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시초대석] 가을바람에 옛 벗을 불러보지만 게시기간 : 2019-09-17 07:00부터 2030-01-29 02:02까지 등록일 : 2019-09-16 15:44
재단법인 한국학호남진흥원
명시초대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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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진(尙震, 1493∼1564)은 조선 명종 대에 영의정을 지낸 인물이다. 그에게는 자랑할 만한 그림 몇 점이 있었다. 그중 신잠(申潛, 1491~1554)의 대나무 그림과 김시(金禔, 1524∼1593)의 기러기 그림은 특히 아끼는 것이었다. 신잠은 신숙주의 증손자로 기묘사화 때 파방(罷榜)된 이후 20여 년간 서화에만 몰두했던 인물이다. 김시는 권신 김안로의 아들이다. 부친 사사(賜死) 이후 서화에 전심했는데, 그의 그림은 최립(崔岦, 1539∼1612)의 시문, 한호(韓濩, 1543∼1605)의 글씨와 함께 삼절(三絶)로 불리기도 했다. 옛날에는 멋진 그림이 있으면 이름 높은 시인에게 그림에 걸맞은 시를 부탁하는 문화가 있었다. 상진은 대나무 그림은 신광한(申光漢, 1484∼1555)과 정사룡(鄭士龍, 1491∼1570)에게, 기러기 그림은 고향에 은퇴해 있던 소세양(蘇世讓, 1486∼1562)에게 보낸다. 얼마 후 신광한과 정사룡은 대나무 그림과 어울리는 격조 있는 시(申光漢, 「題尙領相所藏靈川子畫竹障」, 『企齋集』권9; 鄭士龍, 「爲尙左相題靈川子畫竹」, 『湖陰雜稿』 권4.)를 보내왔다. 기다리던 소세양의 시도 도착했다. 반가운 마음에 시를 읽던 상진은 서글픈 마음에 그만 탄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위의 칠언절구 두 수는 소세양이 보내온 그 시이다. 소세양의 자는 언겸(彦謙), 호는 양곡(陽谷)이며 본관은 진주이다. 1509년 별시문과에 합격한 이래 정언ㆍ수찬을 지냈다. 1521년에 원접사의 종사관으로 참여하여 뛰어난 시작(詩作) 능력으로 칭송을 받았다. 이후 예조참판ㆍ한성부판윤 등을 지냈다. 1533년에는 진하사(進賀使)로 중국에 가는데, 이때 수준 높은 율시(律詩)로 나라의 위상을 높였다는 말을 들었다. 한미한 가문 출신으로 문명(文名)을 날리던 그는, 50세 되던 해(1535년)에 모친 봉양을 위해 사직을 결심하지만 허락받지 못했다. 이후 병조판서ㆍ이조판서를 지낸 뒤, 1543년 형조판서가 된다. 그런데 제수 후 여러 날에 걸쳐 사헌부와 사간원에서 공론(公論)을 들어 집요하게 반대하자, 결국은 체직되고 만다. 그는 더는 정치적 입지의 확보가 어렵다고 판단하고 고향인 익산(益山)으로 내려간다. 낙향 이후에도 몇 차례 서용(敍用) 문제가 거론되지만, 대간들이 인품이나 젊은 시절 김안로와의 교유 문제 등을 들어 반대한다. 그는 고향에서 20년을 생활하다가 1562년 세상을 떠난다. 그림을 보내온 상진은 소세양이 관직 생활을 하던 시기의 후배이다. 소세양이 이조판서일 때에 상진은 형조참판을 하는 등 한 품계 아래에 있었고, 상진이 평안도 관찰사로 갈 때는 부임 축하의 시( 「送平安尙監司」, 『陽谷集』 卷2)를 주기도 했다. 소세양이 형조판서에서 체직되자, 상진이 그 자리를 받기도 했는데, 이 그림을 보낼 때는 좌의정으로 있었다. 그림을 제재로 쓴 시를 제화시(題畫詩)라 한다. 제화시는 대개 제재와 관련된 관념을 바탕으로 내용을 구성한다. 예를 들어, 소나무 그림에 대해서는 ‘사철 푸른 속성’이나 ‘한겨울 홀로 고고한 형상’ 등을 중심으로, 관련 고사(故事)를 끌어오고 상상력을 보탠다. 위 시의 제재는 기러기이다. 기러기는 다양한 각도에서 다루어진다. 가을에 와서 봄에 돌아가며 날 때에는 줄을 이루어 다니는 습성, 갈대밭에 모여 잠을 잘 때 한 마리가 경계를 선다는 생각, 먼 곳의 소식을 전달해주는 메신저 역할, 자유롭게 날아다니지만, 주살의 위험에 노출되어있는 불안한 존재라는 관념 등과 연관을 가지며 등장한다. 상진이 보내 온 그림은 갈대숲에 깃든 기러기[蘆雁]를 그린 것이었다. 그림 속 기러기 주위에는 여귀꽃이 시들어 있고 서편 하늘은 어둑해져 가고 있다. 쓸쓸한 느낌의 그림에서, 시인은 문득 떠나온 조정의 일이 생각났다. 젊은 시절 시인으로 이름을 얻고 임금에게 인정도 받았지만, 계속되는 견제에 더 이상 조정에 머무를 수 없었다. 부득이 낙향을 결심했지만, 그것은 타의에 의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고향에서 세월을 보내며 마음의 동요를 잠재우려 했어도 불편함은 쉬이 사라지지 않았다. 오랜만에 접한 후배의 연락은 적료(寂廖)한 생활에서 반갑기 그지없는 일이었다. 그렇지만 한편으로 자신이 처지를 자꾸 되돌아보게 했다. 그림 속의 기러기는 그러한 마음의 틈을 교묘히 비집고 들어왔다. 그리고는 마음 깊은 곳에 자리 잡은 슬픔을 끌어내었다. 저무는 하늘을 향해 애처롭게 벗을 부르는 것은, 다름 아닌 시인 자신이었던 것이다. 통상의 제화시에 비해 위 시의 시상 전개는 다소 파격적이다. 자신의 문제를 개입시키고 있을 뿐 아니라, 일부 감정 토로의 성격을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시를 읽을 이는 관료생활을 함께 했던 후배였다. 엄숙주의가 지배하던 전통사회의 분위기에 비추어 볼 때, 자칫 체면이나 인품의 문제를 거론할 수도 있는 내용이다. 그만큼 첫째 수는 감정의 저변을 부지불식간에 드러낸 것으로, 직시하지 않으려 했던 마음의 한 부분이 우연한 계기에 의해 증폭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시인 스스로 이런 쏠림을 의식해서인지, 둘째 수에서는 상대적인 분위기로 돌아간다. 둘째 수의 분위기는 앞과 달리 매우 평온하다. 물 위의 마름은 향기롭고 갈대꽃은 무성한데, 기러기는 물결 위를 마음 편히 오간다. 비록 이곳에 오게 된 이유가 변방의 거센 풍상(風霜) 때문이긴 하지만, 지금은 그것과 관계없이 강남의 세월을 즐기고 있다. 관직 생활의 괴로움을 뒤로하고, 지금의 생활에 만족을 느낀다는 ‘현재성’에 대한 강조의 내용이라 할 수 있다. 첫째 수에서의 하소연 같은 내용이, 분위기를 바꾸어 일상에 대한 담백한 설명으로 바뀌고 있다. 시화(詩話)에서는 여러 각도에서 이 시를 설명한다. 제화시로서 자연스럽게 그림을 연상하게 한다[太逼畫樣 可謂絶唱, 『淸江詩話』]거나, 표현의 함축성과 감동력의 면에서 뛰어나다[含思深遠 尙見而嗟悼之, 『惺叟詩話』]는 것 등이다. 한편 소세양의 삶을 볼 때, 그는 관료 생활의 정점에서 은퇴하여, 관료 시절에 버금가는 20년을 고향에서 살았다. 상대적으로 무겁고 길게 느껴졌을 이 시간을 지탱하는 근원은 무엇이었을까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데, 이 작품이 그 해명의 실마리를 가지고 있는 것 같다. 문집을 보면, 이론적으로 심화되어 가던 16세기의 성리학도, 노장적(老莊的) 은둔도 그의 관심 사항은 아니었던 듯하다. 반복되는 일상과 세세한 관심사를 담은 시만이 긴 세월을 반영하고 있을 뿐이다. 시인은 무력감에 빠지고 감상(感傷)에 흐르기도 하지만 심리적인 안정성을 위협받을 정도는 아니다. 비교적 안정적이라 할 삶을 지속하게 한 동력은 무엇이었을까? 아마도 위의 시에 드러나는 감정의 매커니즘이 그것을 설명할 수 있지 않을까? 한편으로는 세상과의 어긋남에서 오는 불편한 감정을 발산하고, 한편으로는 스스로를 다독이며 평온으로 안내하는 틀. 양단(兩端)의 감정 어느 한 편에 머무르기보다는 양단의 감정을 오고 가는 ‘흔들림’. 바로 그 편폭 내에서 ‘삶을 수용하는 특성’에 답이 있는 것은 아닐까? 같은 시기 다른 인물들이 성리학이라는 견고한 사상체계 안에서 안정성의 공간을 마련했다면, 그는 양단을 오가는 어느 굽이에서 마주하는 자잘한 일상과 절물(節物)을 ‘시인적 감각’으로 해석하고 표현하는 그 자체에 몰입했을 수 있다. 어떻게 보면 거시적 삶에 대한 ‘목적 없음’이, ‘목적 있음’의 삶 이상으로 지속적인 안정성을 보장했을 수 있다. 여기에는 간과해서 안 될 전제가 하나 있다. 양단의 감정이 하나의 매커니즘을 이루지만, 불편함이나 우울보다는 마음의 평정이나 낙관적 인식이 더 크고 우위에 있다는 것이다. ‘강남땅의 세월을 사랑하게 된 기러기’는 바로 그 징표라 할 수 있다. 흔들림의 어느 지점에서 발휘되는 시인적인 감각과 창작에의 몰입, 그리고 긍정의 삶으로 환원하는 힘. 낙향 이후 20년의 삶은 이렇게 설명될 수 있을까? 어느 누구의 삶도 흔들림의 구조일 수밖에 없다. 나의 일에 대한 충실성과 인생에 대한 태도의 문제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하는 부분이다. 글쓴이 김창호 원광대학교 한문교육과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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