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문서와 옛편지] 책력을 보내오니 산중 세월을 헤아리십시오 게시기간 : 2019-08-08 07:00부터 2030-08-08 14:00까지 등록일 : 2019-08-07 14:27
재단법인 한국학호남진흥원
고문서와 옛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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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치(小痴) 허련(許鍊, 1808∼1893)은 추사 김정희로부터 ‘압록강 동쪽 최고의 솜씨’로 인정받았던 호남 문인화의 비조(鼻祖)이다. 헌종의 부름을 받아 대내(大內)에서 그림을 그렸으니 소치의 예술적 경지에 대해서는 다시 평가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이러한 소치가 62세에 진도 쌍계사 첨성각 스님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 [溪寺 瞻星閣 回呈 癡客 謝函] 歲輪駸駸將窮 懷想悠悠難裁 承此禪椷遠寄 怳若拄白拂而話蓮華也 矧諗奉爐 淸供自在 慰瀉如倒甁 但羅闍利喉患可悶 畢竟欺其師乃已耶 想亦轉憐發嗔也 向者所言事 非不留念 而猶是俗諦 開口實難 況玆棨戟門內厠此身 常恐不自容乎 深恕之爲好耳 癡狀依存 而現在之境 明窓淨几 硯筆極精 認以爲一樂 不知爲苦耳 一曆送之 留作山中甲子 餘留續不禮 己巳臘月十四日 癡客 鍊 叉手 別紙之示 若是到底 可謂知情也 多情也 後日有書 亦皆細報 以破我遠地紆鬱之心也 [(진도) 쌍계사 첨성각에 회답함. 치객 답장 편지] 세월의 바퀴가 점차 다 되어가니 그리운 생각이 더욱 억누르기가 어렵습니다. 이러한 때에 멀리 선방(禪房)의 편지를 받으니 마치 백불(白拂)1)을 가지고 연화(蓮華) 불법을 말하는 것처럼 황홀합니다. 하물며 봉로방에서 맑은 공양하시는 것이 여전하다는 것을 알게 되어 위로됨이 마치 물병을 엎는 것처럼 충만합니다. 다만 나 사리(羅闍利)2)가 목구멍에 질환이 있다니 걱정입니다. 필경에는 그 선생을 속여야지 끝날 것인가요? 생각해보면 또 연민의 정에서 더 나아가 화가 납니다. 지난번에 말씀하신 일은 유념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오히려 이는 속제(俗諦)3)라서 입을 열기가 실로 어렵습니다. 하물며 여기는 관아에 붙어사는 몸이라서 항상 스스로 용납할 수 없을까 두렵습니다. 깊이 용서해주십시오. 저는 여전하고 현재는 밝은 창가의 맑은 책상에 앉아 벼루와 붓도 매우 정교하여 이를 하나의 즐거움으로 생각하고 괴로운 줄을 모르겠습니다. 책력 하나 보내오니 두고서 산중의 세월을 헤아리십시오. 나머지는 다음으로 미루고 예의를 갖추지 못합니다. 기사년(1869, 고종6) 납월(12월) 14일 치객 련 합장[叉手] 별지(別紙)로 말씀하신 것이 이처럼 자세하니 가히 정(情)을 안다고 하겠고 또 정이 많다고 하겠습니다. 뒷날 편지에도 역시 모두 자세히 알려주시면 멀리 있는 나의 우울한 마음이 없어지겠습니다.
소치는 28살부터 해남윤씨 녹우당의 명품을 빌려보면서 그림 공부를 시작하였다. 본격적으로 서화의 전당에 입문한 것은 초의(艸衣)의 추천으로 추사의 문하에 들어가서 서화 수업을 하면서부터이다. 그것이 32세 때이다. 그러나 그 직후 추사가 윤상도(尹尙度) 옥사(獄事)에 연루되어 몸 붙일 데 없던 제주로 유배 오자, 소치는 세 번이나 바다를 건너 추사의 훈도를 받았다. 또 소치는 스승의 지기(知己)인 권돈인(權敦仁), 신헌(申櫶) 등과도 교류하였다. 나아가 대원군(大院君), 민영익(閔泳翊) 등 당시 실권자들과도 두루 교유하였다. 반도의 남쪽 끝 섬 출신인 소치를 서울의 경화사족들은 어떠한 입장으로 대하였을까? 진정한 벗이나 지기(知己)로 대하였을까? 엄격한 신분제 사회에서 그들은 소치를 단순히 그림 그리는 재능을 가진 하인 정도로 생각하였을까? 어쨌든 소치는 그들과의 인연, 대내에서 국왕으로부터 받은 총애를 꿈과 같이 회상하며 맑은 묵연[淸緣]이라는 기록을 남기고 있다. 소치의 그림은 추사를 찾아 제주에 갔을 때 제주 실경(實景)을 그린 『소치화품첩(小痴畫品帖)』과 그 전후 시기의 그림이 전성인 것 같다. 50세가 되어서는 진도에 운림산방(雲林山房)을 마련하고 생활은 주로 전주와 임피(臨陂, 지금의 군산시), 남원 등에도 영위하면서 서울을 왕래하며 화업(畫業)을 계속하였다. 그러나 생업으로 그린 관념 산수는 조선 말기 경제적으로 성장한 넉넉한 요호부민(饒戶富民)의 집 장식으로 그려진 관념 산수나 묵모란(墨牡丹), 묵죽(墨竹) 등은 그다지 큰 예술적 향기를 맡을 수는 없을 것이다. 많은 사람의 요구에 응하여 기계적으로 그림을 그려준 느낌이 짙게 드는 것은 나만의 느낌일까?
소치의 관념 산수 : 화첩이나 병풍에 수도 없이 그렸을 소치의 관념 산수화. 그림 그리는 것을 생업으로 한 소치는 생계를 위해서 주변의 요구에 응하여 이러한 그림을 많이 그렸다. 그렇다고 하여 소치와 그 뒤를 이은 미산(米山) 허형(許瀅), 의재(毅齋) 허백련(許百鍊), 남농(南農) 허건(許楗) 등으로 이어지는 남화(南畫)의 전통을 무시할 수는 없을 것이다. 비록 ‘문자향(文字香) 서권기(書卷氣)’를 지향하는 경화사족의 문인화 전통을 추수(追隨)하는 경향이 있지만, 밑에서부터 상층 문화를 지향하려는 일반 민중들의 활력있는 모습을 볼 수가 있어서 좋다. 호남을 중심으로 많은 요호부민이 경화 사대부들의 문화를 흠모하여 조금의 여유라도 있으면 머릿병풍 하나라도 마련하여 장식하려는 소박한 전통이 생길 수가 있었을 것이다. 소치나 그 아들 미산은 평생을 화업으로 하여 호남 요호부민의 사랑방과 안방의 고상한 품격을 장식했던 것이다. 소치는 평생을 그림으로 생활을 하였지만, 당시의 사회적 상황은 전업 화가를 먹여 살릴 수 있을 정도의 환경은 아니었다. 그림을 그리면서 한편으로는 그림과 시를 통하여 교유한 권세가들의 힘을 빌어 세금을 대납하거나 관권을 빌어 갈등을 해결하는 과정의 이권 사업에도 어느 정도 관여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서울 권세가들의 식객으로 전전하다가 환갑이 가까워지면서 전주로, 임피로, 남원으로 다니면서 활동한 것은 그림에 대한 수요보다는 이권에 대한 수요를 따라서 이동하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소치의 편지는 산속에 사는 스님에게 보냈던 만큼 용어부터가 매우 불교적이다. 먼저 세월의 수레바퀴[歲輪]라든가 선승의 편지[禪椷], 백불(白拂)이나 연화(蓮華) 또 사리(闍利), 속제(俗諦), 차수(叉手) 등이 모두 불교 용어이다. 이 편지는 소치가 전주와 임피의 나포 등지에 살면서 그림으로 생활을 하고 있을 때의 편지로서 쌍계사의 스님이 소치에게 무슨 긴한 부탁을 한 것으로 보인다. 감영(監營)의 사람에게 어떠한 청탁을 해달라고 부탁한 것으로 짐작이 된다. 소치는 이를 완곡히 거절하고 있다. 사실상 당시에 그림만으로 완전히 생활을 영위하기란 어려웠을 것으로 보인다. 소치는 자신이나 그의 아들들, 조카들을 통하여 경제 활동에 참여하는 생활을 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가 중년에 살았던 전주나 임피 나포 등은 국가의 세곡을 납부하는 요충지였다. 잘 알듯이 전주는 감영이 있는 곳이고 임피 나포는 함열의 성당창(聖堂倉)과 함께 금강 하류의 주요 포구였다. 쌍계사는 지금의 운림산방 바로 뒤에 있는 사찰로서 고향을 떠나 객지에서 있어 고향의 소식을 알 수 없어 소치로서는 답답하고 울적해 있었는데, 그곳 스님이 자세한 진도의 사정을 편지로 알려주니 울적한 마음을 달랠 수가 있었던 것 같다. 이 편지의 마지막 부분에 연말이 되어 스님에게 책력 하나를 보내면서 산중에서도 세월 가는 것을 헤아리시라고 기원하였다. 지난번 ‘부채 정치와 책력 정치’에서 단오의 부채와 동지의 책력이 나누어지고 또 나누어졌던 양상을 소개한 바 있는데 그러한 ‘책력 정치[曆政]’의 여파(餘波)가 진도 산중에까지 미치고 보면서 서로 부채를 나누는 여유를 찾고 싶음은 비단 필자만일까? 1) 白拂 : 흰 소나 말의 꼬리털을 묶어서 자루 끝에 매어 단 장식물. 주로 설법할 때 손에 지님.
2) 闍黎 : 제자의 품행을 바로잡는 일을 하거나 일반 승려들에게 덕행을 가르치는 승려를 높여 부르는 말. 본래 梵語 Ācārya로서, ‘아사리(阿闍梨•阿闍黎)’라고 音譯하였는데, ‘사리(闍黎•闍利•闍梨)’로 줄여서 표기하기도 하며, ‘軌範’ 또는 ‘正行’으로도 의역하기도 한다. 3) 俗諦 : 산스크리트어 saṃvṛti-satya 제(諦)는 진리를 뜻한다. 속제는 二諦의 하나로 世諦라고도 한다. 俗은 俗事 또는 세속이란 뜻이고, 諦는 변치 않는 진리란 뜻으로, 속제는 세간 일반에서 인정하는 도리를 말한다. 眞諦의 상대말이다. 글쓴이 김현영(金炫榮) 한국고문서학회 명예회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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