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유학문선] 농부는 선비의 미래이다 게시기간 : 2019-10-10 07:00부터 2030-03-01 02:02까지 등록일 : 2019-10-08 14:55
재단법인 한국학호남진흥원
근대유학문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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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 황현은 국망의 소식을 듣고 절명시를 지었다. 그는 선비로서 너무나 부끄러웠다. 나라는 온갖 난리를 겪었고 나는 몇 번이고 죽어야 했건만. 나는 성균관에서 공부할 때 왜 나라의 간신을 비판하지 못했던가. 그는 선비 노릇을 하지 못한 자신의 삶을 회한하고 자결했다. 나는 선비 노릇을 하지 못했다, 나는 선비가 아니었다, 국망의 트라우마는 그렇게 오래 갔다. 여기 허위로 가득한 선비를 절망하는 선비가 있다. 그는 선비에서 농부로 귀농(歸農)을 결심한다. 무슨 마음이었을까? [번역] 하늘이 이 백성을 낳음에 반드시 그 직분을 두었다. 해야 할 직분을 지키지 않는 자는 곧 일 없는 무뢰배이니 목숨을 지키기 어렵다. 선비(士)ㆍ농부(農)ㆍ기술자(工)ㆍ장사치(商) 넷은 폐할 수 없는 천직이니 일상생활에 없어서는 아니 된다. 선비는 뜻을 숭상하고 도를 갖고 세상을 지킨다. 농부는 힘으로 먹고살고 백성과 나라를 봉양한다. 기술자는 솜씨를 다해 기계를 제작한다. 장사치는 이자를 취해 재화를 옮긴다. 넷 중에 하나라도 폐하면 나라의 살림과 백성의 생활이 언제나 병들고 축소될까 근심하게 된다. 이 때문에 하늘이 직분을 주어 백성이 직분에 머무름을 생각할 적에 백성이 이용후생(利用厚生)을 원한다면 이를 막을 수는 없다. 다만 이른바 예의염치(禮義廉恥)라는 것이 네 백성에게 통행되는데 그 가르침이 되는 까닭이 선비에게 책임이 있으며 농부ㆍ장사치ㆍ기술자 세 백성은 모두 선비에게 가르침을 받을 따름이다. 삼대의 성대한 시절에는 전토를 나누어 봉록을 제정하여 선비는 상ㆍ중ㆍ하의 봉록이 있었고 농부ㆍ장사치ㆍ기술자 세 백성도 전토를 받지 않음이 없어서 굶주려 떠도는 환난은 없었다. 그래서 밭두둑을 양보하는 풍속이 일어나고 길 위에 이고 진 늙은이가 없게 되어 사람들이 날마다 착한 일을 하며 남을 속이는 일이 사라졌다. 진(秦) 나라의 천맥법(阡陌法) 이후 토지 겸병과 세금 강제가 일어나 위에서는 농사를 돕는 정사가 없고 백성은 전토를 받는 은택이 없었다. 선비는 얻으려고 안달하고 잃을까 걱정하며 농부는 한 해가 다 가도록 힘써 움직여도 처자를 먹여 살리지 못하며 기술자와 장사치도 속여 만들거나 폭리를 취하지 않으면 자기를 구원하기도 힘든데 어느 겨를에 예의를 차릴까? 예의가 없으니 허위가 날로 생기는데 허위의 지극함은 선비가 심하고 기술자와 장사치가 다음이고, 농부는 허물이 없다. 나는 그래서 농부가 네 백성 중에서 가장 좋다고 생각한다. 형벌과 명예는 국정의 대도(大盜)이니 형법으로 사람을 제어함이 안 될 것은 아니지만 이것을 준칙으로 삼으면 운 사납게 걸려드는 사람이 더욱 많아진다. 명예로 사람을 뽑는 것이 안 될 것은 아니지만 항상 이렇게 하면 총애를 구함이 더욱 심해진다. 상앙(商鞅)과 한비(韓非)가 이 법을 써서 나라가 위태롭고 자신은 멸망했으니 재앙을 예측할 수 없다. 곁가지가 만연하여 근일에 이르러서는 나라를 팔고 임금에게 반역한 자가 선비의 무리에서 나왔고 농부ㆍ기술자ㆍ장사치 세 백성은 물이 동쪽을 터놓으면 동쪽으로 가고 서쪽을 터놓으면 서쪽으로 가는 것과 같을 뿐이다. 동방의 풍속이 고루해서 수재(秀才)나 학구(學究) 축에 들어 글줄 찾고 글자 세는 사람을 통틀어 선비라 부르는데 중화를 잊고 오랑캐에 붙으며 옛것을 버리고 새것에 나아가며 명예를 취할 일이라면 못 하는 일이 없다. 직분으로 지키는 일을 살펴본다면 거의 없다. 기술자와 상인은 새 물건에 생각이 막혀 옛것을 싸게 새것을 비싸게 여기고 사람을 기쁘게 해서 이익을 취하는 데 힘쓴다. 직분으로 따르는 일을 살펴본다면 잘잘못이 반반이다. 농부는 땅의 소출을 다해도 양세(兩稅) 납부를 독촉받고 고달프게 자기 힘을 다해도 먹을 것이 자주 떨어짐을 근심한다. 분뇨를 싫어하지만 남아도는 데가 있기를 바라고 한 가지 생각도 다른 데 미치지 않는다. 직분으로 지키는 일을 살펴본다면 확고해서 깨뜨릴 수 없다. 나는 그래서 네 백성 중에서 가장 좋은 것이 농부라고 생각한다. 아아! 옛날 선비ㆍ농부ㆍ기술자ㆍ장사치를 나눌 적에 모두 그 지위의 순서를 말한 것이니 선비가 으뜸이고 농부가 다음이고 기술자와 장사치가 다시 그다음이었다. 요새 사람은 말하기를 장사치ㆍ기술자ㆍ농부ㆍ선비이니 병사는 이와 관계없다고 한다. 장사치는 지혜가 발달해 운송 활동으로 돈주머니에 수만금이 있고 수레와 배에 좋이 억만금이 있으니 으뜸이라 이르겠다. 기술자는 손에서 나오는 것이 무궁한 밑천이니 그다음에 해당한다. 농부는 힘껏 일하고도 곤궁하고 수척하니 다시 그다음이다. 선비는 오늘 벼슬에서 쫓겨나면 내일 굶주림을 호소하니 다시 그다음이다. 아울러 창자도 남에게 내주니 심히 애통하다. 농부는 그렇지 않다. 쟁기와 가래가 이 땅에서 주조한 것이 아니면 쓰지 않는다. 사립(簑笠)과 한의(汗衣)가 이 땅에서 길쌈한 것이 아니면 입지 않는다. 와준(瓦樽)으로 물을 마시고 역상(曆象)으로 씨앗을 뿌린다. 지켜야 할 직분으로 말하면 셋과 비교해 어떠한가? 아, 선비를 배우고자 하나 선비는 진짜가 없으니 배울 수 없다. 기술자와 장사치를 배우고자 하나 기능이 미치지 못하니 배울 수 없다. 『시경(詩經)』에 이르기를 농사로 나라를 열었다고 하였고,1) 『한서(漢書)』에 이르기를 농사는 큰 근본이라고 하였다.2) 나는 누구에게 돌아갈까? 농부에게 돌아가리라! [원문] 天之生斯民也, 必有其職分, 不守職分之所當爲者, 乃閒散無賴, 軀命難保耳. 夫士農工商四者, 天職之不可廢者, 日用之不可無者. 士尙志, 以道衛世, 農食力, 供養民國, 工殫巧, 作成器械, 商取息, 懋遷有無. 四者廢其一, 國計民用, 常患病蹙, 是以天授其職, 民思其居, 利用厚生, 莫之防遏, 而但所謂禮義廉恥者, 爲四民之通行, 其所以爲敎, 其責在士, 農商工三民皆受敎於士者耳. 三代盛時, 分田以制祿, 士有上中下之祿. 農商工三民亦亦莫不受田, 無有飢饑轉輾之患. 故田疇有讓畔之風, 負戴者有頒白之尊, 人日遷善, 欺誣屛息. 自嬴秦阡陌以後, 兼幷起而强制作, 上無助耕之政, 民無受田之澤, 爲士者患得而患失, 爲農者終歲勤動而不得養其妻子, 工商者若無欺詐之鑄, 倍蓰之息, 則口體不能救, 奚暇治禮義哉? 無禮無義, 虛僞日生, 虛僞之至, 士爲甚, 工商次之, 農民無辜. 余故曰農者四民之最良者也. 夫刑名者, 國政之大盜也. 刑法制人, 非曰不可, 而以此爲準, 則橫罹滋多. 名譽取人, 非曰不可, 而以此爲常, 則沽寵尤甚, 衛鞅韓非, 用此道, 而危國滅身, 禍不可測. 支流蔓延, 拖至近日, 則賣國叛君, 出於士類, 農商工三民, 猶水之決東則東, 決西則西耳. 東俗固陋, 凡在秀才學究, 尋行數墨, 總謂之士, 忘華附夷, 棄舊就新, 沽名取譽, 無所不到, 苟觀其職分所守, 絶無而僅有. 工商則爲新物所沮, 賤舊貴新, 務在悅人取息, 苟觀其職分所由, 守與失相半. 農民則殫其地之所出, 征兩稅之督, 竭其力之矻矻, 猶患入口之屢空, 憎其糞而希剩, 罔一念之及他, 苟觀職分所守, 可謂牢不可破. 余故曰四民之最良者農云耳. 嗚呼! 昔之分士農工商, 皆言其地位次序, 士爲首, 農次之, 工商又次之, 今人之言曰商工農士, 兵不與焉. 夫商智慮發達, 運輸活動, 囊橐可以鉅萬, 車船足以億百, 可謂首. 工出於手而資無窮, 當次之, 農力服而困瘦又次之, 士今日罷官, 明日呼餒又次之. 嗚呼! 沽譽爭寵之士, 居於四民之末, 庶幾近於爲法自獘之說, 殊不知異日所到, 又當何如耶? 夫工商地賤, 固不足道, 而士之爲士, 雖未兼濟天下, 亦可獨善其身, 自輕而身辱, 復誰怨尤? 且今士工商三家, 皆食我人之農, 而用異人之器械, 衣異人之布帛, 是內竭吾人之粟, 而外資隣國之工商也. 工焉而自獘其工, 商焉而自病其商, 其爲不仁, 莫此爲甚, 而所謂士者, 非徒器械布帛, 幷以其膓肚而與人, 甚可哀痛. 惟農不然, 耒耟田器, 非土鑄則不用, 縗笠汗衣, 非土織則不着, 瓦尊而坏飮, 曆象而播種, 言其所守之職分, 比諸三家, 奚若耶? 噫! 欲學士, 士無眞, 不可學, 欲學工商, 技能不及, 不可學, 周詩曰, 以農開國, 漢書曰, 農爲大本, 吾誰歸? 歸農乎! [출처] 공학원(孔學源), 『도봉유집(道峰遺集)』 권8 「사민론(四民論)」 [해설] 『서북학회월보』 1908년 9월호에는 일본인 다카하시 히데오미(高橋秀臣, 1864∼1935)가 한국의 농상공부와 통감부의 조사에 의거하여 「한국의 부(富)」라는 소책자를 엮었다는 기사가 있다. 이에 따르면 한국의 부는 토지, 건물 등 14개 분야 총계 25억 환(圜) 이상으로 일본의 부 125억 환, 미국의 부 1886억 환에 비해 현격히 적은 수치이다. 이대로라면 일본은 한국의 5배, 미국은 한국의 75배가 된다. 한국은 무엇이 문제일까? 넉 달 전 『서우』에는 이 문제를 진단하는 글 「실업론」이 실렸다. 국가의 부는 실업의 증진에 달려 있는데, 한국은 전통적인 사ㆍ농ㆍ공ㆍ상 체제에서 학문을 담당하는 사와 실업을 담당하는 농ㆍ상ㆍ공이 서로 격절돼서 실업이 있는 자는 학문이 없고 학문이 있는 자는 실지가 없었으니 이제부터는 실업 교육, 곧 농상공업 교육에 힘쓰자는 주장이다. 농ㆍ상ㆍ공을 사, 그것도 실학을 하는 사로 만들겠다는 혁명적인 선언이다. 농ㆍ상ㆍ공은 새 시대의 아이콘이었다. 농업 하면 미국, 상업 하면 영국, 공업 하면 스위스가 연상되었다. 한국 정부는 ‘농상공’부를 설립해 놓았다. 윤효정(尹孝定, 1858∼1939)은 국가 경쟁을 위해 ‘사ㆍ농ㆍ공ㆍ상’의 직분 대신 ‘농ㆍ상ㆍ공ㆍ사’의 사업을 말했다. 장지연(張志淵, 1864~1921)은 사와 농ㆍ상ㆍ공이 일치하게 된 시운의 변화를 인정하고 도덕과 실업의 합일을 주장했다. 실업론의 확산에 따라 사ㆍ농ㆍ공ㆍ상 중에서 사는 허학(虛學)을 했고 농ㆍ공ㆍ상은 실학(實學)을 한다는 생각이 성장했다. 농ㆍ상ㆍ공은 민생에 유익한 활동을 하는 반면에 사는 곡식이나 축내고 있으니 어디에 쓰겠느냐는 빈축이었다. 실용적인 지식을 생산하지 못하는 사의 허학을 가리킨 것이다. 그러나 서찬규(徐贊奎, 1825∼1905)의 생각은 달랐다. 사의 직분은 도덕을 밝힘에 있다. 도덕이 없으면 가정도 무너지고 국가도 무너진다. 농ㆍ공ㆍ상이 업(業)으로 양민(養民)을 하는 사회적인 존재라면 사는 덕(德)으로 제민(濟民)을 하는 정치적인 주체로 사와 농ㆍ공ㆍ상은 ‘상수(相須)’의 관계에 있다. 이근원(李根元, 1840∼1918)도 사의 본질을 치국평천하를 이룩하는 도덕으로 보고 사의 직분과 농ㆍ공ㆍ상의 직분을 형이상(形而上)과 형이하(形而下)의 차이로 보았다. 만약 사가 이렇게 귀한 직분을 다하지 않는다면 이는 정말로 남의 밥을 훔쳐 먹는 셈이니 자기 직분을 다하는 농ㆍ공ㆍ상에 훨씬 못 미치는 못난이가 된다고 하였다. 김평묵(金平黙, 1819∼1891)은 사의 직분과 농공상의 직분을 도심(道心)과 인심(人心)의 차이로 보았고, 자기 직분을 저버린 사ㆍ농ㆍ공ㆍ상을 간민(奸民)이라 불렀는데, 간민 중에서 특히 사의 일탈을 가장 심각하게 여겼다. 윤기(尹愭, 1741∼1826)에 따르면 조선 사회에서 사와 농ㆍ공ㆍ상의 위계가 자별한 것은 사를 양반(兩班)이라 이르고 농ㆍ공ㆍ상을 상인(常人)이라 이르기 때문인데, 이제는 양반이 몰락하고 타락하여 곳곳에서 사의 품행과 사의 직분이 없는 파락호와 토호가 양반을 행세하고 있음을 고발했다. 장성 유학자 공학원(孔學源, 1869∼1939)이 「사민론」을 지었을 때 세상은 그렇게 변해 있었다. 양반은 넘쳐나도 선비는 드물었다. 또 사ㆍ농ㆍ공ㆍ상의 시대가 저물고 농ㆍ상ㆍ공의 새 시대가 도래했다. 결정적인 것은 유교 국가 조선의 멸망이었다. 그것은 직분을 다하지 않은 사의 책임을 묻는 사건이었다. 동시에 사의 직분을 실현할 더 이상의 세상이 없음을 의미하는 사건이었다. 이제 사ㆍ농ㆍ공ㆍ상은 가고 상ㆍ공ㆍ농ㆍ사가 왔다. 상(商)은 막대한 부를 소유하니 으뜸이고 공(工)은 부를 창출할 기술이 있으니 그다음이고 농(農)은 힘써 일해도 곤궁하니 그다음이고 사(士)는 ‘창자도 남에게 내주니 심히 애통하다.’ 그러나 공학원은 직분을 지키는 윤리에서는 상ㆍ공ㆍ농ㆍ사와 다른 농ㆍ상ㆍ공ㆍ사를 생각했다. 농은 직분 윤리에서 최상이고 상과 공은 중간이며 사는 최악이다. 아무리 곤궁해도 직분을 저버리지 않는 농(農)에서 그는 사(士)의 참다운 이상형을 투시한다. 농부는 선비의 미래이다. 농부야말로 이 땅에 사는 참다운 사람이다. 이 땅에서 만든 것이 아니면 쓰지 않는 농부. 이 땅에서 길쌈한 것이 아니면 입지 않는 농부. 『시경』은 농으로 나라를 열었다고 했지. 『한서』는 농이 큰 근본이라 했지. 공학원은 절망과 희망의 교차점에서 다짐한다. 나, ‘농으로 돌아가리라 歸農乎!’ ‘귀농(歸農)’의 부르짖음. 실은 공학원에 앞서 조선후기에도 근세 사대부의 타락을 비통해하며 세속을 끊고 ‘귀농’을 결의하는 장면들이 있었다. 그러나 사ㆍ농ㆍ공ㆍ상을 논하며 귀농을 결심한 인물은 공학원이 처음이 아니었을까? 1) 『시경(詩經)』에 ~ 하였고 : 『詩ㆍ大雅ㆍ生民』, 『詩ㆍ周頌ㆍ思文』, 『詩ㆍ魯頌ㆍ閟宮』에서 주나라 시조 后稷이 농사를 지어 나라의 터전을 세웠음을 말했다. 2) 『한서(漢書)』에 ~ 하였다 : 『漢書』 「文帝紀」에 “농사는 천하의 큰 근본으로 백성이 의지해서 살아간다”(農, 天下之大本也, 民所恃以生也.)라는 구절이 있다. [참고문헌] 尹愭, 『無名子集』 책13 「峽裏閒話」 俞漢雋, 『自著』 권16 「送金嘉會大歸洪州序」 金平黙, 『重菴集』 권40 「四民說」 徐贊奎, 『臨齋集』 권11 「雜記」 李根元, 『錦溪集』 권16 「士農工賈說」 黃玹, 『梅泉集』 권5 「絶命詩」 『朝陽報』1, 「道德과 實業의 關係」, 1906.6. 『大韓自强會月報』11, 「生存의 競爭」 1907.5. 『西友』17, 「實業論」 1908.5. 『西北學會月報』4, 「我國의 富」, 1908.9. 글쓴이 노관범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부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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