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문서와 옛편지] 영조의 어필(御筆) 정치 게시기간 : 2019-09-19 07:00부터 2030-02-27 02:02까지 등록일 : 2019-09-18 1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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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와 옛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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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의 글씨는 거칠고 다급한 성격과는 달리 마치 버드나무처럼 유연하고 부드럽고 강인하다. 왕위에 즉위하기 전인 연잉군(延礽君) 시절 글씨는 전통적인 간찰체 서풍이 많이 드러나지만, 왕이 되고 남긴 수많은 글씨는 부드러우면서도 강약이 있는 유연한 서체를 구사하였다. 여기에 소개하는 강연(講筵) 갱재첩(賡載帖)은 영조가 훗날 정조가 되는 왕세손과 함께 강연하고 이를 기념한 시첩(詩帖)이다. 갱(賡)은 잇는다는 것이고 재(載)는 짓는다는 것이니, 갱재(賡載)란 임금의 시에 신하가 이어서 짓는다는 뜻으로 중국 고대의 성군 순(舜)과 현신 고요(皐陶)가 노래를 주고받은 고사에서 유래하였다. 영조 46년(1770) 2월 23일 『중용』 읽기를 마친 세손과 강연(講筵)을 마친 영조가 시를 짓고 그 운자에 따라 세자와 신하가 여기에 화답하였으니, 이번 갱재첩은 국왕과 세손, 신하의 공동 시집인 셈이다. 16명의 신하가 참여하였다. 다음은 여기에 참여한 신하의 ‘경진’ 구절이다.
그림1 어필갱진첩 : 표지
그림2 어필갱진첩 : 영조의 어필 부분. 노쇠하고 병약한 말년의 글씨이다. 영조가 ‘할아비와 손자가 한 곳에서 강연을 하네[祖孫仝講一堂中]’라고 하니, 세손은 ‘성스런 가르침이 한 부의 중용에 있네[聖誨欣承一部中]’라고 호응하였고, 병조판서 채제공(蔡濟恭), 도승지 윤동섬(尹東暹) 이하 예문관 검열인 오정원(吳鼎源)까지 갱재하였다. 이어서 영조가 다시 ‘지난해와 올해도 강연은 똑같네[昨歲今年宴講同]’라고 하니 세손은 ‘기쁘게 모시고 강연하니 앞뒤가 똑같네[陪歡侍講後先同]’라고 하였고, 병조판서 채제공은 ‘훌륭한 갱가가 순임금 궁전과 똑같네[濟濟賡歌舜殿同]’라고 하였다.
그림3 어필갱진첩 : 세손의 갱진 부분
그림4 어필갱진첩 : 채제공 등 시종신들의 갱진 부분 『영조실록』에도 광명전(光明殿)에서 『중용』을 다 읽은 왕세손과 함께 강(講)하였다는 기사가 나온다(영조 46년 2월 23일). 영조가 먼저 『중용』 제1장을 외우고 세손에게 한 차례 임강(臨講)하라고 명하였다. 그리고 “글 읽는 소리를 들으니, 많이 읽었음을 알겠구나” 칭찬하고, “무엇을 하늘이 명한 성[天命之性]이라 하는가? 그 명한 바를 누가 듣고 보았는가?” 질문하니, 세손이 “만물을 화생(化生) 시킴에 있어서 기(氣)가 형성되고 이(理)도 부여(賦與)되는 것이 명령하는 것과 같습니다.” 하였다. 또 영조는 “수도(修道)란 무엇인가?” 하니, “천성(天性)은 성인(聖人)이나 범인(凡人)이 모두 같으나, 기질(氣質)의 품부(稟賦)는 지나치고 미치지 못하는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수도한 뒤에야 천성을 회복할 수가 있습니다.” 하였다. 영조와 세손은 ‘닦는다[修]’는 것의 의미, ‘일상 해야 할 일에 등급(等級)과 절목(節目)을 두는 것’ 등에 대해서 상세히 강론하였다. 그리고 영조는 이 기쁨을 밝게 드러내고자 어제시(御製詩) 두 구절을 내렸고 세손도 곧 그 자리에서 화답해 올렸다. 여러 신하도 차례로 화답해 올렸다. 『승정원일기』는 당시 상황을 좀 더 상세하게 기술하였다. 영조가 먼저 ‘중(中)’자를 운으로 시를 지어서 내리고 세손에게 갱진하도록 하였으며 승지와 사관 및 시위(侍衛) 신하에게 갱진하게 하였고, 1차 갱진을 마친 후, 영조는 또 이번에는 ‘동(同)’자 운을 써서 내리고 세손에게 갱진하게 하자 ‘훌륭하다’고 칭찬한 후 여러 신하에게도 갱진하게 한 후, 이를 첩으로 만들어 입시한 여러 신하에게 각 1건씩 분급하라고 명하였다는 것이다.
그림5 영조 영정(국립고궁박물관 소장)
영조는 많은 왕실의 행사나 의례 때에 이러한 어제시(御製詩)를 지어서 신하들에게 갱진하도록 하고 또한 현판 글씨를 써서 내리기도 하였다. 물론 국왕의 글씨는 어필(御筆)이라고 하여 어필을 받은 신하들은 영광으로 여겨 소중하게 간직하였다. 영조는 재위 기간이 긴 만큼 현재 남아있는 어필의 수도 매우 많다. 영조의 어필 글씨는 진적(眞跡)으로도 남아있지만, 국왕의 글씨가 귀한 만큼 나무나 금석(金石)에 새겨서 여러 부를 탁본으로 만들어 보존하고 나누어 가졌다. 갱재 시첩이나 탁본 글씨첩이 많이 남아있게 된 이유이다. 대량의 글씨첩을 만들기 위해서는 보통 목판이나 금석에 새겨서 탁본으로 만들기도 하였지만, 갱재시첩은 진적과 함께 국왕의 시에 수창(酬唱)한 배종(陪從) 신하들에게 모두 가지도록 하였기 때문에 사자관(寫字官)이 여러 부를 만들어서 분급하였다. 특히 영조가 친필로 써서 내린 글씨는 사자관이 외곽을 그리고 안 부분을 먹으로 채워 넣는 쌍구전묵(雙鉤塡墨) 방식으로 똑같이 써서 어필의 느낌을 살렸고, 나머지 신하들의 시구(詩句)는 사자관의 글씨로 정서하여 첩을 만들었다. 수창 배종 신하들이 적을 때에는 십여 명, 많을 때는 수십 명에 이르기도 하였다. 기본적으로 국왕의 시에 갱재하는 시는 ‘용비어천가’ 식의 찬양에 불과하기 때문에, 문학적인 가치는 그다지 높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조는 기회만 되면 자신이 먼저 시를 한 구 지어서 친필로 써주고 이에 화운(和韻)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갱재에 참여한 여러 신하에게 어필 시를 비롯하여 각각 신하들이 올린 갱재시를 사자관에게 쓰도록 하여 첩을 만들어 하사하였다. 영조는 행사의 시종신들에게 자신의 어필이 있는 갱진첩이나 어필 진적 등을 하사함으로서 그 어필이나 어필첩을 받은 신하들의 충성심을 끌어내었다. 일종의 ‘어필 정치’라고 하겠다. 지금 남아있는 영조의 어필은 친필인 진적(眞跡) 자료만이 아니라 위와 같은 갱재첩, 또 현판이나 탁본 등으로 많이 남아있다. 현재 남아있는 영조의 현판 글씨만 해도 100여 점이 넘는다. 글쓴이 김현영(金炫榮) 한국고문서학회 명예회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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