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지의 초상] 독립운동가·의사(医師) 김범수(1899∼1951?) 게시기간 : 2024-03-13 07:00부터 2030-12-23 21:21까지 등록일 : 2024-03-11 10:10
재단법인 한국학호남진흥원
미지의 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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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광주 수재, 김범수 며칠 전 3·1운동 105주년이 지났다. 현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전신인 경성의학전문학교 재학 중 광주 3·1운동을 기획한 독립운동가로, 무료 의술을 펼쳤던 의사(医師)로, 해방 후 분단을 막고자 몸부림쳤던 운동가로 한평생을 보냈던 김범수 선생을 아는 이 많지 않다. 그의 한평생은 질곡의 한국 현대사를 응축하고 있다. 김범수(金範洙)는 1899년 1월 24일 광주광역시 북구 신안동에 해당하는 광산군 서방면 신안리 335-1번지에서 태어났다. 현 북구 서암대로 93번지이다. 서암로는 한말 의병장 양진여의 호를 땄다. 김범수의 생가는 신안다리 있는 곳인데, 불과 2년 전까지 주유소가 있었고, 현재는 유명 커피숍이 들어서 있다. 커피숍 바로 뒤 공터까지가 생가이다. 옛 모습이 여전히 남아 있다.1) 신안동은 1960년대까지 경양 방죽 물로 벼농사를 짓던 농촌이었다. 이곳에 태봉산과 봉두산이 있었다. 봉두산은 봉황이 머물렀다 하여 봉정산이라고도 불렀다. 지금의 광주 기상대가 있는 곳이다. 봉두산 남쪽 기슭에 재매 마을이 있었다. 서방천과 용봉천이 합류한 곳에 있는 재매마을은 강물이 범람하여 생긴 퇴적물과 태봉산과 봉두산에서 흘러 내려오는 유기물질이 쌓여 옥토가 많았다. 재매 마을에 부호들이 많은 까닭이다. 김범수 부친도 이곳 대지주였다. 이 지역에는 재매를 뜻하는 ‘자미’, 자미 남쪽 들 가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들재매=들자미, 자미 북쪽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청계, 자미 북쪽 산 밑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멧저매 등 여러 마을이 있었다. 현재 ‘신안사거리-전남대 사거리-전남대 정문’을 연결하는 도로 이름이 ‘자미로’이다. 옛 재매 마을의 역사를 증언해주고 있는데, 이를 아는 이 많지 않다. 하지만 지인들과 얘기하다 보면 재매마을 출신이 의외로 많다. 재매 마을은 앞재매, 뒷재매로 나뉘었는데 김범수는 뒷재매 출신이다. 김범수는 부친 영관과 모친 최훈 사이에 4남 가운데 3남으로 태어났다. 15세 되던 1913년 김범수는 화순 북면에서 ‘원리 박부자’라고 여전히 전설로 남아 있는 부호 박동표의 장녀 옥(玉)과 혼인하여 1남 4녀를 두었다. 박동표는 조선대 교수를 역임한 유명한 민족 경제학자 박현채의 큰조부이다. 김범수는 결혼하고 현 광주 동구 금남로 4가 37번지로 분가하였다. 그곳에서 이름을 알 수 없는 둘째 형, 아우 언수 등 3형제가 우애하며 살았다. 큰 형 진수는 재매 마을에서 일찍 혼자된 모친과 살았다. 경성의전 입학 이전의 김범수의 학력은 찾을 수 없다. 아우인 언수가 광주보통학교를 졸업한 것으로 보아 그 역시 광주보통학교를 다녔을 가능성이 크다. 광주의 수재로 소문이 날 정도로 영특하여 월반(越班)을 하였다는 얘기가 전하는 것으로 보아, 독학으로 1917년 당시 조선의 대표적 수재들이 입학한 경성의학전문학교에 입학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경성의전 2회 입학생이다. 전국에서 농민이 산업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가장 컸던 전남은, 다른 지역보다 소작인 비율이 높고, 소작인 1인당 경작지 면적도 유난히 적어 소작인 계급의 경제적 기반이 취약하였다. 경성의전 재학생 비율도 인구 대비 가장 낮았다. 지주의 아들이었지만 김범수가 현실 문제에 일찍 눈을 뜬 배경이다. 당시 조선의 의료 환경은 열악하였다. 근대 의학은 태동기 단계라 의술의 발달은 미미하였고, 열악한 백성들의 경제적 사정은 병원에 갈 처지가 되지 못하였다. 전염병이 창궐하면 사망한 사람이 셀 수없이 많았다. 김범수가 의사가 되고자 한 까닭이었다. 하지만 식민지 조선에 이주한 일본인들은 근대 의술의 혜택을 받고 있었다. 이러한 안타까운 현실은 그의 민족의식을 자극하였다. 2. 광주 3·1운동을 추진하다 민족, 민중을 사랑하는 의사를 꿈꾸었던 그를, 암울한 식민지 현실은 의학도의 길을 걷게만 하지 않았다. 경성의전 1년 선배로 ‘압록강은 흐른다’라는 자서전을 쓴 이미륵의 생각을 통해 김범수의 내면을 읽을 수 있다. “모든 교과서가 일본말로 바뀌었기 때문에 우리는 일본말을 배워야만 했다. 또한, 우리들은 역사를 다시 배워야만 했다. 한국의 독립 시대에 일어났던 모든 사건을 깎아 없애 버렸던 것이다. 한국 민족은 이제부터 독자적인 역사를 지닌 민족으로 여겨지지 않았고, 다만 오래전부터 일본 제국에 공물을 바치는 변경 민족으로 여겨졌을 뿐이다.”
경성의전 2학년 재학 중이던 1919년 2월 2일 일본 동경에 유학 중인 화순 출신 정광호가 2·8독립선언서를 들고 경성 송현동의 김범수 하숙집을 찾아와 시위를 제안하였다. 이를 흔쾌히 찬동한 김범수는 장성 출신 박일구와 광주 출신으로 중앙학교 재학생인 최정두를 계획에 참여시켰다. 서울에서는 감시가 심하여 유인물 제작이 쉽지 않았기에, 김범수 등은 이들은, 2월 5일 박일구 처가가 있는 전남 장성의 백암산 기슭의 김기형 집으로 내려와 인쇄 작업을 하였다. 이때 사용된 등사기는 김범수가 경성에서 구입한 것이었다. 이때 유인물 제작에 참여한 이는 정광호, 김범수, 박일구, 최정두, 김기형 그리고 김태열 등이었다. 광주보통학교 교사인 김태열은 신문잡지종람소 회원으로, 광주의 청년, 학생들과 김범수와의 연결 고리였다. 김범수는 김태열을 장성 인쇄 작업에 참여시킨 까닭이다. 이미 시위 준비를 계획하고 있던 광주의 신문잡지종람소 회원들은 김범수가 추진한 시위 계획에 참여하게 되었다. 김범수 등 광주 출신 유학생과 김태열 등 신문잡지종람소 회원들은 인쇄한 2·8독립선언서로 시위를 준비하였다. 신문잡지종람소는 강석봉, 최한영 등 광주 청년들이 조직한 독립운동 비밀결사였다. 장성에서 인쇄된 유인물 일부는 정광호가 경성으로 가지고 올라갔고, 나머지는 김태열이 수레로 광주로 가져와 시기를 살피고 있었다. 독립선언서를 인쇄하고 시위를 준비한 것은 전국 최초였다. 김범수 등이 추진한 시위 계획이 갖는 역사적 의의이다. 김범수가 경성에서 3·1운동 지도부와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 알 수 없다. 정광호가 김범수를 찾아와 2·8독립선언서 인쇄 및 시위 문제를 상의하였다는 것은 김범수가 평소에 민족의 독립 문제에 대해 관심이 많았음을 알려준다. 그의 하숙집에 와 있는 박일구를 시위 계획에 끌어들이고, 등사기를 구입하고, 광주 청년의 구심점 김태열을 독립선언서 인쇄 작업에 참여시키고 있는 것으로 볼 때, 김범수가 동경에서 추진되고 있는 학생들의 독립 만세 계획을 국내로 연결을 시키는 데 깊숙이 개입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김범수는 경성의학전문학교 출신으로 2·8독립선언의 열기를 국내로 확산시키는 데 앞장선, 나아가 독립 만세 시위 계획을 구체적으로 실천에 옮긴 최초의 인물이라 할 것이다. 장성에서 2·8독립선언 유인물이 인쇄되면서 광주 3·1운동은 이미 한 달 전인 2월 5일 시작되고 있었다. 3월 6일 광주 시위준비 첫 모임에 참여한 김태열은, 광주 3·1운동 핵심인물임이 분명하다. 김태열을 장성 인쇄 작업에 참여하게 한 역할은 김범수가 하였다. 김범수가 광주 3·1운동과 연결되고 있다는 증거이다. 장성 김기형 집에서 인쇄된 2·8독립선언서가 김태열을 통해 광주로 들어온 것은 2월 6일 밤 내지는 7일 무렵이었다. 그런데 인쇄물을 김태열이 말에 싣고 왔다고 한 것으로 보아 등사기도 함께 가지고 왔다고 믿어진다. 이들은 등사기와 유인물을 수기동 김범수 동생인 언수 집에 보관하였다. 3월 7일 김언수 집에서 3월 8일 시위에 필요한 유인물을 인쇄하기 시작한 데서 살필 수 있다. 김범수가 광주 3·1운동 준비 단계부터 개입되어 있다는 증거들이다. 광주 신문잡지종람소 회원들과 만세 시위를 추진하였던 김범수는, 경성의 종교계와 학생들이 추진한 시위와 보조를 맞추며 광주 시위 시기를 살피고 있었다. 경성에서 추진되고 있던 3·1운동은, 김범수의 경성의전 동기인 한위건 등이 주체여서 시위 상황을 알고 있었다. 경성 지도부는 광주에서의 시위 계획을 알고 일정을 늦추어 경성과 함께 추진할 것을 요청하였다. 한편 독립운동 비밀결사였던 광주 신문잡지종람소 회원들은 정상호를 비롯하여 김복수, 김용규, 한길상, 최한영, 강석봉, 김태열, 강생기 등 10여 명이었다. 한길상(2회) 김복수(3회) 정광호·정상호·김태열(4회), 김용규·최한영(5회), 강석봉·박일구(6회), 강생기(7회) 등이 광주보통학교 졸업생이었고, 김용규·김태열·최한영·강생기는 광주농업학교를 졸업했거나 재학 중이었다. 신문잡지종람소 회원들은 대부분 광주보통학교 및 광주농업학교를 졸업한 이 지역의 젊은 지식인이었다. 신문잡지종람소 회원들은 김범수 등이 제작한 2·8독립선언서를 읽고 만세 준비에 들어갔다. 그들은 시위를 추진할 것을 약속하고 기념 촬영을 하였다. 이 무렵 종교계를 통해 경성에서의 시위 계획이 전달되어 오자, 당시 양림교회 장로 최흥종은 신도 김복현과 함께 경성의 시위 상황을 알아보기 위해 상경을 하였다. 경성에 올라간 이들은 국기열의 안내로, 김범수를 청량리 뒷산에서 만났다. 광주시위를 계획한 이들이 경성에 올라가 김범수를 제일 먼저 만났다는 것은 김범수가 광주 시위에 깊숙이 개입하였다는 중요한 근거이다. 경성에서의 시위는 3월1일과 3월 5일 두 차례에 있었다. 2차 시위는 경성의전학생을 주축으로 학생들이 주도하였다. 경성의 2차 시위 상황을 살피던 최흥종은 남대문 역전에서 시위대의 뜨거운 함성에 순간 흥분하여 인력거에 올라가 ‘신조선신문’이라는 유인물을 나누어주고, 대한문 앞 인력거 위에서 ‘조선독립’이라고 쓰인 깃발을 흔들며 시위를 선동하다 체포되고 말았다. 여관에서 최흥종을 기다리다 오지 않자 포기하고 혼자 내려온 김복현은, 김강에 부탁하여 당일인 3월 6일 밤 양림동 남궁혁 집에서 신문종람소 회원, 양림교회, 광주보통학교 동문 등과 만나 시위를 계획하였다. 이날 첫 모임에 김강을 비롯하여 김철, 최병준, 송흥진, 최정두, 한길상, 김용규, 김태열, 강석봉, 손인식 등 10명이 참석하였다. 이 가운데 김철, 김강, 최병준, 강석봉, 한길상, 최정두, 김태열은 양림교회 교인이었다. 김태열, 한길상, 김용규, 강석봉은 삼합양조회 회원 곧 신문잡지종람소 회원이었다. 최병준과 손인식은 숭일학교 교사였다. 광주보통학교 교사인 김태열은 김용규, 강석봉과 광주보통학교 선후배 사이였다. 6일 밤 회동한 사람들은 학교 선후배, 교회 신도, 신문잡지종람소 회원 등으로 관계들이 서로 겹치고 있었다. 순식간에 모여 시위를 조직적으로 준비할 수 있었던 것은 신문잡지종람소를 중심으로 사전에 시위를 모의하였기 때문이다. 이들은 시위를 3월 8일 광주 큰 장날을 이용하여 결행하기로 하였다. 첫 모임 후 불과 이틀도 안 되어 시위를 결정하였다는 것은 이미 오랫동안 시위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는 증거이다. 유인물 인쇄 장소로 김범수 아우인 언수 집이 결정되었다. 김범수가 가지고 온 인쇄기가 언수 집에 있었기 때문이다. 김언수 집에서 인쇄 작업이 시작되었으나 시내 한복판이라 발각될 염려가 있어 시내에서 떨어진 최한영 집으로 옮겨 작업을 마무리하였다. 인쇄 작업이 늦어져 예정보다 이틀 늦은 3월 10일 광주의 작은 장날 오후 3시 30분 큰 장터에서 역사적인 광주 시위가 발발하였다. 이 시위는 광주 숭일학교, 수피아여학교, 농업학교 학생들이 조직적으로 참여하였고, 장터에 모인 군중뿐만 아니라 일반 시민들까지 참여한 대규모 시위로 발전하였다. 광주 3·1운동은 어느 지역 시위보다 조직적이고 체계적으로 진행되었다. 그것은 불과 며칠 사이에 급히 준비되어 일어난 것이 아니라, 신문잡지종람소 회원과 경성 유학생 김범수 등이 손을 잡고 1개월 전부터 계획하고 준비한 결과였음을 알 수 있다. 최흥종, 김복현이 경성에 올라가 김범수를 만나고 김언수 집이 인쇄 장소로 결정되고 있는 데서 광주 시위를 김범수가 실질적으로 이끌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의업의 길을 걷던 그가 ‘독립의 길’을 선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의 손아래 처남 박경조 역시 경성 중앙학교 4학년 재학 중인 1919년 경성의 3·1운동에 참여하였다가 구속되는 등 독립운동 가문이라 할 수 있다. 3. 광주의 심장을 지킨 존경받는 의사 1929년 11월 1일,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나기 불과 이틀 전 당시 광주지역의 한 언론에 보도된 김범수와 관련된 보도 기사이다. 남선의원이라면 누구나 연상하는 바, ①‘광주수재’라는 평판 받는 김범수군의 병원일 줄 안다. 군은 ②총독부 의전을 우수한 성적으로 마친 후에 남선의원의 ③외과의사로 근무한 의학적 기술보다도 ④기미운동의 희생에서 맛본 人間苦로서 묻어나온 인간미 그것이 ⑤범인의 追随 못할 저력의 소유자인 만치 ⑥광주의 인기의 초점이 되는 것이다.”(『중외일보』 1929.11.1)
이를 통해 ‘의사 김범수’는 광주 지역민들로부터 감히 보통사람들이 따라올 수 없는 저력의 소유자이며 인기 있는 의사라는 평가를 받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어려서부터 광주의 수재라고 소문나 있었기에 광주 전남 출신으로 거의 유일하게 경성의전을 입학할 수 있었다. 그는 1919년 3·1운동의 실질적인 배후 주동자로 체포되어 징역 3년 형을 선고받고 대구형무소에 복역하다 징역 1년 6월로 감형되어 1920년 9월 출옥을 하였다. 광주의 수재로 소문난 경성의학전문학교 학생이, 광주 3·1 독립 만세 운동을 주도하다 투옥된 후 복학하여 의사 자격증을 취득하였다는 사실은 광주 사회에서는 커다란 뉴스가 되었다. 더구나 경성에서 개업하지 않고 의료 환경이 열악한 고향 광주에서 병원을 개업하여 환자 진료를 시작하였다는 것은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그가 개업하였을 때의 모습을 전하고 있는 당시 신문을 살펴보도록 하자. “광주 시내 서성정(전 광산의원 자리)에 영업을 개시한 남선의원은 종래에 총독부의원에 근무하던 의사 김범수 씨의 경영인 바 내외설비와 입원실도 완비되었으므로 일반 환자에게 편의가 있을 뿐만 아니라 씨는 특별히 무산환자를 위하여 실비 혹은 무료 진료에 응하겠다고 한다.”(『동아일보』 1924.11.17)
1923년 3월 경성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한 김범수가 경성의전 부속병원인 총독부 의원에서 1년간 인턴 의사 생활을 마친 후 고향에 내려와 개업하였음을 알려주고 있다. 지금도 의사들이 낙후 지역 근무를 자원하는 경우는 많지 않다. 당시 대부분 경성의학전문학교 출신 의사들은 자혜의원과 같은 도립병원이나 경성에서 개업하였던 것이 일반적인 현상이었다. 김범수처럼 명문 의전 출신이 낙향하는 경우는 매우 이례적이었다. 김범수는 고향인 광주에 내려와 무산자 계급 곧 경제적으로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그가 공부한 의술을 베풀 의지를 분명히 하였다. 그는 간호 조수에게 신발에 흙이 묻어 있는 환자에게는 치료비를 받아서도 안 되고, 내쫓아서도 안 된다고 강조하였다고 한다. 이는 경제적 형편 때문에 치료받지 못하는 무산자 계급을 위해 의업의 길을 선택하였다고 신문에 보도된 내용을 오랫동안 실천하고 있음을 짐작하게 한다. 김범수가 고향에 내려와 개업한 연도를 1927년이라고 설명한 자료들이 적지 않으나 1924년으로 바로 잡아야 한다. 김범수는 당시 광주 지역민에게 존경의 대상이었다. 경성의전을 다닌 수재에다, 광주 3·1운동을 실질적으로 이끌고 1년 6월형을 복역한 독립운동가로서의 희생적인 삶 이 시민들에게는 깊은 감동으로 다가왔다. 그에게 ‘기미운동의 희생’을 맛본 인간미의 고통이 있어 존경한다고 보도된 사실에서 당시 광주시민들의 높은 민족의식을 엿볼 수 있다. 게다가 김범수는 무료 진료 활동을 하였기에 1950년 한국전쟁 당시까지 그가 살았던 집은 여전히 초가집을 벗어나지 못했다. 당시 가난한 서민들이 늦은 밤에도, 돈이 없어도 언제든지 찾는 병원이 김범수가 운영한 남선의원이었다. 김범수는 가난과 의술 부족으로 치료를 받지 못하고 쓰러져가는 민중 구제에 최선을 다하였다. ‘기미 독립 영웅’의 헌신적인 진료 활동은 뭇사람들로부터 존경받고, 인기 있는 의사로 추앙받게 하였다. 그의 ‘의업의 길’은 민족과 민중을 향한 한없는 사랑 때문이었다. 4. 통일의 길을 선도한 위대한 민족주의자 광주 3·1운동의 영웅으로 추앙된 김범수는 출옥 후 광주지역 청년운동에 관심을 기울였다. 환자를 진료하면서도 광주 최대의 청년운동 단체인 광주청년회에서 간부를 맡는 등 적극적으로 활동하였다. 김범수가 현실 문제에 눈을 뜨게 된 것은 민족주의자로 해방 직후 건국준비위원회 부위원장을 지낸 민세 안재홍과 대구 형무소에서 같이 수감 생활하며 감화받으면서였다. 민세 안재홍은 1919년 12월 배달청년단이라는 비밀조직을 만들다 체포되어 대구 형무소에 징역 3년형을 받고 수감되었다. 이미 그곳에는 광주 3·1운동의 젊은 영웅들이 수감되어 있었다. 당시 나이 30의 안재홍이 볼 때 20대 안팎의 광주의 애국 청년들이 한없이 존경스럽게 느껴졌다. 이듬해 9월 김범수 등이 감형되어 출옥할 때 안재홍은 시를 지었다. “三年枉作獄中人 臨別猶言壮 志新 古来南地多豪傑 此去 願成春外春 己未辛酉 겨울”
대구 형무소에서 광주 청년들이 감형되어 떠날 때 안재홍이 지은 이별의 시(別詩)이다. 광주 청년들을 ‘남쪽 땅의 호걸’이라 표현한 것이 이채롭다. 이들이 광주 3·1운동을 이끈 사실을 안재홍이 높이 평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민족주의자 안재홍과의 만남은 김범수의 사상 체계에 영향을 끼쳤다. 이후의 김범수 삶의 궤적을 보면 좌, 우의 이념의 경계를 넘나들며 오로지 민족의 장래를 고민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1921년 4월 경성의전에 복학하였다. 학교 졸업 후 1924년 광주에 내려와 남선의원을 개원하여 환자 진료에 최선을 다한 김범수는 청년·사회운동에도 앞장섰다. 당시 광주는 광주지역을 중심으로 같은 사회주의 계열 내에서 화요회계와 서울회계 사이에 갈등이 첨예하게 나타났다. 김범수는 이러한 갈등에 휩쓸리지 않고 민족 독립을 위한 실력양성에 관심을 가졌다. 1935년 광주물산창고회사를 세워 민족 자본 형성에 앞장선 사실이 이를 말하고 있다. 해방 직후 통일 정부를 수립하려는 우리 민족의 노력은 조선건국준비위원회와 그 후신 격인 인민공화국 출범으로 나타났다. 이때 김범수는 이 단체의 전남지부에서 간부를 맡아 좌·우의 이념을 초월하여 통일 정부 수립에 앞장섰다. 다음의 사례는 그가 특정 이념에 갇혀 있지 않음을 알려준다. 많은 시민들의 기대를 받은 광주상업학교 개교식은 지난 14일 오전 9시부터 내빈 다수 참석하에 거행되었는데, 범대규 씨의 개회사 있었고 이어 애국가를 부른 후 ○원경 씨의 광주상업학교에 대한 경과보고 후에 지우○교장과 ○실교 김창석 씨의 인사가 있은 후 시장 서민호 북정초등학교 학도○·장용규·김범수·유성환 제씨의 축사가 있은 후 조선완전독립만세, 광주상업학교 만세를 3창하는 것으로 개교식을 마치고 이어 동교 후원회를 조직하였는데 임시의장에 유성환 씨가 당선되었다(○표시는 판독 불능)(이하 생략)(『광주민보』 1945.12.27.).
그동안 준비를 가꾸어 오던 전람도 문학가 동맹 결성식은 26일 오후 2시부터 광주 유치원에서 회원과 다수의 방청객이 참여한 가운데 먼저 애국가 합창과 묵념이 있은 다음 이동식 씨의 개회사로 진행되었다. 경과보고에 이어 의장으로 최오수 외 2명이 선출되고 민전 도위원 김범수·중앙문학가 동맹 정태병 씨 둥 각계 대표의 축사가 이어졌고 민청 민여원 등의 독창 후에 3시 끝을 맺었다(『자유신문』 1947.3.2). 김범수는 광주 부호 최선진이 설립한 광주상업학교 개교식과 좌파 작가들이 조직한 전남도 문학가 동맹 결성식에 연이어 참석하여 축하 연설을 하였다. 김범수는 우파, 좌파를 가리지 않고 관계를 맺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946년 3월 결성된 민족민주주의 전선(민전) 전남지부가 좌파와 일부 우파들이 참여한 최대의 통일전선 정당으로 발전하는 데는 김범수 역할이 작용하였다. 그가 당시 언론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조선 자주독립을 위해서는 우도 좌도 없고, 남도 북도 없다. 오직 3천만 민족이 다 같이 합작할 것뿐이다. 또한 몇 개인이 합작하는 것보다 민족 전체가 협력하여 합작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따라서 광주에 있어서도 좌우 합작은 필연가능하다고 본다(『동광신문』 1946.7.24).
그가 좌우를 아우르는 ‘통일의 길’을 선도한 셈이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통일 정부 수립 운동은 좌절되고 만다. 모스크바 3상 회의 결정 이후 반탁운동이 전개되면서 친일파가 가세한 일부 우파가 반대세력을 좌파=공산당으로 묶어 공격하였다. 게다가 통일 정부 수립의 마지막 희망인 좌우 합작 노력이 실패하고, 그 운동을 추진하던 여운형마저 1947년 7월 암살되자 좌절감을 느낀 김범수는 정계를 완전히 은퇴하였다. 1947년 8월이었다. 그러나 해방 공간의 주도권을 장악한 우파의 공격은 집요해졌다. 철저한 민족주의자인 김범수를 좌파로 묶어 공격의 대상으로 삼았다. 김범수는 공산주의자들부터는 자본가 그룹과 가깝다고, 우파들로부터는 좌파와 어울린다고 공격받았다. 김범수가 운영하는 남선의원 간판이 우파 단체인 서북청년단의 공격을 받아 파손되는 것이 부지기수였으며, 광주 상업학교 교사로 근무한 김범수의 아들이 잠을 자다 괴한에게 피습 당하기도 하였다. 1949년 가을 보도연맹에 김범수를 강제로 가입시켰다. 이러한 현실에도 김범수는 개의치 않고 오로지 환자 진료에만 진력할 따름이었다. 다음에서 이러한 사정을 알 수 있다. 성명서(『동광신문』 1949.10.5 광고)
①해방 이후 본인이 혼란한 정국에 제하여 정치에 관여하여 천직인 의업에 등한히 하였음은 심히 유감이었거니와 ②실은 단기 4280년(1947) 8월부터 일체의 정치관계를 단절하여 실질적 탈퇴를 하고 ③더욱이 대한민국 수립 이후로는 충실한 국민으로 의료에 봉공하고 있는 중이거니와 ④이에 본인의 태도를 선명히 하기 위하여 지면으로 성명함. 단기 4282 10월 1일 광주 대인동 김범수 5. 하늘의 별이 되다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보도 연맹원을 구금하라’는 이승만 정부의 명령에 따라 광주 형무소에 갇힌 김범수는 죽음 직전에서 운 좋게 살아남았다. 그가 광주 형무소에 투옥된 이기홍의 증언에서 확인되고 있다. 7월 23일 인민군이 진입한 광주는, 화요회계인 박헌영계가 장악하고 있었다. 같은 사회주의 계열인 서울회계 출신도 숙청의 대상이 되고 있었다. 이를 간파한 김범수는 인민군이 광주에 들어오자 곧 처가가 있는 화순 북면 원리로 피난을 떠났다.2)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후퇴하던 인민군은 퇴로가 막히자 9월 25일 화순 백아산에 조선노동당 전남 도당사령부를 설치하였다. 김범수가 피난 가 있던 원리와 인접한 곳이다. 백아산을 무대로 군경과 치열한 교전을 전개하였던 빨치산들은 부상자가 속출하자 의료진을 추가로 투입하려 하였다. 이듬해 1951년 2월 원리에 노련한 의사가 있다는 소문을 들은 전남도당 사령부는 김범수를 강제 징발하였다. 인민군이 백아산에 들어오던 9월 말 자발적으로 들어가지 않고 이듬해에 소환되어 갔다는 것은 도당사령부 의무대 근무가 그의 의지와 무관함을 알 수 있다. 이때 김범수는 한복 두루마기를 입고 백아산에 왔다고 당시 인민군 전남도당 사령부 사령관 비서의 증언이 있다. 비서는 광주여고보를 나온 김범수 딸 친구로, 광주 사범학교 출신 이OO였다. 아우인 김언수도 함께 왔다고 한다. 아우와 함께 원리 처가 집으로 피신하였음을 알 수 있다. 경성 의전 출신으로 외과 의사로 명성이 있었기에, 그는 중환자를 치료하는 비트(비밀아지트)에서 부상병 치료를 맡았다. 1951년 4월 국군토벌대의 대대적인 공세가 있었다. 오키나와에서 날아온 B29 폭격기의 폭격도 있었다. 김범수는 피신하지 않고 부상병들을 돌보았다. 도당 사령부는 국군의 공세가 거세지자 부상병들을 남겨 둔 채 광양 백운산으로 피신하였다. 김범수는 이들을 따라 가지 않고 부상병을 치료하다 쓰러졌다. 이념을 초월한 진정한 의사였음을 말해준다. 김범수가 광양 백운산에 없었다는 사실은 이OO의 증언에서 확인된다. 민족을 평생토록 사랑하였던 위대한 독립운동가이자 의사인 김범수는 하늘의 별이 되었다. 언제, 어떻게 그가 죽었는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당시 전남도당사령부 사령관 수행 비서였던 이OO의 귀중한 증언을 통해 1951년 4월 국군의 대대적인 공세가 있었을 무렵 부상병들과 함께 중환자 비트에서 사망한 것으로 필자는 추정하고 있다. 김범수의 며느리는 시아버지의 사망신고를 하지 않고 있다가 1961년 시어머니가 사망하자 함께 사망신고를 하였다. 1961년 사망하였다는 일부 기사는 이 때문에 나온 것이다. 작은딸이 백아산에서 가지고 온 한 줌의 흙을 며느리가 관에 담아 봉분을 만들었다. 위대한 민족주의자이며 독립운동의 영웅, 민중을 위한 의사, 조국 통일에 앞장선 위인 등 온갖 수식어가 붙어 있는 김범수는 그렇게 떠났다. 그동안 우리는 위대한 의사(義士) 김범수에 대한 평가를 소홀히 하였다. 역사의 진실은 언젠가 드러나게 마련이다. 그의 흔적을 추적하는 필자의 꿈에 선생이 홀연히 나타난 것도 비로소 때가 도래하였음을 알려준다. 일제 강점기와 분단으로 점철된 질곡의 현대사를 오롯이 담고 있는 김범수의 삶을, ‘독립의 길, 통일의 길을 선도한 위대한 의사’였다고 역사적 성격을 부여하려 한다. 그는 현재 독립유공자 서훈을 받지 못하고 있다. 한때는 한국전쟁 때 인민병원 원장이었다는 이유에서였다. 필자가 이것이 사실이 아니라고 밝히니, 이제는 ‘총독부의원’ 의사라고 해서 안 된다고 한다. ‘총독부 의원’은 경성의전 부속 실습병원이라고 밝히자, 이제는 또 다른 이유가 나온다. 정말 쉽지 않다. 그의 생가터에 작은 팻말이라고 세웠으면 하는 바램이다. <김범수 연보>
1) 손녀(김행자, 전 전남여고 역사관장)의 기억에 집 뒤에 대밭이 있었다고 한다. 지금도 남아 있는 대밭 일부가 역사의 흔적을 증언하고 있다.
2) 일부에서는 김범수가 한국전쟁 때 인민병원 원장으로 부역했다고 하나 전혀 사실이 아니다. 글쓴이 박해현 초당대 글로벌화학기계과 부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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