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속의 재발견] 진도의 상장례 다시 읽기 08 - 장의(葬儀)의 기억, 오쟁이쌈 - 게시기간 : 2024-03-21 07:00부터 2030-12-24 21:21까지 등록일 : 2024-03-19 17:34
재단법인 한국학호남진흥원
민속의 재발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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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진도의 오쟁이쌈 쟁이쌈은 오쟁이로 죽은 아이의 시신을 쌌다는 뜻으로 붙인 이름이다. 하지만 명사화된 이 명칭을 광범위하게 사용했는지는 알 수 없다. 진도문화원에서 연간지로 펴내는 『예향진도』 편집장이던 박주언이 붙인 이름이다. 마치 진도씻김굿에서 ‘영(魂靈)을 말아서 싼 돗자리’라는 뜻으로 ‘영돈마리’라 이름하는 것과 유사한 이름짓기이다. 진도 혹은 남도지역에서 행해지던 유아 장례 방식이라는 점만 밝혀져 있다. 내가 여기서 주목하고 싶은 것은 왜 죽은 아이를 오쟁이에 담아 장례를 치루었느냐는 것이다. 졸저에서 시도한 일단의 해석은 이 장례가 단순히 의례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유무형의 재생 관념이 깃든, 그러니까 보다 내밀한 의도가 있다는 것이었다.
초분(草墳)의 광범위한 존재와 풍습의 이모저모에 대해서는 익히 알려져 있다. 졸저, 『산자와 죽은자의 축제』(민속원, 2018)에서 오쟁이쌈과 초분에 대해 비교적 상세하게 다루었다. 그것을 왜 하는지 설명을 부가하고 관련 사례들을 차분히 소개하였다. 하지만 초분에 비해 상대적으로 오쟁이쌈 내력을 소상하게 소개하지 못했다. 좀 더 부연하고 빠트린 부분들을 보완하며 새롭게 해석을 덧붙이고자 한다. 부모는 죽은 아이를 안고 커다란 슬픔으로 울부짖는다. 무슨 악귀가 달라붙어서 어린 목숨을 앗아갔느냐고 소리친다. 아들이건 딸이건 자식은 똑같으며 오늘 아침 숨을 거둔 첫아이 시체 위의 하얀 이불이 눈물로 젖어 있다. 모든 식구들은 아직 시체 속에서 웅크리고 있을 보이지 않는 악귀를 두려워하면서도 죽이고 싶은 마음이다. 이 악귀가 또다시 태어나는 아기를 잡아갈 수도 있기 때문이다. 솜씨 있는 이웃에게 오쟁이를 만들어 달라고 부탁했더니 이쁘게 엮어와서 뜰 위에 놓아두었다. 아기 어머니는 깨끗한 보자기로 시체를 싸서 오쟁이를 잡고 있는 남편의 도움을 받으며 그 속에 넣는다. 오쟁이 자루를 어깨에 멘 남편이 집을 나선다. 모든 식구들은 슬픔을 참지 못하고 있다. 오쟁이는 마을을 벗어나 한참을 걸어서 산으로 올라가는 그의 등과 옆구리에서 뒹굴다가 초장골 커다란 소나무 밑에서 땅에 내려졌다. 그러고 나서 담배를 피울 동안 기다렸다가 높은 소나무 가지에 매달렸다. 그 높이는 땅에 서서 닿을 정도로부터 제법 높은 곳까지로, 정해지지 않았기 때문에 상관없으나 그는 위험스럽게도 매우 높은 가지에 오쟁이를 매달고 내려왔다. 그리고는 땀을 닦으면서 죽은 아기를 올려다보았다. 물론 그곳에는 아기를 데려간 악귀도 함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제 저 시체는 오쟁이와 함께 썩을 것이며 그동안 사나운 날짐승들이 찾아와 쪼아 먹으면 나쁜 귀신도 쪼아 먹혀서 다시는 아기를 데리고 가지 않을 것으로 믿고 아기 아버지는 집으로 돌아온다.
진도문화원에서 펴낸 격월간지 『예향진도』 제15호(1987. 3~4월호 2쪽)에 소개된 내용이다. 근자의 전남일보 칼럼 <이윤선의 남도인문학> 384호(2024. 2. 23)에서도 이를 간략하게 소개하였다. 그 일부를 다시 가져와 글을 전개한다.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알 수 없으나 1940년대까지라고 했다. 이같은 장속(葬俗)이 진도군 전역에서 확인된다고 했다. 대상은 대개 3세 미만의 어린아이다. 오쟁이쌈 장례를 치른 장소를 초장(草葬)골, 추장(媨葬)골 혹은 추장(媨葬)터라고 한다는 내용도 포함되어 있다. 오쟁이쌈이 진도 전역에 걸쳐 행해지던 장속이었음을 알 수 있는 자료다. 위 내용에서 “모든 식구들이 아직 시체 속에 웅크리고 있을 보이지 않는 악귀를 두려워하면서도 (악귀를) 죽이고 싶은 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 악귀가 또다시 태어나는(다시 태어날) 아기를 잡아갈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는 점도 확인할 수 있다. 이를 위해 마련하는 것이 오쟁이다. 따라서 오쟁이는 보이지 않는 악귀와 또다시 아기를 잡아갈 수도 있다는 두려움에 대응하는 일종의 보호장치 기능이 부여되어있고 생각된다. 그런데 궁극적 목적은 새에게 쪼아 먹힐 수 있게 한다는 점이다. 아이의 시신을 싸매는 물리적인 기능과 두려움, 소망 등이 기능이 복합되어있다. 겉으로 드러난 마음과 드러나지 않고 스며든 마음이라고 할 수 있다. 이네들의 죽음관이나 생사관을 살펴볼 이유가 여기에 있다. 본문에서는 왼쪽에 두어야 할 계집녀 변(邊)을 잘못 써서 오른쪽 방(旁)의 위치에 두고 세상에 없는 한자로 활자화해 두었지만, 본고에서 바로잡으니 원문과 대조할 때 참고 바란다. 초장은 초분(草墳)과 같은 말이고 추장 또한 진도 지역에서 상용해온 용어다. 초분골이나 오쟁이쌈을 하는 공간에 추할 추(媨)자를 쓰는 것은 초분을 하는 일정한 공간을 일상 공간과 구분하여 일종의 기피하는 공간으로 설정했기 때문일 것이다. 민속학개론에서 흔히 말하는 성과 속의 경계 곧 리미널존이라고 보면 되겠다. 2. 티베트의 천장(天葬)과 장성의 오쟁이쌈 이같은 오쟁이쌈의 사례는 천장(天葬) 혹은 조장(鳥葬)이라고 하는 티벳이나 몽골지역의 사례를 떠올리게 한다. 현재까지 티베트에서 이 풍속이 이어지고 있다. 심혁주는 「티베트의 죽음 이해-천장(天葬)을 중심으로」인문학연구 제47집, 2013)에서 이렇게 말한다. 고대로부터 티베티인들은 생명체의 태어남을(生) 자유로이 주관할 수는 없지만, 죽음은 스스로의 노력 혹은 법력이 있는 타인의 능력을 빌어 생명의 종결을 의미 있게 연장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이는 인간의 죽음은 단순한 생명 종결만을 의미하지 않고 모든 존재는 영혼을 갖고 있으며 그 영혼은 죽음에 따라 소멸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세상으로 순환된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념은 죽음에 이르러서는 현생의 업(業)을 정화할 수 있고 심지어 내생(來生)까지도 설계(還生)할 수 있다는 영혼의 전세(轉世) 사상을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이는 티베트인들이 신뢰하는 윤회(輪回)와 환생(還生)이 기본 구도이기도 하며 이러한 영혼불사의 사상은 결국 티베트 상장(喪葬)관습의 기원과 발전에 영향을 주었다.
졸저 <산자와 죽은자의 축제>(민속원)의 부제를 ‘진도 상장례와 재생의례’라고 붙였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거듭하여 이를 소개하고 다시 풀어나가는 것은 진도뿐 아니라 고대로 거슬러 올라갈수록 명료해지는 재생 혹은 거듭남에 대한 관념이나 관점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작정하고 이번 연재를 시도했던 까닭이 여기 있으니 다소간의 중언부언이 있더라도 양해 부탁드린다. 표준국어대사전에서는 조장(鳥葬)을 이렇게 설명한다. “송장을 들에 내다 놓아 새가 파먹게 하던 원시적인 장사(葬事), 예전에 중국의 남쪽 지방에 있던 풍속이다.” 중국 남쪽뿐만이 아니다. 대개 유아에게 해당되지만 당장 진도지역만 해도 광범위하게 전승되던 장례의식 아닌가. 이같은 장속이 현전된 것으로 보아 고대로 거슬러 올라가면 아마도 풍장(風葬)이 일반적이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당시 『예향진도』 편집장 박주언이 밝혀둔 구술 정보는 아래와 같다. 진도읍에서는 송현리로 가는 길초의 상여집 못미처 바른편 산과 정걸음재 북쪽 1백여 미터 거리의 읍 방향, 그리고 오리정 냉동공장 동남편 2백여 미터 지점에 이러한 오쟁이가 자주 매달려 있었다고 진도읍 동외리 거주 장○삼씨(87세)가 증언해 주셨다. 군내면 덕병리 송○동씨 증언, 고군면 석현리 김○규씨 증언, 지산면 소포리 박○용씨 증언에서 오쟁이쌈을 했으며, 임회면 삼막리 아장골에는 광전리, 용호리, 장구포 등지에서도 여기에 찾아와 매달았다고 하○위씨(진도읍 남동리 거주, 삼막리 출신)는 말했다.
오쟁이쌈이 진도 전역에 걸쳐 행해지던 장속이었음을 재삼 확인해주는 자료다. 내가 알기로 진도지역 아이들 장례는 주로 ‘독장’이라는 형태로 행해졌다. 여기서 말하는 ‘아장골’은 ‘아이를 독장하거나 오쟁이쌈을 하는 등 주로 유아들의 장례를 치르는 공간’이라는 뜻으로 쓰인 용어다. 원문에는 실제 이름들이 나열되어 있으나 본고에서는 밝히지 않기로 한다. 이름이 필요한 경우라면 원문을 참고하기 바란다. 다시 드는 의문이 있다. 이런 풍장에 대한 관념이 어디서 비롯되었는가에 대한 것이다. 구체적으로 추적해보면 풍장을 장례의 주요한 방식으로 도입할 수밖에 없었을 토양과 기후 곧 생태환경이 배경이라는 점을 알 수 있다. 예컨대 수많은 장례 방법 중에서 수장(水葬)을 택한 공동체는 매우 작은 섬지역의 방식일 수 있다. 내가 경험한 바로 미크로네시아 몇 개의 섬 장례법이 그러하다. 방안이나 집 안팎의 뜰에 묘지를 만들고 매우 깊숙하게 매장한 다음 십자가를 세우고 묘지와 더불어 생활하는 사례가 그것이다. 우리로 치면 안방에 묘지가 있는 셈이다. 섬이라는 환경과 토양, 인구에 비례하여 땅이 좁기 때문에 일어나는 거주공간의 제한 등이 이런 법도와 의례를 만들어냈을 것이다. 물론 생태환경만으로 이를 명료하게 증명하기는 어렵다. 티베트의 장례법도 메커니즘 측면에서는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심혁주는 「티베의 생사관(生死觀)의 형성배경-환경과 종교의 관점에서」, 『인문과학연구』37, 2013)에서 이렇게 말한다. 티베트 천장(天葬)의 형성에는 여러 가지 기원의 설과 배경을 가지고 있지만 가장 강력한 뿌리는 역시 종교다. 티베트의 종교는 불교이고 그 사상적 배경은 윤회와 환생이다. 이 개념 속에는 죽음과 생명은 반대되는 개념이 아닌 순환되는 개념이다. 우리들에게는 저항할 수 없는 죽음의 압도적인 힘이 티베트인들에게는 아무런 저항감이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종교가 티베트의 상장의식과 그 정신적 뿌리인 생사관에 미친 영향은 절대적이다. 여기에는 티베트 원시종교인 본교(本敎)도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어디 티베트뿐이겠는가. 나는 지난 2023년 4월 15일 무형유산학회 발표 ‘갱번의 인유, 갯벌에 스민 마음’에서 지난 이십여 년간의 이론이었던 갱번론을 거듭 거론하였다. 갱번에 대한 사유를 시작한 것은 매우 오래된 일인데 이를 공식적으로 거론했던 것은 졸고 「영산강의 인문지리와 ‘갱번’문화 시론」(『도서문화』제38집, 2011)이었던 것 같다. 김지하의 흰그늘을 받아쓰고 조동일의 대등생극론을 받아 썼다. 언제나 그렇듯 사숙의 치밀함이 부족해 아쉬울 따름이다. 그렇더라도 내가 확정적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은 나 같은 개땅쇠들 혹은 이름도 빛도 없던 내 선대들에게는 갱번의 사유와 철학이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그윽이 체화되어있다는 생각들이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을 대대(對待)의 사유로 풀어 설명한 것이 내가 얘기해온 ‘갱번론’이다. 이 사유는 산골의 고랑과 물속의 고랑을 동일하게 보는 시선에서 비롯된다.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 아니라, 산이 물이고 물이 산이다. 산과 물 즉 뭍과 물은 서로 대칭(對稱)하고 환치(換置)하며 대대(對待)한다. 적어도 갱번문화권 사람들은 산과 바다를 대극의 위치에 놓는 것이 아니라 대칭의 위치에 놓는다. 하루에 두 번씩 같은 공간이 땅이 되었다가 물이 되는 것을 체화해왔기 때문이다. 바다와 내륙을 인식했던 서긍의 교묘한 시선을 끌어와 설명해도 좋다. 그 사유를 선명하게 보여주는 공간이 갱번이다. 지난 오랜 시간 갱번론을 말하면서 이를 상극의 원리로 풀면 변증법에 비유하고 상생의 원리로 풀어 주역의 대대성(對待性)에 비유해왔다. 경상도 산골 태생 조동일의 대등생극론과 전라도 갱번 태생 김지하의 흰그늘론을 풀어 ‘갱번론’을 말하고자 했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 두 분네는 우리 삶의 풍경 속에서 문화 독해의 절묘한 이론을 길어올렸다는 점에서 탁월하다. 단순히 이들을 잇고자 함이 아니라 내것과 우리것으로 사유하기 혹은 철학하기가 긴요한 시대다. 어렵지 않다. 이미 내 속에 우리 속에 체화된 마음을 끄집어내는 일일 뿐이다.
갱번은 강변에서 온 말이다. 바다를 총칭하는 특히 남도문화권의 호명이다. 충청도나 경상도지역에도 갱번이라는 호명 방식이 일부 남아 있다. 근해, 연해, 원해는 물론 산골짜기의 웅덩이도 갱번이라고 부른다. 이 독특한 사유 관념에 밀물과 썰물의 교직 즉, 하루에 두 번씩 한번은 바다였다가 한번은 육지가 되는 조간대 갯벌의 생태적 배경이 있다. 이를 문화적 장치 혹은 철학으로 읽어낸 것이 나의 갱번론이다. 티베트인들은 천장이라는 장례법을 기후환경과 생태적 조건에 기반해 만들어냈다. 종교를 분석의 결과물로 제시하긴 했지만 결국 종교 또한 토양 조건의 산물이라는 점에서 크게 다르지 않다. 오쟁이쌈이라는 장례법 또한 토양과 환경조건에 따른 조건에 기반해있을 것이다. 이것이 역경(易經)의 대대적(對待的) 공간이 현현되는 듯한, 세계 3대 혹은 세계 5대 갯벌이라는 생태 공간 속에서 특화되었을 것이라는 게 내 생각이다. 티베트의 사례가 가장 대표적으로 인용되고 있기에 오로지 북방의 전통이 아닌가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오키나와 세골장과 풍장 관련 논의를 보면 오히려 남방의 영향이 강하다는 주장을 접할 수 있다. 세골장(洗骨葬)은 남도지역의 초분장과 같은 말이다. 시신을 짚으로 엮어 만든 가짜의 집(house)-이 용어는 생활공간으로서의 양택(陽宅)도 아니고 묘지로서의 음택(陰宅)도 아닌 중간 형태의 집이라는 뜻에서 내가 고안하였다-에 안치해두고 육탈의 기간을 거쳐 뼈만 추려 다시 땅에 매장하는 이차장(二次葬)이다. 장례를 두 번 치른다는 뜻이다. 초분(草墳)이 그 중심에 있다. 초분은 무덤이면서 사실은 망자가 일정한 기간-육탈하는 동안-거처하는 집이기도 하기에 ‘죽은 자의 집’이라 불러도 무방하다. 초분이나 이차장, 세골장, 동굴장 등은 범 동아시아의 장례법이기도 하다. 짚으로 엮은 집(家)을 사용한다는 점에서 오쟁이쌈과 초분은 닮아있다. 하지만 오쟁이쌈은 소나무에 매다는 것으로 모든 장례절차를 끝낸다는 점에서 다르다. 나는 십여 년 전 가고시마대학에서 1년간 외국인 교수로 근무하며 아마미오시마와 오키나와 군도를 1년여 가까이 답사했다. 김창민이 마침 「오키나와의 문화적 정체성과 세골장」(『동아시아문화연구』 제60집)에서 밝혀둔 바가 있어 여기 인용해 둔다. 풍장터는 미야코지마에서 아마미까지 류큐코 전체에 걸쳐 있지만 특히 미야코군도에 집중적으로 분포하고 있다. 또한 파푸아뉴기니에도 풍장의 관습이 존재하고 있다. 이런 측면에서 풍장의 관습은 남방문화적 요소가 강하며 류큐코에서는 미야코군도 사람들이 주로 행하던 장례법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이는 세골장의 태도에서 보인다. 즉, 오키나와 본도에서는 정상적인 죽음의 경우에 세골장을 하며 비정상적인 죽음의 경우에는 세골장을 하지 않는다. 이는 세골장이 문화적 원칙임을 의미한다. 반면 미야코지마에서는 정상적인 죽음의 경우에는 세골장을 하지 않았고 오히려 비정상적인 죽음의 경우에 세골장을 하였다. 미야코지마에서는 풍장이 문화적 원칙이었으며 세골장은 예외적인 장례법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진도와 남도지역의 오쟁이쌈은 문화적 원칙이었을까 변칙이었을까? 나는 오쟁이쌈과 초분이 둘 다 문화적 원칙이었다고 생각하고 있다. 참고로 아마미오시마는 큐슈 즉 일본의 최남단 가고시마에서 오키나와군도 사이에 있고 미야코군도는 대만 가까이 있다. 앞선 사례와 글쓴이의 주장들을 참고해봐도 풍장이 북방의 문화이거나 남방의 문화이거나 하지는 않은 것 같다. 아시아의 북방이나 남방의 문제뿐이겠는가. 진도의 사례에서 나아가 장성의 사례를 소개한다. 월간전통문화사에 펴낸 『월간전통문화』(1986. 1월호, 91쪽, 씨오쟁이-인병선, 짚공예)에 소개된 내용이다. 전라남도 장성군 삼서면에서 만난 김분이 할머니는 자신도 어려서 들은 얘긴데, 전엔 더러 갓난아이가 죽으면 오쟁에 담아 소나무에 걸쳐 놓았다고 한다. 특히 전염병이 유행할 때 이렇게 했는데 그것은 병귀에게 시신을 공물로 바침으로써 더 이상 전염병이 돌지 않도록 하기 위한 예방책이었다. 같은 생각에서 유추됐을 것으로 짐작되는 몇 가지 민속이 최근까지 전해 내려오고 있다. 가령 열병에 걸리면 짚으로 오쟁이를 만들어 그 속에 조밥을 정성스럽게 지어 담아 나무에 걸쳐 놓으면 낫는다고 믿는 것이랄지, 정월 열나흗날 밤 오쟁이에 모래나 자갈을 담고 그 위에 동전 몇 닢을 얹어 다리 위에 갖다 놓으면 그해의 액운이 다 물러간다고 믿었던 것 등이 그것이다.
다리 위의 오쟁이 안에 들어있는 동전은 가난한 아이들이 와서 가져간다. 당시 이 풍속을 소개한 인병선 기자가 해석한 것은 널리 알려진 속신(俗信)을 중심으로 풀이한 것이다. 사실 제보된 대보름 풍속에서 주목할 것은 이 기능이 사실은 가난한 아이들에게 금전을 재배부하는 메커니즘이라는 점이다. 이와 관련해서는 차후 다룰 예정이니 본고에서는 약하기로 한다. 한 가지 팁을 언급해둔다면 마치 보전 공간을 신성권역과 기피권역으로 나누어 설정하듯이 오쟁이쌈과 향후 소개할 엄가시발쌈이 대칭적 맥락에 있다는 점이다. 3. 풍장(風葬)과 씨오쟁이의 행간 오쟁이에 대해 대한 표준국어대사전의 정의는 ‘짚으로 만든 작은 섬’이다. 강원 지역에서는 ‘오재기’라 하고 경남 지역에서는 ‘오장치’라 한다. 오장치는 삼태기의 방언이라고 하므로 삼태기와 비슷하게 생겼음을 알 수 있다. 진도에서 ‘메꼬리’라 부르는 멱둥구미도 거의 유사한 형태이다. 망태기라고도 한다. ‘섬’과 비슷하게 생겼으나 좀 작은 크기라고 보면 된다. ‘섬’은 곡식 따위를 담기 위해 짚으로 엮어 만든 그릇으로 주로 수확한 벼를 담는 데 쓰였다. ‘나락 한 섬’, ‘겉보리 한 섬’ 등의 용례가 있다. 우리의 전통적인 겉곡식 그릇 중 대표적이라고나 할까? 한 되는 한 홉의 열 배이고 한 말은 한 되의 열 배이며, 한 섬은 한 말의 열 배이니 약 180리터 규모와 크기에 해당하는 셈이다.
‘섬 틈에 오쟁이 끼겠나’라는 속담이 있다. 볏섬을 쌓아두고 그 사이사이에 또 오쟁이까지 끼워 욕심을 부리냐는 힐난 외에, 오쟁이가 섬보다 좀 작은 크기라는 정보까지 들어 있다. 위키백과에서는 짚으로 만든 작은 섬(바구니)이라는 뜻으로 풀이한다. 작은 보자기나 주머니에 물건을 넣는 형태를 통틀어 오쟁이라 부른다고 풀이한다. 대개 20~30cm 정도의 작은 섬(이 경우 대개 바구니 혹은 가방으로 묘사한다)모양으로 생겼으며 지역에 따라 여러 용도로 사용된다는 설명이 덧붙여진다.
앞서 언급했듯이 진도지역 아이들 장례는 주로 ‘독장’이라는 형태로 행해졌다. ‘독장’은 두 가지 뜻을 포괄하고 있다. 하나는 돌무더기라는 뜻이고 다른 하나는 일종의 옹관묘인 독(도가지, 옹기)장이라는 뜻이다. 돌을 ‘독’으로 발음하는 구개음화가 이 용어에 반영되어 있다. 국어사전에서는 ‘독’을 간장, 술, 김치 따위를 담가 두는 데에 쓰는 큰 오지그릇이나 질그릇, 운두가 높고 중배가 조금 부르며 전이 달려 있다고 풀이한다. 잿물의 다른 말이 ‘오지’이므로 오지그릇은 잿물을 입힌 것, 질그릇은 잿물을 입히지 않은 옹기에 해당한다. 어린아이가 죽었을 때 주로 돌무더기로 덮어두는 방식으로 처리한 것을 나도 여려서부터 보기도 하고 듣기도 하며 자랐다. 독(질그릇)에 넣어 그 위에 돌을 얹어두는 방식도 혼용되었던 것 같다. 이것은 서남해에 광범위하게 분포하고 있는 옹관묘의 형식이어서 흥미를 끈다. 이것을 섣불리 그 이전 시대의 옹관과 연결하여 해석하는 것은 무리이지만, 질그릇에 아이의 시신을 담는다는 현상 자체만으로 보면 연결하지 못할 바도 아니라는 점에서 좀 더 관심을 두고 정리해볼 예정이다. 세밀한 연구가 진행되어야겠지만 단선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옹관묘의 전통이 아이들 독장으로 이어지지 않았나 생각하는 중이다. 이같은 장속이 현전된 것으로 보아 고대로 거슬러 올라가면 아마도 풍장(風葬)이 일반적이지 않았을까 추정해본 것이다. 풍장은 곧 초분(草墳)과 연결되므로, 오쟁이쌈은 풍장의 여러 갈래 중 하나이고, 바꾸어 말하면 초분의 한 갈래라고 정의해도 무방하다고 생각한다. 더욱 주목할 것은 오쟁이의 대표적인 것이 씨오쟁이라는 점이다. 씨오쟁이는 씨앗을 담아 두는 짚으로 엮은 물건을 말한다. ‘종다래끼’라고도 한다. 닭이 달걀을 낳을 수 있도록 닭장에 걸어두는 망태기를 알망태라고 하는데, 이 또한 오쟁이의 한 범주에 속한다. 국어사전에서는 알을 넣는 망태기로 계란을 넣어 담아오는 짚으로 만든 바구니라고 풀이해두었다. 이외에도 소꼴을 베어오는 꼴망태 등의 용례를 추가할 수 있다.
‘죽어도 씨오쟁이는 베고 죽는다’는 바로 그 망태기다. 농사꾼은 굶어 죽어도 씨오쟁이를 베고 죽는다는 이 속담을 주의 깊게 관찰할 필요가 있다. 설령 자기가 굶어 죽을지언정 씨를 담은 오쟁이를 남긴다는 뜻으로 그만큼 중요하게 생각했다는 뜻이다. 닭이 달걀을 낳는 ‘닭둥구미’와도 비슷해서, 졸저에서는 오쟁이쌈을 하는 이유를 닭과 달걀의 부화로 해석한 바도 있다. 애틋한 부모의 심정을 씨오쟁이와 닭둥구미에 담아내는 심정으로 오쟁이쌈이란 장례를 치루었다는 내 해석이었다. 이와 연결해볼 수 있는 관념이 진도사람들의 씨앗에 대한 시선이다. 한 마을의 사례만 보고되어 있어서 이게 보편적인 관념인가의 문제로 당장 확대하긴 어렵지만 그럼에도 진도 사람들의 씨앗이나 종자에 대한 관념을 엿볼 수 있는 사례라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졸고 전남일보 이윤선의 남도인문학 332회(2023. 1. 27일자)에서 간략하게 이를 소개했는데 내용의 일부를 다시 인용한다. 진도지역에서는 설날이나 대보름에 지내는 마을제사를 주로 ‘거리제’라 하고, 여름 초입에 지내는 제사를 ‘충제(蟲祭)’라 한다. 이름도 빛도 없이 살다 가신 넋들을 불러모아 마을의 주신격(主神格)으로 대우하고 천하 만물과 생태공동체의 조화를 도모했던 그 마음들에 대해서는 본 지면에 여러 차례 소개했다. 세월호를 맞이했던 마음, 불의를 딛고 일어섰던 5.18의 마음, 한해륙의 한(恨)을 감싸 안았던 남도의 마음 등이 그렇다. 지난 내 칼럼들을 참고하면 도움이 된다. 충제는 용어 그대로 하자면 ‘벌레(蟲) 제사(祭)’이다. 단순히 해충을 퇴치해달라는 제사일까? 오래전 전경수 전 진도학회 회장의 보고로 잘 알려진 진도 하사미 마을 충제의 축문이 긴요하다. 내용 중“...절멸후유종(絶滅後遺種)”이란 구절 때문이다. 대개의 연구자들은 ‘해충을 퇴치하고 곡식 종자를 남겨달라’는 취지로 해석한다. 하지만 전경수는 ‘사람들을 괴롭히는 벌레들을 없애주라(絶滅)’ 요청하면서도 ‘벌레의 종자만은 남겨달라(後遺種)’의 뜻으로 해석한다. 나는 모 학회에서 전경수의 뜻을 받아 이렇게 풀이했다. 전자는 직역(直譯)이고 후자는 의역(意譯)이다. 힘세고 권위 있는 신격이 아닌, 자손 없이 죽은 어떤 할머니 등을 주신격 삼는 마음을 주목하자. 마을 제사 이름조차 ‘거리제’라 하는 마음을 보자. 왜 이 대목을 의역해야 하는지 알 수 있다. 조도사람들을 포함해 서남해 어부들은 조기잡이를 하면서도 ‘만선을 바라지만 씨고기는 남겨달라’고 노래했다. 전쟁이 나서 모든 것 다 버리고 피난할 때도 씨앗자루 만큼은 복부에 차고 간다. 씨앗이 있어야 곡식이든 문화든 대를 이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주목할 것은 해충 일지라도 종자만은 남겨달라는 진도사람들의 마음이다. 전 세계에서 우리나라가 세대 간 계층 간 지역 간 갈등이 가장 높다고 한다. 분단된 것도 모자라 지역을 다시 나누고 성별로 나누고 세대로 나누어 갈등한다. OECD 자살률 20여 년째 일등을 하는 나라, 영화 ‘오징어 게임’이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것들이 있다. 상대편이 해충 같기에 박멸하고 싶겠지만, 그것으로 선진국 혹은 새시대를 맞이하기 어렵다. 분단의 역사가 명백하게 증명하고 있지 않은가. 예로부터 새집을 지어 살림을 시작하는 일을 ‘성주 올린다’고 했다. 성주의 신체(神體)가 부루단지고 토종씨앗을 담는 씨앗자루가 부루단지다. 해마다 성주그릇에 햅쌀을 담아 모신다. 토종씨앗이 신(神)이다.
씨오쟁이에 담는 씨앗을 생각해본다. 닭이 알을 낳거나 혹은 달걀을 운반하는 알망태기와 닭둥구미를 상기해본다. 아이가 죽었을 때 담아서 풍장 의례를 하는 오쟁이쌈에 대해 상고해본다. 진도 하사미마을의 충제에서 종자만은 남겨달라고 한 축문의 내용을 묵상해본다. 이들 모두를 관통하는 씨오쟁이에 대해 생각해본다. 무엇이 진도나 장성 사람들의 아이들 장례에 오쟁이를 사용하도록 하였을까? 물론 해석은 달리 할수 있다. 나는 오로지 우리에게 남겨진 실낱같은 사례와 증거들을 통해 그간 우리가 잃어버렸던 에코프랜들리 혹은 신화적 영성에 대해 말하고 싶을 따름이다. 믿고 싶어서 그러는 게 아니라 현상에 대한 시선들, 그간의 네거티브적 분석들을 뒤집어 해명하고 보다 적극적으로 해석하고 싶은 것이다. 4. 씨오쟁이에 담은 재생의 염원 조장(鳥葬)이라고도 하는 티벳 천장(天葬)에 대해서는 박하선의 『천장(天葬)』,(커뮤니케이션즈와우, 2002)를 참고하면 도움이 된다. 박하선은 생사를 넘나드는 장례 현장에 잠입하여 결국 사진을 찍었고 이것으로 2001년 사진의 노벨상이라고 하는 World Press Photo상을 한국인 최초로 받았다. Daily Life Storeis 부분상 수상인데, 대원사 현장 스님의 증언대로 이 촬영을 시도하던 외국인이 칼부림을 당한 이후 아예 외지인의 접근이 허락되지 않는 상황에서 거둔 값진 성과이기도 했다. 나는 보성 대원사 티벳 전시실에 가서 이 책을 만났었는데, 지금도 전시해두고 있는지 모르겠다. 수도 없이 몰려든 독수리 떼에게 망자의 시신을 나누어주는 장면들이기 때문에 심신 노약자들은 주의가 필요하다. 사진을 차마 여기에 인용할 수는 없지만 출판사에서 주제 문단으로 뽑은 몇 장면의 묘사를 가져와 본다. 영원으로 통하는 문, 천장(天葬), 삶이란 돌고 도는 것, 그러니 아쉬워할 것도, 덧없는 육신에 집착할 것도 없는 티베트인들의 윤회론은 천여년 동안 그들의 삶 속에 녹아 흐르는 지침이니, 몸으로 보시하는 천장 또한 그들의 일상 중 하나일 뿐이다. 때문에 망자를 새들에게 보내는 그 순간은 참혹하고 황량하며 쓸쓸하기까지 하지만,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티벳인에게 있어 바람에게로, 새에게로 뿌려지는 천장은 바로 영혼이 영원의 시간으로 들어가는 하나의 문인 것이다. 대원사 현장스님은 이렇게 말한다. 티베트 사람들은 살아있을 때 세 가지를 기억하라는 스승의 말씀을 배운다. 첫째, 나는 반드시 죽을 것이다. 둘깨, 죽음의 시기는 알 수 없다. 셋째, 죽음의 길에는 영적인 수행과 선행의 공덕만이 저승의 길을 밝혀준다. 그들은 육신의 죽음 이후 내세로 가져갈 수 없는 것들은 참된 재산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착한 일을 해서 공덕의 씨앗을 뿌리고 자비심을 키우고 스승을 잘 섬기는 일이 이승과 저승의 삶을 행복하게 해주는 재산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모든 이웃들이 나의 전생가족이라고 믿는 그들은 전생 어머니들의 괴로움과 배고픔을 덜어주기 위해 자신의 살 한 점, 피 한 방울까지 아낌없이 베풀어주고 새로운 인연의 길을 떠난다. 모든 생명들이 괴로움과 두려움에서 벗어나기를 염원하면서.
안명철은 「‘풍장1’의 언어기호론적 해석」(『우리말글』35, 2005, 117쪽)에서 황동규의 시 <풍장>을 인용하며 이렇게 말한다. “결국 ‘풍장’은 한 생명이 원초적 고향인 섬(自然)으로 다시 돌아가고 그곳에서 다시 생명이 탄생되는, 삶과 죽음의 영원한 순환을 뜻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여기에 이르게 되면 죽음은 더 이상의 ‘죽음’이 아니라 즐거운 삶의 고향으로 가는 일이 되지 않겠는가?”라고. 그래서다. 가장 사랑하던 나의 아이가 죽었는데, 그 아이를 장례 지내야 하는데, 어느 부모가 아이의 시신과 영혼과 아이를 이루었을 그 모든 것들에 대해 연민과 사랑이 스며들지 않겠는가. 특히 다시 태어날 아기라는 언설에는 실제 태어날 동생을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죽은 아이가 다시 태어나기를 바라는 소망이 들어 있기도 하다. 이에 대해서는 진도의 다시래기(다시 태어난다로 해석한다)놀이를 통해 여러차례 밝혀두었으나 기회가 되면 다시 거듭 설명하기로 한다. 이제 논의를 정리한다. 장성의 사례를 소개한 기자의 해석처럼 병귀에게 아이의 시신을 공물로 바치고 더이상 전염병이 돌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을까? 내 해석처럼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아이를 씨오쟁이에 담아 장차 더욱 소중한 어떤 생명으로 발아(發芽)하고 다시 태어나기를 바라기 위함이었을까? 물론 일반적인 해석은 전자의 것이다. 심지어 처녀가 죽으면 네거리에 거꾸로 매장하는 풍속도 알려져 있다. 하지만 풍속의 이면을 부정적으로만 다루거나 미신처럼 대할 필요가 없다. 현대에 이르러 주검을 너무 허투루 다루는 게 아닌가 성찰해야만 한다. 엄연한 사실을 왜곡해서는 안되겠지만, 적어도 전통을 보다 적극적이고 긍정적으로 해석하고 이해하는 태도가 필요하다. 지금은 희미하게 남아있거나 혹은 구술로 전해지지만 진도와 장성의 사례를 통해서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것은 티베트의 천장(天葬)이나 오키나와의 풍장에 버금가는 한국인들의 죽음관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 중심에는 문화적 원칙으로서의 초분(草墳)이 있고 오쟁이쌈이 있다. 재생과 거듭남에 대한 명료한 사례라고 생각한다. 졸저에서 남도의 씻김굿과 다시래기와 만가, 심지어 윷놀이를 상장례의 중요한 풍속으로 풀이하고 그 안에 그윽이 스며들고 깊숙이 베인 관념과 철학을 드러내고자 한 이유이기도 하다. 황동규의 대표적인 작품 <풍장 1>(1982)의 시를 인용하며 이 글을 마친다. 내 세상 뜨면 풍장시켜 다오
섭섭하지 않게 옷은 입은 채로 전자시계는 가는 채로 손목에 달아놓고 아주 춥지는 않게 자국가방에 넣어 전세 택시에 싣고 군산에 가서 검색이 심하면 곰소쯤에 가서 통통배에 옮겨 실어다오 가방 속에서 다리 오그리고 그러나 편안히 누워 있다가 선유도 지나 통통 소리 지나 배가 육지에 허리 대는 기척에 잠시 정신을 잃고 가방 벗기우고 옷 벗기우고 무인도의 늦가을 차가운 햇빛 속에 구두와 양말도 벗기우고 손목시계 부서질 때 남몰래 시간을 떨어뜨리고 바람 속에 익은 붉은 열매에서 툭툭 튀기는 씨들을 무연히 안 보이듯 바라보며 살을 말리게 해다오 어금니에 박혀 녹스는 백금 조각도 바람 속에 빛나게 해다오 바람을 이불처럼 덮고 화장(火葬)도 해탈(解脫)도 없이 이불 여미듯 바람을 여미고 마지막으로 몸의 피가 다 마를 때까지 바람과 놀게 해다오
글쓴이 이윤선 진도학회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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