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窓] 나주 금성산 보흥사 괘불과 화엄경을 공부하는 보흥사 스님들 게시기간 : 2019-11-16 07:00부터 2030-04-04 03:03까지 등록일 : 2019-11-15 16:28
재단법인 한국학호남진흥원
문화재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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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성산 다보사와 다보사괘불탱 나주 금성산에는 유서 깊은 사찰 다보사가 있다. 금성산에서 초옥을 짓고 수행하던 스님이 땅에서 솟아난 칠보로 장식된 큰 탑 속에서 다보여래(多寶如來)가 출현하는 꿈을 꾼 뒤 사찰을 창건했다 하여 사명을 다보사(多寶寺)라 했다는 전설이 내려오는 절이다. 다보사는 절 이름이 많을 다(多), 보배 보(寶), 절 사(寺)이어서 많은 보배가 있는 절이다는 말이다. 어떤 보배를 가지고 있어 다보사라 하였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우선 다보사에 소장된 지정문화재를 살펴보면 국가 지정 문화재로는 보물 제1343호 다보사괘불탱, 보물 제1834호 나주 다보사 목조석가여래삼존상 및 소조십육나한좌상이 있고, 지방 문화재로는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310호 나주 다보사 명부전 목조 지장보살삼존상·시왕상 일괄과 문화재자료 제87호 다보사대웅전이 있다. 다보사의 소장 유물 가운데 가장 주목되는 것은 보물 제1343호로 지정된 다보사괘불탱이 아닐까 한다. 이 괘불탱의 화기에 의하면 다보사괘불탱의 원봉안처는 금성산 보흥사로 기록되어 있다. 보흥사괘불이 언제인지 모르지만 다보사로 옮겨지게 되었고 2002년 7월 보물로 지정되기에 이르렀다. 문화재 지정 당시 조사자들이 보흥사의 기록이 전무하여 그 소재를 확인할 수가 없다고 하면서 문화재 작명도 다보사괘불탱으로 정리하였다. 1745년 금성산 보흥사에 봉안된 괘불 보흥사 스님들이 1745년(영조 21) 보흥사에 괘불을 조성 봉안하였다. 이 괘불은 삼베 바탕에 채색한 대형불화였다. 전체 11,630×8,027mm, 화면 10,866×7,720mm 무게 125,5kg으로 장엄하고 거대한 불화다. 이 괘불의 구성은 석가삼존불입상을 중심으로 윗부분에 관음보살과 대세지보살, 다보여래와 아미타여래가 짝을 이루고 있다 이러한 구성은 18세기 중엽 당시 성행하던 형식이다. 조선후기의 대표적 승려화가인 의겸(義謙)을 비롯하여 9명의 화원이 함께 그렸다. 1754년 화엄경을 공부하러 선암사에 간 32인의 보흥사의 승려들 문화재청 대형불화 정밀조사 보고서 15, 다보사괘불탱(성보문화재연구원, 2018년), 32쪽에서 금성산 보흥사의 기록이 전무하다고 하였으나, 일찍이 보흥사에서 사집(四集)을 배웠고, 나중에 해남 대흥사 12대종사(大宗師)의 꽃이라 불리우는 연담유일(蓮潭有一, 1720-1799)이 기록한 「해주록(海珠錄)」(『朝鮮佛敎叢報』第15號, 70쪽, 72-73쪽)에 나주 보흥사 승려 32인이 수록되어 있어 주목된다. 「해주록(海珠錄)」을 통해 다보사괘불탱 조사 당시 살피지 못했던 기록이어서 여간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화엄에 정통하여 화엄종주(華嚴宗主)로 존경받았던 상월새봉(霜月璽封, 1686~ 1767) 대사가 선암사에서 1734년과 1754년에 선암사에서 두 차례의 화엄법회를 개최하자 학인과 선사들이 구름처럼 운집했다고 한다. 상월새봉(1687(숙종 13)∼1767(영조 43)은 대선사(大禪師)로서 화엄종사(華嚴宗師)이며 대흥사(大興寺) 13대종사(大宗師) 중의 1인이다. 자는 혼미(混迷), 호는 상월(霜月). 속성은 손씨(孫氏). 전라남도 순천 출신이다. 상월새봉은 11세에 조계산 선암사(仙嚴寺)의 극준(極俊)을 은사로 출가하여 16세 때 화악(華嶽)에게서 구족계를 받고 18세 때 설암(雪巖)을 참배하고 담론하였다. 설암은 그의 도가 깊음을 알고 의발(衣鉢)을 전수하였다. 그 뒤 벽허(碧虛)·남악(南岳)·환성(喚惺)·연봉(蓮峯) 등의 고승들을 찾아 심인(心印)을 얻었다. 1713년(숙종 39) 선암사에 돌아와 개당(開堂)을 하자 수많은 수행자가 법(法)을 구하였다. 또한, 1750년(영조 26) 선교도총섭 주표충원장 겸 국일도대선사(禪敎都摠攝主表忠院長兼國一都大禪師)가 되었고, 1754년 선암사에서 화엄대회(華嚴大會)를 열었을 때는 모인 사람이 거의 1,300명에 다달았다. 1767년 10월, 81세의 나이로 “물은 흘러서 바다로 가고 달은 떨어져도 하늘을 떠나지 않는다(水流元去海 月落不離天).”라는 임종게(臨終偈)를 남기고 입적하였다. 다비를 하였으나 사리를 얻지 못해서 문인 탁선(卓璿)이 유골을 가지고 묘향산에 이르러 쇄골을 하려 할 때 갑자기 그 안에서 3매의 사리를 보았다. 하나는 오도산(悟道山)에, 나머지 둘은 선암사와 대흥사에 각각 나누어 봉안하였다. 그는 언제나 문자보다는 계율과 진해(眞解:참된 깨달음)를 존중하였다. 그러나 공적견(空寂見:쓸데 없는 견해)에 떨어지는 편협함보다는 화엄정신을 생활화하였다. 일상수행법(日常修行法)의 하나로 매일 1불(一佛)과 5보살(五菩薩)의 명호를 5,000번씩, 그리고 염불을 1,000번씩 일일이 염주로써 수를 헤아리며 외웠다. 그는 계율을 엄정히 지킴으로써 초학자의 귀감이 되었고, 강론(講論)에 임해서는 경의 진수를 밝혀서 대중의 어리석음을 깨우쳤다. 마음을 가르칠 때는 지혜를 증득함을 법문(法門)의 중심으로 삼아 무명(無明)을 깨닫게 하였다. 언제나 제자들을 대할 때는 부드러움으로 했으며, 학자들에게는 문자를 떠난 진리를 설파하여 마음의 본원을 찾도록 권유하였다. 이 밖에도 유불일치론(儒佛一致論)을 천명하였다. 유가의 아직 드러나지 않은 기상(氣像)은 불가의 여여(如如)한 이(理)와 같고, 유가의 태극(太極)은 불가의 일물(一物)과 같으며, 유가의 이일분수(理一分殊)는 불가의 일심만법(一心萬法)과 같다고 하는 등, 유교와 불교의 차별이 없음을 주장하였다. 그는 매일 자시에 반드시 북두칠성을 향해 절하고 심증실천(心證實踐:깨달음을 실천함)의 법으로 삼았는데, 이는 조선시대 불교의 고승이 북두숭배(北斗崇拜)한 최초의 사료상의 등장이다. 오늘날 남아 있는 칠성신앙은 이러한 습관의 흐름이라고 보겠다. 저서로 『상월대사시집(霜月大師詩集)』 1권이 있다. 순천 조계산 선암사에서 1754년 3개월간 진행된 상월새봉의 화엄경 강회에 참가한 대중 1287인 가운데 나주 금성산 보흥사 승려 32인이 참여하였던 것이 주목된다. 보흥사 스님들이 선암사에서 화엄경 공부할 때 거처했던 곳을 중심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무집당(霧集堂): 금암덕흥(金峯德興) 창파당(滄波堂): 금계덕추(錦溪德樞), 금파태한(錦波泰閒), 천정(天淨), 유흡찰문(有洽察文), 행관(幸冠), 등휘(等輝), 수징(守徵), 달평(達平), 맹한(孟閒), 석해(碩海), 일척(日陟), 치우(致祐), 옥순(玉淳), 복해(福海), 일해(日海), 상눌(尙訥), 시명(始明), 덕수(德守), 본각(本覺), 묘희(妙熙), 운서(雲瑞), 묘찰(妙察), 섭잠(攝岑), 굉희(宏熙), 숙빈(淑彬), 쾌수(快守), 자겸(自謙), 복재(福載), 맹일(孟日), 식명(識明), 월영(月影) 나주 보흥사 스님 가운데 32명이 1754년 일시에 3개월간 선암사에 화엄경 공부하러 떠나고 절에 남은 스님은 몇 명이나 되었을까? 다시 말하자면 18세기 중엽 금성산 보흥사에 살았던 스님들은 32명이 절반쯤 되었다고 한다면 60여 명이 넘는 상주대중이 살고 있었다고 추정할 수 있겠다. 이와 같이 보흥사는 사격을 갖춘 교학을 중시하는 대사찰이었음이 분명하다. 나머지 말 18세기 조선후기에 나주 금성산 보흥사에서 많은 승려들이 머물러 불교수행과 대중교화에 힘쓰고 있었다. 이들은 1745년에 보흥사괘불을 조성 봉안하였고, 1754년 선암사 화엄강회에 보흥사 승려 32인이 참여하였다. 이와같은 새로운 사실을 통해 나주의 진산, 금성산에 꽃피운 불교의 실상을 밝히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글쓴이 이계표 전라남도 문화재위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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