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경의 기억] 대한민국 국호의 소출처, ‘한’, 그리고 ‘마한’ 게시기간 : 2023-08-16 07:00부터 2030-12-24 21:21까지 등록일 : 2023-08-07 13:45
재단법인 한국학호남진흥원
풍경의 기억
|
||||||||
우리나라의 국호와 ‘한’, 그리고 마한 우리나라의 국호는 ‘대한민국(Republic of Korea)’이다. 아쉽게도 분단이 되어 있고, 분단의 한 쪽에서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Democratic People's Republic of Korea)’이라고 한다. 고유한 나라이름으로 남한은 ‘한’, 북한은 ‘조선’을 각각 채택했다. 영문으로는 ‘Korea’로 같다. 통일이 된다면 국호를 뭐로 할까? 물론 어떤 방식으로 통일되느냐에 따라 다르겠지만 …. 어쨌든 거론되는 이름들은 대한, 조선, 그리고 고려이다. 비교적 익숙한 이름들인데, 신조어들도 거론되곤 한다. 대한은 남한, 조선은 북한, 고려는 남북한 공히 사용하는 영문 이름 Korea가 고려라는 국호에서 비롯된 데서 각각 연유한다. 여기서는 우리나라의 현재 국호인 ‘대한민국’을 대상으로 그 이름이 어떻게 나오게 되었는지? 그 역사성, 계승성 등을 살피면서 ‘한’이란 글자를 매개로 마한과의 관련성을 찾아보고자 한다. 대한제국의 탄생과 삼한의 내력 1897년(고종 34) 5월 이후 황제위에 오를 것을 요청하는 각계각층의 상소문들이 빗발치듯 이어졌다. 그러다가 9월 29일 봉조하 김재현(金在顯) 등 관원 716명이 연명으로 상소를 올려 칭제, 즉 황제를 칭할 것을 청하였다.1) “갑오경장 이후로 독립하였다는 명분은 있으나 자주(自主)의 실체는 없으며 국시(國是)가 정해지지 않으니 백성들의 의혹이 없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오늘날을 위한 계책으로는 마땅히 위의(威儀)를 바로세우고 존호를 높임으로써 백성들 마음이 추향(趨向)하는 방향이 있게 하는 데 있습니다.”
라 하여 칭제를 청하고. 이어서 “논의하는 자들이 말하기를, ‘「왕」이나 「군(君)」이라고 하는 것은 한 나라 임금의 칭호이며 「황제」라는 것은 여러 나라를 통틀어 관할하는 임금의 칭호이므로 넓은 영토와 많은 백성들을 가지고 여러 나라를 통합하지 못하였다면 황제라고 불러서는 안 된다’고 합니다.”
라 한 다음, 그 반론으로 “그러나 우리나라는 삼한(三韓)의 땅을 통합하여[統合三韓] 영토는 사천리를 뻗어있고 인구는 2천만을 밑돌지 않으니 폐하의 신민(臣民)된 사람치고 누군들 우리 폐하가 지존(至尊)의 자리에 있기를 바라지 않겠으며 지존의 칭호를 받기를 바라지 않겠습니까? 옛것을 인용하여 오늘에 증명하고 여정(輿情)을 참작하고 형세를 헤아려 보아도 실로 시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라 하여 삼한의 땅을 통합했음을 들어 “여러 나라를 통틀어 관할하는 임금”에 다름없다고 주장하였다. 10월 11일 원구단(圜丘壇)에 첫 제사를 앞두고 어전회의에서 국호를 무엇으로 정할지 관리들과 논의하였다. 이때 고종은 "우리나라는 곧 삼한(三韓)의 땅인데, 국초(國初)에 천명을 받고 하나의 나라로 통합되었다. 지금 국호를 ‘대한(大韓)’이라고 정한다고 해서 안 될 것이 없다. 또한 매번 각국의 문자를 보면 조선이라고 하지 않고 한(韓)이라 하였다. 이는 아마 미리 징표를 보이고 오늘이 있기를 기다린 것이니, 세상에 공표하지 않아도 세상이 모두 다 ‘대한’이라는 칭호를 알고 있을 것이다."
라 하여 국호를 ‘대한’으로 정하였다.2) 우리나라는 곧 삼한의 땅인데, 국초에 천명을 받고 하나의 나라로 통합되었고, 각 나라의 사람들이 이미 조선을 ‘한’이라고 부르고 있으니, 세상이 모두 다 ‘대한’이라는 칭호를 알고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10월 12일(음 9월 17일) 백악산(白嶽山)의 남쪽에서 천지(天地)에 고유제(告由祭)를 지내고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10월 13일 반조문(頒詔文)을 내렸다.3) 거기서 "짐은 생각건대, 단군과 기자 이후로 강토가 분리되어 각각 한 지역을 차지하고는 서로 패권을 다투어 오다가 고려 때에 이르러서 마한(馬韓), 진한(辰韓), 변한(弁韓)을 통합하였으니, 이것이 ‘삼한’을 통합[統合三韓]한 것이다.“
라 하였다. 즉 고려 때 마한·진한·변한을 통합하였다고 하여 이를 ‘통합 삼한’이라 불렀다. 앞서 고종은 삼한일통을 국초라 하였는데 반조문에서는 이를 고려 때의 일로 보았다. 그런 의미에서 국초는 조선이 고려를 계승했다는 인식에서 나온 것으로 고려 초를 뜻하는 것으로 보인다. ‘삼한일통’에 대한 인식은 어떻게 달라졌나? 신라 통일 즈음에 삼한은 고구려·백제·신라의 삼국을 일컫는 말이 되었다. 고구려를 마한, 신라는 진한, 백제를 변한에 대응시켰다. 삼국을 삼한으로 보는 인식은 최치원의 글에 분명하다. 신라 말기 최치원(崔致遠, 857~ ?)의 상태사시중장(上太師侍中狀, 시중에게 올린 편지)이란 편지의 서두에 “엎드려 듣건대 동해 밖에 삼국이 있었으니 그 이름은 마한·변한·진한이었습니다. 마한은 곧 고[구]려, 변한은 곧 백제, 진한은 곧 신라입니다[伏聞東海之外有三國, 其名馬韓·卞韓·辰韓. 馬韓則髙麗, 卞韓則百濟, 辰韓則新羅也].”
라 하여 동해 밖 세 나라를 마한=고[구]려, 변한=백제, 진한=신라로 지칭하였다. 삼국을 곧 삼한으로 인식했던 것이다. 따라서 최치원 이래 ‘한’은 곧 ‘삼한’으로 우리나라 전체를 지칭하는 말로 받아들였다.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는 신라의 통일을 두고 ‘삼한일통’, ‘삼한일가’ 등으로 표현하였다. 요약하자면 삼국시대 사람들은 한반도의 세 나라를 삼한이라 불렀고, 이것이 후대에 이어져서 삼한을 삼국이라 부르고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후 하나의 '한(韓)'으로 자리 잡은 것이다. 그리고 이는 다시 조선에 와서 “고려 태조가 계림(鷄林)인 신라를 멸망시키고 압록강(鴨綠江)을 차지했던 후고려를 쳐서 삼한을 합쳐 통일하였습니다[合三韓而一之].”4)
라 하듯이 고려가 삼한을 통일한 것으로 해석하였다. 조선왕조에 들어와서 처음으로 고조선까지 포함하여 우리 역사 전체의 체계를 세운 통사들이 간행되었다. 이때 국가가 편찬했던 사서에서는 신라의 통일보다 고려의 통일을 더 높게 평가하고 있었다. 이는 조선이 중국 요임금과 순임금의 계승과 같은 선양의 방식으로[역성혁명] 통치권을 이어받아 유신을 이루었으므로, 진정한 삼한통일의 공동체 체험의 역사를 신라보다 고려에서 이어받았음을 내세우고자 하는 뜻으로 해석한다. 곧 통일공동체 의식의 출발을 고려 단계의 삼한 의식으로 보고, 조선의 건국을 통해 이를 한 단계 더 진전, 확대시켰다고 보고 있다.5) 이는 지리고증과는 다른 차원의 것으로 통일에 대한 인식, 즉 역사공동체 성립에 대한 문제였다. 따라서 삼국을 거치면서 고구려까지를 포함하여 ‘삼한’이라 부르게 된 인식은 고려 때는 물론 조선까지도 이어졌다. 삼한은 곧 삼국이었다. 남자남 북자북(南自南北自北)6) 삼한의 위치 비정은 시기에 따라 달랐다. 삼한-삼국의 계승관계에 주목하여 마한=고구려, 변한=백제, 진한=신라로 이어진다고 보아, 삼한을 삼국과 연결시킨 최치원의 삼한인식은 줄곧 부정하기 힘든 정설로 받아들여졌다.7) 그러던 인식에 변화가 생기게 된 것은 700여 년의 세월이 지난 후, 한백겸(韓百謙, 1552∼1615)에 이르러서였다. 지금 한국사 교과서를 보면, 삼한의 위치에 대해서 마한은 경기·충청·전라지방, 진한은 낙동강의 동쪽, 변한은 낙동강의 서쪽으로 비정하고 있다. 이것이 현재의 통설이다. 이는 『후한서』「동이열전」「한(韓)」조를 보면, “한(韓)은 세 종족이 있으니, 하나는 마한, 둘째는 진한(辰韓), 셋째는 변진(弁辰)이다. 마한은 서쪽에 있는데, 54국이 있으며, 그 북쪽은 낙랑, 남쪽은 왜와 접하여 있다. 진한은 동쪽에 있는데, 12국이 있으며, 그 북쪽은 예맥과 접하여 있다. 변진은 진한의 남쪽에 있는데, 역시 12국이 있으며, 그 남쪽은 왜와 접해 있다. 모두 78개 나라로 백제(伯濟)는 그중의 한 나라이다. 큰 나라는 만여 호, 작은 나라는 수천 가(家)인데, 각기 산과 바다 사이에 있어서 전체 국토의 넓이가 방 4천여 리나 된다. 동쪽과 서쪽은 바다를 경계로 하니 모두 옛 진국(辰國)이다.”
라 되어 있는데, 이는 사실 지금의 통설과 같다. 하지만 『후한서』의 설이 통설로 수용되는 것은 한백겸에 와서였다. 이른바 고증학의 발달과 맞물려서였다. 즉 지리고증의 결과였다. 앞서 보았듯이 삼한은 고려시대와 조선 중기까지 고구려, 백제, 신라를 지칭하여 한반도 전체를 포괄하는 명칭이었다. 이런 삼한을 재해석하여 한강 이남을 ‘한국’이라 하고 마한·진한·변한을 그 범주에 넣어서, 한강 이북의 ‘조선’과 구분하는 인식은 한백겸에게서 비로소 생겼다. 한백겸에 의해 ‘남자남 북자북’의 구분이 나오면서 ‘한국’의 범위는 남한으로 제한되었고 북은 ‘조선’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북 전체를 아울러서는 여전히 ‘삼한’이라 부르는 관습은 유지되었다. 그래서 ‘한’은 곧 우리나라를 의미하게 되었다. 한반도 내의 정치체가 바뀌어도 이 지역 전체를 ‘한’이라 불렀다. 이처럼 ‘삼한’에 대한 인식은 단지 고증에 따른 위치 비정의 문제와는 또 다른 차원의 문제, 즉 ‘통일(역사)공동체’에 대한 인식의 문제가 있었다. 어찌 보면 한백겸 이전에는 ‘조선’이든 ‘삼한’이든 어느 경우든 한반도 전체 또는 그 이상의 영역을 포함하였다. 그러던 것이 한백겸 이후 ‘남한국’과 ‘북조선’으로 구분되었다. 이것이 지리고증으로는 타당하겠지만, 이렇게 구분하게 되면서 이후 ‘대한’과 ‘조선’을 남과 북으로 나누게 되는 씨가 되었던 것은 아닐까? 그래도 여전히 삼한=삼국이고 삼한은 곧 우리나라라는 인식은 강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이는 앞서 보았듯이 ‘대한제국’이란 이름에 고스란히 반영되었다. 국호를 중국으로부터 책봉된 나라 이름인 ‘조선’을 버리고 제국에 어울리는 자주적 표현으로 ‘대한’을 택했던 것이다. 국제(國制)를 말할 때는 ‘대한국’이라고 표현했다. 앞서 인용한 9월 29일자 칭제를 청하는 연명상소에서 “갑오경장 이후로 독립하였다는 명분은 있으나 자주(自主)의 실체는 없”다고 하여 칭제를 함으로써 자주의 실체를 보일 것을 청하였다. 이를 통해 보더라도 대한제국의 탄생은 중국으로부터의 ‘독립’, ‘자주’에 있었다. ‘대한’이란 명칭도 그랬고, 제국으로 국체를 바꾸는 것도 같은 의미였다. 한국 국호의 폐지
【그림 1】 조선총독부관보 제1호에 게재된 한국 국호 폐지에 대한 칙령(勅令) 제318호 나라를 잃던 국치일 당일에 일제에 의해 ‘한국’ 대신에 ‘조선’의 사용이 강제되었다. 「한국 국호 폐지에 대한 칙령」(칙령 제318호, 1910년 8월 29일)에서 “한국의 국호는 고쳐 지금부터 조선이라 칭한다”고 하고 공포한 날부터 시행하였다. 이에 일제가 패망하기 전까지 ‘조선’이라는 용어 이외에 우리나라를 지칭하는 다른 용어는 합법적으로 사용할 수 없게 되었다. 일제강점기에 국내에서는 조선민족이라는 표현만 사용이 가능하였다. 그렇다고 ‘대한’이란 구호가 사라진 건 아니었다. ‘대한민국’ 국호의 출현 다시 ‘대한’이란 국호가 나타난 것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였다. 그렇다고 대한민국이란 명칭이 쉽게 정해진 건 아니었다. 여운형 등은 ‘대한’ 대신 ‘조선인민공화국’ 등 ‘조선’이 들어간 국호로 칭하자고 주장했으나 신석우 선생이 “대한으로 망했으니, 대한으로 흥하자”라는 의견을 냈는데 이것이 임정 요인 다수의 공감대를 얻어 ‘대한’으로 결정되었다고 한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우리 역사상 최초의 공화주의 정부였다. 따라서 대한제국의 ‘제국’이 ‘민국’으로 바뀌었다. ‘대한’이란 이름은 대한제국에서 그대로 이어졌지만, 나라의 주인은 황제에서 백성으로 크게 달라졌다. 우대한 좌조선 ‘대한’과 ‘조선’이라는 국호를 대립적으로 사용하는 경향은 일제강점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즉 우익은 대한, 좌익은 조선, 중간층은 고려라는 국호를 선호했다. 사학연구자들 사이에서도 박은식은 ‘한’을, 신채호는 ‘조선’을 사용하는 등 서로 달랐다. 대체로 1910년대 국외의 독립운동 단체들이나 국내 비밀단체의 명칭에는 ‘한’이란 표현이 널리 사용되었다. 이러한 경향은 3·1운동까지도 이어졌다. 다만 1920년대 이후 사회주의 이념이 도입되어 사회세력화하면서 사회주의자들은 ‘한’ 대신 ‘조선’이라는 용어를 고집했다. 이에 따라 ‘우대한 좌조선’이라는 의미의 대립 구도가 등장하게 되었다. 독립운동 단체에서 ‘한’을 사용했던 이유는 그러한 단체의 지도자들이 대한제국 시기에 활동을 했었거나 이념적으로 자강운동의 연장선상에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일제의 병합으로 ‘대한’이 ‘조선’이 되었으므로 이를 부정하고 국권을 되찾는다는 것이 중요했기 때문이었다.8)
한편, 일제강점기에 많은 사람들은 ‘조선’이라는 용어를 사용할 때 단지 이성계가 세운 나라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단군 이래 고조선으로부터 시작하여 역사 속에서 이어 내려온 민족의 얼과 우수한 민족 전통을 상징하는 ‘조선’을 염두에 두었던 것이다. 조선학이나 조선민족에서의 ‘조선’은 1392년에 건국된 조선은 물론 고려와 삼국시대를 포함하여 단군조선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의미의 ‘조선’이었다. 그런 점에서 ‘조선’이라면 이 또한 ‘한’과 마찬가지로 북쪽만이 아니라 우리나라 전체를 뜻한다.9) 이런 이유로 ‘조선’이 워낙 국내에서 관행으로 굳어져 있었기 때문에 민족주의 진영 역시 해방 후에도 ‘조선’을 자주 사용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국호의 결정 ‘한’과 ‘조선’을 둘러싼 좌우의 태도 차이는 해방 후에 더 뚜렷해졌다. 이런 좌우의 태도 차이는 1947년 국호에 대하여 미소공동위원회에 보낸 답신서에서 우파가 ‘대한민국’을, 좌파가 ‘조선인민공화국’을, 중간파가 ‘고려공화국’을 각각 제시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즉 한민당을 비롯한 임시정부수립대책위원회(우익)는 ‘대한민국’, 남로당을 비롯한 민주주의민족전선(좌익)은 ‘조선인민공화국’, 좌우합작위원회와 미소공위대책 각 정당사회단체협의회(중간파)는 ‘고려공화국’을 제시했다. 1947년 7월에 공개된 조선신문기자회의 여론조사에 의하면 ‘조선인민공화국’이라는 국호의 지지율이 가장 높았다고 한다. 1948년의 제헌국회에서도 대한·조선·고려공화국 등이 국호로 거론되었다. 30명의 제헌의원으로 구성된 헌법기초위원회에서 국호 결정을 놓고 표결한 결과, 대한민국 17표, 고려공화국 7표, 조선공화국 2표, 한국 1표로 최종 ‘대한민국’으로 결정됐다. 그리하여 8월 15일 남한에는 ‘대한민국’이라는 임시정부의 국호를 계승한 정부가 수립되었다. 그러자 북한은 9월 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수립을 선포했다. 결국 남북 분단 상황에서 남은 '대한'을, 북은 '조선'을 선택했다. ‘우대한 좌조선’이 이제는 ‘남대한 북조선’이란 대립과 중첩되면서 고착되기에 이르렀다.10) 어쩌면 우대한 좌조선의 맥락에서 나타난 예정된 결론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남북 분단에 따른 국호 사용의 변화 ‘남대한 북조선’이란 대립은 1950년 1월의 대한민국 국무원 고시 제7호, 그리고 무엇보다도 6·25 전쟁과 그 이후 남북 대결을 통해 더욱 확고해졌다. 남북의 분단이 공고화되면서 국호 사용에 대한 추가 조치가 이루어졌다. 즉 단기 4283년(1950) 1월 16일자 관보 제261호를 보면 국무원 고시 제7호로 「국호 및 일부지명과 지도색 사용에 관한 건」이 게재되어 있다. 그 조항을 보면, “1. 우리나라의 정식 국호는 [대한민국]이나 사용의 편의상 [대한] 또는 [한국]이란 약칭을 쓸 수 있으되 북한괴뢰정권과의 확연한 구별을 짓기 위하여 [조선]은 사용하지 못한다. 2. [조선]은 지명으로 사용하지 못하고 [조선해협], [동조선만], [서조선만] 등은 각각 [대한해협], [동한만], [서한만] 등으로 고쳐 부른다. …”라고 하였다. 이를 계기로 ‘조선’이란 명칭은 국호나 지명에 공식적으로 사용할 수 없게 된다.
대한민국의 약칭은 대한(大韓) 및 한국(韓國)으로 정해졌다. 정식 영문은 Republic of Korea를 사용한다. 한국인들이 대한민국이라고 얘기하면 현대의 한국만을 지칭하지만, 한국이라고 할 때는 일컫는 범위가 크게 2가지다. 첫째는 한국 역사상의 나라들(고조선~현대 한국까지)을 통칭하는 경우, 둘째는 현대의 한국만을 지칭하는 경우이다. 한국사라 하면 곧 한국 역사상의 나라들의 역사를 모두 포괄하는 의미가 된다. 연호 사용을 둘러싼 갈등 정부 수립 이후 연호 사용을 둘러싸고도 ‘대한민국’이냐 ‘단기’냐를 놓고 한동안 갈등이 있었다. “ … 나는 이 대회(大會)를 대표하여 오늘의 대한민주국(大韓民主國)이 다시 탄생된 것과, 따라서 이 국회가 우리 나라에 유일한 민족 대표 기관임을 세계 만방에 공포합니다. 이 민국은 기미년 3월 1일에 우리 13도 대표들이 서울에 모여서 국민대회를 열고 대한 독립 민주국임을 세계에 공포하고 임시정부를 건설하여 민주주의의 기초를 세운 것입니다. 불행히 세계 대세에 연유해서 우리 혁명이 그때에 성공하지 못했으나, 우리 애국 남녀가 해내 해외(海內海外)에서 그 정부를 지지하며 많은 생명을 바치고 혈전 고투하여 이 정신만을 지켜온 것이니, 오늘 여기에서 열리는 국회는 즉 대한국민대회의 계승이요, 이 국회에서 건설되는 정부는 즉 기미년에 서울에서 수립된 민국 임시정부의 계승이니 이날이 29년만의 민국의 부활일임을 우리는 이에 공포하며 민국 연호(民國年號)는 기미년에서 기산할 것이요, 이 국회는 전 민족을 대표한 국회이며 이 국회에서 탄생되는 민국 정부는 완전히 한국 전체를 대표한 중앙 정부임을 공포하는 바입니다. …”
라 하였다. 이는 초대 대한민국 국회의장인 이승만이 제헌국회 개원 축사(1948-05-31)에서 한 말인데, 여기서 그는 “기미년에 서울에서 수립된 민국 임시정부의 계승이니 이날이 29년만의 민국의 부활일임을 우리는 이에 공포하며 민국 연호(民國年號)는 기미년에서 기산할 것”을 주장하였다. 따라서 그날을 “대한민국 30년 5월 31일”이라고 기재하였다. 이승만이 대한민국 연호를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한 이래, 1948년 9월 25일 연호에 관한 법률이 제정되어 공용연호가 단군기원으로 확정되기 전까지 ‘정부’ 차원에서는 1948년을 ‘대한민국 30년’으로 하는 대한민국 연호를 사용하였다. 제헌국회는 초대 의장인 이승만의 생각과는 달리 단군기원을 선호하였으나, 임시정부 법통에 대한 애착이 강했던 이승만은 대한민국 연호를 고집하였다. 따라서 대한민국 헌법을 게재한 대한민국 관보 제1호를 보면, 발행처는 대한민국정부공보처이고 발행시기는 “대한민국 30년 9월 1일”로 되어 있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한 해를 ‘대한민국 원년’이라 하지 않고 ‘대한민국 30년’이라 했다. 여기에는 1919년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계승이란 점을 분명히 하겠다는 뜻이 담겨 있다. 다만 정작 헌법 전문에는 연도 표기를 단기 4281년이라고 하였다. 이후에도 국회가 의결하는 법률안에는 계속 ‘단기 4281년’이라고 했지만, 그 법률을 대통령이 공포하는 공포문에는 꿋꿋하게 ‘대한민국 30년’이라고 적었다.
정부 수립 이후, 국회와 정부가 연호를 두고 서로 고집부리는 상황은 1948년 8월부터 9월까지 약 한 달간 계속되었다. 이 싸움은 결국 9월 25일, 국회가 「연호에 관한 법률」을 법률 제4호로 제정, 시행함으로써 마무리되었다. 그 내용은 “대한민국의 공용연호는 단군기원으로 한다”였다. 이렇게 법률로 공용연호를 단군기원으로 정함으로써 이승만도 승복할 수밖에 없었다. 이에 따라 그날부터 단기로 바뀌었다.11) 그러니까 대한민국 임시정부 기원의 연호는 27일간 사용되었다.
이승만은 대한민국 연호를 사용하려 한 이유를 “우리나라의 민주정치제도가 남의 조력으로 된 것이 아니요, 30년 전에 민국정부를 수립·선포한 데서 이뤄졌다는 것과 기미년 독립선언이 미국의 독립선언보다 더 영광스럽다는 것을 드러내고자 함”이라고 설명하였다. 우리나라의 별칭들과 ‘한’의 어원 우리나라를 칭하는 이름으로는 ‘한’ 이외에도 ‘동국(東國)’·‘해동(海東)’·‘대동(大東)’·‘진국(震國)’·‘진역(震域)’·‘진단(震檀)’·‘청구(靑丘)’ 등이 있었다. 이들 명칭은 대개 중국의 동쪽나라라는 의미에서 나온 것이다. 또한, 우리나라는 중국의 정사에서 동이열전(東夷列傳)에 들어 있는데, ‘동이’는 중국에서 우리나라를 포함한 동방의 종족을 총칭한 이름이다. 동이의 말뜻에는 대궁(大弓), 즉 큰 활을 사용하는 종족이라는 해석이 있다. 그리고 동이의 ‘이(夷)’는 고자(古字)에서 고문의 ‘인(仁)’자와 같은 ‘인(人)’자로 보아 성인이 많이 나오고 예악문물이 갖추어진 나라로 해석하기도 한다.
무궁화가 많이 자라고 있다고 하여 ‘근화지향(槿花之鄕)’·‘근역(槿域)’, 땅 모양이 가자미와 비슷하다 하여 ‘접역(鰈域)’이라고도 불렀으며, 산수가 아름답다는 뜻에서 ‘금수강산’이라고도 칭하였다. 한편, ‘한’의 어원을 살펴보면, ‘한’을 ‘크다’ 또는 ‘중앙’이라는 뜻의 고유어로 해석하기도 한다. 알타이어족에 속하는 몽골어나 튀르키예어로 왕을 나타내는 칸과 관련이 있다고 보기도 한다. 한자로는 韓(한), 幹(간), 刊(간), 干(간), 漢(한) 등으로 표기된다. 따라서 ‘한’은 ‘크다’를 뜻한다는 설과 ‘추장’을 칭한다는 설이 있는데, 둘 다 공통으로 ‘큰 세력’이란 뜻을 가진다. 신채호의 『전후삼한고』(1924)에서 한과 조선은 원래 같은 뜻이라고 하여 삼한의 북방기원설을 주장하였다. 곧 삼한은 조선의 세 왕이고 한국은 큰 나라라는 뜻이니 조선의 존칭이라고 하였다. 이는 정약용이 한은 크다는 뜻으로서 토착어를 한자로 음역했다고 파악했던 것과 동일한 해석에서 출발한 것이었다.12) 한(韓)은 고대 중국의 나라 이름에도 쓰였으나, 오늘날에는 한국을 비롯하여 한자문화권에서 한국을 나타내는 글자 및 약호로 두루 인식되어 쓰인다. 삼한의 원형은 마한 우리나라를 일컫는 명칭은 다양했지만, 결국 지금 국호는 대한민국이다. 이는 곧 삼한에 국호의 연원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주목해봐야 할 것은 여암 신경준(申景濬, 1712∼1781)의 「강계고(疆界考)」에서의 언급이다. 그는 “진국(辰國)의 뒤에 마한이 되고, 마한이 나뉘어 삼한이 되었습니다”라 하여 삼한의 원형은 마한이라고 주장하였다.13) 앞서 인용한 『후한서』「동이열전」「한(韓)」조에도 “마한이 [한족 중에서] 가장 강대하여 그 종족들이 함께 왕을 세워 진왕(辰王)으로 삼아 목지국에 도읍하여 전체 삼한 지역의 왕으로 군림하는데, [삼한의] 제국왕(諸國王)의 선대는 모두 마한 종족의 사람이다.”
라 하여, 마한이 삼한의 중심이자 연원임을 지적하고 있다. 신경준의 「강계고」에 기반한 『동국문헌비고』 「여지고」를 보면, 단군조선국부터 시작하는 「역대국계(歷代國界)」에 남쪽 지역에 대하여는 진국(辰國)부터 마한국, 기준마한국, 후마한국, 진한국, 변한국(弁韓國)까지 소개하고 있다. 그리고 마한국부터 변한국까지 모두 ‘한국’이란 명칭을 쓰고 있어 북은 ‘조선’으로 남은 ‘한국’으로 구분하는 “남자남 북자북”의 인식이 반영되어 있음도 알 수 있다. 이는 『증보문헌비고』에도 그대로 이어진다. 이때 주목해야 할 것은 마한국부터 변한국까지를 모두 ‘한국’이란 범주에서 다루고 있다는 점이다. 여기에 마한이 나뉘어 삼한이 되었다는 말을 더하면 곧 ‘마한국’에서 ‘한국’의 연원을 찾을 수 있다는 뜻이 된다. 『해동역사』의 편년 구분을 보면 주나라 때 한강 이북은 ‘조선’이라 하였고, 한강 이남은 모두 ‘한국’의 영역으로 구분하고 있다. 그리고 한국이 마한·진한·변한으로 나뉜다고 보았다. 한국이 진으로 시작해서 한으로 바뀌었다가 다시 진국이 되는 변화를 거치지만, 지명은 여전히 ‘한’을 사용하고 있다. 이것이 우리 지역을 ‘한’이라 부르게 된 단초였다. 그 중 대표적 한국은 역시 마한국이었다. 조선 후기에 유행한 ‘기자-마한 정통론’도 ‘한’에 대한 인식을 제고시켰다. 그런 점에서 ‘마한’에서 ‘한’의 연원을 찾는 데 하등 이상할 것이 없다. 1) 『고종실록』 36권, 고종 34년 9월 29일 양력 2번째 기사, 1897년 대한 광무(光武) 1년
2) 『고종실록』 36권, 고종 34년 10월 11일 양력 3번째 기사, 1897년 대한 광무(光武) 1년 3) 『고종실록』 36권, 고종 34년 10월 13일 양력 2번째 기사, 1897년 대한 광무(光武) 1년 4) 『新增東國輿地勝覽』 중 「東國輿地勝覽序」 5) 박광용, 「우리나라 이름에 담긴 역사계승의식 – 한·조선·고려관」(『역사비평』, 1993.5), 19~20쪽. 6) “한수(漢水)의 남쪽은 남쪽대로 북쪽은 북쪽대로 나라가 이어가서 본래 서로 섞이지 않았다[南自南北自北 本不相參入]”는 뜻이다. 7) 문창로, 「조선 후기 실학자들의 삼한 연구-연구 추이와 특징을 중심으로-」(『한국고대사연구』 62, 2011.06, 한국고대사학회), 63쪽. 이 글은 수정·보완하여 『실학자들의 한국 고대사 인식』(2012.11, 경기문화재단 실학박물관 편, 경인문화사)에 「조선 후기 실학자들의 삼한사 연구와 의의」로 재수록되었다. 8) 이 부분에 대하여는 임대식, 「특별기획 : 통일조국의 이름짓기/ 일제시기·해방 후 나라 이름에 반영된 좌우갈등 -右'대한'·左'조선'과 南'대한'·北'조선'의 대립과 통일-」(『역사비평』, 1993.05)에 상세하다. 9) 이 점에 대하여는 박창욱, 「특별기획 : 통일조국의 이름짓기/ 중국에서는 한·조선·고려가 어떻게 사용되었나」(『역사비평』, 1993.05) 참조, 10) 한경구, 「한민족」(『한국학 학술용어 – 근대 한국학 100년의 검토』, 한국학중앙연구원 기획, 한국학중앙연구원 출판부, 2020), 64쪽. 11) 단기 연호는 또 바뀐다. 1961년 12월, 박정희가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으로 있는 동안 연호에 관한 법률을 개정하여 1962년(단기 4295년) 1월 1일부터 단기를 폐지하고 서기를 채택하기로 하여 현재에 이른다. 공문서 등 공식적인 문서에서는 서기만 사용하지만, 민간에서는 단기를 함께 쓰는 경우도 나름대로 있었다. 예를 들어 불교 달력에 서기와 함께 불기와 단기를 병용하거나, 신문 날짜란에 서기와 같이 쓰는 식이었다. 사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졸업 앨범 등에 서기와 병기하여 쓰는 일이 심심찮게 있었다. 12) 박광용, 앞 논문, 31쪽, 13) 『旅菴全書』 권5, 「疆界考」 「辰國」 「漢書 眞番 辰國 欲上書見天子」 글쓴이 고석규 목포대학교 前 총장, 사학과 명예교수 |
||||||||
Copyright(c)2018 재단법인 한국학호남진흥원. All Rights reserved. | ||||||||
· 우리 원 홈페이지에 ' 회원가입 ' 및 ' 메일링 서비스 신청하기 ' 메뉴를 통하여 신청한 분은 모두 호남학산책을 받아보실 수 있습니다. · 호남학산책을 개인 블로그 등에 전재할 경우 반드시 ' 출처 '를 밝혀 주시기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