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유학문선] 광복절에 돌아보는 광복사(光復史)의 뜻 게시기간 : 2019-08-14 07:00부터 2030-12-30 00:00까지 등록일 : 2019-08-13 16: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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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와 옛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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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에는 다양한 광복이 있다. 인현왕후가 갑술환국으로 복위한 사건을 광복이라 했다. 영조가 임오화변 이후 친정을 회복한 사건도 광복이라 했다. 본래는 후한 광무제가 왕망의 신(新)을 멸하고 전한을 계승한 사건이 광복이었다. 비슷하게는 조선 선조가 임진왜란으로 나라를 잃을 뻔했으나 다시 나라를 회복한 사건도 광복이었다. 20세기 들어와 광복은 민족운동과 결합되어 광복회, 월남광복회, 대한광복회가 등장하였다. 그 연장선에 대한민국의 국경일 광복절이 있다. 광복을 이룩했다, 광복에 성공했다, 신생 대한민국에서 광복의 메시지는 광복사(光復史)의 새 역사 이야기를 창출했다. 1972년 남원 향교에서 발행한 역사책에서 광복사의 뜻을 들어본다. [번역] 사람은 죽지 않는 사람이 없고 나라는 망하지 않는 나라가 없다. 단지 죽고 망할 따름인데 유독 보는 바가 있어서 죽고 망한 진짜 평론을 정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사람이 죽을 적에 보고 듣지 못하고 숨을 거두어 온몸이 차가워지나 떳떳한 양심이 아직 사라지지 않았음을 본다면 이는 살아 있는 사람이요 죽은 사람이 아니다. 나라가 망할 적에 사직과 종묘가 폐지되고 정삭(正朔)과 복색(服色)이 교체되나 국민성(國民性)이 아직 사라지지 않았음을 본다면 이는 살아남은 나라요 망한 나라가 아니다. 때문에 ‘마음의 죽음보다 더 슬픈 일이 없으니 몸의 죽음은 그 다음이다. 역사의 멸망보다 더 원통한 일이 없으니 나라의 멸망은 그 다음이다.’라고 한다. 역사란 국민성이 의탁하여 세상에 표현된 것이니, 그러하지 아니한가? 저 왜적은 우리 한국을 노예로 만들고, 어육으로 만들고, 초개로 만들었다. 우리 한국은 왜적에 의해 구속되고 병탄되고 유린되었다. 약육강식의 상태로 지낸지 모두 서른 여섯 해나 되었다. 그러나 시종 울분이 쌓인 나머지 국민성이 폭발하여 불이 더욱 타오르듯 물이 더욱 들끓듯 하니 강자가 막아낼 수 없었다. 처음엔 의병이 곳곳에서 봉기했고 이어서 열사가 몸바쳐 나라에 보답했다. 그 밖에도 두발을 지키다 죽었고 성씨를 지키다 죽었다. 3.1운동이 사방에서 일어나니 입이 있는 사람이면 모두 독립만세를 외쳤고, 임시정부가 여러 해 지속되니 마음이 있는 사람이면 모두 대한독립을 원했다. 이리가 으르렁대고 매가 달려드는 것 같은 위압에도 조금도 굽히지 않고 하나같이 곧게 앞을 향해 백번 꺾여도 다른 마음이 없었으니 이는 과연 누가 그렇게 시킨 것인가? 사람의 마음에 똑같이 있는 하늘에서 나와 동방 사천년 예의 풍속의 남은 자취가 사람들의 피부와 골수에 두루 미친 것이 더러 없지 않아 그러할 수 있었는가? 옛날 명나라가 망할 때에 명나라 황제가 종사를 위해 죽었고 명나라 신민이 의리에 기대어 나라를 위하다 죽은 사람이 매우 많았다. 대개 역대에 있지 아니한 일인데 일찍이 『명사(明史)』를 보고 마음으로 가만이 공경하였다. 지금 우리 한국이 망할 때에 명나라 말기 집집마다 충의로웠던 것보다 도리어 더 나음이 있으니 시대가 더욱 아래인데도 사적이 도리어 상반됨은 어째서인가? 아니면 처했던 사정이 그랬기 때문인가? 대개 왜인은 우리에게 대대로 동쪽의 근심거리로 옛날 임진왜란은 극히 참혹했는데 지금 끝내 뱀 아가리의 개구리가 되고 호랑이 창자의 고깃덩이가 되었다. 무릇 우리 한국의 인민이라면 누구인들 천지에 원통해하지 않았겠으며 조금이라도 편안히 지낼 수 있었겠는가? 예로부터 망한 나라가 하나둘이 아니지만 망하면 그 뿐 이미 망했는데 다시 옛 강토를 회복해 마치 벽(璧)이 진나라에 들어갔다가 다시 조나라에 돌아온 것 같은 일1)은 없었다. 지금 우리 한국의 일을 말하자면 나라를 잃어버림에 사나운 바람이 옷을 말아 가 버린 듯하였고 나라가 돌아옴에 신비한 공작이 구슬을 머금고 온 듯하였다. 천만 년을 거치는 동안 거의 절대로 없었던 일인데 이상하도다. 이 어찌 나라를 근심한 여러분들이 천지에 가득한 정성과 우주에 가득한 기운으로 위급하고 창망한 때 국민성을 발휘하여 하늘이 기어이 이루어주심을 얻은 데서 나온 것이 아니겠는가? 대개 하늘과 사람의 관계를 논함에 사람이 못 하는 일이 없어 보여도 오직 하늘은 속일 수 없음을 생각하게 된다. 저들은 자기의 강함을 믿고 남을 어육으로 만들었으니 ‘사람’이다. 이쪽은 자기의 약함에 어찌할 수 없어서 남에게 어육이 되었으니 ‘사람’이다. 그러나 그 중단 없는 정성과 지극히 원통한 기운이 우주간에 서리고 맺혀 필경 천둥과 번개가 한번 크게 울리자 어떤 사람인지 모르는 곳에 벼락이 떨어져 우리가 마침내 그 도움을 받아 일어나 옛 나라를 광복(光復)했으니 이것이 ‘하늘’이 아니면 무엇인가? 아아! 하늘이 이미 돌아보셨으니 그 이유를 말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에 의(義)를 위해 죽은 여러분들을 거론하고 다음으로 3.1운동과 임시정부를 언급하여 우리 한국의 국통(國統)이 국치(國恥) 중에 중단된 적이 없었음을 밝힌다. [원문] 謹按人無不死之人, 國無不亡之國, 而但之死也之亡也, 獨有所觀以定其死亡之眞評者何也? 人之死也, 視聽呼吸旣收矣, 四肢百體旣冷矣, 然獨觀其所仗秉彛心之尙不泯, 則是生也非死也, 國之亡也, 社稷宗廟旣廢矣, 正朔服色旣替矣, 然獨觀其所守國民性之尙不滅, 則是存也非亡也. 故曰哀莫大於心死而身死次之, 痛莫甚於史亡而國亡次之. 史者, 國民性之所倚以表見於世者也, 不其然哉? 夫倭之於我韓, 旣任其奴之隸之魚之肉之草芥之矣. 我韓之於倭, 旣被其羈之縶之噬之呑之糜爛之矣. 弱肉之屬於强食之過境者, 凡三十六年之久矣. 然自初迄終, 國民性之爆發於蓄憤積鬱之餘者, 如火益熾, 如水益沸, 有非强者之所可抑遏. 始而義兵之隨處蜂起, 繼而烈士之捐身報國, 其他保髮而死, 守姓而死, 及至三一運動之達乎四境, 而有口皆唱獨立萬歲, 臨時政府之持續多年而有心皆願大韓獨立. 盖嘗深原其不少屈於狼咆豺哮鷹搏鸇擊之威壓而一直向前百折靡他者, 是果孰使之然也? 非出於人心所同得之天而有不容已於東方四千年禮義成俗之遺風餘澤浹人肌髓者, 其能然乎? 昔明之亡也, 明皇殉社而明臣民之仗義爲國而死者甚多. 盖歷代所未有也. 嘗觀明史, 心窃欽之, 今我韓之亡也, 反有勝於明末之家忠戶義, 以時益下而事乃相反何如? 抑所處地之事然耶? 盖倭人於我, 世爲東患, 在昔龍巳, 其禍極憯, 而今乃爲蛇口之蛙, 虎腸之肉矣. 凡爲我韓人民者, 孰不寃天痛地, 容可晏然而已乎? 從古國之亡非一, 然亡焉而已, 未有旣亡而旋復舊疆, 如璧入秦而復反於趙者也. 今我韓之事, 其失也如飄風之卷衣而去, 其反也如神雀之含珠而來, 歷千萬年絶無而僅有, 其異矣哉! 此豈非出於憂國諸公之積徹穹壤之誠, 奮塞宇宙之氣, 發揮國民性於危急顚沛之際而取必于天者乎? 盖嘗論天人之際, 以謂人無所不爲, 惟天不可誣, 彼恃己之强而魚肉人者人也. 此無奈己之弱而爲魚肉於人者人也. 獨其不斷之誠至冤之氣盤旋凝結於宇宙間, 畢竟震電一響轟發於所不知何人而我乃興受其助, 光復舊物, 非天而何? 嗚呼! 天旣垂眷而不可以不白其由. 玆擧殉義諸公次及三一運動臨時政府以明我韓國統之未嘗中絶於國恥中者. [출전] 김종가(金鍾嘉), 『입헌집(立軒集)』 권4 「서동감강목후(書東鑑綱目後)」 [해설] 1968년 남원 유림은 『동감강목』을 발간하고자 ‘남한 전국 사림’에게 총회에 참석해 달라는 통문을 돌렸다. 일시는 1968년 음력 4월 8일 오후 1시. 장소는 남원 향교. 발간 작업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1970년 12월 25일 『동감강목』 전편과 『동감강목』 원편이, 1972년 12월 30일 『동감강목』 속편이 남원 향교에서 발간되었다. 『동감강목』은 조선말기 마지막 산림 송병선(宋秉璿, 1836∼1905)이 편찬한 강목체 한국사인데, 신라(통일신라 이후), 고려, 조선(철종 이전)을 아우르는 최초의 한국 통사였다. 이후 송병선의 문인 김재홍(金在洪, 1867∼1939)이, 『동감강목』 원편의 의례에 따라 전편(단군조선부터 삼국)을 편찬했고, 다시 김재홍의 아들 김종가(金種嘉, 1889∼1975)가 속편(조선 고종ㆍ순종. 부록 삼일운동ㆍ임시정부)을 편찬했다. 송병선이 『동감강목』 서문(1900년)을 지은 이래 문인들의 끈질긴 노력으로 72년의 세월을 거쳐 단군조선부터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이르는 장구한 한국사가 강목체 사서로 세상에 출현하였다. 그런 의미에서 전통 역사학의 마지막 완결은 대한민국 시기에 이루어졌다고 하겠다. 『동국통감』에서 『동감강목』까지 ‘동국사’의 역사적 전개는 그 자체로 중요한 사학사 현상이다. 『동감강목』은 시대전환기 조선 유학자가 발휘한 맹자의 ‘일치일란’ 정신의 산물이었다. 맹자의 일치일란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인간 세상에 난세가 들이닥칠 때마다 유가의 성현이 출현하여 치세를 추구했던 문명사의 전통을 자각하여 적극적으로 시대의 정학을 수립하는 것을 의미한다. 공맹과 정주의 학문이 난세의 도전에 대한 유교적 응전이었다면 서양에서 발원하는 새로운 난세의 도전에 직면하여 어떤 정학을 수립할 것인가? 송병선은 중국사에서 하ㆍ은ㆍ주 삼대의 본질인 충(忠)ㆍ질(質)ㆍ문(文)이 한국사에서 각각 신라ㆍ고려ㆍ조선에서 발현되는 것으로 보고 한국사에서의 삼대를 ‘동감(東鑑)’으로 창조하고자 했다. 동시에 역사적 사실의 핵심적인 요약에도 치력했는데, 예를 들어 조선후기 영조대 균역법 실시에 관한 기사는 현재 학계의 연구 성과에 비추어 손색이 없다고 평가된다. 난세는 끝나지 않았다. 송병선은 『동감강목』의 의례와 초본을 완성했으나 을사늑약 무효 투쟁을 위해 고종과 독대했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자결했다. 스승의 죽음과 국가의 멸망 속에서 남원 유학자 김재홍은 『동감강목』 원편의 최종 교정을 마쳤고 다시 전편을 추가 편찬하였다. 김재홍은 살아생전 광복을 보지 못했으나 김종가는 대한민국의 새 세상을 맞이하였다. 비로소 조선말기의 역사와 3ㆍ1운동과 임시정부의 최근사를 포함하는 속편을 편찬하여 『동감강목』 세트를 완성하였다. 그는 이제 안심할 수 있게 되었다. 1967년 발생한 이순신의 『난중일기』 도난 사건을 듣고 『동감강목』도 항시 그러한 위험에 처할 수 있음에 불안해 하던 터였다. 동시에 광복이 찾아와 『동감강목』을 마무리하는 소명을 완수했음에 감격하며 한국사에서 광복의 의미를 반추했다. 광복이란 무엇인가? 일반적으로 한번 멸망한 나라가 외국의 혹독한 지배에 놓여 있다가 다시 일어나 나라를 회복한 일은 역사에 유례가 드문 일이다. 한국은 한국으로 멸망했다가 한국으로 부활해서 한국을 이었다. 그래서 광복이다. 한국사에서 발생한 이 역사적인 사건의 의미는 무엇인가? 인간 세상은 약육강식의 법칙에 지배받고 있으니 약국이 강국에 먹히는 것은 인사(人事)의 필연이건만 그럼에도 끝내 강국이 쓰러지고 약국이 광복했다면 이는 인사를 압도하는 천의(天意)의 작용이다. 따라서 한국의 광복사는 세속적인 인사의 역사가 아니라 초월적인 천의의 역사가 체현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렇다면 한국의 광복을 실현한 하늘의 뜻에 비추어 한국사를 다시 쓰지 않으면 안 된다. 무엇이 하늘을 움직였는가? 한국인의 원혼과 의열이다. 무엇이 광복사의 핵심인가? 3ㆍ1운동과 대한민국임시정부이다. 광복사의 관점에서 본다면 국망 이전 대한제국과 광복 이후 대한민국을 연결하는 ‘국통(國統)’이 이것이다. 송병선의 중화 이념사로서의 한국사는 김종가에 이르러 광복 이념사로서의 한국사에 진입한다. 양자 모두 중화와 결합한 한국사, 천의와 결합한 한국사라는 점에서 한국사를 향한 보편사의 시점을 획득한다. 오늘은 광복절이다. 3ㆍ1운동 백 주년의 광복절이다. 대한민국임시정부 백 주년의 광복절이다. 광복절을 맞이하여 한국 근대 유학이 창출한 광복사를 돌아본다. 한국인의 원혼과 의열을 표장한 『동감강목』의 마지막 페이지를 곱씹어 본다. 1) 마치 벽(璧)이 ~ 같은 일 : 중국 전국시대 진(秦)나라가 조(趙)나라의 보물인 벽(璧)을 요구했는데 조나라 사신 인상여(藺相如)가 진나라 궁정에서 기지를 발휘하여 벽(璧)을 무사히 조나라로 돌려 보냈다.
[참고문헌] 宋秉璿, 『淵齋集』 권18 「繼開論」 宋秉璿, 『淵齋集』 권24 「東鑑綱目序」 金在洪, 『遂吾齋集』 권9 「東鑑綱目凡例箚錄」 金在洪, 『遂吾齋集』 권9 「東鑑綱目前編凡例」 金種嘉, 『立軒集』 권3 「續東鑑綱目序」 金種嘉, 『立軒集』 권4 「東鑑綱目發刊通文」 노관범, 「19세기 후반 호서산림의 위상과 정학운동」『한국사론』38, 1997 김경수, 「『동감강목』의 사학사적 고찰」『한국사학사학보』3, 2001 박경목, 「연재 송병선의 학맥과 민족운동」『대동문화연구』39, 2001 최성환, 「한말 조선시대사 편찬의 동향과 『동감강목』의 영정조대 서술」『한국사학사학보』28, 2013 김상기, 「연재학파의 사상과 민족운동」『한국독립운동사연구』59, 2017 글쓴이 노관범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부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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