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문서와 옛편지] 황윤석(黃胤錫)이 친구 송상은(宋相殷) 빈소에 보낸 조장(弔狀)
재단법인 한국학호남진흥원
고문서와 옛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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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사람을 애도하는 글은 항상 깊은 감동과 슬픔을 자아낸다. 중국 명문 중의 하나인 한유(韓愈)의 「제십이랑문(祭十二郞文)」이나 명나라 귀유광(歸有光)의 「선비사략(先妣事略)」은 각각 조카를 잃은 슬픔, 어머니를 회고하는 마음을 간략한 글에 담아냈다. 우리나라에도 신라 때의 「제망매가(祭亡妹歌)」나 고려 예종의 「도이장가(悼二將歌)」, 박지원(朴趾源)이 홍대용의 행적을 쓴 「홍덕보묘지명(洪德保墓誌銘)」은 짧은 글 속에서 그들을 그리워하며 일생의 행적을 그려내고 있다. 제문이나 위장(慰狀), 조장(弔狀)이라고 하는 글들이 이러한 부류에 속한다. 〈그림 1〉은 이재(頤齋) 황윤석(黃胤錫, 1729∼1791)이 객지에서 43세의 일기(一期)를 마친 친구의 아들들에게 보낸 조문 편지 즉 조장이다. 13살 아래인 벗과의 교유 관계가 그려지면서 아련한 슬픔과 안타까움을 자아내게 한다. 이때 이재는 56살이었다.
[번역] 윤석은 통곡하고 재배하며 말씀드립니다. 이 무슨 흉변(凶變)이고 이 무슨 흉부(凶訃)입니까? 선공(先公)1)의 현명함으로도 나이는 오십을 채우지 못하였고 선공의 학문으로도 지위는 6품을 넘지 못했습니다. 빈궁하여서 여러 고을에 우거를 하다가 마침내 돌림병에 걸려 갑자기 길에서 돌아가신 것은 대개 고봉(高峰) 기대승(奇大升)이 고부(古阜)의 며느리 집에 가서 죽은 것과 같으니2 정침(正寢)에서 고종(考終)을 했다고 하겠습니까? 아! 선공이 불행한 것이 역시 그렇습니까? 윤석은 선공과 그 나이를 계산하면 약간 위입니다. 성균관으로 방문하고 미호(渼湖)3)에서 결의하고 아울러 선대 증조부의 행장을 지어줄 것을 부탁받은 것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오늘날 흔히 있는 일이지만 20년 가까이 한 사람은 남쪽에 있고 한 사람은 북쪽에 있으면서 서로 다른 일을 한 것이 오래되었습니다. 남평(南平)에서 무장(茂長)으로 왔을 때는 오히려 거리가 가깝지 않은 것을 한탄했고, 무장에서 장성(長城)으로 왔을 때는 길이 너무 멀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생각했습니다. 하물며 이번 3월 즉길(卽吉)4) 이후에는 또 밤낮으로 만나 이야기할 시간을 가지려고 했던 것은 지난해 섣달에 와주신 것에 따른 사례였습니다. 아! 그런데 누가 갑자기 유명을 달리할 줄을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지난번 우리 동네 이인섭 군의 빈렴(殯斂) 때에 우연히 (장성에서 온) 두세 분 변씨(邊氏)를 만나서 들으니, 선공의 온 집안이 돌림병에 걸리고 또 굶주려서 부안의 현감 윤가5)에게 가서 장차 여기(癘氣)를 피하고 진휼을 구하려고 하였다는데, 그러면 아마도 그날 저의 집 앞을 지났을 겁니다. 막 서북쪽으로 고개를 내밀고 기다리고 있었는데 지금 졸지에 흉한 부음을 듣는단 말입니까?… 어머니가 형과 동생을 데리고 영결하려고 한다고 하니 이것은 오히려 다행입니다. 초종(初終)의 여러 가지는 또 어떻게 조치할 것이며, 아마도 상이 나가는 것이 내일일 터인데, 아마 와석(臥石) 신기(新基)의 삼거리 주막6)을 지날 것입니다. 그곳은 우리 집에서 동쪽으로 3리쯤 되는 곳입니다. 죽지 못하는 늙은 내가 정이나 예로 보아서 마땅히 닭 한 마리와 술로 지나는 길가에 가서 곡을 해야 하겠지만, 온 동네가 돌림병이 돌아서 마음속으로 두렵습니다. 성인이 질병을 조심하라는 뜻으로 미루어 보면 갑자기 갈 수가 없을 것이니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두 분 상인은 이 사람을 고루하다고 생각하여 비록 눈길도 한번 주지 않겠지만, 일은 같은 집안이나 같으니 묵묵히 입 다물고 위문마저 하지 않을 수가 없어서 삼가 조장(弔狀)을 쓰고 겸하여 부지(賻紙) 한 다발을 올립니다. 나머지 할 말은 천만 가지가 많습니다만, 돌림병이 조금 물러가면 장례 기일이 정해진 연후에 한번 궤연(几筵)에 나아가서 위로는 끝없는 애통함을 다하고 아래로는 변변치 않은 제수를 올리면 오히려 마음에 부담이 되지 않을 것 같습니다. 형이 어머니의 병환에 손가락을 잘라 피를 먹이셨다는데 지금은 나아졌는지요? 동생은 비록 어리지만, 책임이 가볍지 않으니 오직 더욱 신경을 쓰시고 감정을 억제하시어 본성을 멸하는 것은 효도가 아니라는[滅性非孝] 경계를 범하지 말기를 선공과 늙은 나는 깊이 바라는 것입니다. 삼가 글을 올리니 살펴주십시오. 갑진년(1784, 정조8) 윤3월 6일 세하(世下)7) 황윤석이 통곡하며 글을 올립니다. 송 석사 형제의 행점차(行苫次)8)에 1) 조장을 받는 사람이 죽은 사람의 아들들이기 때문에 선공이라고 하였다.
2) 〈고봉 선생 연보〉와 택당이 지은 〈시장(諡狀)〉에는 태인(泰仁)에 이르러 볼기에 종기가 났으며 고부(古阜)에서 사돈 김점(金坫)이 문병을 왔다고 기록되어 있다. 김점은 고봉의 큰며느리 친정 부친으로 호가 매당(梅塘)이다. 3) 두 사람의 스승인 김원행(金元行)이 있던 양주의 미음(渼陰). 4) 즉길(卽吉): 상(喪)이 끝나 상복(喪服)을 벗고 길복(吉服)으로 갈아입는 것을 이른다. 5) 이때 부안 현감은 충민공(忠愍公) 윤각(尹慤)의 후손인 윤수검(尹守儉)이다. 6) 지금 전북 정읍시 소성면 보화리에 와석 삼거리가 있다. 상이 난 부안에서 장성으로 가는 길에 지나는 곳으로 황윤석이 사는 흥덕에서 3리쯤 되는 곳이라고 하였다. 7) 세하(世下): 대대로 세교(世交)가 있는 집안사람에게 자칭하는 겸사(謙辭). 8) 행점차(行苫次): 점차(苫次)는 부모 상중에 거처하는 곳을 말하는데, 객지에서 상이 나서 이동 중이기 때문에 행점차라 한 것이다. [탈초] 胤錫慟哭再拜言 此何凶變 此何凶訃/ 先公之賢而壽不滿五十耶/ 先公之學而位不過六品耶 旣貧窮奔寓于數邑 竟癘疫卒逝[於道]/路 蓋如奇高峯之就古阜子婦家而終者 謂之考終于正寢[耶]/ 嗚呼 曾謂先公而亦不幸如之耶 胤錫於/先公 計其犬馬之齒 則禮先一飯矣 而泮中之蒙訪 渼上之結義 與[其]/先曾王考狀草之受托 蓋無一 非今世多有之事 而近卄稔 一南一北 相[逢]/逐久矣 自南平而茂長也 猶恨 相距之不甚近 自茂長而長城也 差幸/其不甚遙 況今三月卽吉以後 又日夜擬進敍之時 則庶幾客蠟/來賁之是謝爾 嗚呼 孰謂遽永隔幽明耶 頃赴鄙鄕 李君仁燮□/之未殯也 偶逢邊氏二三人 聞/先公以擧家經染而且饑 赴扶安尹倅 將以之避 껍癘而求賙 故意□/日 必我過也 方西北引領而企之 而乃有此猝地凶訃耶 姻家仁□/慈夫人率哀侍伯季往訣 此猶可幸 而初終 껍凡百 又如何措置 似□ /喪行當在明日 必過臥石新基之三歧酒幕 此東距三里許矣 老物/不死 以情以禮 正宜一鷄酒出哭途左 껍而一網輪染 心所畏悸 以聖人愼疾/之義推之 亦不容徑行 奈何奈何 二哀以此孤陋 雖未及一眄 而事同一家 不可默而無問 敬修弔疏 兼[呈賻]/紙一束 自餘千萬 只須染氣稍淸 襄奉有期 然後一進 껍/几筵 上以洩無極之慟 下以修不腆之具 此猶可爲不負心者耶/伯哀於/慈患血指 今或更爾否 季雖少矣 責不輕矣 惟加意抑情 껍毋犯滅[性]/非孝之戒 則/先公與老物之所深望者耳 謹奉疏 伏惟/哀察 甲辰閏三月六日 世下 黃胤錫 慟哭疏上 宋碩士伯季 行苫次 * □는 탈락 글자, [ ] 속은 추정 글자. [해설] 황윤석은 1759년(영조 35) 31살에 진사에 합격하였고, 송상은은 4년 후인 1763년 진사가 되고 30살 되던 1771년(영조 47) 대과에 급제하였다. 두 사람은 13살 차이였지만 같은 호남 출신으로 성균관에서 함께 공부하고 미호(渼湖) 김원행(金元行)을 한 스승으로 모시며 도의로 맺어진 친한 사이였다. 송상은은 승정원ㆍ승문원ㆍ봉상시ㆍ종부시에서 봉직하였으며, 1766년(영조 42) 음직으로 벼슬길에 나선 황윤석은 장릉참봉(莊陵參奉), 사포서(司圃署)의 직장ㆍ별제, 익위사의 익찬(翊贊) 등을 거쳐, 1779년(정조 3) 목천 현감이 되었다가 이듬해 파직되고 1781년 모친상을 당하였다. 황윤석은 벼슬이 끊기면 흥덕 고향으로 내려와 학문에 몰두하였다. 문과 급제 당시에는 남평에 살았던 송상은이 무장을 거쳐 장성으로 이사하여 지내면서 자주 황윤석을 찾아 학문을 강론하였다. 그런데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는 것이다. 돌림병을 피하려고 친구인 부안 현감 윤수검(尹守儉)에게 의탁하여 도움을 받으려고 가는 길이었다. 황윤석은 벼슬은 높지 않았으나 학문이 방대하고 다양한 실학의 학풍을 이어받아 발전시켰을 뿐 아니라 서학에도 조예가 깊었다. 『이수신편(理藪新編)』 『자지록(資知錄)』 『이재유고(頤齋遺稿)』 등의 저술을 남겼는데, 평생에 걸친 기록인 『이재난고(頤齋亂藁)』는 분량과 내용에 있어서 당대 지성과 생활사에 대한 압권이라고 할 수 있다. 『이재난고』 1784년(甲辰, 정조 8) 윤3월 5일과 6일에도 송상은을 직접 조문하지 못하고 부의와 조장을 보내 위문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그림2 『이재난고』 1784년 윤3월 부분 5일 경신일. 흐리고 바람. ○ 장성 원덕리 사람으로 송학신 일행을 따라온 사람이 권성발이 통지한 부고를 가지고 왔다. 그가 지금 장성 송군이 거처하는 곳 본가에 가는데 내일 새벽에 다시 들릴 것이라고 하였다. 초7일에 상이 나가니 장성에 돌아가야 한다고 하였다. 지금 행차를 계산하면 아마 와석 신촌의 삼거리를 지날 텐데 전염병 기운을 조심해야 할 것이다. (중략) 6일 신유일. 해가 나고 바람. 송군의 남자 종이 다시 상가에 간다고 하여 조장(弔狀)을 쓰고 부지(賻紙) 한 다발을 그의 두 아들 수묵 등에게 보냈다. (하략) 五日 庚申 陰風 ○ 長城遠德里人 從宋學臣行中者 以權聖發所通訃書來 言渠方往長城宋君寓所本家 欲以明曉再過 因言初七喪行 當歸長城 余計此行 必過臥石新村之三歧店中 而染氣可戒 奈何 (중략) 六日 辛酉…暘風 宋君奴子 再赴喪側 作弔狀 賻紙一束于其二孤脩黙等 (하략) 글쓴이 김현영(金炫榮) 한국고문서학회 명예회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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