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비, 길을 열다] 새가 나무를 고르지, 어찌 나무가 새를 고르겠는가!
재단법인 한국학호남진흥원
선비, 길을 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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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는 ‘예(禮)로서 신하를 상대하는 명군(明君)’을 만나고 싶었다. 그러한 군주라야 ‘신하 노릇이 쉽지 않음을 알 것이고, 임금의 잘못을 고쳐주는 신하를 받아들일 것’이기 때문이다.1) 신하의 직분을 배려하고 직언을 수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정녕 자신은 정사를 도모할 만한 마땅한 지위를 얻지 못했다.2) 비부(鄙夫)의 무리와 섞여 벼슬하고 싶지 않았다.3) “마음씨 더러운 사내와 어찌 함께 임금을 섬길 수 있겠는가! 저들은 벼슬을 얻기 전에는 얻지 못할까를 걱정하고 얻은 뒤에는 잃을까를 근심하는구나.” 천하 주유에 나선 공자, 받아주는 제후는 없었다. 주인이 죽어서 처량한 ‘상갓집 개’처럼 보일 때가 있었다.4) 비웃음, 빈정거림도 당하였다. 이른 아침 자로가 공자의 처소에서 왔음을 알리고 성문을 열어주라고 하자, 문지기가 말하였다.5) “일이 되지 않을 줄을 알면서 그 일을 하려는 사람한테서 왔습니까?” 공자를 도를 펼칠 수 없는 때가 아님을 알고도 힘들이는 무모한 자로 비꼬았음이다. 자로가 공자를 모시고 가다가 농사짓는 두 사람에게 나루터를 물었는데, 한 사람은 시큰둥 ‘사방을 돌아다녔으니 나루터를 알 것’이라며 가르쳐주지 않았고, 다른 한 사람은 ‘누가 혼란한 세상을 도(道)로써 바꾸겠소?’ 하며, ‘사람을 피하는 선비를 따르지 말고 세상을 피하는 선비를 따를 것’을 충고하였다. 사람을 피하는 즉 도가 맞지 않는 사람과 상종하지 않는 공자를 따르지 말고 은둔하는 편이 낫다고 한 것이다.6) 일행에서 뒤처진 자로는 한 노인에게 ‘스승을 보지 못하셨소?’ 물었다가, 다음과 같은 대답을 들었다.7) “사지로 부지런히 일하지 않고 오곡도 구분하지 못하는데 누구를 선생님이라고 하는가?” 이들은 은자들이었다. 공자는 나루터조차 알려주지 않는 행태에 실로 망연하였다. “사람이 새나 짐승과 무리 지어 살 수는 없다. 내가 이 세상 사람들과 살지 않고 누구와 함께 살겠는가! 천하에 도가 있다고 하여도 굳이 나의 길을 바꾸지 않았을 것이다.” 노인에게는 자로를 시켜 다음과 같이 전하였다. “벼슬에 나가지 않음은 도의를 저버리는 것이요. 어른과 젊은이 사이의 예절을 그만두지 못하거늘, 하물며 임금과 신하 사이의 의리를 어찌 팽개친단 말입니까? 자기 몸을 깨끗이 하려고 벼슬하지 않는다면 큰 인륜을 어지럽히는 것이며, 군자가 벼슬하는 것은 의리를 실천하려는 것이외다. 나도 이미 도가 실행되지 않음을 알고 있소이다.” 그리고 위나라, 영공(靈公)이 진법(陣法)을 물어오자 ‘제사 예절은 들었지만, 군대에 관한 일은 배우지 못했음’을 알리고 곧장 여장을 꾸렸다.8)노나라로 돌아오는 숲속, 새가 둥지를 트는 모양을 보았을 것이다. 9) “새가 나무를 고를 수 있지, 어찌 나무가 새를 고를 수 있겠는가!” 새는 공자이고 나무는 군주였다. 기원전 484년, 예순일곱 즈음이었다. 쉰다섯에 떠나 예순여덟에 노나라로 돌아온 공자는 애공(哀公)에게 말하였다. “임금은 배요, 백성은 물입니다. 물은 배를 띄우기도 하고 또한 뒤엎기도 합니다.10) 군주민수(君舟民水)! 그러나 세도가에 포위된 애공은 허수아비나 다름없었다. 고을에서는 겉으론 점잖고 깨끗한 듯싶어도 시류에 영합하고 권세에 아첨하는 사이비 즉 향원(鄕原)이 활개춤을 쳤다.11) 더구나 기량 뛰어난 염구(冉求)는 세도가의 가신이 되어 마구잡이로 세금을 거둬들였다. 공자는 실망하였다. “나의 제자가 아니니, 너희들은 북을 울려 죄를 성토해 꾸짖는 것이 옳다."12) 공자는 동방의 구이(九夷)로 옮겨가고 싶었다. ‘군자가 살면 누추함이 무슨 대수랴!’ 하였지만 차마 그러지 못했다.13) 이전부터 진행하였던 『시』ㆍ『서』ㆍ『예』ㆍ『악』ㆍ『춘추』의 마무리에 골몰하였다. ‘술이부작(述而不作)’이라지만 ‘온고지신(溫故知新)’의 위대한 창조였다. “내가 위나라에서 노나라로 돌아온 뒤에 음악이 바로잡혀서 아(雅), 송(頌)이 제자리를 찾았다.”14) 또한 ‘(죽간을 묶은) 가죽끈이 세 번이나 끊어질 정도’로 『역(易)』에 몰두하였다.15) 공자는 꿈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러나 울림은 컸고 여명을 비추었다. 물론 공자 홀로의 독창은 아니었다. 최근 완역된 류쩌화를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16) 진(晉)의 비정(丕鄭)은 말하였다. “군주를 섬기는 자는 의로움을 따르고 미혹함에 아부하지 않는다. 임금이 미혹되면 백성을 그르치니, 이는 백성을 버리는 것이다. 백성을 의롭게 다스리라고 임금을 두는 것이다.” 진(晉)의 사암(史黯) 일명 사묵(史墨)은 다음과 같았다. “군주를 섬기는 자는 잘못은 간하고 잘한 것은 권면하며, 좋은 일은 진언하고 나쁜 일은 폐기하게 해야 하며, 재능 있는 사람은 추천하고 어진 사람은 끌어올려야 하며…(임금이) 들어주면 벼슬하고 아니면 물러난다.” 사암은 또한 말하였다. “사직은 영원히 받들어지지 않고, 군주와 신하가 항상 그 자리에 그냥 있지 않으니 예로부터 그랬다. 그래서 ‘높은 언덕이 골짜기 되고 깊은 골짜기는 구릉이 되네’란 시가 있으니, 옛적 왕족이 지금은 서민이 되어 있는 것이다.” 비정은 백 년 전 사람이고, 사암은 조금 앞선 세대였다. 공자 발탁을 가로막았던 제나라 안영(晏嬰)도 말하였다. “신하는 사직에 충성하지, 군주의 노복이 아니다.” 신하는 임금을 의로써 섬기며, 임금에게 직언하고 좋은 인재를 천거하며, 나아가 임금과 신하의 자리가 바뀐다고 유세한 것이다. 이러한 입장 관점을 공자도 받아들였다. 다음은 『주역』 「곤괘(坤卦)」 ‘단전(彖傳)’이다. “신하가 임금을 시해하고 자식이 아비를 시해함은 일조일석의 변고가 아니요, 그러한 연유 조짐이 차츰 자라남에도 일찍 분별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17) 「혁괘(革卦)」 ‘문언전(文言傳)’ 또한 말한다. “천지가 변혁하니 사시(四時)가 이루어지고, 탕ㆍ무가 혁명하여 천명에 순종하고 인심에 부응하였으니, 변혁의 때가 크도다”18) ‘단전’ ‘문언전’은 공자가 지었다. 그렇다면 공자야말로 누구보다도 일세의 치란, 왕조의 혁명을 선명하고 냉철하게 읽어낸 셈이다. 다만 ‘도가 없으면 숨고’ 내지는 ‘신하는 새, 군주는 나무’로 온화하게 드러냈을 따름이다. 그만큼 현실 참여를 통하여 사람의 길이 활짝 열리는 세상을 만나고 싶었음이리라. 공자는 세월을 얻지 못하였지만, 사람을 얻었다. 흔히 삼천 제자라 하는데, 『사기』 「중니제자열전」에만 77인이 실려 있다. 사후 제자들은 여러 나라에 살며 여러 분파로 나뉘었다. 이것은 공문(孔門)의 분열, 약화가 아니라 확장 발전의 여정이었다. 위나라 관리가 말했었다. “여러분들은 어찌 공자의 가르침이 없어질 것이라고 걱정합니까? 하늘이 장차 부자를 목탁(木鐸)으로 삼으실 것입니다.”19) 1) 『論語』 子路 “定公問一言而可以興邦 有諸? 孔子對曰…人之言曰 爲君難 爲臣不易, 如知爲君之難也 不幾乎一言而興邦乎? 曰 一言而喪邦 有諸? 孔子對曰… 人之言曰 予無樂乎爲君, 唯其言而莫予違也, 如其善而莫之違也, 不亦善乎? 如不善而莫之違也, 不幾乎一言而喪邦乎?”
2) 『論語』 泰伯 “不在其位 不謀其政” 3) 『論語』 陽貨 “鄙夫可以事君也與? 未得之也 患得之, 旣得之 患失之.” 4) 허경진 책임번역, 『孔子家語』 困誓 6, “或人謂子貢曰 東門外有一人焉…纍然喪家之狗” 5) 『論語』 憲問 “子路宿於石門, 晨門曰 奚自? 子路曰 自孔氏. 曰 是知其不可而爲之者與?” 6) 『論語』 微子 “長沮桀溺耦而耕, 孔子過之, 使子路問津焉, 長沮曰 …是知津矣. 問於桀溺, 桀溺曰 …滔滔者天下皆是也, 而誰以易之? 且而與其從辟人之士也, 豈若從辟世之士哉. 耰而不輟, 子路行以告, 夫子憮然, 曰 鳥獸不可與同群 吾非斯人之徒與 而誰與 天下有道 丘不與易也” 7) 『論語』 微子 “子路問曰 子見夫子乎? 丈人曰 四體不勤 五穀不分 孰為夫子?…子曰 隱者也, 使子路反見之…子路曰 不仕無義, 長幼之節 不可廢也, 君臣之義 如之何其廢之? 欲絜其身 而亂大倫. 君子之仕也 行其義也. 道之不行 已知之矣.” 8) 『論語』衛靈公 “衛靈公問陳於孔子 孔子對曰 俎豆之事 則嘗聞之矣, 軍旅之事 未之學也” 9) 허경진 책임번역, 『譯註 孔子家語』 2, 正論解(15); 임동석 역주, 『춘추좌전』 6, 魯哀公 11년, “鳥則擇木 木其能擇鳥?” 10) 『譯註 孔子家語』 1, 五儀解(7) “夫君者舟也, 庶人者水也. 水所以載舟, 亦所以覆舟.” 11) 『論語』 陽貨 “子曰鄕原 德之賊也”; 『孟子』 盡心(下) “孟子曰…閹然媚於世也者 是鄕原也…同乎流俗 合乎汚世 居之似忠信 行之似廉潔 …故曰德之賊也. 孔子曰惡似而非者” 12) 『論語』 先進 “季氏富於周公 而求也爲之聚斂而附益之. 子曰 非吾徒也, 小子鳴鼓而攻之 可也” 13) 『論語』 子罕 “子欲居九夷 或曰 陋, 如之何? 子曰 君子居之, 何陋之有?” 14) 『論語』 子罕 “子曰 吾自衛反魯然後, 樂正, 雅頌各得其所” 15) 『사기』 「孔子世家」 “孔子晩而喜易, 序彖,繋,象,説卦,文言. 読易, 韋編三絶.” 16) 劉澤華, 장현근 옮김, 『중국정치사상사』 1, 글항아리, 2019. 17) 「坤卦」 “文言曰…臣弑其君 子弑其父 非一朝一夕之故 其所由來者 漸矣, 由辯之不早辯也” 18) 「革卦」 “彖曰…天地革而四時成 湯武革命 順乎天而應乎人 革之時大矣哉” 19) 『논어』 八佾 “二三子何患於喪乎? 天下之無道也久矣. 天將以夫子爲木鐸” 글쓴이 이종범 (재)한국학호남진흥원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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