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경의 기억] 천하제일 고려청자 -세계 최고의 첨단기술을 가졌던 전남 게시기간 : 2024-04-10 07:00부터 2030-12-24 21:21까지 등록일 : 2024-04-08 16:53
재단법인 한국학호남진흥원
풍경의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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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도에는 면면히 이어지는 도자사의 전통이 있다. 남도에는 옹관부터 도기, 자기(청자), 분청사기, 백자, 옹기 등으로 면면히 이어지는 도자사의 전통이 굳건히 자리 잡고 있다. 그래서 남도는 “한국 도자문화의 본향”이라 불린다. 그중에서도 강진의 고려청자가 우뚝 솟아 있다. 중국 송대 태평노인(太平老人) 문장중(文張仲)의 저작인『수중금(袖中錦)』의 「천하제일(天下第一)」 편에 “감서(監書), 내주(內酒), 단연(端硯), 낙양화(洛陽花), 건주차(建州茶), 촉금(蜀錦), 정자(定瓷), 절칠(浙漆), 오지(吳紙), 진동(晋銅), 서마(西馬), 동견(東绢), 거란안(契丹鞍), 하국검(夏國劍), 고려비색(高麗秘色) …… , 모두 천하제일이다. 다른 곳에서 이를 본뜨려 했지만 끝내 미치지 못하였다[皆爲天下第一,他處雖效之,終不及].”
라 하여 ‘고려비색(高麗秘色)’을 중국의 여러 특산물들과 나란히 ‘천하제일’로 꼽고 있다. 고려청자를 ‘천하제일’이라 부르는 연원은 여기서 나왔다. 이때의 비색(秘色)은 뒤에서 다룰 비색(翡色)과는 다르다. 자기의 생산은 청동기 제작에 이은 제2의 첨단기술이라고 평한다. 고려는 중국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자기를 만들었다.1) 10~15세기 동안 자기를 생산할 수 있는 나라는 중국과 고려뿐이었다. 그중에서도 고려는 비색과 상감(象嵌)이라는 독보적인 솜씨로 중국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천하제일 세계 최고의 청자를 탄생시켰다. 그런데 그런 고려청자 중에서 국보로 지정된 것은 24점인데 이 가운데 18점이 강진에서 생산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보물 54점 중에서도 강진에서 생산된 것이 34점에 이른다. 이것만 봐도 강진이 고려청자 생산의 중심지였다는 것은 너무나 분명하다. 강진군 대구면과 칠량면을 중심으로 한 지역에는 200여 개소의 청자 요지(窯地)들이 산재해 있다. 전국 청자요지의 30% 정도를 차지한다. 이렇듯 청자문화를 꽃피운 곳이 강진의 청자요지이고, 그 가운데 전성기 비색청자를 이끈 곳이 사당리 당전마을로 가장 핵심을 이루고 있다. 이곳을 중심으로 고려청자박물관이 들어섰고, 대한민국 대표축제인 강진청자축제가 매년 성황리에 열리고 있다.
천하제일 고려비색 - 흙과 유약 중심의 순청자 고려는 12세기 전반 예종(1105~1122)과 인종(1122~1146) 때에 이르러 황금기를 맞는다. 이때 고려청자는 스스로 발전하면서, ‘천하제일’의 위치에 오르게 된다. 그 비결은 색깔이었다. 중국의 송 청자와는 ‘다른’ 푸른색이었다. 이를 ‘비색(翡色)’이라 불렀다. ‘비색(翡色)’이란 표현은 1123년(인종 1) 북송 휘종의 사행(使行)의 일원으로 고려에 왔던 서긍(徐兢, 1091~1153)이 쓴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이하 『고려도경』)에 나온다.2) 즉 “도기(陶器)의 빛깔이 푸른 것을 고려인은 비색(翡色)이라고 하는데, 근래에 들어 제작기술이 정교해져 빛깔이 더욱 좋아졌다.”3)
라 하여 고려청자를 ‘비색’이란 표현에 담아 그 빼어남을 기록하였다. 그는 비색의 작은 찻잔[翡色小甌]4)이나 참외 모양의 도기 술독[酒尊], 산예출향(狻猊出香)5)과 같은 도기 향로 등의 청자를 설명하면서 ‘비색’이란 표현을 덧붙였다. 비색청자는 12세기 전반기인 16대 예종 때 완성된 것으로 보고 있다. 이때 청자의 모습은 인종 왕릉[장릉(長陵)]에서 시책(諡冊)과 함께 출토되었다고 전해지는 청자 참외모양병[靑磁瓜形甁; 국보]으로 대표된다. 바로 이 유물들을 『고려도경』에서 극찬한 비색청자로 꼽고 있다. 인종 장릉에서는 또 청자 방형대, 청자 국화모양합, 청자 뚜껑 있는 통형잔 등도 함께 출토되었다.6)
【그림 2】 청자 참외모양병[靑磁瓜形甁], 고려시대(12세기 전반), 국보 지정일 1962.12.20. 출처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고려도경』에서 꼽은 비색청자를 ‘순청자’로 분류한다. 12세기 전반 순청자의 푸른색은 빙렬이 없이 깊고 차분한 비색의 절정을 보인다. 회색의 태토와 녹청색의 유약 층으로 형성된 고려청자는 산화철 1.5~3% 정도가 함유된 태토와 산화칼슘 13~20%가 함유된 유약을 사용하였고, 산화칼슘의 공급원으로 재(灰) 또는 석회석의 원료를 사용한다. 1,180℃ 정도의 온도와 환원번조(還元燔造) 과정을 통해 탄생했다고 분석한다.7) 재벌구이가 큰 기술적 역할을 했다. 순청자 절정기의 비색(翡色)은 시유된 유약의 두께가 얇고, 비취옥과 같이 녹색이 비쳤으며, 유약 내에 미세한 기포가 많아 반실투성(反失透性)으로 태토가 은은히 비쳐 보인다. 그러므로 섬세한 음각이나 세밀한 양인각 등을 나타낼 수 있어 한층 기품이 있다.8) 그러한 최고급 청자를 주로 생산한 요장이 바로 강진의 사당리 요장이었다. 비색의 비(翡)는 물총새란 뜻이다. 이 비색을 서양학자들은 주로 물총새의 깃털 색으로 인식했다. 그래서 비색을 ‘Kingfisher Green’, 또는 ‘Kingfisher Colour’ 등으로 불렀다. 물총새의 깃은 청색과 녹색이 뒤섞인 오묘한 색이다. 실제 12세기 고려청자의 색은 하나의 색보다는 청색과 녹색이 만든 스펙트럼의 범위 내의 색으로 볼 수 있다. 어느 하나만의 색에 해당하지는 않는다.9)
【그림 3】 청색과 녹색이 뒤섞인 물총새의 깃털. 출처 : John Bridges / WTML 그런데 왜 하필이면 이런 비색을 표현하려 했을까? 연금술처럼 비색의 재현을 통해 인공 옥을 만들려는 욕구였을까? ‘비(翡)’와 ‘취(翠)’는 녹색 경옥(硬玉)인 비취옥을 연상시키는 말로서 ‘취색(翠色)’을 이상으로 한 중국 월주요(越州窯) 청자나 ‘비색(翡色)’을 이상으로 한 고려청자도 모두 목표는 옥과 같이 부드럽고 맑은 재질의 청자였을 것으로 보인다. 고려의 이규보(李奎報, 1168~1241)도 청자를 ‘푸른 옥[碧玉]’이나 ‘치옥(緻玉)’처럼 옥의 특별한 질감과 비교하면서 13세기 고려사회에서 옥과 청자의 전통적 친연성을 확인시켜주고 있다.10) 이렇게 보면 ‘비색(翡色)’과 비취옥과의 관련성은 분명하다. 옥에서 나오는 좋은 기운을 손으로 만져 직접 느낄 수 있다고 하여 옥은 예로부터 인기가 많았다. 무늬가 돋보이는 상감청자- 투명한 녹색의 비색 고려청자는 비색 순청자 단계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상감청자(象嵌靑磁)’를 만들면서 제2차 절정기를 맞는다. 고려청자가 청자로서 최고의 품격을 갖춘 것은 상감청자를 만들면서부터라고 한다. 상감기법이란 태토를 파내고 다른 흙을 감입하여 태토와 대비되는 색조의 문양을 표현하는 기법이다. 상감기법은 10세기 청자 발생기 요장에서도 나타나긴 하나, 13세기경에 이르러 독보적 미감을 완성하여 최고 절정의 상감청자를 만들어냈다.11) 거기에는 유약의 변화도 컸다. 즉 청자 유약을 더 맑고 밝고 투명하게 발전시켰다. 기포(氣泡)를 줄여 비색을 밝게 함으로써 문양을 잘 보이게 만들었고 빙렬도 많아졌다. 12세기 청자보다 투광성이 강해져 태토의 회색이 보다 선명히 들여다보여 비취색과 회색의 절묘한 조화를 이루게 하였다. 이제 청자의 주류가, 바탕흙과 유약 중심의 순청자에서 무늬가 돋보이는 상감청자로 전환하였다. 이는 무엇보다도 재벌구이[이차 번조]라는 고도의 기술을 가지고 있었던 고려의 장인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특히 ‘매병’이라는 특수기형을 통해 고려만의 곡선미와 장식 문양으로 미학적인 고유성을 발휘했다.12) 12세기 중엽 무신의 난(1170년)이 일어나고 또 무신집권기인 1231년에 몽골의 침략을 맞는다. 하지만 이때에도 각종 상감청자를 만들며 13세기 내내 오히려 전성기를 이룬다. 그야말로 내우외환 속에서 태어난 명품 청자들이다. 이때 전북 부안이 전남 강진과 쌍벽을 이루면서 청자 발전에 기여한다. 상감청자는 이를 녹자(綠瓷)라고 불러 비색 순청자와 구분하기도 한다. 12세기 중반부터 13세기 전반까지의 상감청자 유태색은 완전한 투명유에서 점점 녹색이 짙어져 가는 현상을 보여주고 있다. 이규보는 녹자배(綠甆盃)에 대한 시를 썼는데, 이를 “이제 알겠네, 술잔 만든 솜씨는 하늘의 조화를 빌려왔나 보구려[迺知埏塡功 似借天工術]”라고 묘사하면서 “푸른 자기 술잔을 구워내[陶出綠甆盃]”라거나 “선명하게 푸른 옥 빛이 나니[瑩然碧玉光]”이라 하여 푸른 옥빛이 나는 녹자로 표현하였다. 또 책상 위의 세 가지 물건을 소재로 시를 지었는데 그중 하나가 녹자연적자(綠瓷硯滴子)였다. 베개를 소재로 한 시도 있는데 그때의 베개 역시 녹자침(綠瓷枕) 즉 푸른 자기 베개였다.14)
【그림 4】 청자 상감운학문 매병(靑磁 象嵌雲鶴文 梅甁), 고려시대(무신집권기), 국보 지정일 1962.12.20. 출처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이렇듯 청자보다는 ‘녹자’라는 표현을 썼다. 청자의 색을 오로지 녹색이라고 했던 것은 1212년경 그가 본 청자가 그저 현실세계의 색인 ‘녹색’이 분명했기 때문이라고 해석한다.15) 우리는 이것까지 포함하여 관행적으로 ‘비색’이라고 부르고 있지만, 서긍이 지적한 ‘실투성의 비색’과 이규보의 ‘투명한 녹색의 비색시대’는 다르다. 하지만 그 차이는 미미해 보인다. 결국 고려는 청자의 시작 단계에서부터 월주요식(越州窯式)의 투명유를 청자의 이상으로 생각하고 자주적 조형정신을 계발하여 ‘천하제일 고려비색’과 ‘독보적인 상감청자’와 같은 고품위의 완성도 높은 수준까지 달성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16) 이즈음 청자는 고려의 ‘문화’였다. 모든 생활용기, 즉 찻잔은 물론 꽃병, 화분, 장신구, 건축자재, 화장용기까지를 청자로 만들었다. 이에 고급과 저급의 청자들로 다양했다. 이것이 청자가 곧 고려의 문화였음을 반영한다. 그중 양질청자는 세계최고의 첨단기술을 가진 강진에서 생산했다. 어떻게 전남 강진이 중심지가 되었을까? 강진이 고려청자의 초기 생산지는 아니었다. 그렇다면 청자는 언제 어디서 만들기 시작했을까? 이른바 ‘청자 발생 문제’는 지금도 여전히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다. 통일신라시대인 9세기 전기부터 11세기까지 다양하다. 다만 전성기는 12세기 강진으로 일치한다. 이 글에서는 발생 문제를 자세히 다룰 여유는 없다. 우리의 관심은 여전히 “어떻게 강진이 중심지가 되었을까?”에 있다. 여기에 필요한 정도로만 발생문제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자.17) 차문화의 전파에 따라 음다용 도구로서 청자에 대한 수요가 늘고 있었는데, 오대 십국시대(五代十國時代, 907~979)의 혼란으로 중국산 자기 수입이 원활치 못하게 되었다. 마침 중국 절강성(浙江省)의 월주요에서 활동하던 장인들의 일부가 전쟁을 피해 고려로 이주해 온 것이 계기가 되어 이들이 고려에서 벽돌가마를 직접 만들어 생산하기 시작했다고 본다. 이렇게 청자 발생을 본다면 그 시기는 늦어도 10세기 전반경에 해당한다. 초기청자 요지는 고려 초 주로 중서부 지역에 있었다. 초기청자는 해무리굽[日暈底 또는 玉璧底] 완(碗)과 화판접시(花瓣楪匙) 등이 주요 기종(器種)을 이루며, 거의 문양을 새기지 않은 소문청자(素文靑磁)라는 점 등을 그 중요한 특징으로 꼽고 있다. 이러한 초기청자를 만들었던 요지(窯址)는 우리나라 중서부와 남서해안 지방에 산재해 있다. 이들은 청자를 만드는 핵심적 기술인 축요법(築窯法)과 요도구(窯道具)의 사용법을 기준으로 크게 두 가지 계열로 나눌 수 있다. 그 하나는 네모난 내화벽돌로 가마를 만든 ‘전축요(塼築窯)’ 계열이고,또 다른 하나는 내화 점토, 즉 진흙으로 쌓아 가마를 만든 ‘토축요(土築窯)’ 계열이다. 전자는 중서부 지역에 넓게 퍼져 있었고, 후자는 서남해안 지역에 밀집·분포되어 있었다. 전축요는 한 장소에 정착하여 대규모의 가마를 1~3기 정도 운영하였으며, 갑발을 중심으로 거대한 퇴적을 남기고 있다. 토축요는 일정한 지역 내에서 다섯 개 정도의 소규모 제작집단이 이곳저곳으로 옮겨 다니면서 청자를 제작했기 때문에 수십 개소에 이르는 소규모 퇴적을 남기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대표적 토축요인 강진지방의 초기청자요들은 일정 지역 안에서 각 단계마다 십여 개의 요들이 무리를 지어 청자를 만들다가 일정 기간이 지나면 장소를 옮겼다. 이렇게 보면, 중서부 지역 전축요들의 대부분은 ’정착식 대규모형‘으로, 서남해안 지역의 토축요들은 ’이동식 소규모형’으로 구분할 수 있을 것이다.18) 10세기 후반 이후 중서부 지역의 초기 벽돌가마들이 소멸하고 새롭게 서남해 지역에서 청자 요업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왜 그랬을까? 거기에는 우선 10세기 말부터 11세기 초까지 이어진, 거란의 침입이 일차적 원인이었다. 이 때문에 전란의 직접적 영향권 내에 있던 중서부 지역 요장들은 소멸의 길로 들어섰고, 상대적으로 그 영향권 밖에 있던 서남해 지역의 요장들은 오히려 안정적으로 운영될 수 있어 활성화의 기회를 맞았다. 이런 강진지방의 청자요들은, 중서부지방의 청자요들이 사요(私窯)였던 것과는 달리, 자기소(磁器所)라는 특수행정구역에 속해 있었다. 이는 곧 고려의 청자 생산이 자기소 중심의 청자생산체제로 일원화되었음을 뜻한다.19) 고려 정부가 강진을 중심으로 이런 변화를 꾀했던 데에는 중앙집권화의 큰 걸림돌이었던 호족세력들을 누르고 중앙집권화를 강화할 수 있었던 점이 주효했다. 현종 9년(1018)에 ‘전라도’라는 행정구역이 탄생하는 등 고려 지방제도의 기본체제가 완성되었고, 이에 따라 중앙에서 지방에 대한 통제·관리가 용이해졌다. 특히 조운제도 확립되었는데, 이는 청자 생산지가 서남해안으로 이동해도 운송에 지장이 없는 조건을 만들었다. 바닷길이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물론이고, 땔감과 물이 풍부한 강진의 자연조건도 영향을 미쳤다. 또 전문기술과 예로부터 내려오는 우수한 도자문화의 전통도 한몫을 하였다. 그리고 이 지역의 우호적인 세력집단을 매개로 청자산업에 대한 지배력 강화를 통하여 경제적 안정을 꾀하려는 의도도 작용하였다. 이렇게 해서 강진을 중심으로 한 서남해안 지역은 당시의 최첨단 산업이었던 청자의 생산에서 우월적 지위를 부여받을 수 있었다. 그리고 이곳의 토축요들은 완전 환원염이 가능한 구조를 갖춰 비색청자를 더욱 발전시킬 수 있어 양질청자의 주산지가 될 수 있었다. 이런 토축요들이 고려청자의 주류를 이루게 되었다. 대표적으로 만두형 가마가 확인된 사당리 23호 요장 일대가 고려 황실을 위해 최고급 명품 비색청자를 만들었던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20) 한편, 양질의 고품격 청자, 즉 양질청자를 주로 생산하였던 강진지방의 청자요와 함께 해남군 신덕리요들이 토축요의 또 다른 한 축을 형성하고 있었다. 여기서는 소박하면서도 일상생활에서 쉽게 사용할 수 있는 청자, 즉 조질청자를 주로 생산하였다. 이로써 10세기 말기부터 11세기 초기 사이에 자기소로 편제된 강진지방의 토축요가 청자생산의 중심지가 되었다.21) 전남 강진 지역은 12세기 이후 왕실용 최고급 청자를 생산하는 대표적인 제작지로 고려 후기까지 운영되었다.22) 전성기 강진 청자는 전국에 분포하는 소규모의 요장에도 많은 영향을 미쳐 ‘강진양식' 또는 ‘강진유형’의 청자가 전국으로 확산되기에 이르렀다. 대몽항쟁 중에도 전라도 지역은 개성과 강화 등 전란의 중심지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으며, 무신정권의 경제적 기반을 형성하고 있어 상대적으로 피해가 적었다. 청자 생산의 핵심인 대구소 역시 품질이 급격하게 저하되지는 않았다. 전북 부안이 전남 강진과 쌍벽을 이루면서 청자 발전에 기여하였다. 강진 청자의 품질을 하락시키는 결정적 계기는 1350년(충정왕 2) 이후 남해안에 많은 피해를 주었던 왜구의 잦은 침략이었다. 강진의 요업은 사기가 판매되던 1341년 전후에 이미 해체되어 외부로 확산되기 시작하였다.23) 일제강점기 최초의 요지 발굴조사는 1914년 4월 강진 청자요지에 대한 조사였다. 이후 대구면을 중심으로 고려 옛 요지들에 대한 조사는 지속되었다. 1920년대에 작성된 분포도들이 몇몇 남아 있어 강진 청자요지에 대한 관심이 얼마나 컸는지 짐작케 한다.24)
고려자기에 드리운 식민제국의 검은 손 - ‘조선예술쇠망론’의 허구 고려청자가 본격적으로 이름을 세상에 알리게 된 배경에는 유감스럽게도 일제의 탐욕과 이를 포장하고 있는 ‘조선예술쇠망론’이 자리잡고 있어 조심스럽다. 「‘고려자기’는 어떻게 ‘미술’이 되었나」라는 연구가 있어 주목된다.25) 이 글에 따르면, 식민지 지배하에서 고려자기는 ‘만들어진 전통’의 산물이 되었다고 한다. 지하에 수백 년간 매장되어 있던 고려자기들이 갑자기 ‘도굴’되어 나타나 조선시대와는 연속성을 갖지 않는 완전히 새로운 ‘전통’, 즉 한국을 대표하는 물질의 표징이자 전통의 표방이 되었다고 한다. ‘도굴 행위’는, 이미 1876년 개항 이전부터 있었다. 이즈음 일본인들의 도굴에 대하여 이유원(李裕元, 1814~1888)이 다음과 같은 단상을 남겨 그 실상의 일부를 전한다. “일본사람은 고려자기를 좋아하여 값을 아끼지 않는다. 갑신년(1884, 고종 21)에 개성 사람 하나가 고총(古塚)을 파 들어가다가 왕릉에서 옥대(玉帶)를 발굴하고 또 운학(雲鶴)이 그려진 자기 반상기 한 벌을 발굴하였는데, 값이 700냥이나 나갔다. 그때는 원(元)나라 장인(匠人)들이 왕래했기 때문에 그 만듦새가 여느 것과는 달랐다. 사람들은 더러운 기운이 깊이 스며 있는 것조차 모르고 좌석 주변에 놓아두기를 좋아하는데, 종래의 중국 사람들의 기록에서는 이를 비난한 경우가 많았다.”26)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걸쳐 개성과 강화도에서 도굴된 고려의 유물들이 이른바 골동품이 되어 시장에 쏟아졌다. 후지타 료스케(藤田亮策)는 그 배경을 “18세기 이후 구미인들의 동양에 대한 호기심”에서 찾았다. 도굴이란 불법적인 행위를 통해서라도 고려자기를 수집하게 했던 배경은 구미인들의 ‘동양에 대한 호기심’이란 제국주의적 욕망 때문이었으니 이 또한 개탄할 일이 아닐 수 없다. 나아가 이러한 ‘동양에 대한’ 시선은 그대로 일본 제국의 조선에 대한 시선으로 옮겨갔다. 고려자기가 ‘미술’로 감상되었던 이면에는 조선인들에 대한 편견과 무시가 강하게 도사리고 있었다. 거기에 더해, 고려자기의 도굴과 수집을 ‘전통의 보호’라는 이름으로 정당화하기까지 하였다. 도굴꾼이 ‘전통의 보호자’라는 허울을 쓰고 나타나는 위선을 버젓이 저질렀다. 이어서 도굴은 합법적이고 제도적 차원의 발굴로 전환되었다. 합법적인 발굴 작업을 통해 고려자기의 가치를 더욱 공고히 했다. 그것은 ‘고려자기 열광’이란 특정시기의 현상으로 나타났다.27) 그리고 이는 조선예술쇠망론으로 이어지면서 식민사관에 일조했다. 이런 쇠망론에서는, 고려의 예술은 “통일신라시대에 비해 진보의 흔적이 없고 오히려 퇴보”하였으며, “이조에 들어와서는 마침내 절멸에 이른다”고 주장한다.28) 이 때문에 조선백자는 더욱 가치없는 것으로 무시되었다. 이렇게 ‘고려자기’는 훌륭한데, 그것이 역설적으로 ‘조선예술쇠망론’을 뒷받침하는 근거의 하나로 이용되었던 것이다. 이렇듯 식민사관 형성에 기여하는 쇠망론은 임진왜란 때 조선 장인을 납치해 가서 비로소 자기를 생산할 수 있게 된 일본이 주장할 일은 아니다. 이와는 달리 강점기 때에서조차 조선의 예술이 쇠망한 것은 아니라는 관점이 나오기도 하였다. 조선시대 도자에 대한 재평가를 통해 백자가 청자보다 우위에 있다는 인식의 전환도 일부 있었다.29) 세계의 도자기는 크게 나누어 보면, 토기에서 도기·석기[炻器, 오지그릇]를 거쳐 자기 즉 청자로 넘어갔고, 다시 청자에서 백자로 이행, 발전되었다고 본다.30) 이처럼 청자에서 백자로 넘어가는 것은 세계적 추세였다. 조선 역시 사회적 요구나 문화적 풍조가 바뀌면서 청자에서 분청사기를 거쳐 백자로 넘어갔는데, 이는 미의 기준이 달라진 때문에 나타난 자연스러운 현상일뿐, 쇠망이라고 표현할 일은 더욱 아니다. 고려는 물론 조선 후기를 거치면서도 줄곧 우수하게 기억되어온 고려자기, 일제가 제국의 전략으로 예술쇠망론을 내세워, 역으로 그 상품 가치를 높이려 했지만, 그런 기만적 행위와 상관없이 고려청자는 객관적으로 훌륭하고 그 이후 나온 백자도 여전히 아름답다. 결코 후퇴가 아니었다. 성호 이익(李瀷, 1681~1763)의 다음과 같은 평도 인상적이다.31) 그는 비색자기라 하여 고려청자에 대해 천하제일 등의 평을 하면서도 조선의 백자에 대해서도 그 아름다움을 언급하고 있다. 즉 “지금 궁중에 바치는 사옹원(司饔院)의 자기가 지극히 아름다운 바, 지난해 청국 사신이 우리나라에 왔을 때에 한량없이 칭찬하였다” 고 하여 백자의 우수성을 자랑스럽게 말하고 있다. 반면에 “(고려자기는 - 필자) 지금 사대부의 집에 보통 쓰는 그릇에 비교해도 오히려 품격이 낮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지금은 귀천을 막론하고 집집마다 이런 자기(백자 –필자)를 쌓아 놓고 쓰는데, 거의 질그릇과 구별없이 흔하게들 쓰고 있으니, 이로써 세상의 사치함과 검소함을 점칠 수 있겠다.”
고 하여 청자는 낮게, 백자는 높게 평가하고 있음이 눈에 띈다. 이런 기록들이 있는 것처럼 예술은 취향이고 시대성을 반영한다. 그래서 문화는 우열을 논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고려자기의 우수함이 달라지는 것 또한 아니다. 청자에 대한 인식의 맥락 – 조선 후기 고려청자에 대한 관심 청자의 우수성이나 그 가치에 ‘열광’하는 현상이 19세기 말 20세기 초에 갑작스럽게 튀어나온 것은 아니다. 그런 인식에 대한 시대적 맥락은 먼저 『고려도경』에 대한 관심의 정도와 닿아 있다. 『고려도경』은 12세기 당시의 고려청자를 ‘비색’으로 거론한 문헌 기록으로 거의 유일하게 전해온다. 『고려도경』은 고려 이후 조선 중기까지도 국내에서 별로 활용되지 않았다. 그러던 것이 18세기 후반경부터 다시 거론되고 있었다.32) 『고려도경』의 필사본들이 다수 제작 유통되었고, 『임하필기(林下筆記)』 등 이를 인용한 문집들도 많이 나온다. 『해동역사』를 비롯한 고려 역사를 다룬 대부분의 역사서들에서는 『고려도경』이 인용서목에 올라가 있다. 이처럼 『고려도경』은 조선 후기에 고려를 바라보는 주요한 통로가 되었다. 이에 따라 고려청자에 대한 관심도 커졌다. 이렇게 조선시대 동안에도 『고려도경』은 물론, 고려와 관련된 사서와 문집 등 기록과 사료를 통해 고려청자에 대한 기억을 축적해 가고 있었다.33) 그 기억은 『고려도경』과 『수중금』의 기록에 크게 의존하고 있었다.
【그림 8】 긍(송) 찬, 『선화봉사고려도경』 표지. 출처 :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성호 이익은 『수중금(袖中錦)』을 인용하여 비색자기(秘色磁器)를 언급하면서 “고려의 비색자기는 천하에서 제일 간다”고 하였다. 다만, “충렬왕(忠烈王) 15년에 원(元) 나라 중서성(中書省)에서 고려로 통첩을 보내 청사(靑砂)로 만든 독ㆍ동이ㆍ병 등을 구해 갔다 하니, 이는 혹 예전에만 만드는 이가 있었고 지금은 능히 만들 수 없는 것인지, 또는 일본과 무역함에 따라 그렇게 되었는지 알 수 없다”
고 하여 그 맥이 끊김을 아쉬워했다. 그리고 “지금 세상에는 이런 자기가 또한 많은데, 금조(禽鳥)ㆍ초목ㆍ산악ㆍ충수(虫獸) 등 여러 물형의 그림을 놓아 만든 것이 푸르고 곱기가 모두 절기하다. 이는 곧 회회청(回回靑)이라야 그릴 수 있는 것이고 딴 채색으로는 이룰 수 없는 것인데, 왕원미(王元美)는, “혹 석청(石靑)으로도 그릴 수 있다.” 하였다. 우리 집에도 옛날에는 이런 자기가 몇 개쯤 있었는데, 선인(先人) 외가에서 궐내(闕內)로부터 전해 왔기 때문에 우리 할머니께서 몹시 중하게 생각하였다. 병자년(1636, 인조 14) 난리 때에도 잃어버리지 않고 온전히 보호했던바, 나도 오히려 보았다.”
고 하여 여전히 고려자기가 많이 전해 내려오고 또 귀하게 여겨지고 있었음을 말하였다.34) 다음 몇 가지 기록들도 더 확인된다.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이 김우희(金友喜)에게서 수선화 분재 화분을 선물 받았는데 이를 ‘고려고기(高麗古器)’라고 기록하고 있다.35) 또 이유원의 『임하필기』에 「고려기(高麗器)」36)라는 항목이 있는데 거기서 말하기를 “두실(斗室, 沈象奎) 댁에 옛날 고려시대의 비색 자기[高麗秘色瓷尊]를 간직하고 있는데, 안 문성공(安文成公 安裕)의 집터에서 습득한 것으로서 보배로 여길 만하다. 양연(養硏 申緯) 노인이 그 그릇을 빌려다가 8년간 쓰고 돌려보냈다.”
라 하여 ‘비색자기[秘色瓷尊]’라는 표현을 쓰면서 “보배로 여길 만”한 그릇으로 귀하게 여겼다. 그 자기의 모습에 대해 묘사하기를 “나는 학 여섯 마리와 피어오르는 구름송이 열여덟 개를 그렸는데, 모두 분청(粉靑)을 사용하였다”고 되어 있다. 아마도 운학문이 상감된 매병이었을 것으로 본다.37) 또 이어서 “내(이유원)가 간직하고 있는 자기는 분청으로 푸르게 뇌문(雷文)을 그렸으니, 고려 풍속에서 채색을 쓰는 데는 모두 분청을 사용했던 것을 알 수 있다”라고 덧붙이고 있는데, 이유원 자신도 고려자기를 소유하고 있음을 말하였다. 이처럼 조선 후기에도 청자에 대한 재인식의 단초들이 마련되어 있었으며, 고려자기를 ‘보배’로 여길 만큼 귀하게 여겼다. 그만큼 서로 갖고자 하는 욕구도 컸음을 알 수 있다. 조선 말에 고려자기를 외국인에게 선물로 주기도 하였다. 즉 1882년을 전후한 시기에 조선 왕실에서 고려청자를 일본이나 구미 지역 외교사절에게 주는 예물로 사용하였다.38) 1884년에 John B. Bernadou(蕃於道, 1858~1908), Percival Lawrence Lowell(魯月, 1855∼1916), Horace N. Allen(安連, 1858~1932) 등이 고종과 명성황후로부터 고려자기를 하사받았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39) 이처럼 고려청자는 귀한 물건이 되어 왕실의 공식적인 선물로도 사용되었다. 고려자기의 가치는 우리 스스로도 알고 있었다. 이렇게 고려청자를 “비색”으로 부르면서 고려의 대표적 유물로 인식하는 경향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조선시대에도 있었다. 그러던 것이 근대의 특수한 사정으로 인하여 ‘열광’이란 절정을 맞게 되었던 것이지40) 한말·일제의 ‘만들어진 전통’에 의해서만 비로소 주목되기 시작했던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 고려청자에 대해서는 미완의 과제들도 남아 있지만, 지난 20, 30여 년의 세월 동안 풍부한 학문적 연구 성과를 쌓아가면서 객관적 입증 기반을 충분히 마련하였다. 그리하여 세계 최고의 첨단기술이라 할 수 있는 ”천하제일 고려청자“의 실체를 넉넉하게 밝혔다. 우리 정부는 1994년에 문화재청 직권으로 ‘강진 고려청자 요지(사적 제68호)’를 세계문화유산 신청에 앞서 반드시 필요한 절차인 유네스코 세계유산 잠정목록에 등록했다. 비색 순청자와 상감청자로 세계도자사에 독보적 성취를 남긴 고려의 관련 유적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기에 부족함이 없다. 전성기 고려청자의 모든 것을 갖춘 강진 사당리를 비롯하여 부안, 그리고 해남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세계도자사의 중심으로 재탄생하기를 믿어 의심치 않는다. 등재를 위한 후속 작업들이 신속하게 진행되길 바란다. 1) 한성욱, 『천하제일 고려청자 –남도에서 꽃 피다』(학연문화사, 2022.02.01), 355쪽.
2) 서긍을 포함한 북송의 국신사 일행은 1122년 고려 예종의 훙거(薨去)에 조문하고 새롭게 등극한 인종에게 휘종의 조서를 전하려는 목적으로 고려에 내조했었다. 『고려도경』은 그 사행 과정을 작성한 후 황제에게 바쳤던 기록물로서 그림을 곁들여 내용을 구성한 일종의 도경체(圖經體) 보고서이다. 3) “陶器色之靑者, 麗人謂之翡色, 近年以來, 制作工巧, 色澤尤佳”(『선화봉사고려도경』 권32 생활용기[器皿] 3, 도기 술병[陶尊]) 4) 『선화봉사고려도경』 권32 생활용기[器皿] 3, 찻상[茶俎] 5) 『선화봉사고려도경』 권32 생활용기[器皿] 3 도기 향로[陶爐] 6) 강경숙, 『한국도자사』(예경, 2012. 3. 20), 238쪽. 7) 강경인, 「고려청자 제작기술의 특성」,(『강진청자 연구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 강진청자박물관 제8회 고려청자 학술세미나, 2006.10.21), 23~28쪽. 8) 鄭良謨, 『韓國의 陶磁器』(文藝出版社, 1991. 3.10), 203쪽. 9) 박정민, 「고려청자 연구에 있어서 『宣和奉使高麗圖經』의 활용양상과 가치」(『미술사학연구(구 고고미술)』, 한국미술사학회, 2019.12), 56~57쪽. 10) 최건, 「‘高麗翡色’의 성격과 전개」(『미술자료』제83호, 국립중앙박물관, 2013.06), 204~205쪽. 11) 고려청자의 변화에 따른 제작 시기를 정확히 정하는 데는 어려움이 있다. 절정의 상감청자 제작 시기도 12세기 후반에서 13세기 중엽까지 다양하나 대체로 그 시기는 무신집권기에 해당한다. 이 점을 감안하여 13세기경으로 서술하였다. 12) 강경숙, 앞 책, 317쪽. 13) 『東國李相國全集』卷第八, 古律詩, 金君乞賦所飮綠甆盃 用白公詩韻同賦 14) 『東國李相國全集』卷第十六, 古律詩, 綠瓷枕 15) 최건,「‘高麗翡色’의 성격과 전개」(『미술자료』제83호, 국립중앙박물관, 2013.06), 216쪽. 16) 최건, 같은 글, 218쪽. 17) 관련된 논문들로는 최건, 「高麗靑磁의 發生問題 고려청자 언제 어떻게 만들어졌나」(『미술사논단』제1권, 한국미술연구소, 1995; 李喜寬·崔健, 「고려초기 청자생산체제의 변동과 그 배경」(『미술사학연구(구 고고미술)』, 한국미술사학회, 2001-12) 등을 참고하였다. 18) 李喜寬·崔健, 같은 글, 24~29쪽. 19) 李喜寬·崔健, 앞 글, 48쪽. 20) 한성욱, 앞 책, 133쪽. 21) 李喜寬·崔健, 앞 글, 40쪽. 22) 김종일·권오영·장남원·한혜선 지음, 『토기와 도자기 – 한국 도자기 문명사』(들녘, 2022.04.28), 194쪽. 23) 박소현, 앞 글, 18쪽 참조. 24) 여기 인용하는 분포도는 고려청자박물관, 『2019년 고려청자박물관 특별전 : 하늘의 조화를 빌리다(似借天工術)』(『고려청자박물관 학술총서』23, 2019.07.19.), 10쪽 참조. 25) 박소현, 「‘고려자기’는 어떻게 ‘미술’이 되었나 - 식민지시대 ‘고려자기열광’과 이왕가박물관의 정치학」(제5회『사회연구 학술상』수상 논문, 한국사회조사연구소, 2006) 26) 李裕元,『林下筆記』 卷之三十五, 薜荔新志 27) 김상엽은 「미술시장의 형성과 미술품 거래」(『충북사학』제17집, 충북사학회, 2006.09.25)에서 한국 근대의 골동거래 시대구분을 하면서 시작기(1900-1910),고려청자광(高麗靑瓷狂)시대(1910-1920),대난굴(大亂掘)시대(1920-1930), 호황기(1930-1940) 등으로 구분하였다.박소현, 앞 글, 18쪽 참조. 28) 박소현, 앞 글, 18쪽 참조. 29) 김윤정, 「근대 유럽에서 한국도자에 대한 인식 변화와 그 배경」(『한국근현대미술사학』제36집, 한국근현대미술사학회, 2018.12), 55쪽 참조. 30) 鄭良謨, 앞 책, 78쪽. 31) 『星湖先生僿說』 卷之四, 萬物門, 秘色磁器 32) 이 부분은 장남원, 「필사본 『고려도경(高麗圖經)』의 유포와 의의」(『한국문화연구』 17, 2009.12.30, 이화여대 한국문화연구원) 참조. 33) 장남원, 「고려청자에 대한 사회적 기억의 형성과정으로 본 조선후기의 정황」(『美術史論壇』제29호, 2009.12, 한국미술연구소) 참조. 34) 『星湖先生僿說』 卷之四, 萬物門, 秘色磁器 35) 조은정, 「강진 청자요지의 조사 현황과 성과」( 『20세기 고려청자 연구와 강진 청자요지』제18회 고려청자 학술심포지엄, 2016. 8.1), 각주 50) 참조. 36) 『林下筆記』卷之三十四, 華東玉糝編, 高麗器 37) 조은정, 앞 글(2016) 참조 38) 김윤정, 「근대 미국의 고려청자 Collection 형성과 연구 성과의 의미」(『석당논총』66집, 동아대학교 석당학술원, 2016.11.30), 395쪽. 39) 김윤정, 「근대 미국에서 한국도자에 대한 인식 변화와 그 배경」(『미술사학』32호, 한국미술사교육학회, 2016.08), 309쪽. 40) 장남원, 앞 글(2009), 214쪽 참조. 글쓴이 고석규 목포대학교 前 총장, 사학과 명예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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