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문서와 옛편지] 정조의 비답(批答) 정치 게시기간 : 2019-10-17 07:00부터 2030-03-01 03:03까지 등록일 : 2019-10-15 15: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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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와 옛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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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에 중국 근세사의 대가인 교또 대학의 미야자키 이치사다(宮崎市定) 교수는 『옹정제(雍正帝)』라는 조그만 문고판 책에서 강희제(康熙帝)와 건륭제(乾隆帝) 사이에 끼어서 별로 주목받지 못한 옹정제에 주목하였다. 35명의 황자(皇子) 사이에서 경쟁을 뚫고 황제에 즉위한 옹정제는 철저히 형제들을 숙청하고 감시하면서 황제 독재체제를 확립하였다. 그것은 주접제도(奏摺制度)를 완성해서 각 지역의 중신(重臣)들이 황제에게 직보하는 체제를 확립함으로써 전국을 일원적인 통치할 수 있었던 데에서 가능하였다. 광대한 중국을 통일하고 이를 완성한 것은 옹정제의 부왕(父王)인 강희제(康熙帝)였는데, 이러한 통일 제국을 일사불란하게 통치할 수 있었던 것은 각 지역의 총독(總督)이나 순무(巡撫)가 황제에게 비밀리에 직보할 수 있는 주접제도가 있었고 황제는 직접 그 상주문에 붉은 글씨 친필로 비답을 하였다. 이를 주비(硃批)라고 하고 이러한 문서를 주비주접(硃批奏摺)이라고 하였다.
위 주접 문서는 호광총독(湖廣總督) 양종인(楊宗仁)의 ‘안부를 묻는 문서 請安摺’에 대한 옹정제의 주비이다. 이 문서는 안부를 묻는 간단한 문서인데도 ‘칭노(稱奴)’하는 것은 체식(體式)에 맞지 않으니 ‘칭신(稱臣)’으로 하라고 교정을 하였을 뿐만 아니라 장황한 업무를 지시하였다. 만주족이 중원을 지배한 이후 강희제가 어느 정도 안정을 시키고 건륭제(乾隆帝)는 현재의 중국 판도 전역을 지배하는 전성기를 이룬 것으로 기억이 되는 데 비하여 중간에 낀 옹정제는 거의 존재감이 없다. 그런데 미야자끼 교수는 일본에 유입되어 소장되어있는 옹정제의 주비주접을 분석하여 옹정제 통치기의 의미를 정리하고 나아가 옹정제가 부왕인 강희제나 아들인 건륭제처럼 여름에는 피서산장(避暑山莊)이 있는 열하(熱河)에도 가지 않고 지방을 순무하지도 않고 오로지 궁중에 틀어박혀 황제의 업무에만 충실하였다. 옹정제는 불철주야 각지에서 올라온 주접을 일일이 읽으면서 그에 답변하는 주비를 쓰느라 밤을 새워 일하였다고 한다. 옹정제가 즉위 13년 만에 갑자기 세상 떠난 원인에 대하여 황제가 직무를 너무 열심히 하다가 과로사하였다는 이른바 ‘황제과로사(皇帝過勞死)’ 설이 나오게 된 배경이다. 신하들의 상주문에 대하여 황제와 국왕이 답변하는 형식은 달랐지만, 조선국의 왕들도 신하의 상언에 대하여 꼼꼼한 비답(批答)과 판부(判付)를 내린 것이 많았다. 특히 정조(正祖)는 신하들의 모든 상언을 상세히 읽고 일일이 이에 대하여 답변을 하였다. 역대 왕들 가운데 가장 호학(好學)의 군주로 말해지는 정조는 총 184권에 달하는 방대한 저술 『홍재전서(弘齋全書)』를 남겼다. 여기에는 정조가 내린 윤음(綸音), 교서(敎書), 돈유(敦諭), 유서(諭書), 봉서(封書) 등 신민(臣民)이나 산림(山林), 관료, 암행어사에게 지시한 문서가 있는가 하면 신하들이 올린 상소나 차자에 답변하는 비답(批答), 각 관서에서 올라온 문서에 결재하는 판부(判付)까지 수록되어 있다. 필자는 그중 신하들이 올린 상소, 차자에 답변하는 비답에 주목하였다. 정조의 문집인 『홍재전서』에 수록된 비답의 건수는 총 204건으로, 아래 표와 같이 치세 전반기에는 19건, 17건, 18건이었다가 마지막 10년 동안 각각 68건, 82건으로 격증한다.
정조 말년에 승정원 주서(注書)를 지낸 풍산 류씨 류이좌(柳台佐)의 후손가에는 「전교축(傳敎軸)」들이 남아있다(국왕의 모든 언동을 다 기록할 책임이 있는 승정원 주서는 승정원을 통하여 출납하는 모든 상소나 차자, 계본, 계목, 초기, 단자 등을 수합하여 『승정원일기』 편찬의 임무를 맡는다. 따라서 이러한 자료들을 합철한 자료의 명칭은 ‘승정원 출납 문서축’이 정확할 것이겠지만 그동안 ‘전교축’으로 불렸기에 그에 따른다). 이러한 「전교축」에는 하루에도 수십 건의 상소와 차자, 초기 등의 형태로 보고되고 이에 대해서 국왕 정조는 일일이 답변을 하였다. 상소나 차자에 국왕이 직접 답변을 하는 것이 비답이다. 정조는 윤음이나 교서와 같은 형식의 문서에 대해서는 어제서(御製書) 작성의 임무를 맡은 지제교(知製敎) 등에게 대신 작성하도록 하였겠지만, 정치적 함의가 짙은 상소나 차자에 대해서는 직접 비답을 작성하였다. 정조는 여러 차례에 걸쳐서 각 지역의 유생들에게 농서(農書)나 시무책(時務策)을 올리라고 한 후, 그에 대해서 하나하나 답변하였다. 그러한 비답 중에 아직까지 남아있는 것이 많다. 그중에 대표적인 것이 정조의 구언(求言)에 응하여 올린 우하영(禹夏永, 1741∼1812)의 ‘시무책 13조’에 대한 비답이다. 폭이 60cm가 넘고 거의 7m에 이르는 장지에 쓴 정조의 비답은 각 조항 하나하나에 대한 진지한 답변이 실려있다.
여기에 소개하려고 하는 홍문관 교리 이동직(李東稷)의 상소에 대한 정조의 비답은 이동직이 문체를 빌미로 하여 반대 세력을 제거하려고 하는 것을 간파하고 상소를 올린 이동직을 훈계하여 꾸짖는 비답이다. 정조는 이동직의 상소가 겉으로는 문체를 말하지만 실제로는 당론을 세운 것이라 하여 엄격히 꾸짖는 비답을 내리면서 동시에 그 상소문은 불태워서 더는 다른 사람들이 보지 못하도록 명하였다. 당쟁으로 확대될 것을 우려하였기 때문이다. 지금 장서각에는 『정조실록』 『승정원일기』 『홍재전서』에도 실려있는 정조의 비답 원본이 소장되어있다. 세로 37cm, 길이 240cm에 이르고 1100여 자에 달하는 장문의 비답은 문체(文體)를 핑계로 정적을 제거하려 하는 노론 벽파의 심중을 꿰뚫어 보고 이를 견제하고 강하게 꾸짖는 정조의 생각을 잘 알 수 있다. 정조가 당쟁을 거론하였다고 하여 불태우도록 한 이동직의 원래 상소문은 『승정원일기』와 『홍재전서』에는 실려있지 않으나 『정조실록』에는 수록되어 있다. 정조의 지시대로 상소문은 불태워졌겠지만, 후대에 실록을 편찬할 때에 당시의 사관들이 집에 보관하고 있던 가장사초(家藏史草)를 제출받아 실록에 수록한 것으로 생각된다. 하긴 심환지에게 보낸 비밀 편지도 대부분 불태우도록 명하였지만 그대로 고스란히 남아있다. 다만 『실록』에 실린 비답에는 당시 당로자들이 언급되어있는 부분과 후반부가 생략되어 있다. 먼저 각 자료의 성격에 따라 비답의 제목부터 각각 다르다. 정조의 친필 비답에는 ‘옥당 이동직 상소 비답 玉堂李東稷上疏批答’이라고 제목을 달고, 보통의 비답 첫머리 투식(套式)인 ‘상소문을 잘 보았다 省疏具悉’로 시작하고 있다. 그러나 『승정원일기』에서는 이동직의 상소 원문은 없이 ‘부교리 이동직의 상소에 답하기를 答副校理李東稷疏曰’로 비답을 시작하고 있다. 『실록』에는 ‘부교리 이동직 상소에 副校理李東稷上疏曰’이라 적고 상소문을 싣고 있고, 그에 대한 비답은 ‘비답에 이르기를 批曰’라 적고 수록하였다. 그러나 『실록』에 실린 비답의 후반부 상당 부분과 그동안 문병(文柄)을 장악하고 있던 남공철(南公轍), 김조순(金祖淳), 이상황(李相璜), 심상규(沈象奎) 등 세가(世家)의 면면을 나열하여 그들도 이가환(李家煥)과 마찬가지로 문체가 순정하지 못하다고 비판한 부분 등을 생략하였다. 『홍재전서』는 ‘부교리 이동직이 이가환을 논핵한 상소문에 대한 비답 副校理李東稷論李家煥疏批’라고 하여 이동직이 이가환을 탄핵한 것이 주요 내용이라는 식의 타이틀을 뽑아서 제목을 달아놓고 있다. 『실록』에만 실려있는 이동직의 상소는 신기현(申驥顯)이 홍국영 등 역적을 옹호한 것을 비판하고 그 앞뒤에서 힘을 실어주고 있는 것이 이가환, 채제공이라고 하며 남인 시파를 적극적으로 비판하였다. 이가환을 대사성에 임명한 것을 계기로 이가환이 신기현과 채제공을 중간에서 연결해주는 역할을 하고 있으며 문체도 순정하지 못하다고 비판하였다. 이동직의 상소에 대해 정조는 오랫동안 끌어온 신기현 탄핵 문제만이 아니라 문체의 문제, 남인들을 육성하려는 문제에서 더 나아가 서얼들을 등용하려는 자신의 뜻을 명확히 밝혔다. 그리고 당론을 언급하는 이동직의 상소는 불에 태워서 더 이상 논란을 하지 말도록 명령하였다. 정조의 비답 가운데 『홍재전서』에 빠져있는 부분만을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내가 요즈음에 치세(治世)의 희음(希音)을 듣고 싶어서 먼저 한두 명의 젊은 문신들을 들어서 경고하였다. [남공철과 같은 집안은 대대로 사륜(絲綸)을 장악하고 있었고 김조순의 집안은 시(詩)와 예(禮)로 전해졌으며, 이상황과 심상규는 주연(胄筵)을 하였던 옛 신료의 자식들이다. 익숙한 것은 헌면(軒冕)한 작품이고 외어 익힌 것은 사명(詞命)의 문체이다. 위아래로 나아가 진실로 각각 그 재주에 따를 뿐이다] 만약 하나라도 송(宋)을 버리고 월(越)로 간다든가 중화를 써서 오랑캐 풍속으로 변화시킨다면 정도를 말미암지 않고 본말을 전도시키는 것이 되니, 문교(文敎)를 펴는 데에 해가 되고 그 선대의 사업을 욕되게 한 셈이다. 어찌 다만 뜻하지 않은 작은 과오이겠는가. 그들은 명문가의 자제로서 눈 깜짝할 사이에 응당 성균관 대사성과 홍문관, 예문관의 제학(提學)을 손쉽게 점유할 것이다. 과거를 주관할 때에는 선비들을 그르치고 글을 윤색할 때에는 왕언(王言)을 욕되게 하는 것이야말로 이른바 현악기로 저속한 노래를 연주하고 좋은 술을 질항아리에 담는 셈이다. 성균관과 관각(館閣)을 줄곧 이들이 무너뜨리는 대로 맡겨 두었다면 아주 멀리 내쫓더라도 어찌 족히 속죄할 수 있겠는가. 予於近日 欲聞治世之希音 首擧一二年少文臣而撕警之者 [南公轍之世掌絲綸 金祖淳之家傳詩禮 李相璜沈象奎之冑筵舊僚之子 濡染者軒冕之作 誦習者詞命之體也 俯就跂及 固各隨其才分] 萬有一捨宋而適越 用夏而變夷 捷徑窘步 貪鳥錯人 則其爲賊于敷文 僉厥先武 豈特无妄之小過 渠曺以崔盧赫閥 瞬焉之頃 當臥占國子大司成弘藝文館提學矣 貢擧而誤多士 潤色而辱王言 是所謂朱絃下里 黃流瓦缶 而黌庠館閣之上 一任此輩厮壞 則有北之投 何足以贖乎 * [ ] 부분이 『홍재전서』에 생략된 부분
얼마 전에 방대한 분량의 정조 간찰이 발견되어 학계에 소개된 바 있다. 정조는 어린 세손 시절에는 주로 외가인 풍산 홍씨가의 외할아버지, 외삼촌에게 쓴 편지들이 있고, 즉위 이후의 간찰은 벽파와 시파의 영수인 심환지(沈煥之, 1730∼1802), 채제공(蔡濟恭, 1720∼1799)에게 보낸 간찰이 많다. 최근 소개된 간찰은 정조가 벽파의 영수인 심환지에게 죽기 전 마지막 4년 동안 보낸 비밀편지 350여 통이다. 이 편지에는 노론, 소론, 남인 그리고 시파와 벽파의 정치적 갈등 속에서 이를 조제(調劑) 보합(保合)하려고 노심초사하는 정조의 모습이 350여 통의 밀찰(密札) 속에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4년 동안 350여 통이니 1년에 거의 100통 가까운 편지가 벽파의 영수에게 보내졌던 것이다. 어떤 날은 하루에도 3차례나 편지를 보낸 경우가 있다고 한다. 벽파의 영수인 심환지와 마찬가지로 시파, 남인의 영수인 채제공에게도 많은 비밀편지를 보낸 것으로 짐작이 된다. 만기(萬機)를 친람하고 만천명월(萬川明月)의 주인임을 자처하는 정조는 불같은 태양(太陽) 체질의 성격이었다. 비답이나 비밀 편지 등을 통하여 군신 간의 대립 갈등을 조정하느라 꼬박 밤을 새우는 경우도 비일비재하였다. 갑작스러운 정조의 죽음을 놓고 옹정제의 ‘황제과로사’를 떠올리는 것은 지나친 생각일까? 글쓴이 김현영(金炫榮) 한국고문서학회 명예회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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