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비, 길을 열다] 고운을 향한 기억, 임은 어디에? 게시기간 : 2019-10-15 07:00부터 2030-03-01 03:03까지 등록일 : 2019-10-14 15:12
재단법인 한국학호남진흥원
선비, 길을 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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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치원은 우리 강역과 고유 문명, 국풍(國風)을 소중하게 생각하며, 삼교가 어울리는 사상문화의 활력을 믿고 싶었고 또한 실제 믿었다. 이러한 생각 신념은 나라가 망할 징후가 뚜렷할 때도 변함이 없었다. 가야산에 숨어들고 4년 되던 890년(효공) 12월, 해인사 ‘선안주원(善安住院)’ 벽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1) “「왕제(王制)」에 ‘동방은 이(夷)’라 하였는데, 범엽(范曄)은 ‘이(夷)란 뿌리[柢]가 되는데, 이것은 어질고 살리기를 좋아하여 만물이 땅을 밀치고 나온다는 뜻이다. 따라서 동이는 천성이 유순하여 마땅한 도리로 다스리기가 수월하다’라고 풀이하였다. 나는 이(夷)를 평이(平易)와 같다고 풀이한다. 왜냐면 가르쳐서 인도하면 제대로 교화되기 때문이다. 『이아(爾雅)』를 살펴보아도, ‘동쪽으로 해가 뜨는 곳이 대평(大平)’이라 하고, ‘대평 사람은 어질다’라고 하였다.” 『예기』의 「왕제」와 범엽이 지은 『후한서』 「동이열전」, 가장 오래된 글자 풀이 ‘자서(字書)’ 인 『이아』를 인용하며 우리 동방을 빛과 생명의 나라, 교화가 수월한 어진 사람의 영역으로 높인 것이다. 그리고 살만한 땅을 향한 가치, 덕목을 제시하였다.2) “하늘이 귀하게 여기는 것은 사람이요, 사람이 으뜸으로 여기는 것은 도(道)다. 사람이 도를 크게 할 수 있는 만큼, 도는 사람과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그렇다면 도가 혹 존귀해진다면, 사람도 자연히 존귀해지게 마련이니, 도를 제대로 조장하려면 오로지 사람의 덕을 높여야 하지 않겠는가?” 공자와 노자를 종횡무진 구사하며 사람이 도의 주인이며, 도를 실천하였을 때 하늘 아래 소중한 사람이 된다는 점을 설파한 것이다.3) 그러나 한숨은 무거웠다. 오늘날 대구지방 수창군(壽昌郡)의 태수가 남쪽 요새에 팔각기둥 누각을 올릴 때 멀리서 기문을 적어 보냈던 908년(효공 12) 52세 이후 자취를 남기지 않았다.4) 그런데 언제 당성(唐城)에 갔을까? 서산 태수였을 땐지, 혹여 하정사(賀正使)로 부름을 받고 중국으로 가는 배를 기다리고 있을 때인지 아니면 말년 유랑할 할 때인지, 모르겠다. 그곳에 노닐다가 선왕(先王)의 악관(樂官)을 만나 건넨 시가 『동문선』에 실려 있는데, 시제가 「당성에 나그네로 놀러 갔더니 선왕의 악관이 있었는데, 장차 서쪽으로 돌아가려 하면서 밤에 두어 곡을 불며, 선왕의 은혜가 그리워 슬피 울기에 시를 지어 주다 旅遊唐城 有先王樂官 將西歸 夜吹數曲 戀恩悲泣 以詩贈之」와 같았다.5) 사람 일이란 성쇠의 이치가 있지만 덧없는 생애 정녕 서글프네. 천상의 곡조를 해변에서 불어줄 줄을 누가 알았으리. 수궁에서 꽃구경하고 처마에서 바람 쐬며 달을 마주했어라. 이미 선왕을 다시 뵐 수 없으니 그대와 더불어 두 줄기 눈물이 주룩주룩. 시제 중의 서쪽으로 돌아감은 배를 타고 중국으로 건너감이다. 당성은 아산만과 남양만을 아우르는 요충으로 당나라로 가는 들머리였다. 오늘날 최치원의 제사를 모시는 홍성군 장곡면 보금산 쌍계 계곡에서 충청우도 내포의 물길을 모아 북으로 흐르는 삽교천을 타면 쉽게 갈 수 있으며 문헌에 최치원의 묘소가 있다는 부여 홍산(鴻山)에서도 멀지 않다.6) 신라 경순왕이 고려의 신하가 된 이후, 최치원이 태조 왕건에게 ‘계림은 누런 잎사귀 鷄林黃葉, 곡령은 푸른 소나무 鵠嶺靑松’라는 구절의 글을 올렸다는 소문이 돌았다. 계림은 경주, 곡령은 송악이다. 실로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 훗날 경주 사람들은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고려 성종이 경주를 순행하던 때, 어느 노인이 당시 재상에게 다음과 같은 시를 올렸는데 ‘계림황엽(鷄林黃葉)’을 인용하였다.7) 구천의 빛 움직이고 별들이 구르니, 해와 용 그림 임금님 깃발이 바다를 따라 도는구나. 계림의 누런 잎사귀는 이미 떨어졌는데, 안개꽃이 임금 계신 동산에 다시 봄이 왔음을 알리네. 신라의 세월이 가고 고려가 열렸음을 찬양한 것이다. 이때가 997년, 그리고 23년 후인 현종 11년(1020) 고려국은 최치원을 내사령(內史令)―조선의 영의정과 같다―에 추증하고 문선왕묘(文宣王廟) 즉 문묘에 배향하였다. 우리 선현으로는 첫 문묘 배향이었다. 참고로 한자 경전을 우리말[方言]로 풀고 가르친 설총은 그보다 2년 후였다. 과거제가 시행되며 유교정치의 여명이 열리던 때였다. 고려에서 최치원은 무척 존중되었다. 특히 ‘파천황(破天荒)의 큰 공으로 동방학자들의 종사(宗師)’가 되었다고 평가하였던 이규보(李奎報, 1168∼1241)는 중국에서 최치원의 여러 저술을 『당서』 「예문지(藝文志)」에 실어놓고도 「문예열전」에 올리지 않았던 점이 못내 아쉬워 다음과 같이 적었다.8) “내가 가만히 혼자 생각해 볼 때, 옛날 사람들은 문장에 있어서 서로 샘을 부렸는데, 하물며 최치원은 외국의 외로운 서생으로 중국에 들어가서 당시의 명인들을 짓밟았으니, 중국 사람들이 꺼리는 바가 있었을 것이다. 만약 전기에 그 사적을 바로 쓴다면, 그들의 시기심에 저촉될까 염려하였기 때문에 생략하였던 것일까? 나는 좀처럼 이해하지 못하겠다.” 그러나 주자학이 국가 학술로 자리 잡던 조선에서는 달랐다. 고려가 문묘에 배향한 ‘설총(薛聰)ㆍ최치원(崔致遠)ㆍ안향(安珦)은 사도(斯道: 유교)와 관계가 없으니 다른 곳에서 제사를 지내는 것이 마땅하며 문묘에 배향하는 것은 잘못’이라는 견해가 나왔던 것이다.9) 심지어 ‘주돈이(周敦頤)ㆍ정호(程顥)ㆍ장재(張載)ㆍ소옹(邵雍) 및 주자(朱子)가 최치원 등과 함께 나란히 양무(兩廡)에 모셔져 있는 것 자체가 매우 옳지 않다’ 하였다.10) 이런 점은 성호 이익도 마찬가지였다. 즉 ‘(최치원은) 노자와 부처를 공자와 나란히 높였으니 이단으로써 유교를 해치는 우두머리’라면서, 고려의 흥기를 예언한 ‘계림황엽, 곡령청송’이야말로 신하의 도리를 저버린 패역(悖逆)이라고 규탄하고 다음과 같은 풍자시를 남겼다.11) 광명(廣明)에 난적 토벌 격문을 지은 것 잘한 일이지만, 글을 지어 부처에게 아첨했으니 허물이 적잖네. 암탉 울어 임금이 혼미할 때에 밝게 기미를 살폈으되, 신하 된 자로 어찌 밖과 교통하였다니 무엇을 바랐을까? 오래된 신하라면 계림의 누런 잎사귀에 곡을 해야 건만, 도리어 송악의 왕업을 걱정하였구려. 몰래 흥륭(興隆)을 도왔다는 말은 아주 잘못이니, 문묘에서 제사를 받는 것이 부끄러울레라. 상서장(上書莊) 앞에서 크게 손뼉 치나니, 이제 문순(文純)의 정론이 아득하기만. 첫 행 ‘광명’은 황소가 일어난 때의 연호, 3행 암탉은 진성여왕, 7행 ‘상서장’은 경주 금오산 아래 최치원이 살던 집, 8행 ‘문순’은 퇴계가 받은 시호다. 퇴계 또한 최치원이 불교에 빠진 것을 마음 아파하였었다. 최치원을 주벽으로 모신 태산사가 ‘무성(武城)’이란 사액을 받을 때조차 최치원은 ‘논할 만한 학문은 없다’고 폄하되었다.12) 시절이 그러하였다. 이때 고을 사람들 심정은 어떠하였을까? 공자가 제자 자유(子游)가 벼슬하던 무성 고을을 찾았다가 거문고 노랫소리를 듣고 빙그레 웃으며 ‘닭 잡는데 어찌 소 잡는 칼을 쓰느냐?’라고 하였다는 일화를 생각하며 거뜬하였을까?13) 무성서원은 최치원이 태수를 지냈던 태인에 있고 그 모태인 태산사는 일찍이 향약을 실시하고 후학을 양성하였던 정극인(丁克仁, 1401∼1481)의 사숙 즉 불우헌(不憂軒) 옆에 있었다. 다음은 정극인의 고운을 향한 회고다.14) 숲 사이로 갓과 신을 벗어 놓고 아득히 떠났으니, 누가 알랴 신선선비가 본디 죽지 않았음을. 읊은 시는 옛적이나 물은 흘러 산을 감싸리니, 바람과 구름이 아직껏 독서당을 보살피겠지. 시를 훗날 정극인의 문집을 교정, 간행한 황윤석(黃胤錫, 1729∼1791) 등은 ‘합천 가야산 해인사에 노릴 때 작품’이라고 하는데, 정극인이 실제 영남을 여행한 적은 없었다. 이 시의 원운(原韻)은 우리에게 친숙한 「가야산 독서당에서 짓다 題伽倻山讀書堂」이다.15) 미친 듯 바위에 부딪히며 겹겹 산중을 울리나니, 사람 말씨는 지척 간에도 알아듣기 어려워라. 세상 시비 다툼이 귀에 닿을까 두려워, 일부러 물을 흐르게 하여 온통 산을 감싸게 하는구나. 1) 『고운집』 권1, 「新羅迦耶山海印寺善安住院壁記」. “「王制」 ‘東方曰夷’, 范曄云: ‘夷者抵也, 言仁也而好生, 萬物抵地而出. 故天性柔順, 易以道御.’ 愚也謂夷訓齊平易, 言敎濟化之方. 按『爾雅』云 ‘東至日所出爲大平’, ‘大平之人, 仁’.”
2) 『고운집』 권1, 「善安住院壁記」 “天所貴者人, 人所宗者道. 人能弘道, 道不遠人. 故道或尊焉, 人自貴矣, 能助道者, 惟崇德歟?” 3) 『논어』 「衛靈公」 “人能弘道 非道弘人”; 『중용』 “道不遠人 人之爲道而遠人 不可以爲道”; 『도덕경』 51장 “道之尊 德之貴 夫莫之命 而常自然” 4) 『고운집』 권1, 「新羅壽昌郡護國城八角燈樓記」 5) 『고운집』 권1, 「나그네로 당성에 노닐면서 선왕의 악관에게 주다 旅遊唐城贈先王樂官」 “人事盛還衰 浮生實可悲 誰知天上曲 來向海邊吹 水殿看花處 風欞對月時 攀髯今已矣 與爾淚雙垂” 6) 1833년 전라감사 시절 『계원필경집』을 교정하고 간행한 서유구(徐有榘, 1764∼1845)는 최치원의 묘가 ‘호서 홍산(鴻山)’에 있다고 하고, 조선 말기 박물학자 이규경(李圭景, 1788∼1856)은 보다 자세하게 “묘소가 홍산현 극락사(極樂寺) 뒤에 있는데 비석의 제액(題額)은 공의 자필이며 최흥효(崔興孝)가 음기(陰記)를 썼다”고 밝혔다. 최흥효(1370∼1452)은 선초 관료ㆍ서예가이며 극락사는 홍산 지금의 부여군 외산면의 무량사일 듯싶은데 분명하지 않다. 참고로 무량사에는 매월당 김시습 부도가 있다. 7) 『동문선』 제19권 「어가가 동경에 왔을 때 내상 왕융에게 드린다 駕幸東京獻王內相融」 “九天光動轉星辰 日旆龍旗竝海巡 黃葉鷄林曾索寞 煙花今復上園春.” 이 시는 고려 후기 문단을 이끌었던 최자(崔滋, 1188∼1260)의 『보한집(補閑集)』에 있다. 왕융(王融)은 과거제를 도입하였던 광종 대부터 성종 대까지 12번이나 지공거(知貢擧)가 되어 많은 인재를 뽑았던 재상으로 신라를 고려에 바치고도 사십여 년을 더 살았던 경순왕 김부(金傅, ?∼979)를 상보(尙父)로 높였던 장본인이었다. 8) 『동국이상국집』 권22 「당서에 최치원 열전을 두지 않음에 대한 논의 唐書不立崔致遠列傳議」 9) 이이, 『석담일기』 상, ‘만력 원년 계유 1573년(선조 6) 8월’ 10) 송시열, 『송자대전』 제17권 「문묘종사에 대해 논하는 소 論文廟從祀疏」(辛酉十二月六日); 『숙종실록』 12권, 7년(1681) 12월 14일. 11) 이익, 『성호사설』 제18권 「최문창 崔文昌」 및 『성호전집』 제7권, 「상서장 上書莊」 “廣明討亂檄宜草 作書佞佛多愆尤 牝晨昏德見幾明 爲臣外交果何求 雞林黃葉舊臣哭 鵠嶺王業還堪憂 隆興密贊語大謬 兩廡血食渠應羞 上書莊前一拍手 文純定論今悠悠” 12) 『숙종실록』 권30, 22년(1696) 1월 1일. 13) 『논어』 ‘陽貨’ “子之武城, 聞弦歌之聲. 夫子莞爾而笑 曰割鷄 焉用牛刀?” 14) 『불우헌집』 권1, 「고운이 그리워 憶孤雲」 “林間冠屨去茫茫 誰識儒仙本不亡 流水籠山吟已遠 風雲猶護讀書堂” 15) 『고운집』 권1, “狂奔疊石吼重巒 人語難分咫尺間 常恐是非聲到耳 故敎流水盡籠山” 글쓴이 이종범 (재)한국학호남진흥원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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