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유학문선] 조선의 말년사를 성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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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유학문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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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역사책은 전통적으로 중국의 역사책을 모델로 삼았다. ‘사기’(『삼국사기』), ‘통감’(『동국통감』), ‘강목’(『동사강목』)이 인기 있는 이름이었다. 근대에 들어와 역사책의 이름이 달라졌다. 폴란드의 역사를 담은 ‘말년사’(『파란말년사』), 이집트의 역사를 담은 ‘근세사’(『애급근세사』), 비엣남의 역사를 담은 ‘망국사’(『월남망국사』)가 널리 읽혔다. 이때만큼 말년사를, 근세사를, 망국사를 열심히 읽었던 적이 또 있었을까? 이윽고 역사 읽기는 곧 역사 쓰기로 변화한다. 1911년 호남 유학자 양재경은 조선의 마지막 역사를 총평하는 사론을 지었다. 그는 무엇을 말하고 싶었을까? [번역] 국가의 화란이 임오년(1882)에 일어나 경술년(1910)에 끝났다. 화란은 하루아침에 일어나는 일이 아니니 서리를 밟게 되면 단단한 얼음이 생기듯 반드시 그 시초가 있는 법이다. 옛날의 현명한 임금과 재상은 늘 미연에 방지했기 때문에 화란이 일어나지 않았고 더러 처음에 헤맸어도 나중에 능히 깨달아 잘못을 뉘우쳐 새 정치를 열었던 적이 많았다. 우리나라 임금과 신하가 만약 임오년에 잘못을 뉘우쳤으면 갑신년(1884) 난리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고 갑신년에 잘못을 뉘우쳤으면 갑오년(1894)과 을미년(1895)의 변란, 을사년(1905)과 병오년(1906)의 화란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며 경술년(1910)의 망국도 없었을 것이다. 저 임오년의 군사들은 본래 글 읽는 선비나 군자의 부류가 아니니 어찌 ‘부모가 자애롭지 않아도 자식은 효도해야 한다’는 의리로 책망할 수 있겠는가? 더욱이 그 마음이 실은 부모 형제와 처자식이 헐벗고 굶주려 이산함으로 인해 옳고 그름을 돌아보지 않고 목숨 걸고 난리를 일으켰으니 당시의 군자는 이들을 위무하고 통제함에 마땅히 경중의 차이를 두었어야 했다. 민비가 승하했다고 관문(關文)을 발송하고 상복을 입었던 까닭에 당시 언론은 군사들의 난리가 대원군에게 뿌리가 있다고 여겨, 만 리 밖 머나먼 땅1)에 대원군을 유폐했다. 대원군이 갑자년(1864) 이래 사친의 권세를 빙자해 천리를 거스르고 인륜을 어지럽혀 종사를 뒤집기에 이른 일은 참으로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다. 하지만 국정에 간여하지 못하게 하는 것으로도 충분하거늘, 군부를 낳고 길러준 어버이를 어찌 습격해 체포하여 천하의 비웃음을 사게 했단 말인가? 갑신년 다섯 역적2)이 거리낌 없이 왜적을 불러들여 임금을 침범했는데도 국법을 가하지 않았고 그 후 영효(泳孝)가 돌아와 글을 올려 원통함을 호소하자 다시 관작을 주었거늘 몰래 역모를 꾸미다 해외로 달아나 요행히 모면하고는 다시 와서 입경하여 함부로 대신의 자리를 차지하고 마침내 임금이 선위(禪位)하는 날 갑자기 완용(完用)을 죽여 죄명에서 벗어나려 했으나 어찌 전날의 잘못을 속죄할 만한 일이었겠는가? 임용할 때 이렇듯 충신과 역적의 분별이 없었으니 나라가 나라답지 못한 지가 오래되었다. 갑오년의 비도(匪徒)가 방백과 수령의 악독한 탐학을 참지 못하고 무리를 모아 창궐하여 괴성으로 사람들을 미혹시켜 관리를 죽이고 백성을 살육했다. 정권이 이를 스스로 제지하지 못하고 도리어 일본 병사를 시켜 토벌해 평정했으니 외국 오랑캐에게 수모를 받아 멸망을 자초한 것이 참으로 당연하다. 갑오년 6월의 변란3)으로 말하자면 당초에 저들이 화친을 간청할 때 서울 재상과 산림 학자가 마땅히 최대부(崔大夫)4)처럼 궁궐 앞에 엎드려 저들을 물리쳐 끊는 상소를 올렸어야 했는데 방관하고 침묵하거나 선동하여 조장하는 바람에 개항과 통상을 허락했고 필경 화호(和好)를 맺어 조약5)을 만들었다. 이제 선왕의 전장을 뜯어고치고 성현의 말씀을 저버리고 전통 있는 복식을 망가뜨리고는 ‘자유’라 ‘독립’이라 이름했으나 실상은 야만을 써서 문명을 변개시키고 인간을 강등시켜 금수로 만든 것이었다. 정령(政令) 하나 내는 일도 거조(擧措) 하나 내는 일도 반드시 왜적에게 자문해야 했으니 말은 ‘대경장(大更張)’이라 하고 ‘대개화(大開化)’라 했으나 국가를 멸망시키는 구실이었다. 더욱이 갑신년의 달아난 역적6)을 조정에 포진시켰는데도 이들이 외적을 끌고 와서 임금을 해치는 화란이 곧 들이닥칠 줄을 전혀 알지 못했다. 을미년의 사변7)은 전고에 없던 일이었다. 대원군이 자식을 데리고 입궐하여 안팎의 역적들이 왕후를 시해하는 음모에 간여하여 즉시 자기 자식8)이 궁내부대신을 얻도록 했으니 이것을 ‘궁정 혁신’이라 할 수 있겠는가? 조정이 계속해서 두발을 훼손시키는 명령을 내려 전국이 들끓자 팔방의 의사들이 원수를 갚고 역적을 토벌하는 군사를 일으켜 천하에 대의를 펴고자 했는데 역적의 무리가 거짓 왕명으로 군사를 출동시켜 파했다. 을사년 거짓 조약9)이 이루어질 적에 성상께서는 굳게 고집하고 허락하지 않았으나 다섯 적신(賊臣)10)이 조인해 허가하였다. 병오년 양위에 관한 의논이 나올 적에 임금께서는 매우 엄하게 항거했으나 완용과 병준(秉畯)이 억지로 ‘내선(內禪)’을 시켰다. 경술년 7월에 이르러 종사가 영영 끊겼다. 오호라. ‘독립’이 변하여 ‘개화’가 되었고 ‘개화’가 변하여 ‘보호’가 되었고 ‘보호’가 변하여 ‘합병’이 되었다. 밖으로 외국 공관과 담판하지도 못했고 안으로 최후의 결전도 치러보지 못했고 종이 한 조각에 삼천리 강토와 오백 년 종사를 하루아침에 남에게 주었으니 천하 만고에 듣지 못한 일이었다. [원문] 窃惟國家之禍, 起於壬午, 終於庚戌. 夫禍亂之作, 非一朝一夕之故, 履霜堅氷, 必有其漸. 古之明君賢宰, 常防於未萌, 故亂無自而興, 亦或有迷之於始, 而能覺之於後, 懲創改紀者多矣. 我國君臣, 若懲於壬午, 則甲申之亂無起矣. 懲於甲申, 則甲午乙未之變, 乙巳丙午之禍不作, 而無庚戌之無國矣. 夫壬午之軍士輩, 本非讀書士君子之類也, 豈可以父雖不慈子不可以不孝責之乎? 且其心實緣於父母凍餒兄弟妻子離散, 而不顧是非, 冒死爲亂, 則當時君子慰撫操縱, 宜有輕重也. 時論以閔妃昇遐發關受服之故, 謂軍亂根柢於大院君, 幽囚於萬里絶域. 大院君自甲子以來, 藉私親之勢, 其所以逆天理亂人倫, 致宗社顚覆者, 固不可勝記. 然使不得干預國政則可, 是君父劬勞之親, 豈有使襲執而取天下之譏者乎? 甲申五逆之招倭犯上, 無所顧忌, 而王章不加. 其後泳孝之還, 上書鳴寃, 復授官爵. 及其陰謀不軌, 逃海倖免, 而又來入京, 冒據大臣之位, 乃於禪位之日, 欲掩殺完用而逃名, 豈足以續前日之罪也? 任用如是忠逆無分, 國不可爲國久矣. 甲午匪徒, 不忍方伯守令貪虐之毒, 聚黨猖獗, 鼓妖惑衆, 戕殺官吏, 魚肉生民, 柄用自不能制止, 反使日本兵討平之, 其受侮外夷, 自取滅亡, 固其所也. 以六月之變言之, 當其初之乞和也, 京宰山林, 當如崔大夫之伏闕而陳斥絶之䟽, 而或袖手結舌, 或逐波助瀾, 許開舘而通商, 竟和好而成約. 改先王典章, 棄法言毁法服, 名爲自由獨立, 而其實用夷變華, 降人爲獸, 一政令一擧措, 必咨於倭, 名之曰大更張大開化, 作亡人家國覇柄. 且使甲申逋賊布列朝著, 殊不知引寇反噬之禍迫在朝夕也. 乙未之變, 前古所未有也. 大院君率子入闕, 干與於內外諸賊弑后之謀, 卽使其子得宮內府大臣, 是可曰革新宮廷乎? 朝廷繼有毁髮之令, 全國鼎沸, 八方義士, 起復讎討賊之師, 將伸大義於天下, 而逆黨矯旨, 發兵罷之. 乙巳僞約之成, 聖上堅執不許, 而五賊臣調印許可. 丙午讓位之議, 上拒斥甚嚴, 而完用秉畯强之內禪, 至於庚戌七月而宗社永絶矣. 嗚呼! 獨立變而爲開化, 開化變而爲保護, 保護變而爲合倂. 外而未得談辦於公舘, 內而未得背城一戰, 以一片紙擧三千里疆土五百年宗社, 而一朝與人, 天下萬古所未聞也. (하략) [출처] 양재경(梁在慶), 『희암유고(希庵遺稿)』 권7 「국조기사(國朝記事)」 1) 만 리 밖 머나먼 땅: 청나라 보정부(保定府)이다. 대원군은 1882년부터 1885년까지 보정부에 유폐되어 있었다. 이 시기의 일기가 『대원군천진왕환일기(大院君天津往還日記)』이다.
2) 갑신년 다섯 역적: 갑신정변의 주역들을 가리킨다. 조선 정부는 김옥균, 박영효, 홍영식, 서광범, 서재필 다섯 사람을 주모자로 생각했다. 이 가운데 해외로 도주한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네 사람을 가리켜 사흉(四凶)이라 일컬었다. 본문처럼 갑신정변의 주모자 다섯 사람 전체를 가리켜 오역(五逆)이라 칭하는 경우는 드물다. 3) 갑오년 6월의 변란: 1894년 동학운동이 일어나 조선 정부의 요청으로 청나라 군대가 출병하자 동시에 조선에 출병한 일본 육군이 경복궁을 점령한 사건을 가리킨다. 이 사건을 계기로 조선 정부는 일본 정부의 통제 하에 타율적인 갑오개혁에 착수했다. 경복궁 점령 이틀 후 일본 해군이 아산만 풍도에서 청국 함대를 격침시키면서 청일전쟁이 발발하였다. 4) 최대부(崔大夫): 최익현을 가리킨다. 그는 1876년 음력 정월 도끼를 들고 광화문 앞에 나아가 일본과의 수호조약을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 5) 조약: 1876년 조선과 일본 사이에 체결된 수호조규이다. 세칭 강화도 조약이라 한다. 6) 갑신년의 달아난 역적: 박영효를 가리킨다. 갑신정변 실패 후 일본에 망명해 있던 그는 1894년 청일전쟁이 발발하자 조선에 귀국하였고 김홍집 내각에서 내부대신으로 발탁되었다. 7) 을미년의 사변: 1895년 명성왕후시해사건을 가리킨다. 8) 자기 자식: 흥선대원군의 장남이자 고종의 형인 이재면을 가리킨다. 9) 을사년 거짓 조약 : 1905년 한국 외교권의 일본 위탁 관리를 내용으로 하는 이른바 을사늑약을 가리킨다. 10) 다섯 적신(賊臣) : 1905년 한국 외교권의 일본 위탁에 찬성했던 다섯 대신을 가리킨다. 이완용, 이지용, 박제순, 이근택, 권중현으로 세칭 을사오적이다. [해설] 1906년 4월 30일 『황성신문』은 일본 유신 30년의 역사를 연재하기 시작했다. 메이지 유신이라는 일본 역사의 성공담을 한국 사회에 전파하여 문명개화를 향한 분발 자강을 독려하고자 하는 기획이었다. 이등박문(伊藤博文)이 최근 초대 통감으로 한국에 왔으나 동요하지 말자. 꿋꿋하게 진보의 한길로 나아가자. 희망의 30년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1907년 7월 26일 『대한매일신보』는 한국 변란 30년의 역사를 논설로 내보냈다. 한국은 역사의 비상한 변국을 만나 폴란드, 이집트, 비엣남처럼 끝내 쇠망하고 말 것인가? 고종 황제가 최근 ‘황위(皇位)에서 폐립’된 사건은 한국 역사의 실패담에서 절정에 달하는 순간이었다. 30년은 유신에서 변란으로 빛이 바랬다. 미래를 향한 희망의 상징에서 과거를 향한 회한의 상징으로 퇴색해 버렸다. 그럼에도 여기에서 주저앉을 수는 없는 일, 바로 이때야말로 ‘신대한(新大韓)’을 세울 때가 아니던가. 고종의 퇴위와 함께 자각된 ‘신대한’은 고종 사후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수립으로 형체가 갖추어졌다. 한국의 30년 말년사, 무엇이 문제였을까? 임오년(1882)의 군란과 갑신년(1884)의 정변으로 중국군과 일본군이 이 땅에 주둔했고 충돌했다. 다시 갑오년(1894)의 경복궁 점령과 을미년(1895)의 국모 시해 사건, 그리고 갑진년(1904)과 을사년(1905)의 국권 피탈 조약을 차례차례 겪었다. 만약 대한 인민이 첫 번째 변란에서 정신을 차려 분발 자강했다면? 만약 대한 인민이 두 번째 변란에서 복수설치를 맹세하고 실력을 배양했다면? 그러나 한국인은 장기간의 평화 속에서 편안히 놀고 게으르게 지내며 현실로부터의 각오라는 것이 없었다. 『대한매일신보』의 이 논설은 파급력이 상당하였다. 한국 근대사의 고전적인 저작으로 손꼽히는 박은식의 『한국통사(韓國痛史)』(1915년 중국 상해에서 출판)는 고종 황제가 퇴위하여 경운궁에 유폐된 사실을 기록하고 자신의 사론을 덧붙였다. 조선의 군신이 임오년 변란을 겪은 뒤 위(衛)나라 문공처럼 정치에 힘썼으면 중흥의 터전을 세웠을 터이고, 갑오년과 을미년 변란을 겪은 뒤에도 월(越)나라 구천처럼 와신상담했다면 독립을 잃지는 않았을 터인데, 자강의 각성이 없이 편안히 놀고 게으르게 지냈기 때문에 결국 국망을 맞이했다는 것이다. 능주 유학자 양재경(梁在慶, 1859~1918)이 『한국통사』에 앞서 1911년 조선의 말년사를 기록하고 이를 총평하는 사론을 작성했을 때, 그 역시 동일한 관점이었다. 옛날의 현명한 군신은 잘못을 뉘우쳐 새 정치를 열었건만, 조선의 군신은 왜 그러하지 못했는가? 임오년의 잘못을 뉘우쳤으면 갑신년 난리는 일어나지 않았을 테고, 갑신년의 잘못을 뉘우쳤으면 갑오년과 을미년, 을사년과 병오년의 화란은 일어나지 않았을 테고, 그러면 경술년의 국망도 찾아오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조선 말년사가 국망으로 치닫는 과정을 4단계로 제시하였다. 곧 ‘독립’(1884년)에서 ‘개화’(1894년)로, ‘개화’에서 ‘보호’(1905년)로, ‘보호’에서 ‘합병’(1910)으로. 조선 말년사의 각 변란들을 인식하고 더 이상의 악화가 없도록 이를 막아내야 했다는 생각은 같았지만, 그의 주안점은 조선 말기 정치세력이 창출했던 역사적 국면의 변화와 그 마지막 종착지로서 조선 종사의 멸망에 놓여 있었다. 조선의 말년사에서 조선 구체제의 망국사는 물론 조선 신체제를 향한 혁명사를 투시했던 『한국통사』의 관점과는 이 지점에서 달랐다. 유학자로서 ‘신대한’을 전망하기에는 국망 직후의 충격이 컸다. [참고문헌] 『皇城新聞』 1906년 4월 30일, 「日本維新三十年史」 『大韓每日申報』 1907년 7월 26일, 논설 「大韓三十年間變亂歷史」 『韓國痛史』 제3편 제42장 「日人之監制韓皇」 노관범, 「『한국통사』의 시대사상」 『한국사상사학』 33, 2009 예안, 「대한제국기 유신의 정치학」 『개념과 소통』14, 2014 허재영, 「지식 수용의 차원에서 본 『황성신문』 「일본유신 30년사」 역술 과정과 그 의미」 『한민족어문학』 70, 2015 장규식, 「3·1운동 이전 민주공화제의 수용과 확산」 『한국사학사학보』 38, 2018 글쓴이 노관범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부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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