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비, 길을 열다] 산하를 비추리라! 사산비명(四山碑銘) ① 게시기간 : 2019-09-24 07:00부터 2030-01-01 01:01까지 등록일 : 2019-09-20 10:09
재단법인 한국학호남진흥원
선비, 길을 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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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5년(헌강 11) 3월, 29살 최치원은 고국 땅을 밟았다. 국왕의 학문을 시중들고 국가문서를 작성하는 요직, ‘시독 겸 한림학사(侍讀兼翰林學士)’에 임명되었다. 국왕이 희양산 봉암사의 ‘지증대사적조탑(智證大師寂照塔)’ 비석에 새길 글을 맡겼다. “누더기 걸친 동국 선사가 서쪽으로 돌아가서 슬펐는데, 비단옷 입은 서국 사신이 동쪽으로 돌아와 무척 기쁘도다. 오래도록 썩지 않을 일이 이제 인연이 닿았으니 절묘한 재주를 아끼지 말고 장차 대사의 덕에 보답해야지 않겠는가!”1) ‘지증(智證)’과 ‘적조(寂照)’는 시호와 탑명, 법명은 지선(智詵)이며, 법호는 도헌(道憲, 824∼882)이었다. 진골 신분으로 왕실 귀족과 돈독하였는데 특히 경문ㆍ헌강왕이 존숭하였다. 경문왕의 여동생 단의옹주가 시주한 현계산(賢溪山)―원주 한계산―안락사(安樂寺)에 주석하다가 왕실의 희사를 받고 봉암사를 창건하여 선풍을 떨쳤다. 다른 산문의 거벽(巨擘)과 달리 ‘입당 구법’ 하지 않았고, 선법 또한 남종선(南宗禪)과 다소 거리가 있었던 북종선(北宗禪) 계열이었다.2) 스승 혜은(慧隱)의 법맥이 장안에서 북종선으로 입문하고 단속사에서 입적하였던 신행(愼行, 704∼779) 나아가 신수(神秀)에 닿던 것이다.3) 최치원은 바로 왕명을 받들지 못하였다. 왕사로 초빙하였던 헌강왕조차 ‘말씀을 잊은 망언사(忘言師)’라고 하였듯이, 대사의 행장에 법문이나 설법 등이 간략하여 아쉬웠던 것이다. 한편으론 국왕에게 바칠 ‘시ㆍ부ㆍ표(表)ㆍ장(狀) 등’을 정리하는데 분주하였다.4) 이듬해(886) 정월이 돼서야 율수현에서 엮었던 『중산복궤집(中山覆簣集)』을 비롯하여 귀국 직전에 지은 편지 시문을 보탠 『계원필경집』 등을 올렸다. 자신의 문장을 알리고도 싶었겠지만, 군막의 공사(公私) 문서를 통하여 중원―세계 사정을 알려야 한다는 뜻이 우선하였으리라. 그리고 여름이 되기 전, 원성왕릉의 원찰인 숭복사(崇福寺)를 기념할 비명(碑銘)을 찬술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초월산(初月山) 즉 토함산 서남쪽 구릉에 있던 곡사(鵠寺)를 경문왕이 중창하고 헌강왕이 승복사로 이름을 바꿨다.
경문왕(재위 861∼875)이 ‘꿈에 원성왕을 만나고’ 숭복사 중창을 시작하였는데, 즉위 초부터 계획했었다. 그간 왕권쟁탈 골육상잔의 상흔을 치유하고 단합하고픈 발원이 그만큼 간절하였음이었다.5) 아울러 원성왕이 도입한 독서삼품과, 경전 시험으로 인재를 등용하겠다는 유지를 계승하겠다는 의지도 담았을 것이다. 실제 경문왕은 846년(문성 8)―장보고가 패망한 그해 이후 중지된 대당 외교를 재개하여 당의 공식 책봉을 받았고, ‘국자감 유학생’도 다시 들여보냈다. 국왕 자신도 ‘국학(國學)’에 행차하며 유학에 주의를 기울였다.6) 이런 중에 최치원도 유학길에 오를 수 있었고, 더구나 부친이 공사 감독관이었다. 어린 시절 현장을 보았을지 모른다. 왕명 또한 절실하였다. “선조(先朝: 경문왕)께서 애초부터 절을 다시 지으시겠다는 서원(誓願)을 크게 세우셨는데, 일찍이 김순행(金純行)과 그대의 아버지 견일(肩逸)이 종사하였다. 명(銘)을 갖추면 과인과 그대가 더불어 효성을 바칠 수 있지 않겠는가!”7) 아련하고 뭉클하였을 것이다. 그런데 그해(886) 여름 지난 7월, 국왕은 돌도 채 되지 않는 야합해서 낳은 아들을 두고 급작스레 서거하였다. 아우 황(晃)이 즉위하였으니 정강왕이다. 숭복사 비석을 세울 여유가 없었다. 최치원도 겨를이 없었다. ‘황소적 격파’를 경하하러 갔던 사신이 가져온 조서에 사례하는 표문을 짓고, 불국사의 아미타불상과 석가모니를 수놓은 깃발에 찬사를 올려야 하였다.8) 때마침 지리산 쌍계사의 ‘진감선사(眞鑑禪師) 대공탑(大空塔)’이 완공되었다. 탑비를 세워야 하고, 명문(銘文)이 필요했다. 정강왕이 당부하였다. “선사는 행실로 드러났고 그대는 문장으로 진출했으니, 명은 그대의 몫이다.”9) 진감선사는 ‘흑두타(黑頭陀, 黔丹)’로 불린 혜소(慧昭, 774∼850), 속성은 최씨(崔氏)였다. 산동의 지방관을 지낸 선조가 수양제의 요동 침공에 종군하였다가 을지문덕에게 항복하고 귀순하였다. 고구려가 망하자 남쪽으로 내려와 전주 금마(金馬)에 터를 잡았다. 농사지을 땅이 없어 고기잡이 생선 장수로 살다가 부모 돌아가신 후, 804년(애장 5) 세공선의 뱃사공이 되어 바다 건너 창주(滄州)의 신감(神鑑)을 찾아 삭발하고 가사를 받았다.10) 신감이 서거하자 짚신을 짜서 보시 행각을 하며 숭산의 소림사, 장안 종남산 등을 순례하였다. 앞서 들어온 도의(道義)와도 여러 해를 함께 편력하였다.11) 선사는 830년(흥덕 5)에 귀국하여 한때 상주 등에 머물다가 지리산 화개골로 들어갔다. 민애왕―희강왕을 보위에 올려놓고 곧장 빼앗았다가 장보고의 개입으로 축출되었던 그 임금―이 ‘혜소(慧昭)’란 법호를 내리고 황룡사 승적에 올리면서 발원을 당부하자 짤막하게 답하였다. “부지런히 선정(善政)을 베풀면 되지, 발원은 해서 무엇 하겠습니까!” 이후에도 사신이 오면 일렀다. “마른 나무 썩은 등걸 같은 이 몸을 찾아와서 왕명을 욕되게 합니까? 배고파도 먹지 못하고 목말라도 마시지 못한 역마가 안쓰럽기만 합니다.” 선사는 거친 밥 가리지 않고 중국 차[漢茗]나 좋은 향[胡香]에도 시큰둥하였다. 열반에 들며 일렀다. “만법이 모두 공(空)이라, 나는 이제 가련다. 한마음이 근본이니, 그대들은 힘쓸지어다. 탑을 세워 육신을 보존하지 말고, 명(銘)을 꾸며 행적을 기록하지 말라.” 850년(문성 12) 정월이었다. 탑도 세우지 말고 명도 짓지 말라! 선사 입적 36년 지나서야 시호와 탑명이 내려진 까닭이었다. 최치원은 서둘렀고 글씨까지 썼다. 전자로 쓰는 비석의 제목 즉 전액(篆額)은 ‘당나라 시대 신라국 有唐新羅國’이 아닌 ‘해동의 고 진감선사의 비 海東故眞鑑禪師之碑’라 하였다. 탑비는 887년 7월 건립되었다. 너무 병약하고 후사도 없이 겨우 1년을 버텼던 정강왕이 여동생―진성왕에게 왕위를 맡기고 세상 버린 그달이었다. 훗날 장성 청백리 박수량(朴守良, 1491∼1554)이나 속리산 처사 성운(成運, 1497∼1579) 또한 외척 권신이 발호하며 나라가 나라답지 못한 참혹한 세월이 부끄러워, 비석을 세우지 말라, 하였다. 선사는 어땠을까? 중국에서 신감 스님에게 익힌 부처를 공양하는 노래, 범패를 우리 소리로 바꿔 부르며 아스라하였을 것이다. 지리산의 차밭을 돌보며…. 1) 『고운집』 권3, 「지증화상 비명병서 智證和尙碑銘竝序」
2) 선종은 달마(達磨,?∼528) 이후 제5조 홍인(弘忍, 601∼674)에 의하여 궤도에 올랐다. 홍인은 신수(神秀, 606∼706)와 혜능(慧能, 638∼713)에게 전하였는데, 신수는 장안ㆍ낙양, 혜능은 강남을 무대로 활동하며 북종(北宗)ㆍ남종(南宗)이 구분되었다. 한편 신수에게 배우고 혜능에게 갔던 신회(神會, 684∼758)가 혜능의 돈오(頓悟)를 받아들이며 신수의 점오(漸悟)를 비판하면서 ‘남돈북점(南頓北漸)’이 회자되었지만, 머잖아 남종이 대세를 이뤘다. 혜능을 육조(六祖)로 부르는 까닭이었다. 3) 중국에서 신수의 문중에 입문하여 북종선을 받아들인 신행의 법맥은 준범(遵範)→혜은(慧隱)→지증대사 도헌(道憲)→양부(陽孚)→긍양(兢讓)으로 이어졌다. 훗날 전란 중에 소실된 봉암사를 중창하며 희양산문을 재건한 긍양(兢讓, 878∼956)은 지증대사가 쌍계사 혜소(慧昭)의 법맥을 받은 것으로 정리하였다. 남종선이 대세였던 상황에서 산문의 활로를 찾고자 함이었다(鳳巖寺靜眞大師圓悟塔碑). 4) 『계원필경집』 「계원필경서 桂苑筆耕序」, 본래는 「시ㆍ부ㆍ표ㆍ장을 올리는 글 進詩賦表狀等集狀」. 5) 신라 하대의 왕위는 원성왕(재위, 785∼798) 후손으로 이어졌다. 한동안 첫째 인겸계(仁謙系: 昭聖→哀莊→憲德→興德)가 맡다가, 장보고가 개입하며 셋째 예영(禮英)의 균정계(均貞系: 神武→文聖→憲安)로 옮겼는데, 헌안왕이 희강왕(예영의 장손으로 사촌 균정과 대립하며 인겸계(민애왕)의 도움을 받아 왕위에 올랐으나 살해되었다―의 손자를 사위 삼고 왕위를 잇게 하였으니 경문왕이었다. 6) 『삼국사기』 권11(신라본기) ‘문성왕 2년’ 및 ‘경문왕 2년ㆍ3년ㆍ5년ㆍ9년ㆍ10년’ ; 『新唐書』 권 220(列傳 145) ‘新羅’ “會昌後 朝貢不復至.” 회창은 841년∼845년의 무종(武宗)의 연호. 7) 『고운집』 권3, 「대숭복사 비명병서 大嵩福寺碑銘竝序」 8) 『고운집』 권1, 「조서 두 함을 내린 것을 사례한 표문 謝賜詔書兩函表」 및 권3, 「화엄 불국사의 석가여래상을 수놓은 당번에 대한 찬 華嚴佛國寺繡釋迦如來像幡贊」 「대화엄종 불국사의 아미타불상에 대한 찬 大華嚴宗佛國寺阿彌陀佛像讚」 9) 『고운집』 권2, 「진감화상 비명병서 眞監和尙碑銘竝序」 10) 신감(神鑑, ?∼844)은 부처의 공덕을 찬미하는 노래, 범패가 좋아 입산하여 마조(馬祖) 도일(道一, 709∼788)의 제자가 되었다. 11) 84년 입당한 도의는 마조(馬祖) 도일(道一)의 양대 법맥 지장(智藏, 738∼817)과 회해(懷海, 720∼814)의 인정을 받고 821년 귀국하여 설악산 진전사에 40여 년 수도하다가 천화(遷化)하였다. 재전 제자 체징(體澄, 804∼880)이 장흥 보림사에 가지산문(迦智山門)을 열면서 개산조로 올렸다. ‘북산의 도의 北山義, 남악의 홍척 南岳陟’으로 일컬어졌던 선종의 쌍벽이었다. 홍척은 지장에게 심계를 받았던, 지리산 실상산문의 개산조였다. 글쓴이 이종범 (재)한국학호남진흥원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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