 송순이 태인을 지나며 ‘학당은 불우헌 정선생이 교수하던 곳으로 취은 송세림 공이 이었다’는 설명을 보태곤 이렇게 노래하였다. “전날 학당을 열어 예를 강론하신, 현자를 우러르며 유서 깊은 마을에 절을 올리네. 일찍이 인재 길러낸 효험 나타나니, 살만 한 마을을 골라 이사할 수 있겠구나.”5) 여기 향학당에서 도강 김씨 김약회ㆍ약허 형제와 김약현ㆍ약묵 형제는 물론 송세림의 생질, 사위인 정언충(鄭彦忠)ㆍ나응허(羅應虛)ㆍ김원(金元)ㆍ손홍륜(孫弘綸) 등이 공부하며 생활도덕 일상윤리를 실천하였다. 특히 정언충(1491∼1557)은 1525년 진사가 되었음에도 문과 급제에 필요한 사장(詞章)에 매이지 않고, 서경 ‘홍범구주(洪範九疇)’―기자가 주 무왕에게 교시한 세상을 다스리는 아홉 가지 규범에 천착하며, 성리학의 지평을 열었다고 평가되는 주돈이의 「태극도설(太極圖說)」을 연구하였다. 또한 역학ㆍ천문에도 밝아 선기옥형(璇璣玉衡)을 정밀하게 살폈다. 1544년 봄 전라감사 송인수(宋麟壽, 1499∼1547)가 지극정성의 효행을 보고하여 조정에서 참봉을 내렸음에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때 나응허도 ‘효우세가(孝友世家)’의 명성을 얻었다.6) 정언충의 성리학 공부는 김약묵(1500∼1558)으로 이어졌다.7) 10대 후반의 김인후(金麟厚)도 훗날 이름을 밝히지 않는 벗에게 보낸 편지에 ‘김약묵을 만나 처음으로 배우는 자가 마땅히 추구할 바가 있어야 한다는 말을 듣고 내심 무척 기뻤다’고 밝혔듯이, 김약묵을 통하여 의리지학에 다가섰다.8) 김인후보다 열 살 많은 손위 동서(同壻)이며 별시문과에 나란히 급제한 동방(同榜)이었다. 이후 여러 고을 수령을 거치며 청백리로 포장을 받았는데, 고을 떠날 때 백성이 송덕비라도 세우려고 하면 분연히 나서 깨뜨렸다. 성균관 사성을 거쳐 양주목사 재임 중에 세상을 버렸다. 향학당 선비들이 어울렸던 또 하나의 공간은 김약회가 조성한 ‘한정(閑亭)’이었다. 집안이 부자였던 김약회는 기묘사화 이후 벼슬을 넘보지 않고 유유자적 처사로 지내다가 처남 송세형이 외척 윤원형의 소윤에 가담하며 을사사화를 일으키자 무척 분개하였다.9) 이곳 한정을 젊은 시절 김인후가 자주 찾았다. 여러 편을 남겼는데 다음 오언율시가 빼어나다.10)
무성서원 가는 길목, 풍광이 오롯하다. 그런데 여기에 손님이 찾아왔다. 광주목사로 나가던 송순이 지난봄에 부임한 신관 사또 신잠(申潛)과 같이 온 것이다. 1544년(중종 39) 가을이었다.11) 김약회ㆍ송순ㆍ신잠은 1513년 같은 해 사마시에 들었던 동방이었다. 1) 국편, 『수집사료해제집』 6, 정읍 도강김씨 소장자료; 宋純, 『俛仰集』 권4, 「楊州牧使同州鎭兵馬節制使誠齋金公行狀」; 黃胤錫, 『頤齋遺藁』 권16 「祖妣孺人康津金氏行狀」
2) 申光漢, 『企齋集』 권3, 「贈吏曹判書礪原君宋公神道碑銘」 3) 『신증동국여지승람』 권34, 태인현 ‘학교’ 4) 『불우헌집』 권2, 「동중향음주서 洞中鄕飮酒序」; 『고현향약(古縣鄕約)』 「향약발 鄕約跋」 5) 『면앙집』 권2, 「태인 고현학당에 차운하다 次太仁古縣學堂韻」 “講禮開前序 尊賢挹舊閭 作人曾有效 擇里可移居…” 6) 『중종실록』 권102, 39년(1544) 4월 17일. 송인수는 김안로 몰락 이후 조정에 복귀하여 이언적(李彦迪)과 더불어 국정쇄신에 앞장섰다가, 을사사화로 파직되고 1547년 양재역벽서사건에 따른 정미사화 때에 사약을 받았다. 7) 『면앙집』 권4, 「楊州牧使同州鎭兵馬節制使誠齋金公行狀」 “公諱若默…稍長 從舅氏醉隱先生受學…與同里鄭先生彥忠 勵志而作 講究義理之學” 8) 金麟厚, 『河西全集』 권11, 「벗에게 보낸 편지 與友人書」 9) 『이재유고』 권16 「祖妣孺人康津金氏行狀」. 송세형(宋世珩)은 한때 중종으로부터 사부의 아들로 대우받으며 승정원에 봉직하며 권신 김안로를 견제하는데 일조하였지만, 소윤(小尹)에 가담하며 위사공신(衛社功臣)이 되고 이조판서까지 올랐지만 일가의 저버림을 받았다. 10) 『하서전집』 권8, 「상사 김약회의 한정에 차운하다 金上舍若晦閒亭韻」 글쓴이 이종범 (재)한국학호남진흥원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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