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시초대석] 그대 떠나가는 날, 옛날처럼 꽃은 만발하네
재단법인 한국학호남진흥원
명시초대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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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 신숙주(申叔舟, 1417~1475)의『보한재집』권7에 있는 시이다. 정식(鄭軾, 1407~1467)의 장례를 보며 느낀 감회를 적은 것이다. 정식의 본관은 나주(羅州)로, 원 간섭기 문장가인 5대조 정가신(鄭可臣)이 나주에서 상경하여 집안을 일으켰다. 신숙주는 나주 오룡동(五龍洞) 외가 마을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냈는데, 어머니는 정유(鄭有)의 따님이었다. 정유의 손자가 정식이었으니, 이종사촌 간이었다. 열 살 차이의 두 사람은 본래 친밀하였을 뿐 아니라, 같은 때에 함께 벼슬을 하였다. 이 작품은 두 사람의 사적인 인연을 먼저 생각하게 하지만, 국가를 위해 헌신했던 공통의 경험이 굵직한 밑그림으로 깔려있다. 세조가 즉위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동북 방면 모련위 여진족이 소란을 피우자, 조정은 강력한 응징을 결정하였다. 이때 강경론을 주도한 신숙주가 강원·함길도 도체찰사가 되어 출정하였다. 이 무렵 정식도 형조참판에서 함길도관찰사가 전출되어, 두 사람은 여진족 소탕에 협력하였다. 잘 알려져 있듯이 신숙주는 뛰어난 전술로 여진족을 퇴치하였는데, 정식 역시 병기의 조달을 관장하는가 하면, 직접 군사를 이끌고 여진 진영 깊숙한 곳까지 돌진하기도 하였다. 결과만을 보면 쉽게 승리를 거둔 것 같지만, 이들은 두만강을 건너 북쪽 산간에까지 진격하였고 때로는 역습을 당하기도 하였다. 생면부지의 땅에서 목숨을 걸고 싸웠던 경험은 강렬한 기억으로 남았을 것이다. 세조 13년(1367) 봄 3월 상순, 신숙주가 조정의 일로 분주할 무렵, 비보(悲報)가 들려온다. 전장에서 머리를 맞대고 전의를 다지던 사람이, 불귀의 객이 되었다는 것이다. 다른 기록을 보면 정식은 북변에서의 귀환 이후 병을 앓았던 것으로 보인다. 세조실록의 졸기(卒記)에 “정식은 성품이 굉활하여 불법으로 남을 간섭하고 침범하지 않았으며, 자기에게 거스르는 자가 있으면 반드시 성을 내어 그를 꾸짖었으나 노기가 풀리면 곧 잊어버렸다 性宏闊 不以非法干人 有忤己者 必怒罵之 怒止輒忘”라고 한 것을 보면, 기질적인 측면에서도 서로 통하는 사이였던 것 같다. 북방 「고원의 천변에서 감사 정식 형과 이별하다 高原川邊 別監司鄭兄軾」에서 “시냇가의 몇 잔 술 川邊數杯酒, 그리운 마음은 꿈속에서도 바쁘리 離思夢中忙”라며, 애틋한 정을 드러내기도 하였다. 그의 죽음은 신숙주에게 적지 않은 충격이었다. 북정(北征)에서 자신과 협력한 동료이기에 앞서, 누구보다 마음을 잘 이해해주는 외사촌 형이었기 때문이다. 이 시는 세월의 무상함을 배경에 두고 출발한다. 신숙주는 장례 과정을 지켜보며 생각에 잠긴다. 드높은 기개로 북방을 호령하던 정식의 모습은 이제 과거가 되었다. 쓸쓸하게도, 염습(殮襲)이 끝나고 관 뚜껑이 덮이면 이제 그는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간다. 그 순간 신숙주는 생사의 갈림길에 겹쳐지는 한 장면을 주시한다. 그날따라 정식의 집에는 살구꽃이 흐드러지게 피었고, 살구꽃은 지난날의 기억을 또렷이 불러일으킨다. 숨막히는 전투의 중간에 정식을 맞아 주연(酒宴)을 열던 날, 가무의 흥은 고조되고 오가는 술잔에 전장의 시름을 잊던 때. 그날에도 뜰 한 켠에 화사한 봄꽃이 만발했다. 장렬한 죽음일지 당당한 개선일지 알 수 없는 상황이지만, 흥취만은 봄꽃의 빛깔만큼이나 강렬했다. 시간이 흐르고 늙음이 다가오는 때에 그날의 무장은 화려한 기억을 뒤로하고 이승을 마감하고 있다. 영웅도 관 뚜껑 덮으면 모든 일 끝난 것. 삶의 중량감은 그저 ‘덧없음’으로 비약될 수밖에 없다. 돌아오지 못할 길을 떠나는 날, 화려했던 북녘에서의 그날처럼, 집 한 켠에 봄꽃이 만발해있다. 신숙주의 슬픔은 꽃을 매개로 북변의 기억에서 정점을 이룬다. 그런데 대상에 대한 슬픔은 슬픔으로 끝나지 않는다. 대상을 바라보는 시인 자신의 문제를 파생한다. 눈물이 뺨을 타고 흐르는 순간, 꽃을 틔운 봄바람이 흰 머리칼에 불어옴을 느낀다. “봄바람만이 나의 흰 머리칼에 불어온다”는 것은 한시의 일반적인 표현이다. 자연의 순환성과 대비되는 인간 존재의 유한성을 부각하는 말이다. 그러나 적극적으로 해석할 때, ‘봄바람 앞의 흰 머리칼’이라는 주체의 제시는 유한성에 대한 자각이자 새로운 성찰의 기점이기도 하다. 윤리적 고뇌나 불교에 대한 관심 등 만년의 삶이 이것과 관련이 있는지는 확인할 방법이 없다. 다만 시를 읽는 우리는 이 지점을 우리의 삶의 차원으로 옮겨와 음미할 여지가 있다. 신숙주의 경험은 오늘의 우리에게도 낯설지 않다. 누군가의 장례식에서, 또는 고별사를 듣거나 한 시대의 상징물이 사라져 갈 때, 우리는 돌이킬 수 없음에 슬픔을 느낀다. 한 시대가 가고 일부였던 자신도 그 흐름을 거역할 수 없음을 알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러한 슬픔의 어느 지점에서, 우리는 슬픔이 견고한 이성(理性)이 되어 자신을 향하는 것을 발견하곤 한다. 말하자면 슬픔을 딛고 서는 ‘성찰’의 지점이라 할 수 있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마음속 깊은 곳으로부터의 울림을 느끼게 된다. 저 덧없는 인생에서, 그리고 유약한 인간 존재가, 유한성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은 무엇일까? 이 성찰의 지점은 유한성에 맞서 무한성을 열어가는 지점이기도 하다. 여기에서 우리는 인생에 있어서 ‘가치’의 문제, 곧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질문을 만나게 된다. 글쓴이 김창호 원광대학교 한문교육과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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