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유학문선] 일본 유학이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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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유학문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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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유학이란 무엇인가? 사람마다 보는 관점이 달랐다. 이덕무는 말했다. 일본 유학은 주자를 배우는 학문도 있으나(야마자키 안사이), 주자를 배반하는 학문도 있고(이토 진사이), 아예 문학으로 빠져 병든 학문도 있다(오규 소라이). 정약용은 말했다. 일본 유학이 제법 성숙해져(이토 진사이, 오규 소라이) 문명화가 진척되고 있으니 이제는 과거와 같이 이웃을 침략할 염려는 없겠다. 신채호는 말했다. 일본 유학은 공자가 쳐들어오면 이를 원수처럼 여겨 맞싸우겠다고 하니(야마자키 안사이) 참으로 국가주의 정신이 투철하다. 여기 조선의 또 다른 유학자 장화식이 있다. 그는 일본의 또 다른 유학자 오쓰카 다이야를 생각했다. 일본 유학을 바라보는 그의 관점은 무엇이었을까? [번역] 소싯적 어느 날 『퇴도언행록(退陶言行錄)』을 보았는데 선생의 시1)가 적혀 있었다. 이슬 맺힌 고운 풀이 물가를 둘렀는데 작은 못의 맑은 활수(活水)는 고요하여2) 모래가 없네 구름 날고 새 지나감이 원래 서로 간여하니 다만 때로 물결 차는 제비가 두려워라. 나는 ‘구름 날고 새 지나감이 원래 서로 간여하니’라는 뜻을 이해하지 못해서 평상시에 마음속에서 헤아려본 지 오래였다. 하루는 나의 벗 박성중(朴聖中)3)이 대구부에서 돌아와 방문했는데 일본의 선비로 퇴야(退野)라는 호를 가진 사람4)에게 말이 미쳤다. 그가 이 시를 보고는 ‘구름 날고 새 지나감이 원래 서로 간여하니’에서 원래[元]라는 글자를 교정하여 ‘이것은 없을 무[无]를 잘못 기록한 것’이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나는 이 말을 듣고 무릎을 치며 감탄했다. “이것은 내가 40년간 의문을 둔 것인데 이제 의문이 풀렸으니 어찌 유쾌하지 아니한가?” 선생의 생각은 ‘구름이 날아감은 절로 날아가는 것이고 새가 지나감은 절로 지나가는 것이라 물결을 차서 어지럽히지 않으니 어찌 맑고 고요함에 간여하겠는가? 다만 물결 차는 제비가 있어서 맑고 고요함을 어지럽혀 본래 면목을 잃는 것이 걱정스럽도다.’라는 것이었다. 또 이 마음이 본래 물처럼 맑고 고요한데 사욕이 둘러싸 어지럽힘을 비유한 것이었다. 퇴야(退野)의 견해가 어찌 명쾌하지 아니한가? 비슷한 한 글자 때문에 천 리나 틀렸으니 이 때문에 군자는 사이비를 미워한다. [원문] 少日觀退陶言行錄, 記先生詩, 曰露草夭夭繞水涯, 小塘淸活靜無沙, 雲飛鳥過元相管, 只怕時時鷰蹴波. 余不解雲飛鳥過元相管之義, 尋常往來于心久矣. 日吾友朴聖中, 自大丘府回訪, 言及日本士人號退野者, 看到此詩, 雲飛鳥過元相管, 校正元字, 曰此无字之誤也. 余聞之擊膝, 歎曰此余四十年致疑者, 今得解疑, 何快如之. 先生之意, 雲之飛自飛, 鳥之過自過, 無蹴亂之及, 則何管於水之淸靜耶? 但有鷰蹴其波, 亂淸靜, 失其本面, 是可怕矣. 且此心本如水之淸靜, 而私欲撓亂之比也. 退野之見, 豈不明快耶? 一字之近似, 而謬至千里, 是故君子惡夫似也. [출처] 장화식(張華植), 『복암집(復菴集)』 권6 「퇴도시변의(退陶詩辨疑)」 1) 선생의 시 : 이황이 18세에 연곡(鷰谷)에 놀러 갔다가 연곡의 맑은 못을 보고 지은 시이다.
2) 고요하여 : 이황의 시에는 ‘깨끗하여[淨]’로 되어 있다. 장화식의 『복암집』이 ‘깨끗하여’를 ‘고요하여’로 잘못 기록한 것이다. 3) 나의 벗 박성중(朴聖中) : 박재시(朴在時)이다. 장화식은 박재시와 교류하며 일본의 유학자에 관해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1936년 장화식이 박재시에게 답한 편지에 보면 일본 규슈 유학자 구스모토 세키스이(楠本碩水, 1832∼1916)에 대해 두 사람이 극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4) 일본의 선비로 퇴야(退野)라는 호를 가진 사람 : 오쓰카 다이야(大塚退野, 1678∼1750)이다. 일본 에도막부 말기에 일어난 이른바 구마모토 실학당의 학문적 원조로 받들어지는 학자이다. 이황의 학문에 심취하여 일본에서 퇴계학의 전승에 크게 기여하였다. [해설] 도쿠가와 막부 시대 일본에서 가장 유학이 발달했던 번(藩)의 하나가 규슈의 구마모토(熊本) 번이다. 구마모토 번은 1755년 시습관(時習館)이라는 번교(藩校)를 설립했는데 차츰차츰 주자학의 열기가 고조되어 번교 안에서 주자학을 공부하는 모임이 활성화되었다. 막부 말기 정치의식이 투철한 일부 사무라이는 번교 바깥으로 나가 주자학 언더서클의 성격이 있는 사숙(私塾)을 열고 정치를 토론했다. 이것이 구마모토 실학당(實學黨)의 형성 배경인데, 사쯔마(薩摩)번의 근사록당(近思錄黨)도 그렇고 막부 말기 이러한 학당의 결성은 사무라이에게 사(士)의식을 고취하여 정치 변혁의 원동력을 제공하였다. 여기서 ‘실학당’이란 명칭이 흥미롭다. 이들이 말하는 실학이란 현재의 세사를 연구해 군자가 되겠다는 것으로 사서와 『근사록』을 회독하며 글 뜻을 새겨 정치의 득실을 논하고 야쿠닌(役人)의 잘잘못을 따지는 것이었다. 유교적 이상의 현재적 실천을 추구하는 실학당의 유교적 보편주의는 실학당의 중심인물 요코이 쇼난(橫井小楠, 1809∼1869)에게서 발견할 수 있다. ‘서양의 기예와 동양의 도덕[西洋藝術, 東洋道德]’을 제창한 사쿠마 쇼잔(佐久間象山, 1811∼1864)과 함께 막부 말기 경세가로 저명했던 그는 ‘요순 공자의 도를 밝히고 서양기계의 술을 다하여 부국강병을 이룩하고 사해에 대의를 펼친다’는 경세의 포부를 안고 있었다. 구마모토 실학당은 자신의 학파적 출발을 동향의 선진 오쓰카 다이야(大塚退野, 1678∼1750)에게 두고 그를 일본 주자학의 도통으로 존숭하였다. 오쓰카는 위인지학(爲人之學)의 세속적 인간이 위기지학(爲己之學)의 도덕적 인간으로 거듭나는 내면적인 자기 변혁을 중시했고 자신을 주자학으로 이끌어준 이황(李滉)의 『자성록(自省錄)』을 존신했다. 오쓰카를 현창한 실학당의 요코이 쇼난은 주희 이후 고금의 진유로 조선 유학자 이황을 손꼽았고 문인 도쿠토미 가즈타카(德富一敬, 1822∼1914, 德富蘇峰의 부친)에게 이황의 『자성록(自省錄)』을 인용해 마음공부를 충고하였다. 역시 오쓰카의 후학으로 『일본도학연원록(日本道學淵源錄)』을 편찬한 구스모토 세키스이(楠本碩水, 1832∼1916)는 이황을 ‘주자 이후 일인’으로 생각하고 이황과 관계된 방대한 문헌을 구축하였다. 그 종손(從孫) 구스모토 마사쓰구(楠本正繼, 1896∼1963)는 『송명시대 유학사상의 연구』로 잘 알려진 규슈대학 중국철학자였다. 오쓰카 다이야가 우리나라에 처음 알려진 것은 모토다 나가자네(元田永孚, 1818∼1891)의 편지에 부친 우치다 슈헤이(內田周平, 1854∼1944)의 발문이 재일 유학생 잡지 『대한학회월보』에 소개된 1908년이 아닌가 싶다. 모토다는 구마모토 실학당 멤버로 메이지 교육칙어를 기초한 인물이고 우치다는 구스모토 세키스이의 문인으로 두 사람 모두 오쓰카 다이야를 연원으로 하였다. 우치다는 이 글에서 모토다의 학문이 오쓰카에게서 나왔는데 오쓰카는 이황의 글을 읽고 정주(程朱)를 독신했으며, 모토다가 오쓰카의 이 학문을 받들어 메이지를 보필하고 있음을 찬미하였다. 이 글은 이황의 주자학이 메이지 일본의 근대 문명에 기여하고 있다는 의미로 읽힐 수도 있었는데, 실제 이 글을 읽은 박은식은 이황의 학문이 일본에서 ‘동양철학’의 범주에서 연구되고 있다는 학문적 현재성에 주목하였다. 『매일신보』 1916년 기사는 이황의 『자성록』과 『주자서절요』가 일본에서 번각되어 야마자키 안사이(山崎闇齋), 오쓰카 다이야, 요코이 쇼난, 모토다 나가자네 등에게 영향을 미쳤음을 말했다. 근대에 유입된 일본 주자학에 관한 새로운 지식은 조선 유학자에게 신선한 자극을 주었다. 이를테면 경상도 청도 유학자 장화식(蔣華植, 1871∼1947)은 동향 친구 박재시(朴在時)와 더불어 일본의 주자학에 관해 곧잘 토론하곤 했는데, 한번은 박재시가 앞서 말한 구스모토 세키스이를 일본의 진유라고 높이 평가하는 편지를 보내자 답신을 보내 구스모토 세키스이의 학문이 공맹정주(孔孟程朱)의 문로에서 나왔고 왕왕 중국과 조선의 선유가 미처 연구하지 못한 데를 말했다고 비평하였다. 그는 구스모토를 높이 평가했을 뿐만 아니라 구스모토의 문인 우치다 슈헤이 및 오카 나오카이(岡直養, 1864∼?)와도 교분이 있었다. 장화식은 우치다와 오카 두 사람을 통해 일본 주자학 문헌을 얻었는데, 우치다로부터는 구스모토 세키스이의 『어략(語略)』과 비토 니슈(尾藤二洲, 1745∼1813)의 『택언(擇言)』을, 오카로부터는 미야케 쇼사이(三宅尙齋, 1662∼1741, 山崎闇齋의 문인)의 『묵지록(默識錄)』과 구메 데이사이(久米訂齋, 1699∼1784, 三宅尙齋의 문인)의 『학사록(學思錄)』을 선물 받았다. 이 책들에 대한 그의 감상은 모두가 정주(程朱)를 조술하고 이황을 종주로 삼아 의리가 정박하고 견해가 투철하다는 극찬이었다. 박재시의 질자 박장현(朴章鉉, 1908∼1940)도 구스모토 세키스이로부터 처음 일본 주자학을 발견(!)하였고 비토 니슈의 『택언』을 읽은 후 주자학이 침체된 중국이나 조선과 달리 일본에서 우치다 슈헤이의 힘으로 주자학이 번성할 것을 기대하였다. 장화식은 그가 접한 일본 주자학에서 학문적 감흥을 받았음은 물론 그가 수행하고 있는 이황의 작품 연구를 위한 실제적 도움을 받기까지 하였다. 그가 『퇴도언행록』에 실린 이황의 싯구 해석에 어려움을 겪어오다가 오쓰카 다이야의 교감 작업을 알게 되어 40년간의 의문이 풀렸음을 고백한 것은 근대 한일 유학사의 에피소드라 이를만한 어떤 상징적 사건이었다. 이황의 『자성록』을 읽고 양명학에서 주자학으로 좌정한 일본 구마모토 유학자의 이황 연구가 다시 조선 청도 유학자에게 수용되어 이황의 작품 세계를 재해석하는 길이 열린 것이다. 학문이란 그런 것. 이황은 주희를 만났고 오쓰카 다이야는 이황을 만났고 다시 장화식은 오쓰카와 만났다. 학문을 향한 신실한 만남 앞에 국적이 무엇일까? 장화식에게 일본 유학이란 글로벌 퇴계학의 소중한 자원이었으리라. [참고문헌] 蔣華植, 『復菴集』 권6 「讀丁與猶堂集」 蔣華植, 『復菴集』 권6 「答朴聖中-丙子」 朴章鉉, 『文卿常草』 「讀尾藤二洲擇言」 李德懋, 『靑莊館全書』 권58 「盎葉記(五)」 <日本文獻> 丁若鏞, 『與猶堂全書』 文集 권12 「日本論(一)」 『大韓學會月報』7, 「片紙感人」 1908.7. 『西北學會月報』12, 「退溪先生의 學이 行于日本者久矣」 1909.5. 『大韓每日申報』 1909년 11월 28일, 「今日 宗敎家에게 要ᄒᆞᄂᆞᆫ바」 『每日申報』 1916년 10월 25일, 「朝鮮의 活字와 珍書」 박훈, 「19세기 전반 웅본번에서의 ‘학적 네트워크’와 ‘학당’의 형성」 『동양사학연구』 126, 2014 박은영, 「요코이 쇼난과 구마모토 밴드의 ‘봉교취의서’」 『동아시아문화연구』 62, 2015 이효원, 「비교사적으로 본 근세 일본의 퇴계학 수용의 두 방향」 『퇴계학논총』 28, 2016 성해준, 「에도시대 유학자들의 퇴계학 전승과 그 학맥」 『퇴계학보』 141, 2017 엄석인, 「구마모토 실학파의 퇴계학 수용과 영향」 『퇴계학논집』 23, 2018 글쓴이 노관범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부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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