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비, 길을 열다] 무위지치(無爲之治), 치명적 유혹을 넘어서… 게시기간 : 2019-08-19 07:00부터 2031-01-01 00:00까지 등록일 : 2019-08-13 16:43
재단법인 한국학호남진흥원
선비, 길을 열다
|
||||||||
노자는 ‘조짐도 없고 형체도 없어 이름 지을 수 없고[不可名], 다시 없는 상태[無物]로 다시 돌아가니 황홀이라고 말할 뿐인 뭉뚱그린 하나[混而爲一]’를 상상하였다.1) 여기에 인간의 의지나 하늘의 명령이 개입할 여지는 없다. 그것은 ‘천지에 앞서 생겨난, 만물의 모체’인 도(道)였다.2) 천지에 앞서 뭉뚱그린 무엇이 먼저 생겼으니, 고요하고 텅 비었구나! 홀로 서도 바뀌지 않고 두루 움직여도 위태하지 않으니, 천하의 어미가 될 만하다네! 나는 그 이름을 몰라서 그냥 ‘도’라고 부르며, 억지로 이름하여 ‘크다’로 하였도다! 크면 가기 마련이고, 가면 멀어지고 멀어지면 되돌아온다네! 천장지구(天長地久) 생멸무궁(生滅無窮)의 대서사답다. 그렇다면 누가, 어떻게? 반복 순환하는 위대한 도를 감당할 것인가? 다음과 같이 이어갔다. 따라서 도가 크고, 하늘이 크고, 땅이 크고, 왕 또한 크도다. 아득한 가운데 큰 것이 네 가지 있는데, 왕이 그중의 하나에 거처한다네. 사람은 땅을 본받고, 땅은 하늘을 본받고, 하늘은 도를 본받고, 도는 자연을 본받는다. 〈사람〉은 사람의 주인[人主] 즉, 왕이다.3) 노자는 말하고 있다. ‘왕이여, 자연을 따르라! 그러면 하늘과 땅, 사람의 주인이 된다.’ 주인 되는 덕이란 다름 아닌 무위와 무욕, 자애와 검약 그리고 스스로 낮춤[卑弱]이었다. 실제 당대 제후에게 설파하였다. “도는 항상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이루지 못하는 바가 없다. 후왕이 이것을 지킬 수 있으면 천하 만물이 저절로 교화된다. 아무 욕심 없이 고요하면 천하는 저절로 안정된다.”4) “후왕의 귀함은 천함을 근본으로 삼고, 높임은 낮춤을 기반으로 삼는다. 이런 까닭에 후왕이 스스로 외로운 자[孤], 버려진 자[寡], 착하지 못한 자[不穀]라고 하니, 이야말로 천함을 근본으로 삼는 것이 아니겠는가!”5) “내가 간직하고 지키는 세 가지 보배가 있으니, 자애로움과 검소함 그리고 감히 천하 앞에 나서지 않음이다. 자애로우니 용감할 수 있고, 검소하니 은혜를 널리 베풀 수 있고, 감히 천하 앞에 나서지 않으니 만인의 우두머리가 될 수 있다.”6) 이렇듯 ‘도를 도라고 할 수 있으면 영원불변한 도가 아니고[道可道 非常道], 이름을 이름 지을 수 있으면 영원불변한 이름이 아니라[名可名 非常名]’로 시작하는 『도덕경』은 어느덧 군주에게 무위 무욕 청정 겸허의 정치를 호소하였다. 지금은 노자와 장자를 병렬하여 ‘노장학’이라고 하지만, 당시 ‘노자학’은 군주의 통치술[南面之術]로 평가받았다. 노자는 시장도 없고 교통이 막혀도 자급자족할 수 있는 영토가 작고 인구가 적은 소국과민(小國寡民)의 목가적 공동체를 꿈꾸었다. 그것은 ‘성왕은 백성을 갓난이로 여기며, 백성은 성인만을 쳐다보는’ 세상이었다.7) 성인은 마음이 항상 같지 않아, 백성의 마음이 제 마음으로 삼는다네. 착한 사람은 착한 대로, 착하지 못한 사람도 착하게 여겨서 착함을 키우고, 믿을 사람은 미더운 대로. 믿지 못할 사람도 미덥게 여겨서 믿음을 키우네. 성인이 하늘 아래 살면서 백성과 함께 숨 쉬며 서로 마음을 뒤섞으니, 백성들 눈과 귀가 성인에게 온통 쏠리고, 성인은 백성을 갓난이로 삼는다네. 이런 상황이면 굳이 ‘인의예지가 더는 쓸데없고, 어질지 않은 천지[天地不仁]를 탓하지 않아도 된다!’ 이를 두고 훗날 주희(朱熹)가 평가하였다. “노자의 마음이 가장 독(毒)하다.”8) 한비(韓非)는 도법자연(道法自然)을 도가 법을 낳는다는 ‘도생법(道生法)’으로 읽고, 군왕을 도의 실마리[道紀], 도의 주인으로 삼았다! 노자를 풀이한 「해로편(解老篇)」에 적고 군왕의 길을 유세한 「주도편(主道篇)」에서 분명히 밝혔다. 후자는 운문인데 다음과 같다.9) 도는 만물의 시초이며, 옳고 그름의 규칙이다. 이 때문에 총명한 군주는 시초를 지킴으로써 만물이 어디서 생겼음을 알고, 그 규칙을 잡음으로써 선악을 올바르게 구별할 수 있다. 군주가 비움과 고요함으로 기다리면, 여러 명분이 스스로 영(令)을 세우고, 여러 직무가 저절로 정착되니, 비워야 실정을 알고, 고요해야 움직임의 주인이 된다.… 총명한 군주는 자리 없는 듯 고요하고, 마음 둘 데가 없는 듯 텅 비워야, 위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뭇 신하들을 아래에서 두려움에 떨게 한다. 이렇듯 한비는 군주에게 도를 끌어가는 ‘주도(主道)’의 권세를 부여하였다. 그리고 ‘무한의 권(權)’이야말로 스스로 그러할 따름인 ‘자연의 세(勢)’임을 설파한 것이다. 이때 ‘법ㆍ술’은 절대 나눠줄 수 없는 군주의 무기였다. 그간 군주에게 드리워진 하늘의 명령을 따라야 한다는 종도(從道), 군주라도 법을 어길 수 없다는 종법(從法)의 강박감, 부채의식을 덜었다고나 할까? 한비를 읽은 진왕은 좋았다. 그러나 그것은 치명적 유혹이었다. 한비가 순자를 배반하고 노자를 왜곡하였다고 지탄받지 않아야 하듯이, 한비의 죽음을 진왕의 속임수나 이사의 모함 탓으로만 돌릴 수 없다. 한비가 자신의 논리를 세웠듯이, 진나라 또한 천하를 읽는 문법, 천하 일통을 향한 학술 사조를 갖추고 있었다. 그것은 천하 안정, 일통을 앞세운 제자백가의 제방(齊放)ㆍ쟁명(爭鳴)을 조절, 융통하자는 여불위(呂不韋)―『여씨춘추』의 산파―의 ‘잡학(雜學)’ 정신이었다. 진나라는 군사적 승리에 못지않게, 유(儒)ㆍ묵(墨)ㆍ도(道)ㆍ법가(法家) 등의 사상 융합을 통하여 마른 풀 태우는 들불처럼 일어났다. 그리고 반딧불처럼 사그라졌으니 민군(民軍)의 지도자 진승(陳勝)은 외쳤다. “왕후장상에 어찌 씨가 있겠는가!” 말 위에서 나라를 취한 유방(劉邦) 또한 유협(遊俠)의 무리였다. 한 제국의 안정은 『회남자(淮南子)』 『염철론』에서 보듯이 여러 학술의 병존, 회통(會通)을 빼놓고 말할 수 없다. 특히 유가는 황로(黃老)의 무위를 인의(仁義)에 집결시켰으며, 학술적 발전은 그쳤던 법가와도 경쟁하면서 겸병(兼幷)하였다.10) 유가(儒家)는 진시황 때 분서갱유의 시련을 겪었으나, 한 고조가 공자를 제사 지내고 무제(武帝)에 의하여 독존(獨尊)의 위상을 부여받았다. 그러나 오경(五經)을 해석하고 가르치는 ‘박사(博士)’일 뿐, 시대의 목탁을 자임할 수는 없었다. 유학이 체제화, 관방화(官房化)되면서 인문정신이 희석되고 경세의 꿈은 포말(泡沫)에 그칠 따름이었다. 유학이 ‘국교(國敎)’가 되었던 후한 시기 고문경학자(古文經學者) 허신(許愼)은 선비 사(士)를 이렇게 풀었다.11) “사(士)는 일[事]이다. 사물을 세는 숫자는 하나에서 시작하여 열에서 끝나서 일(一)과 십(十)으로 구성되는데, 공자는 열을 미루어 하나로 합칠 수 있어야 선비라고 하였다.” 사(士)가 벼슬아치 사(仕), 리(吏)와 통용되던 시절, 일[事]을 내세우고―사(事)에 섬김의 뜻도 있음은 일을 알아야 섬길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공자의 가르침을 부가한 것이다. 열을 알아 깨달아야 하는 일(一)은 ‘일이관지(一以貫之)’의 도(道)이니, 선비를 도를 추구하는 학인으로 높였음이다. 허신은 반고(班固)ㆍ왕충(王充)과 더불어 유학이 벼슬의 수단으로 전락하였음을 비판하였었다. 이에 비하여 유(儒)는 소략하다. “유(儒)는 부드러움[柔]으로 술사(術士)를 칭한다.” 훗날 청나라 고증학자 단옥재(段玉栽)의 주해가 흥미롭다. “유(儒)의 말은 넉넉하고 부드러워 남을 편안하게 하고 또한 복종시키는데, 그러자면 선왕의 도로써 자신을 먼저 적셔야 한다.” 또한 “술(術)은 읍중(邑中)으로 술사는 읍에서 도를 행하는 자이다. 『주례』는 도로서 백성을 얻는다고 하였다.”12) 제사의 주관하고 의례를 실행하는 ‘술사’를 부드럽게 가르치며 사람의 마음을 얻는 교사로 풀이한 것이다. 여기에 유(儒)가 사람[人]과 쓰일 수(需)―비 우(雨), 수염 이(而)가 합친―로 만들어졌음을 참작하면, 상쾌한 상상이 가능하다. 즉 비가 오면 사람 사는 마을에서 젖은 수염을 쓰다듬으며―산중 들판보다는 비를 피하기가 낫다― 때를 기다리며 사람을 얻어가는 사람! 오늘날 선비는 누구일까? 임금을 섬길 일 없고, 하늘이 무서워도 울부짖지 않아도 되는 세상, 일을 배우고 알아서 사람을 섬기며[事人], 반가운 천하[大同]를 기다리는 사람이라면 비약일까? 그렇다면 동이불화(同而不和)가 아닌 화이부동(和而不同) 구동존이(求同存異) 나아가 온고지신(溫故知新) 연구혁신(沿舊革新)으로 개벽하자는 마음[開闢心]을 가져야 하지 않겠는가! 1) 김시천 역주, 『老子道德經注』 14장 “視之不見 名曰夷, 聽之不聞 名曰希, 搏之不得 名曰微, 此三者 不可致詰, 故混而爲一. 一者 其上不曒 其下不昧, 繩繩不可名 復歸於無物, 是謂無狀之狀 無物之象, 是謂惚恍.”
2) 25장 “有物混成, 先天地生, 寂兮寥兮. 獨立不改 周行而不殆, 可以爲天下母. 吾不知其名, 字之曰道 强爲之名曰大. 大曰逝, 逝曰遠, 遠曰反. 故道大, 天大, 地大, 王亦大. 域中有四大, 而王居其一焉. 人法地, 地法天, 天法道, 道法自然.” 3) 成玄英, 최진석ㆍ정지욱 옮김, 『老子義疏』; 김학묵 옮김 『박세당의 노자』 4) 37장 “道常無爲而無不爲, 侯王若能守之 萬物將自化…無欲以靜 天下將自定” 5) 39장 “侯王 無以貴高 將恐蹶, 故貴以賤爲本 高以下爲基, 是以侯王 自謂孤寡不穀, 此非以賤爲本耶” 6) 67장 “我有三寶, 持而保之. 一曰慈 二曰儉 三曰不敢爲天下先. 慈故能勇, 儉故能廣, 不敢爲天下先 故能成器長” 7) 49장 “聖人無常心 以百姓心爲心, 善者 吾善之, 不善者 吾亦善之, 德善. 信者 吾信之, 不信者 吾亦信之, 德信. 聖人在天下歙歙 爲天下渾其心, 百姓皆注其耳目, 聖人皆孩之.” 8) 李澤厚, 정병석 옮김, 『중국고대사상사론』 9) 허호구 책임번역, 『韓非子集解』 1, 主道篇 “道者萬物之始, 是非之紀也. 是以明君守始以知萬物之源, 治紀以知善敗之端. 故虛靜以待令, 令名自命也, 令事自定也. 虛則知實之情, 靜則知動者正.…故曰 寂乎其無位而處, 漻乎莫得其所, 明君無為於上, 群臣竦懼乎下.” 10) 蕭公權, 최명ㆍ손문호 역, 『중국정치사상사』; 劉澤華, 장현근 옮김, 『중국정치사상사』 2. 11) 段玉栽, 『說文解字注』 제1편(상) “士, 事也, 數始於一終於十, 从一十, 孔子曰 推十合一爲士.” 12) 『說文解字注』 제8편(상) “儒, 柔也, 術士之稱” 및 “儒之言 優也 柔也 能安人 能服人 又儒者 濡也 以先王之道 能濡其身…術 邑中也 因以爲道之稱 周禮 儒以道得民 注曰儒有六藝以敎民者…按六藝者 禮樂射御書數也.” 글쓴이 이종범 (재)한국학호남진흥원장 |
||||||||
Copyright(c)2018 재단법인 한국학호남진흥원. All Rights reserved. | ||||||||
· 우리 원 홈페이지에 ' 회원가입 ' 및 ' 메일링 서비스 신청하기 ' 메뉴를 통하여 신청한 분은 모두 호남학산책을 받아보실 수 있습니다. · 호남학산책을 개인 블로그 등에 전재할 경우 반드시 ' 출처 '를 밝혀 주시기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