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유학문선] 세계사를 성찰한다 게시기간 : 2019-09-26 07:00부터 2030-02-01 03:03까지 등록일 : 2019-09-25 13:38
재단법인 한국학호남진흥원
근대유학문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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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를 어떻게 읽을까? 세계사를 지배하는 유럽 내러티브의 바깥에서 세계사를 성찰할 수 있을까? 마르크 페로의 『새로운 세계사』는 각국의 세계사 교육에서 세계사의 ‘산산조각’을 발견했다. 타밈 안사리의 『이슬람의 눈으로 본 세계사』는 이슬람 내러티브로 전달되는 ‘중간 세계’의 역사에서 세계사의 ‘문명광역성’을 제기했다. 비자이 프라샤드의 『갈색의 세계사』는 제3세계 프로젝트 성쇠의 핵심 현장들을 연결하는 ‘네트워크’ 세계사를 창조했다. 김기협의 『밖에서 본 한국사』는 민족과 국가의 이중 정체성을 지닌 중국의 조선족 동포를 위해 한국사와 중국사의 세계사적 결합을 추구했다. 유럽 내러티브의 세계사를 상대화하는 시도들이다. 이 땅에서 그러한 세계사 성찰의 기원을 찾을 수 있을까? [번역] 한가히 지내다 무료하여 우연히 이른바 『태서신사(泰西新史)』라는 것을 열람했는데 총명함이 이미 쇠해서 새로 알아도 금세 잊어버린다. 그러나 각국의 정치와 국운의 연혁에 대해서는 대략 그 대강을 알 수 있었다. 태초에는 각기 강역을 지키고 각기 임금과 백성이 있어서 나라라고 부르는 것이 얼마나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각기 몽매하고 몽매해서 오직 자기 힘으로 먹고살 줄만 알지 남에게서 빼앗으려는 마음을 품은 적이 없었다. 급기야 혼돈에서 열리자 지교(智巧)가 날로 밝아져 이용후생(利用厚生)의 술법과 관계된 것들이 차례로 발전했는데, 특히 이른바 기학(氣學)이니 화학(化學)이니 하는 것은 전고에 없던 것들이었다. 이 때문에 기계가 날래니 일하기 쉬워지고 탈것이 빨라지니 교통이 편해져서 재부를 순치해와 백성이 풍족하고 화락하여 태평을 누렸다. 그러나 지교(智巧)가 이미 밝아지자 정욕도 뒤따라서 권세와 지위를 오랫동안 탐하니 임금과 백성이 승부를 각축했고 땅을 다투고 나라를 멸하니 좋은 이웃이 원수로 변했다. 마침내 지난날 이용후생의 기술이 성시(城市)와 인민을 도륙하는 기계로 변하고 강력하고 혹독한 폭탄이 거듭된 연구로 갈수록 신기해지며 날마다 먼지가 자욱한 전장은 원혼의 피바다가 되었다. 강국이 약국을 삼키고 대국이 소국을 아우르는데 강국과 대국이라 이르는 것도 위는 아래를 근심해 초개같이 참살하면 아래는 위를 거역해 원수처럼 시해하니 지난날 태평을 누렸다는 것도 거의 다 사라져서 흥망의 속도가 마치 바둑이 뒤집히는 것처럼 빨랐다. 그 까닭을 생각해 보면 지교만 높이고 인의를 모르기 때문이고 권력만 믿고 윤리가 없기 때문이다. 인의를 모르고 윤리가 없이 오직 지력으로 천려일득(千慮一得)의 요행으로 삼는다면 지력이 나보다 뛰어난 자가 반드시 나를 뒤따라와 곧 천려일실(千慮一失)의 불행이 있을 텐데, 그러면 내일의 불행이 오늘의 요행에 이미 뿌리 내린 셈이라 무어 그리 대단한 것이겠는가? 내 생각에 이 책의 엮은이는 우리 조선이 지혜가 밝지 못해 남에게 제어 받음을 개탄하고는 서국(西國)의 정치와 기예의 장점을 극찬하여 우리나라 사람이 이를 깨닫고 분발하게 하였으니 그 의도는 본디 좋다. 그러나 치세가 적고 난세가 많은 까닭이 전적으로 인의와 윤리를 가르치지 않았기 때문임을 한 번도 논하지를 않았으니 아무래도 정교의 근원에 밝다고는 이르지 못하겠다. 내 생각에 이용후생은 서양을 배우고 교화는 동화(東華)를 주로 한 뒤에야 부강을 꾀할 수 있고 영속을 말할 수 있겠다. 이 책의 독자는 내 말을 우활하다 하지 말고 취사선택하면 다행이겠다. 장채산인(藏蔡山人)은 쓴다. [원문] 閒居無聊, 偶閱所謂泰西新史者, 顧聰明已衰, 隨得隨失, 然其於各國政治國祚沿革, 略可以見其大槩矣. 蓋其太始也, 各守疆域, 各有君民, 呼稱國者, 不知爲幾何, 而亦各蒙蒙昧昧, 惟知食力爲生, 而未嘗以攘奪爲心, 及其混沌開, 而智巧日明, 凡係利用厚生之術, 次第發展, 而所謂氣學化學, 尤是前古所未有也. 是以器械捷利而事功易, 舟車迅速而交通便, 馴致財阜, 民殷熙熙, 享太平矣. 然而智巧旣明, 情欲亦隨, 而長貪權覬位, 君民角其勝負, 爭地滅國, 隣好變爲讐敵, 乃以向之利用厚生之技術, 變而爲屠城戮人之器械, 强砲毒彈, 愈硏愈奇, 戰塵日起, 寃血成海, 以之强呑弱大倂少, 而其所謂强大者, 亦上虞其下, 斬殺如草芥, 下逆其上, 簒弑如仇讐, 向所謂享太平者無幾, 而興亡之速如局棋飜覆, 試究其所以然, 則所尙者智巧而所昧者仁義也, 所恃者權力而所蔑者倫紀也, 昧仁義蔑倫紀而全以智力爲一得之倖, 則智力之勝於吾者, 必將踵吾後而至, 旋有一失之不倖, 然則明日之不倖, 已根於今日之倖, 何足多哉? 余意編是書者, 慨我鮮之智不明而見制於人, 盛稱西國政治藝能之美, 而俾我人有所感悟而振發也. 其意固善矣. 然一未嘗論治少亂多之故, 全由於仁義倫紀之無敎, 恐亦未可謂明於政敎之源者也. 愚以謂利用則學西洋, 而敎化則主東華, 然後富强可謀而長遠可道, 覽是書者不以吾言爲迂而有所取舍焉則倖也. 藏蔡山人書. [출전] 권상규(權相奎), 『인암집(忍庵集)』 권12 「서태서신사후(書泰西新史後)」 [해설] 1898년 대한제국 학부는 논술 시험 11문제를 만들어 평안남도 공립 소학교에 훈령을 발송했다. 학생들이 『태서신사남요(泰西新史攬要)』를 읽고 작성한 논술 답안을 학교별로 3개월 이내에 학부로 보내라는 것이었다. 시험 문제 몇 가지를 소개해 본다. 첫 번째 문제. ‘법국(法國)이 무슨 까닭에 대란(大亂)이며 나파륜 제1세는 어떠한 영웅인가?’ 두 번째 문제. ‘영국(英國)은 어떻게 해서 흥성하여 세계 일등국이 되었으며 정치의 잘잘못이 우리나라에 비하면 어떠한가?’ 이 문제에는 ‘숨기지 말고 사실대로 직서함이 가함’(!)이라는 주의 사항이 적혀 있다. 일곱 번째 문제. ‘아국(俄國)이 정치와 땅을 개척함과 얻은 속지의 국민을 어떻게 대우하며 그 나라와 깊이 사귐이 어떠한가?’ 이 문제는 『태서신사남요』 가 부족하다고 판단한 듯 『아국약사(俄國略史)』 를 숙독하라는 주의 사항이 적혀 있다. 열 번째 문제. ‘신정(新政)이 일어난 후 세계가 전에 비하면 어떠한가?’ 마지막 열한 번째 문제. ‘우리 대한은 어떤 정치를 써야 세계 일등국이 되며 또 구습을 고치지 않으면 어떠한 지경에 이를까?’ 이 문제에는 ‘소소명백히 저론(著論)함이 가함’(!)이라는 주의 사항이 적혀 있다. 문제를 출제한 학부의 마음은 간절했다. 서양과 경쟁하는 부강한 나라가 되려면 실사구시의 자세로 세계 현대사를 알아야 한다. 이 점에서 위의 11개 문제 중 핵심은 열 번째 문제 ‘신정(新政)이 일어난 후 세계가 전에 비하면 어떠한가?’이다. 다행히 『태서신사남요』 제23권 「구주안민(歐洲安民)」에 모범 답안이 있다. 이에 따르면 서양의 인민은 전제정치 하에서 제왕의 ‘노복’에 불과했으나 프랑스 대혁명 이후 ‘민주’의 마음이 발생해서 비인 회의의 구체제 복귀에 맞서 ‘자주’를 요구하였다. 1820년 남미의 독립, 1830년 프랑스 7월 혁명, 1848년 프랑스 2월 혁명을 거치면서 서양 각국은 이를 수용해 ‘신정’을 실시하고 학교를 설립하여 마침내 ‘안민(安民)’에 성공하였다. 『태서신사남요』 제24권 「부기(附記)」에는 ‘구주신정(歐洲新政)’의 이름으로 서양 각국의 상하 의원이 예시되어 있어서 ‘신정’의 함의를 알 수 있다. 이제 학부에서 출제한 세계사 문제는 의도가 명확해졌다. 태서의 ‘신정’과 한국의 ‘구습’이 대비되는 지점, 그것은 대의정치였다. 『황성신문』 1898년 11월 5일자 제1면에는 관민공동회 헌의 6조에 따른 중추원 관제 개정의 건이 제2면에는 『태서신사남요』에 기초한 세계사 문제를 소개하는 학부의 훈령이 동시에 실렸다. 우연의 일치였을까? 『태서신사남요』 는 역사서의 형식을 지키면서도 정론서의 역할을 수행한 책이었다. 청일전쟁이 종결된 그해 출판된 이 책은 중국이 청일전쟁의 아픔을 딛고 어떻게 재기할 수 있는지 역사의 거울을 제공하였다. 시모노세키 조약이 체결된 다음 달 티모시 리처드(Timothy Richard, 1845∼1919)가 지은 이 책의 번역자 서문은 19세기 서양의 세입이 중국의 28배에 달한다는 사실, 19세기 서양의 민부(民富)가 과거보다 5배나 증가했다는 사실을 제시하며 서양 신법의 조속한 수용을 주장했다. 중국 광서제가 칙지를 내려 중국 과거 시험 문제에 반드시 서양사를 출제하게 하고 또 이 책을 읽혀 기초를 다진 40세 이하 중국인을 서양에 유학을 보내서 신법을 학습하게 하라고 제안했다. 이 책은 전체 24권 중 독일, 오스트리아, 이탈리아, 러시아, 터키, 미국, 교황은 각각 1권씩 할애되어 있으나 영국에만 10권이 투입되어 있으니 겉으로는 태서신사이나 속으로는 영국신사(英國新史)이다. 이와 같은 극심한 불균형이 과연 19세기 서양사에 대한 온전한 이해에 도움이 되었을까? 중국이 영국의 길을 가야 한다는 역사 선전 이상의 의미를 담고 있었을까? 이 책의 제목으로 취한 ‘신사’는 다분히 이념적이다. 현실을 이해하는 역사 지식을 낡은 역사와 새로운 역사로 차별하는 신구 대립의 계몽주의 어법을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황성신문』 1899년 7월 29일 논설은 정확히 이 지점, 곧 역사와 현실의 관계에서 비춰진 역사 지식의 유효성을 논한다. 이를테면 광산 개발 때문에 명나라 말기 국망에 치달았다는 ‘구사’와 광산 개발이 서양의 부강에 일조한다는 ‘신사’를 비교한다면 ‘구사’와 ‘신사’ 중에서 어느 역사 지식이 현실에 유효한가? 논설은 『태서신사남요』를 자와 저울로 삼아 이제까지의 ‘유문고사(遺聞古事)’가 합당한지 장단과 경중을 재자고 결론지었다. 그러나 역사는 역사일 뿐 거기에 ‘구사’와 ‘신사’의 차별이 무엇이며 또 『태서신사남요』로 하여금 역사의 표준을 장악하게 한다는 발상은 무엇인가? 조선 유학자 권상규(1874∼1961)는 이 책을 읽고 서양 현대사에서 인간과 국가의 야만적인 무한 상쟁과 그것이 결과할 종국적인 문명 파멸을 느꼈다. ‘지교만 높이고 인의를 모르는, 권력만 믿고 윤리가 없는’ 세상에서 인간이 살아갈 참다운 문명의 표준을 발견할 수 있을까? 권상규의 서양사 비평은 한국 근대 유학의 성찰적인 세계사 인식과 맞닿아 있다. 이로부터 이 땅에서 피어난 세계사 성찰의 전통을 말할 수 있을까? [참고문헌] 마르크 페로 지음, 박광순 옮김, 『새로운 세계사』, 범우사, 1994 김기협, 『밖에서 본 한국사』, 돌베개, 2008 타밈 안사리 지음, 류한원 옮김, 『이슬람의 눈으로 본 세계사』, 뿌리와 이파리, 2011 비자이 프라샤드 지음, 박소현 옮김, 『갈색 세계사』, 뿌리와 이파리, 2015 麥肯濟 著, 李提摩泰․蔡爾康 譯, 『泰西新史攬要』, 上海書店出版社, 2002 『皇城新聞』 1898년 11월 4일, 5일 別報 『皇城新聞』 1899년 7월 29일, 論說 노관범, 「1875∼1904년 박은식의 주자학 이해와 교육자강론」 『한국사론』43, 2000 백옥경, 「한말 세계사 저역술서에 나타난 세계인식」 『한국사상사학』35, 2010 허재영, 「광학회 서목과 『태서신사남요』를 통해 본 근대 지식 수용과 의미」 『독서연구』35, 2015 글쓴이 노관범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부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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